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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07 – 술 취했다는 사람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4. 24. 21:51 Writer : 김홍덕

(2:5-13)

"술 취했다"라는 말은 술 마신 사람만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다. 이건 일상적이지 않고 상식적이지 않은 상태를 비난하는 포괄적 표현이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으로 인해 방언을 말하고 회개하는 사람의 모습을 술에 취했다고 말했다는 건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봤다는 의미다. 사람의 이런 시각은 요즘이라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성령의 기적으로 병을 고치겠다고 한다거나, 교회를 위해 생계를 위협하는 큰 돈을 헌금하는 행동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볼 때 낮술에 취한 것과 진배없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신비한 능력을 신봉하는 건 낮에 술에 취해 있는 것처럼 비정상적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기에 낮술에 취한 것 이상으로 더 비이성적인 게 있다. 그건 바로 세상을 구원한다는 그리스도 곧 메시아가 일반인보다 훨씬 낮고 천한 신분인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진다는 걸 믿으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설명하면 세상의 가치관과 법 기준에 따라 죄인, 그것도 사형수가 된 사람이 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라는 걸 믿으라는 의미다. 이건 의미로만 보면 기도하면 암이 치유된다고 믿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술에 취한 소리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외치고, 그걸 듣고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던 자신의 마음에 찔려 회개하는 무리는 낮술에 취했다고 비웃는 건 교양 없는 행동이 아니라 어쩌면 너무 당연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 말씀은 술 마시고 하는 말이 아니라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일갈했다. 다시 말해서 이건 술에 취해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이다.

 

사람에겐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존재가 그리스도며, 메시아는 그런 존재로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걸 믿으라는 건 낮술에 취한 것 이상의 비이성적인 소리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말은 세상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터무니없는 소리다. 하지만 성령의 직임과 능력을 안다면 베드로의 말은 성령의 능력이다. 게다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걸 이해하지 못해 힘들어하던 베드로가 성령이 오시니 그리스도가 오히려 담대하게, 사람들이 낮술에 취한 소리라고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걸 선포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제자들과 함께 성령이 임한 사람들은 베드로의 말이 마음을 찔렸다. 자기의 죄를 시인한 것이다. 그 찔림에 "우리가 어찌할꼬?" 탄식했고, 베드로는 세례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다. 세례는 이전 생명으로는 생명이 없음을 알고 옛 것은 죽고 새 생명으로 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가난은 해결하지 않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죄인 것도 알 수 있다. 그 죄 사함을 받고 새 생명으로 나는 게 세례다. 구원은 이렇게 자기 스스로 죄를 시인하고, 스스로 새 생명을 소망하므로 말씀에 순종하므로 얻는다.

 

자신들과 같은 육신을 가지고 와서 가난은 그리스도의 일이 아니라는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단정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 준 죄를 시인하니, 베드로가 선포한 말씀이 그들 마음에 심겼고, 성령께서 그 말씀이 생명이 되게 잉태시키시므로 회개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이고 강림이며 충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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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06 - 베드로의 설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4. 21. 19:33 Writer : 김홍덕

(2:14-42)

베드로의 설교와 3,000명의 회개는 줄탁동시의 관계다. 베드로의 설교가 유대인들에게 찔림이 되었다. 핵심은 베드로는 무엇을 설교했고, 사람들은 무엇에 찔려 무엇을 회개했는지다. 그게 이 사건을 기록한 목적이다. 그리고 설교자 베드로도 설교 전후로 아주 대단한 변화가 있었다. 그건 바로 십자가를 진 예수가 그리스도냐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해 베드로에게 변화가 있었다. 그 전환점은 성령강림이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기독교인들은 성령강림 전과 후의 베드로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예수님의 수제자니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지, 베드로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베드로는 아주 큰 변화가 있었다. 성령이 충만해지기 전에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질 수 있지?'라는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엠마오로 가려 했다.

 

성령이 강림하시니 "그리스도가 어떻게 십자가를 지는가?"라며 낙담했던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선포했다.

