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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하나님의 영광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9. 30. 22:22 Writer : 김홍덕

영광'나타나다'라는 말이다. (헬라어 독사(δόξα) '나타나다'라는 의미) 실체가 드러났는데 사람들이 높이 여기게 되는 걸 영광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높으심과 위대함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다만 사람들은 이 위대함과 높으심은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되듯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신인지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밝은 빛이 비취고, 몽환적인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걸 하나님의 영광이라 생각했다. 그건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 특히 신앙인들 역시 그렇다. 그래서 뭔가 기적적인 것, 보통 사람이 잘할 수 없는 결과를 도출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라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아주 비싸고 귀한 자재로 교회를 건축하거나 엄두도 내기 힘든 가격의 파이프 오르간을 교회에 설치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게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이냐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람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영광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나ㅏㅈ고 천한 십자가를 지시면서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사람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일로 십자가의 영광이 나타나는지를 살펴야 한다.

 

어떤 분위기나 기적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실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밝히셨다. 스스로 있다는 말은 스스로 존재한다는 뜻인데, 이는 존재의 목적을 스스로 가졌다는 뜻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자기 스스로가 존재의 목적을 정하거나 존재성을 선택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전능자(자칭) 중에 이렇게 자기 정체성으로 밝힌 신은 하나님이 유일하다. 하나님이 자신을 유일한 신이라고 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에 관해서는 앞서 <거룩>을 이야기할 때 상세히 다루었었다.

 

존재의 신이라는 건, 존재 정체성을 의로 여기는 신이라는 뜻이다. 이는 착한 일을 하면 인생에 필요한 복을 주고, 악한 행동을 하면 인생에 필요한 것을 앗아 가는 벌을 주는 일반적인 신의 개념과 전혀 다른 성품을 가진 신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신은 그런 신이 있다는 게 아니라 사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는 사람이 조각한 신이다. 이런 신이 생각하는 의와 선과 악의 기준은 <행동>이고 행동의 목적은 육신의 복락이다. 존재가 아닌 행위를 보고 의로움을 판단하는 신을 믿는 세계는 이렇다.

 

이렇게 존재가 아닌 행위와 그 공로를 의로 여기고 육신의 복을 반대급부로 제공하는 신과 그를 신앙하는 세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기에 사람이 조각한 행위의 신을 믿는 허구의 세계와 정체성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의 신은 존재의 정체성을 의로 믿는 세계에 임하시는 게 지극히 상식적이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영광 역시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게 드러나는 영광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하기를 구한다는 건 언제나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라는 걸 아는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으로 사는 삶이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는 건, 내가 그리스도로 거듭나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저 사람을 보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겠다"라는 고백을 끌어내는 삶을 살 수밖에 없고, 그 삶은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게 단 하나의 하나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존재의 신이라는 하나님의 정체성이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영이시기에 물리적 실체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 존재를 드러내시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육신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고자 했는데, 그 뜻하신 바가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 나타남이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으로 함축되는데, 결국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게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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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35)

예루살렘교회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베드로의 말에 야고보 사도가 화답하므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방인에게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용납하기로 하고, 이를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실라와 유다(바사바)를 통해 서신으로 안디옥 교회에 전하였니 성도들은 큰 위로를 얻게 되었다. 굳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걸 보증한 것이다.

 

성경의 이런 흐름과 바울 사도가 전한 행위나 율법이 아니라 믿음과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많은 이들에게 행위는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래서 초창기 교회, 심지어 성경을 정하는 과정에서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 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행위는 버릴 게 아니다. 정말로 생명의 법을 안다면 행위를 버릴 수 없고, 행함이 없다면 죽은 생명이란 걸 이해하게 된다. 행위는 살아있어야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위를, 몸 쓰는 걸 귀찮아한다. 돈과 권력이 좋은 건 자기 몸을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십자가는 자기 몸을 드리는 것이다. 여기서도 세상과 복음의 가치관 차이가 드러난다. 몸을 움직이기 귀찮은 이유는 억지로 하기 때문이다. 하기 싫은데 돈이나 다른 이유 때문에 억지로 하는 삶은 사람을 허무하게 만든다. 그래서 어떻게든 몸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추구한다.

