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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04 - 성령이 임하는 사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4. 15. 07:21 Writer : 김홍덕

(2:1-4)

기독교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진 성령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을 상징하는 단어는 아마도 '기적'일 것이다. 성령의 역사 혹은 능력은 보통의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테면 마귀를 물리치는 것과 같은 것이 그렇다. 사람을 유혹하는 마귀를 사람이 이기는 건 쉽지 않으므로 사람 이상의 능력을 가진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사람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성령의 능력과 직임은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일이다.

 

성령의 충만은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가진 본성이 충만한 상태를 말한다. 항상 기쁘게 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게 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하는 유전자를 가진 생명이 그리스도라는 생명이다. 그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니, 성령의 충만은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이 바로 성령의 충만이다.

 

이런 성령의 충만은 난데없이 임하지 않는다. 비단 성령의 충만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은 준비된 사람과 상태에 임한다. 하늘의 비도, 천둥도 다 조건이 맞아야 한다. 가룟 유다를 대신해 맛디아를 제자로 뽑은 제자들은 오순절에 모여 있었다. 이들이 모여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떠나지 말고 예루살렘에 모여 있으라고 하셨다.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성령은 우리 안에 있는 말씀과 그에 대한 믿음을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성령이 임하시려면 하나님의 말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이 자기 심령에 있어야 한다. 이건 들은 기억이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임한 말씀으로 믿고,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걸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게 바로 그리스도가 된다는(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고, 그리스도는 생명이므로 그리스도가 되려면 생명의 잉태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말씀이 생명이 되게, 성령으로 잉태케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따라서 성령이 임하시려면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이 자기 육신이 된다는 걸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어야 성령이 오신다.

 

성령은 그리스도로 잉태케 하시는 분이시니,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충만히 임하신다.

 

비단 성령의 강림뿐 아니라 어떤 게 주어지려면 그에 합당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여자가 가임 기간이어야 잉태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노력도 생명의 잉태를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성령도 임할 만한 사람에게 임한다.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임한다. 그렇지만 사람의 보편적 생각처럼 순종으로 복을 얻으려는 건 거래일 뿐 순종이 아니다. 순종은 말씀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이 내 삶을 주관하는 데 동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의도가 내 삶의 목적이 되기를 바라고 동의하는 게 바로 순종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말씀도 그렇다.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신 말씀을 지킨다는 건, 위로부터 오는 말씀이 내 삶을 주관하는 데 동의한다는 순종이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순종이 있을 때 임하셔서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이고, 그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거듭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잉태되는 게 거듭남이다. 괜히 성령으로 잉태된다는 표현을 사용한 게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표현 역시 그렇다. 종교적으로 거룩한 뉘앙스를 주기 위한 고의적인 표현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정체성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결국 그리스와 같이 십자가를 진다.

 

그러므로 성령의 강림을 기다린다면, 성령 충만을 사모한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주관하신다는 데 동의해야 한다. 여기서 나를 주관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 그 자체다.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육신이 된다는 것이고.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일이다. 그렇게 되는 게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건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끈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산다는 것이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삶을 살겠다는 동의가 있어야 성령이 오신다. 성령의 충만은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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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6)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후 제자들과 성도들 이십 명이 모여서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제자로 선출했다. 그러나 맛디아에 관해서 알려진 바가 많지는 않다. 다만 가룟 유다를 대신할 제자의 자격은 세례를 받던 날부터 함께 했던 사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할 사람이라고 했으니, 맛디아는 이를 충족하는 사람인 건 분명하다. 그러므로 맛디아의 선출을 12명이라는 제자의 수를 충족하기 일로 볼 게 아니다. 맛디아가 갖춘 자격이 중요하다. 그건 예수님의 제자라는 정체성이다. 맛디아의 선출은 예수님의 제자가 갖추어야 할 자격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맛디아의 충원은 예수님 제자의 자격을 완성하는 것

 

