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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26)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친 건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향유 옥합 사건이 예수님이 어떤 그리스도인지를 선언하는 사건이었듯, 사도행전에 나오는 놀라운 기적들이 어떤 능력으로 행해지는지를 정의하는 사건이 바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일이다.

 

이 일로 믿는 사람의 수가 남자만 오천 명이 늘어났지만, 반대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같은 율법 신앙을 가진 이들에겐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어 핍박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이런 핍박은 교회가 일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촉매가 되고, 더 나아가 교회의 성도들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앉은뱅이가 성전으로 들어가 기뻐하게 되는 일은 영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큰 전환의 사건이다.

 

부활의 도를 싫어하는 사람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어떤 사람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성공한 간증을 하면, 많은 경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며 그 일을 공유하고 자랑한다. 같은 이치라면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고친 일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또 제사장과 장로는 이 일을 기뻐하고,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일을 심히 경계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핍박했다. 그들의 이런 태세는 그들의 하나님과 앉은뱅이를 고친 하나님이 다르다는 걸 입증한다.

 

제사장과 장로들이 믿는 하나님과 앉은뱅이를 치유한 하나님은 다르다.

 

바리새인들(바리새인, 제사장, 장로 등)은 부활의 도를 싫어했다. 이는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느냐는 과학적 이유 때문에 싫어한 게 아니다. 부활의 도는 곧 십자가의 도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부활의 도와 십자가의 도를 싫어한다는 건 나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안다는 의미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데 싫어하긴 쉽지 않다.

 

이는 대제사장의 심문에 답하는 베드로의 답변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쳤을 때 유대인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게 아니냐고 했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걸 뒤엎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을 두고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물은 것처럼 앉은뱅이를 고친 일을 두고도 똑같이 물었다. "누구의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는가?"라고.

 

유대인들의 이런 반응은 믿는 하나님이 다르다는 걸 보여준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앉은뱅이를 고친 능력이 나사렛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베드로의 설교와는 달리 유대인들은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고 가난을 구제할 초자연적 능력을 가진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다. 이건 동이 서에서 먼 것만큼 다른 차이다. 이 두 하나님은 절대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더더욱 그렇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복음 전파의 의미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성공을 싫어했다.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는 걸 용인할 수 없었다. 자기들과 다른 신앙을 가진다는 걸 질투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런 하나님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는 안 되기에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런 발상의 싹부터 잘라야 하는 게 그들의 신앙이고 믿음이다. 이게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 만의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늘도 사람들은 십자가를 진 죄인 예수를 믿는 믿음을 용인하지 않는다.

 

복음이 전해진다는 건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가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와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의 생각을 극복하는 것

 

제사장과 바리새인 장로 등이 모여서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겁박한 것은 사도행전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암시한다. 더 나아가 복음이 전해지는 법을 알려준다.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은 결국 가난을 해결하는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극복하고 이기는 과정이다. 복음이 싸우고자 하지는 않지만, 가난과 질병을 초인적 능력으로 해결하는 그리스도를 앙망하는 사람의 믿음은 끊임없이 나사렛 예수를 핍박한다. 복음 전도는 결국 이 투쟁이다. 사도행전은 하나님께서 이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고 각 사람이 복음으로 구원을 얻는지를 보여준다.

 

제사장과 바리새인이 베드로와 요한을 겁박하는 일은 오늘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고, 온전한 복음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어떤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가난을 해결하고 육신의 병을 기적적으로 고치는 예수를 앙망했다. 사람은 이 예수, 성경이 거짓 그리스도라 말하는 이 예수를 쉽게 벗어나질 못한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바라는 마음이 부자로 만드는 축복을 주는 거짓 예수를 믿게 한다. 여기서 벗어나는 게 곧 구원이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가 믿어야 하는 예수,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친 능력의 예수는 나사렛 예수라는 걸 한 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이걸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는 게 거듭남이다. 그냥 사는데 모든 순간, 선택과 결정을 본능적으로 낮아지는 걸 택하는 사람이 되는 게 나사렛 예수를 믿는 믿음이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가진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늘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이러한 반추가 바로 경건이고 묵상이다.

 

건축자가 볼 때 유용하지 않아 보여서 버리는 돌처럼 가난을 해결하지 못하는 예수님은 믿을 가치가 없어 보인다. 신앙인들은 가난이나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을 경계한다. 예를 들어 헌금 떼먹으면 경제적으로 망한다고 생각하는 게 그렇고, 주일날 일하면 벌 받는다는 생각이 그렇다. 그런데 이 보편화된 믿음이 바로 나사렛 예수를 배척하는 일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부인한다고 그 믿음에서 떠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말씀하는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앉은뱅이 같은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는 능력은 나사렛 예수에게서 나온다. 가난을 이기게 하는 게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걸 믿는 믿음이 오히려 세상을 이기게 한다. 그 이김이 필요하다면 육신과 세상 일에 기적을 더한다. 어차피 세상과 사람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여기에 필요하다면 바다도 가르시는 게 하나님이다. 바다를 가르는 걸 보여주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거나,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하겠다는 건 거꾸로 된 믿음, 아니 거짓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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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2 – 기적을 행하는 능력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5. 21. 16:28 Writer : 김홍덕

(3:1-10)

유대인들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쳐 성전에서 걷고 뛰게 한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놀랐지만, 베드로는 자신과 요한의 권능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일은 오히려 유대인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온 선지자들이 말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임을 전한다. 그리고 이 예수를 믿을 때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의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베드로의 이 설교는 기적의 능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설명한다. 베드로의 이 설교가 필요한 이유는 기적의 원천에 관한 사람의 생각과 베드로의 설교가 다르기 때문이다. , 기적의 원천이나 동력에 관한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건 결국 구원의 차이다.

