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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10)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려 한 사도 바울과 달리 성령께서는 마케도냐로 인도하셨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는 바울 일행이 아시아로 가는 형편을 여의치 않게 조성하셨고, 바울의 꿈에는 마게도냐 사람이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바울은 복음을 전하러 아시아로 가지 않고 마게도냐로 갔고 거기에 사는 '루디아'라는 자주장사(자주색 옷감 장사 자주색은 귀족의 색)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온 집이 구원을 얻었다.

 

 

사도 바울이 환상에 이끌려 마게도냐로 간 일은 하나님의 일을 결정하는 데 징조는 중요한 요소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징조보다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 우선한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뜻하신 의가 육신이 된 사람인 만큼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분명하게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생명의 본능으로서 삶을 이끌기 때문에 그 본능이 항상 우선한다.

 

반대로 자기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은 사람은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벗어나면 안 되었던 율법의 삶을 대변하는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사사건건 하나님의 뜻이 필요하다. 그들은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목사에게 찾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이유다. 심각한 건 질문하는 내용이 육신의 일이라는 것인데, 더 최악인 건 그걸 돈 받고 기도해서 알려주는 사람이다.

 

바울 사도는 평소에 징조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가 계획하고, 말씀이 육신이 된 교회의 사도들과 협력하여 전도 여행지를 결정하고 복음을 전했다. 성령의 감동으로 자기 안에 육신이 되어 있는 말씀을 전하였다. 이런 사도 바울에게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이 거의 직접적으로 마게도냐로 가도록 하신 건 선교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지,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일상으로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으로 말씀하시는 건 아니다.

 

하나님께서 환상이라는 신비한 일을 통해 바울의 길을 돌리신 건 하나님이 보실 때 마게도냐에 있는 사람이 더 급히 복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오직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라면 바다도 가르고 죽은 사람도 살리신다.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안다면 바울에게 환상으로 임하신 건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을 보고 모든 일을 징조에 의해 결정하는 걸 우선하는 식의 우를 범하면 곤란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주목할 게 아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뜻을 사람이 아는 일을 위해서는 환상도, 그 이상의 기적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봐야 한다. 그걸 보려 하고 그 마음에 순종하여 같은 마음이 될 때 사람인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진정한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가 소망해야 하는 건 환상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의 본성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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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

바나바와 결별 후 실라와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난 사도 바울은 생애 전반에서 아주 아끼고 아들처럼 여긴 디모데를 만난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고 어머니(유니게)는 유대인이다. 이런 경우 유대인들은 이방인으로 간주한다. 그러니까 디모데는 이방인이다.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나려 하니 그 지경에 있던 유대인들이 그에게 할례를 행했다고 했다. 불과 얼마 전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에게 할례와 같은 율법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었는데 왜 이런 일이 있었을까?

 

바울 사도가 디모데가 할례받는 일에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건 용인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이 정한 규례를 그 지경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지키도록 했다고 했다. 그 결과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믿는 사람의 수가 늘어났다.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고 전하는 바울 사도가 여러 규례를 지켰더니 복음이 왕성해졌다는 말씀인데,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신념을 바꾼 것일까?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할례를 <행했다>라는 행위와 규례를 <지키게 했다>라는 행위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다분히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습성의 유산이다. 또 한편으로 복음은 어떤 규례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를 준다는 막연한 생각이 디모데가 할례받은 일을 의아하게 생각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런 어색함은 모두 복음을 모르거나 미성숙함에 기인한 것이지 복음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진리기 때문인 건 아니다. 당연히 바울 사도 역시 태도를 바꾼 게 아니다.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의 안목으로 보면 여러모로 이상한 성경

 

먼저 왜 디모데는 할례를 받았는지를 생각해 보자. 디모데는 모계가 유대인이기 때문이라는 의견들이 있는데 그건 작은 가지일 뿐이다. 율법이나 신약 성경을 행위로 지켜 의로워지려는 신앙은 마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따라가는 출애굽 행렬처럼 아주 경직되어 있다. 말씀을 지키면 안전하고,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는 단순한 구조다. 아주 기계적인 셈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이를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복음은 거듭난 생명의 세계이므로 생명처럼 유연하다. 생명은 같은 상황에서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디모데가 율법의 행위라고 인식되는 할례를 받은 건 생명의 유연함 때문이다. 생명은 유전자가 같아도 반응이 다를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해 본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도 같은 경우다.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생명을 가졌기에 둘이 마가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신앙 세계에서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지만, 복음 안에서는 부유할 수도 있고 궁핍에 처할 수도 있다. <생명>으로 나면 이렇게 된다. 이건 생명으로 난 사람에겐 보이지만, 행위로 율법과 성경을 지켜 의로워지려는 신앙 안에서 보면 디모데가 할례받은 일은 맞거나 틀리거나 해야 하는 일로 보인다. 그래서 이런 걸 연구한다. 신학이 얼마나 불의한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생명인 만큼 생명의 유연함을 가지고 있어…

 

그렇다고 복음이 줏대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건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복음은 생명의 법을 따른다. 생명은 어떤 순간에도 자기 DNA를 표현하고 유지하고 지키려고 한다. 그리스도라는 생명도 그렇다. 다만 그 표현은 생명의 개체마다 다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 역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해 가진 모든 본성을 다한다.