 

그러나 본능에 따른 행동은 다르다. 본능 때문에 하는 건 자기가 아무리 귀찮게 여겨도 결국은 하게 되어 있다. 화장실 가는 게 제아무리 귀찮아도 다 가게 되어 있는 걸 생각하면 본능과 행동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구원을 거듭남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자기 본성이 되면, 그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게 된다. 그래서 육신이 되는 말씀을 생명이라 한다.

 

성경은 바로 이 생명을 가진 사람이 사는 삶의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 일기나 자서전 같이 읽힌다. 자기의 생각과 행동과 삶과 가치가 성경에 고스란히 있기 때문이다. 그건 역설적으로 자기 생각과 삶과 가치가 성경과 다르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게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는 상태나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이 상태다. 그러니까 구원이 없는 상태라는 뜻이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위로를 받았다는 건 신앙생활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보증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위로는 오늘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성경에서 자기 모습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형식도 예루살렘에서 온 서신을 읽고 위로를 받았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의 성도들에게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것도 행동을 요구한 게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굳이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거듭나기만 하면 성경이 자기 안에 완성된다. 예수님께서도 성경이 자기를 가리켜 한 말씀이라고 하셨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당연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물(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말씀이 육신이 된다. 그래야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로 살면 성경 말씀이 나의 이야기가 되어 늘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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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1)

어떤 유대인이 바울과 바나바가 있는 안디옥에 와서 '모세의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구원이 없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가 저들과 격론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자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한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결론을 얻기로 한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한국인들에게 성묘와 비슷한 정도의 관습인지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은 할례와 구원이 무관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할례는 유대인을 구분하는 증거다. 특히 할례는 문신처럼 몸에 직접 행하는 율법이다. 그래서 할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증거였다. 물론 그건 사람의 생각이었지만,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문제의 성격과 비중이 달라진다. 결국 이 논쟁의 핵심은 어떤 사람이 구원받느냐 혹은 구원받은 증거는 무엇이냐다. 그 증거를 몸에 행한 할례에서 찾고자 한다는 건 결국 사람의 외모가 구원의 기준이나 자격이 된다는 주장이다. 방언을 받아야 구원받은 것이라는 주장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율법을 지키는 행위 심지어 신약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는다. 그건 할례가 구원의 자격이나 기준이 된다는 생각이 어리석은 것임을 방증한다. '항상 기뻐해야 한다'와 같이 신약 성경의 구절들을 지켜야 한다(Have to)는 가르침과 그래야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실 것이란 기대 등은 모두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주장의 후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할례의 근본 의미를 모르는 어두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할례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할례는 표피를 벗겨내는 행위이자 의식이다. 그러니까 겉을 보지 않는 신앙의 증표다. 외모로 사람을 보시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의식으로 표현한 게 할례다. 그런데 그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이 없다고 하는 건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바보의 모습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고 어두움에 있다고 하셨고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것이다.

 

이런 할례 논쟁은 베드로에 의해 마침표가 찍힌다. 단순하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라는 간결한 말 한마디가 할례에 관한 논쟁과 율법과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 모두를 탄핵한다. 그런데 그 전에 베드로가 한 말은 참 의미가 있다.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의 목에 두려 하느냐는 것이다.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5:9-10)

 

특히 베드로는 할례를 받아야 하는 주장, 곧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 일갈했다. 하나님이 아니라는데 반복적으로 '이거 아닙니까?'라고 질척거리는 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란 의미다. 게다가 베드로는 그들의 주장은 우리 조상이나 우리도 메지 못하는 멍에라고 말했다. 육신으로 율법을 지켜 의로워지는 건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분명한 선언이다.

 

세상의 성공을 목적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한 신앙에서 회개해야 한다.

 

오늘날은 유대인이 아니라면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주장하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어진 건 또 아니다. 행위로 의로워져야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다고 믿는 신앙이 팽배한데 그것이 바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 곧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있다는 신앙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신약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자기 본성이 아님에도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하라는 목사와 교회가 시키는 걸 억지로 하려고 노력했던 자신의 신앙이 바로 그 신앙이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이셨는데, 그 예수님께 세상의 성공과 평안을 구하고, 대가로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드리는 건 명백히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있다는 신앙이다. (신약 성경도 예외가 아니다) 그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성경을 지키는 자기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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