 

사람은 앉은뱅이가 걷게 되는 기적은 초인적인 능력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보다 초월적인 존재가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는다. 당연히 하나님도 그런 분으로 믿는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은 그런 초월적 존재 중에서 다른 존재와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그런 존재가 구원을 베푼다고 믿는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람의 그 기준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오히려 능력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은 외면하고 오히려 가난을 해결하는 건 그리스도의 직임이 아니라고 말하기에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믿음이 앉은뱅이를 걷게 했다고 설교한다. 우리가 베드로의 정체성을 부인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 말은 곧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사실 오늘날 신앙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믿음도 과거 유대인의 믿음과 다르지 않다. 기적이라면 보이는 세계의 상식과 과학을 넘어서는 신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타나고 육신으로 인지하는 세계를 본질로 믿기에 그 본질에 초인적 영향을 끼치는 능력을 기적이라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능력을 주관하는 분이라고 믿는다. 가난을 해결하고,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예수,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대로 기이한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 하는 예수는 그런 예수가 아니다.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는 그런 예수가 고친 게 아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행한 기적은 육신의 질병을 고친 게 본질이 아니라,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영혼이 성전에 들어가서 기쁨을 누리도록 하는 능력이고 기적이다.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믿음이 성전에 들어가서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기적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나사렛 예수, 세상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는 전혀 메시아가 될 수 없어 건축자가 버리는 돌 같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자기가 이런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과연 그런지는 재고해 봐야 한다.

 

선한 존재가 나올 수 없는 나사렛에서 온 예수를 믿는다는 건 놀랍게도 우리 자신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믿는 믿음의 근거다.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자체가 바로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된다는 의미라는 걸 믿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이 생각에 늘 조심스럽다. 예수님과 자신이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나, 죄가 없으신 예수님의 정체성 그대로 우리도 죄가 없다는 걸 믿는 믿음이 부족하다. 기도할 때 마다 회개하는 게 그 증거다.

 

앉은뱅이를 고친 하나님의 능력은 다음 아닌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뻐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사람이고 예수님과는 다르니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겸손 같은 불신은 성전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늘 회개해야 하고, 행여 하나님께 무언가 잘못하거나 하나님께서 내가 생각지도 못한 죄가 내 행동에 있다고 책망하실까 두려워한다. 교회에 가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 증거다. 가지 않으면 벌을 받는 곳이 기쁨의 장소라고 말하는 건 정신 승리일 수는 있지만 신앙고백은 될 수 없다.

 

나사렛 예수를 믿는 믿음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

 

우리에겐 정말로 나사렛 예수가 앉은뱅이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신앙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뻐하는 신앙으로 바꾼다. 이건 단순한 경험의 변화가 아니다. 이건 정체성의 변화이자 존재의 변화다. 즉 생명이 바뀌는 변화다. 이걸 성경이 거듭남이라고 한다. 베드로 이 믿음이 있어야 우리가 멸망에 빠지지 않고 구원을 얻는다고 말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나 자신을 순종하느냐가 우리의 구원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행 3: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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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나라가 임하옵시며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5. 17. 22:14 Writer : 김홍덕

나라는 ''의 공동체이자 ''가 다스리는 영역이다. 민주주의를 따르는 사람들과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모여 각각 민주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가 된다.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국가의 의가 되고, 사회주의가 사회주의 국가의 의가 된다. 이는 비단 민주주의, 사회주의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어떤 나라든 나라를 다스리는 의가 그 나라의 정체성이 되고 국민을 결정한다. 그 의가 효력을 발휘하는 지경까지가 그 나라다.

 

나라는 의가 다스리고 그 효력이 미치는 지경

 

나라는 사람이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게 표면적 형식이다. 하지만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나라가 사람에게 임한다. 나라에 속하는 순간 그 나라의 의와 통치가 자신에게 임하기 때문이다. 나라가 임하옵시길 구한다는 건 바로 그렇게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나의 삶이 되기를 바라는 게 바로 나라가 임하옵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이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속하는 것이자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건 하나님의 의가 내게 임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가진 하늘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해 가지신 의가 내게 임하는 게 곧 하나님 나라가 나에게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과 같은 법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건 곧 말씀이 나의 육신이 되는 것

 

예수님께서는 이 나라가 임하기를 구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다만 이런 예수님의 주문은 사람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다. 세상 나라들은 사람의 의지와 선택으로 여권을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법을 따르므로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생명이 바뀌는 걸 거듭난다고 말하고 거듭남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 잉태된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사람의 가장 큰 오해는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간다는 믿음과 생각이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살아 있는 동안 할 기도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니까 육신으로 사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람이 되기를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육신으로 사는 동안 가는 곳이다. 천국은 죽어서가 아니라 살 동안 누리는 곳이며, 살 동안 누리지 못한 천국에 죽어서 가는 법은 없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말씀을 통해 살아 있는 동안 천국에 속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육신으로 살아 있는 동안,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기회를 가진 동안 하나님의 의가 내게 임하기를 구하라는 것이다. 그 의는 다른 게 아니라 앞서 구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의다. 하나님이 가진 인생을 주신 목적, 그것이 임하기를 구하라는 말씀이다. 그 의가 내게 이루어지는 게 곧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천국에 속한 것이고, 천국을 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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