 

이는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고 열심인 신앙과 다르다. 노력과 신념은 부족한 걸 메우기 위한 행위지만, 본성에 따르는 건 자기 안에 이미 있는 본성 모두를 쏟아붓는다. 호랑이 무늬가 다 달라도 언제나 호랑이라는 본성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과 같다. 행위로 율법과 성경을 지켜 의로워지려는 신앙의 안목으로 보면 할례를 받거나 받지 않는 둘 중 하나만이 의로운 선택이지만, 그리스도의 본성은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된다는 사고를 참으로 받아들이는 본성은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이 유연함은 아주 자유롭다. 할례를 받아도, 안 받아도 된다는 건 구속되지 않는 자유다. 그런데 이 자유는 아주 남용되기도 한다.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유는 영지주의로까지 브레이크 없이 내달릴 수도 있다. 그러나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말에 합당한 존재가 되지 않았는데 자기 임의로 신앙의 규례를 폐하면 안 된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의 교회에 지키라고 권면한 규례(16:4)는 할례를 받으라든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과 같은 게 아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이었다. 우상이라고 하니 조각한 돌이나 나무에 절하는 것만을 생각하겠지만, 세상에서 성공하겠다는 사람의 욕망을 실현 시킬 대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자 자기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또한 음행은 자기 짝이 아닌 것과 짝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목적 아닌 걸 인생의 목적과 내용으로 삼는 것이고, 목을 매는 건 머리와 몸을 분리하는 것이니 중풍처럼 하나님의 의가 행위를 주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피는 생명이 함부로 범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거듭난 생명의 본성으로 지키는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완성, 행위로 지키는 율법은 폐기

 

말로 표현한 규례는 같아 보이지만 그 내막은 이렇게 다르다. 그러므로 규례는 함부로 폐기하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셨다고 한 건, 율법의 완성인 복음을 주셨기 때문에 기존의 개념이 폐기되었다는 의미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율법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완성이 성취되므로 행위로 지켜내려는 노력으로 관철된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것이지 율법 자체를 폐기하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신앙이 얼마나 유연한지를 반추해 본다면 내가 생명의 법에 따라 살고 있는지, 아니면 벗어나면 안 되는 불기둥, 구름 기둥을 따라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디모데가 할례받는 일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라 지극히 복음적이다. 이게 그렇게 보이지 않으면 자기 신앙을 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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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41)

사도행전 15장 마지막 부분에는 '정말인가?' 싶은 사건이 있다. 바로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서로 다른 길로 전도 여행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툼의 원인은 1차 전도 여행 도중에 돌아가 버린(13:13) 마가복음을 기술한 것으로 알려진 마가라고 하는 요한의 동행 여부였다. 행위나 율법이 아니라 믿음과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걸 확실히 한 초대교회의 파송을 받아 떠나는 길인데 두 사도가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결별한 모습이 복음 안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싶은 사건이었다.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DALL-E가 그린 그림)>

 

바울 사도에게 바나바는 은인 중의 은인이다. 바울이 회심했을 초기 교회는 바울을 믿지 않았다. 그런 바울의 신원을 보증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다. 바나바의 보증으로 바울이 사도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9) 그런 바나바가 이전에 바울을 보증했듯이 마가를 보증했지만 바울 사도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은혜를 잊은 듯한 모습이다. 이런 모습들은 인내하고 말 한마디도 선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생경할 수 있다.

 

이런 모습에 우리가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이런 상황을 의아해하는지는 알 수 있다. 바로 행동이다. 늘 언급했듯이 행동은 의를 표현하는 수단 혹은 도구 혹은 형식이다. 감정 역시 그렇다. 그러니까 '?'를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다. 그건 곧 외모로 사람과 상황을 판단하는 습관 때문에 우리가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을 의아하게 본다는 뜻이다.

 

만약 우리가 행동만으로 선함을 가늠한다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상을 엎으신 건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그저 예수님이니까 괜찮다? 그런 관점은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기에 성경을 다 지킬 수는 없고 노력하는 것뿐이다"라는 생각과 같다. 그렇게 볼 일이 아니다. 성경은 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십일조와 돼지고기처럼 말씀에 따라 다른 기준으로 보면 안 된다.

 

화내는 행위가 성경의 쟁점이 아니라 무엇에 화를 내느냐가 쟁점이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은 어떻게 하면 복음을 더 잘 전할 것인지의 문제이지 상대에 대한 갈등이 아니다.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한 의견의 차이다. 두 사람이 결별했지만 둘 다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후일에 바울 사도는 후에 바나바에 대한 존경과 우정을 표했고(고전 9:6), 마가도 동역자로 받아들인다. (4, 딤후 4) 또한 바나바를 일컬어 서로 화평하는 일로 덕을 세운다고(14:19) 했다.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았기 때문이고, 서로가 거듭난 생명이란 걸 알고 존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도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본다면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물론 없으면 더 좋은 상황이란 건 맞지만, 그렇다고 복음 안에 갈등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이 갈등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갈등과 다른 건 서로의 중심을 믿고 존중한다는 것이다. 이는 "말을 그따위로 하는 게 어딨느냐?"와 같은 말로 더 커지는 세상의 다툼과 완전히 다르다.

 

예수 믿으면 사람 사이에 갈등조차 없을 것이라는 환상은 바른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가 모욕을 당한다면 다윗처럼 분기탱천할 수도 있고, 예수님처럼 상을 엎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면 그러면 안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에 관해서는 목숨도 버릴 수 있고, 화도 낼 수 있지만, 자기 의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 없는 생명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모습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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