열두 제자는 12라는 숫자의 의미보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집합의 대표성이고 제자는 어떤 사람인지를 대표한다. 가룟 유다가 맛디아로 교체되는 건 12라는 숫자를 채우는 게 아니라 제자라는 정체성을 온전케 한다. 따라서 맛디아의 충원은 예수님 제자는 어떤 사람인지 자격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어서 성령강림이 있었다. 성령은 제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임하신다는 걸 보여준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맛디아는 가룟 유다를 대신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할 사람인 맛디아는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정한 가룟 유다를 대신한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건 당연한 이야기지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가룟 유다가 맛디아로 교체된 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여기까지는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는 이야기다. 다만 이 시대 신앙인 대부분이 가룟 유다의 후손이라고 말한다면 이건 선뜻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정하고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 버린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향유 옥합의 일이다. (이 향유 옥합의 일은 블로그에 자세히 설명한 글이 있다) 특히 가룟 유다가 예수님은 자기가 생각하는 그리스도라고 확정한 계기는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듣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종의 몸값인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버렸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닌 램프의 요정 지니 같은 종(마법 같은 능력으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으로 확정한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준 때문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정했기에 예수님을 팔아버렸다. 가룟 유다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 겪고 있는 가난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그리스도라고 생각했다. 그건 오늘날 기독교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늘 육신의 문제를 간구하는 것이다.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그리스도라는 생각을 버려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건 그리스도의 일이 아니라고 일갈했다. 자신이 그리스도로 이 땅에 왔다고 하신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건 그리스도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건 글자만 읽을 수 있어도 알 수 있는 것인데 예수님을 믿는다며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여전히 육신의 문제를 기도한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가 맛디아로 교체된 것이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도 겉으로는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부인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다. 열한 명의 제자들이 부인한 건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다른 제자들도 그리스도를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 기대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왕이 되었을 때 높은 자리에 앉기를 욕심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십자가를 진다고 하니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제자들은 자기가 생각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예수님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은 11제자와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신한 가룟 유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건 확실히 믿고 있었다. 그걸 믿었기에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십자가를 진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기본적인 자격은 충분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그걸 믿지 않았다. 자기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준을 제일로 놓고 예수님을 심판했고, 그 결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정했다. 그리스도가 아닌 예수님은 그에게 아무 쓸모가 없었다. 종의 값을 받고 팔아 버린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맛디아의 선출은 가룟 유다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에 관한 기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그리스도라는 기준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자격으로 바뀌는 전환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려면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걸 믿어야 한다. 자기도 인정하지 않는 걸 증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걸 믿는다는 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것이다.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가룟 유다의 가치관이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믿음으로 바뀌어야 예수님의 제자라는 걸 맛디아의 충원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때 성령이 임한다.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지도 않을 사람에게 성령이 임할 리는 없다. 성령이 임하신다는 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걸 깨닫는 것이고, 예수님이 그랬듯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잉태되고 거듭나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게 제자고, 그런 사람에게만 성령이 임하신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과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는지와 성령의 직임을 안다면 이건 너무 당연한 진리로 받을 것이다. 가룟 유다가 가진 가치관이 부활을 증거하는 맛디아로 교체한 일이 이것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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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6-11)

앞서 우리는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는 걸 알게 하는 분이란 걸 이야기했다. 핵심을 선명하게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의도였고 실제 성령의 일이 그것이다. 사람의 일반적인 생각처럼 성령은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분이 아니라, 사람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걸 믿게 하시는 분이라는 걸 아는 게 중요하다. 이걸 깨닫는 게 곧 구원이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남이다. 나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 아들 예수를 보고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는 걸 보고 같은 육신을 가진 나도 하나님 아들이 된다는 걸 믿는 게 구원이고 거듭남이다. 이걸 알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그렇게 되길 바라시는 게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다. 그래서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이 일을 행하신 실제 이야기를 전하는 말씀이다. 사도행전 속 기적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란 걸 믿게 되는 기적임을 전한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성경이다. 이 주제를 시작인 15절에서 선언하고, 다음 6절부터 다시 그 세부적인 말씀을 전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세부적인 전개는 예수님의 승천으로 시작한다. 성령의 능력을 전하는 사도행전이 예수님의 승천으로 시작한 이유는 예수님이 가셔야 성령이 오시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를 기록한 말씀이니 성령이 오시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핵심은 사실 승천보다 다시 오신다는 말씀, 흔히 재림이라 말하는 예수님의 약속이다. 재림에서 중요한 건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 오늘 나는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났느냐가 더 중요하다. 오늘 내게 예수님이 오셨는지가 핵심이다. 현대를 사는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본 적이 없으므로, 예수님을 만난다는 자체가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만남이 없다면 예수님을 본 적이 없는 것이므로,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없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교회라는 관점에서도 그렇다. 교회는 성령이 임한 사람의 만남과 모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그것을 볼 수 있는 시절을 사는 사람들만을 위한 약속이 아니다. 모든 성경이 오늘 나의 이야기이듯 재림도, 성령강림도 나의 이야기여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만남이 교회다.

 

제자들이 모여서 예수님께 물었다. "이스라엘 나라는 언제 회복됩니까?"라고. 예수님께서는 그건 하나님이 정한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라고 하셨다. 언뜻 보면 답을 하시지 않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답은 "성령이 임하시면 회복된다". 그리고 그 회복은 제자들이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또 우리는 예수님의 무엇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건 예수님에 관해 증언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이건 심도 있는 신학도 아니다. 그냥 상식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면 예수님을 본 적이 있어야 한다. 보지 않고 증언하는 건 위증이거나 망상이다. 이와 같은 상식적 개념으로 봐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겠다며 울며불며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건 모두 가식이고 거짓이다. 승천하셨다가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나야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그건 재림하신 예수님을 만나야만 가능하다.

 

재림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선 이에 관해 분명히 말씀하셨다. 승천하셔야 성령이 오신다고 하셨고, 함께 계실 동안 말씀을 듣던 사람 중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셨다. 살아 있을 동안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게 바로 구름 같은 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예수님이다. 말구유에 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과거의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우리가 만났다고 하는 것과 같이 구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할 수는 있지만, 성령으로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건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사도행전은 그걸 말씀하시는 성경이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 중에는 예수님을 실제로 본 사람도 분명 많았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게 전 인류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일부의 사람이 누린 은혜였듯이 구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만난다는 건 어느 한 시대를 사는 사람의 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우리가 믿듯, 구름 타고 오시는 주님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다고 재림을 경험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성령으로 오심이고, 다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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