 

그런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설교했다. 베드로의 이 변화는 성령의 역사와 능력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고나면 오시는 성령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걸 알게 하실 것이라고 하신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는 죄인이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던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자기 것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고 성령 충만의 결과다.

 

한편 유대인들은 베드로의 설교가 마음을 찔렸다. 그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지를 의심한 정도가 아니라, 가난을 해결하지 않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단정했던 사람들이다. 그게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고 정당성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선포되니 마음이 찔려 회개했다.

 

가난을 해결하지 않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성령이 강림하니 자기 믿음을 돌이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유대인들의 회개는 자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행위를 회개하는 것 같다. 하지만 본질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렇게 환호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건 예수님이 그들이 바라던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도 그리스도는 가난과 독립의 문제를 해결하는 초능력자였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죄인은 아니었다.

 

그런데 성령이 강림하시니 그리스도가 어떻게 십자가를 지는지 갈등하던 제자들이나 가난과 독립을 해결하는 존재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이나 모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걸 믿었다. 그걸 믿었기에 설교했고, 그걸 인정했기에 가난을 해결하지 않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정했던 자신들의 생각을 돌이켜 회개했다. 이것이 바로 성령강림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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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05 - 성령강림 & 방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4. 17. 07:32 Writer : 김홍덕

(2:5-13)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위에서 임하는 능력을 기다린 제자들에게 약속대로 성령이 강림하셨다. 분명 시대적, 역사적으로 그때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다는 객관적 사실 외에, 어느 시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육신이 되는 걸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임하신다는 걸 보여준다. 성령은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로 잉태케 그리고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의 강림은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듣게 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원하시는 건 사람 모두가 창조 목적대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기에 어떤 사람이라도 이 복음을 듣게 하시려 한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니 제자들이 방언으로 말하였다. 제자들의 방언은 최소 12개 이상의 언어였다. 우리가 주변에서 말하는 방언과 달리 사람이, 그것도 방언 통역 없이 들을 수 있도록 각 방언으로 말하였다. 그 내용은 상세하지 않지만 간략하게 <하나님의 큰 일>이라고 했는데, 그 큰 일은 당연히 모두 하나님의 복음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성령으로 인한 능력이니 성령의 직임에 따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서 잠깐 방언이란 걸 생각해 보자. 방언을 성령의 능력으로 안다면, 성령의 직임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 성령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라는 직임과 관련이 있어야 성령의 능력이다. 따라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도 능력이긴 하지만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덕을 세우기엔 부족하다. 이 말의 취지는 방언을 받아야 구원이 있다고 말하거나, 방언을 말하느냐를 기준으로 사람을 계층화하는 건 어리석은 일임을 알자는 것이다. 진정한 방언은 각 사람이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는 것이다.

 

말의 주인은 듣는 사람이다. 듣는 사람이 이해할 때 말이 된다.

 

말은 결국 듣는 사람이 이해해야 완성된다. 말하는 사람의 말이 아무리 수려해도 듣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결국 말의 주인은 듣는 사람이다. 따라서 방언도 말하는 사람이 배우지 않은 다른 언어를 구사한다거나 사람이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듣는 사람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것이다. 오순절 제자들이 방언을 말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 일>이라고 알아들었다는 게 핵심이지, 배우지 않은 여러 나라 말을 하는 건 놀랍긴 해도 본질이나 핵심은 아니다.

 

(중략)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11)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은 성령의 직임과 연결되어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게 하는 영이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에겐 큰 일이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데 이를 알게 하시니 큰 일이고, 무엇보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게 하니 큰 일이다. 그리고 그 큰 일은 황금마차 하늘에서 내려온 위대한 자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로 인해 이루어진다는 걸 깨닫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다.

 

성령의 충만은 불치병을 낫게 하는 기적이 아니라 사람이 이 일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것과 그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도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하는 게 인생의 목적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조성하신 뜻이라는 걸 알게 하는 게 성령의 능력이고 성령의 충만이다. 즉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살아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고 충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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