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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은 아주 유명한 일화다. 아마도 많은 신앙인이 이 말씀에 대한 설교를 들었을 것이고, 주된 내용은 하나님께 드리는 데 인색하지 말라거나 아니면 헌금하기로 한 건 착복하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드리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굳이 비꼰다면 그건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서 원하는 바를 얻겠다는 삯꾼들의 설교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교회의 필요를 떠나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다. 즉 교회의 필요와 헌금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교회의 필요와 무관하게 드리는 헌금은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 자체로 성령을 속이는 일이다. 사람이 괜히 돈을 쓰지는 않으므로 교회의 필요가 아닌데 헌금한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목적을 예수님께서는 <장사하는 것>이라고 책망하셨다.

 

이 사건은 단순히 헌금 횡령과 거짓말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 아니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드릴 것을 자기 맘대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설교할 일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봐야 하는 핵심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다. 한 가지 자기들이 그 가치를 정했다는 건 분명하다. 밭을 판 돈에서 얼마를 감추었다는 건 계산이 수반되었다는 것이고, 가치를 계산한 결과 남은 돈이면 헌금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했다고 자기들이 판단한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스스로 헌금의 가치를 결정했다.

 

이들의 생각과 대척점에는 교회의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한 마음으로 자기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헌금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드린 헌금인 만큼 가치와 지출은 오롯이 하나님께서 맡기는 순종으로 드린 헌금이다. 반면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들의 기준으로 헌금의 가치를 정했다. 얼마를 감춘다는 건 헌금의 가치를 하나님께 맡긴 게 아니라 스스로 결정했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다양한 목적으로 헌금을 드리지만 성경이 말하는 헌금의 본질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데 사용하기 위한 재물로 드리는지는 의문이다. 사람들의 헌금은 다른 목적으로 주를 이룬다. 사람들이 헌금하는 목적을 대변하는 대표로 십일조가 있다. 십일조를 하면 재물을 쌓을 곳이 없다고 하시는 말씀에 의지해서 드리는 십일조의 목적은 단연코 재물이지 하나님의 의와 뜻 때문이 아니다. 십일조라는 마중물을 통해 부자가 되려는 게 본심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도 이랬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이런 마음을 <장사하는 것>이라고 크게 호통치셨다.

 

헌금의 본질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이루는 필요를 위하는 것

 

언뜻 몇 단계를 건너뛴 견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자기 가진 돈의 가치를 스스로 정했다는 건 헌금이 가져올 반대급부를 계산했기 때문이다. 간혹 사람들이 부자는 되고 싶은데 세전 수익의 십일조를 내야 하는지, 세후 수익의 십일조를 내야 하는지 토론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스스로 부자가 되기 위해 어느 정도 헌금해야 하는지 계산하기 때문에 생기는 토론이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람이 가진 헌금에 관한 기저에 깔린 생각을 대변하고 있고, 이들에게 일어난 재앙은 사람이 가진 헌금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 대한 경고인 셈이다.

 

사람이 헌금의 가치를 스스로 정하는 것, 헌금을 드려서 얻을 이익에 상응하는 헌금 수준을 정하는 건 이름만 헌금일 뿐 초대교회의 헌금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헌금이다. 반대급부를 염두에 두고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과 장사하겠다는 속셈이다. 그런데 헌금이라 하니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한 베드로 사도의 책망을 자기 이야기로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된다. 이건 단지 육신의 죽음에 한정된 말씀이 아니다.

 

사람들은 헌금의 반대급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헌금의 반대급부는 꼭 부자가 되는 것처럼 희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가족이 아프지 않으려고, 또 사업이 망하지 않으려고 내는 건 무당에게 복채를 내는 것과 같은 것이지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를 위한 게 아니다. 이건 양심만 있으면 알 수 있는 일인데, 이 마저도 스스로 돌아보지 못한다면 말 그대로 양심에 화인 맞은 거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육신의 문제가 늘 희망적이길 바란다. 그 희망이 헌금을 왜곡하고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 기대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런 걸 기도하지 말라고 하면 두려워하거나 싫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먼저 구할 게 있다는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말씀을 잊으면 안 된다. 헌금도 교회의 필요, 곧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게 먼저라는 뜻이다. 그리하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진 사람이 되면 모든 걸 충족해 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거듭난 삶을 산다면 우리의 삶은 모두 하나님 것이 된다. 주인의 의도한 대로 구매한 자동차에 필요한 건 주인이 모두 채우듯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진 사람과 교회에 필요한 것, 그게 돈이든, 건강이든, 사업의 성공이든 필요하신 대로 이루신다. 우리가 그 필요를 규정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걸 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신앙인 개인은 반대급부를 목적으로 헌금을 드리지 않는지 돌아보고,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이루는 필요를 위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은 단순하게 헌금을 착복하지 말고, 하나님 것을 기쁘게 드리라는 의미로만 좁게 보면 안 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그 그런 결정을 한 이유를 보고, 나는 그렇지 않은지를 반추해 봐야 한다. 아울러 교회의 필요인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돌아보고, 교회는 그 뜻을 간구하고, 그 필요를 위해 헌금이 모이고 지출되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서 얻는 올바른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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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 – 필요에 따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5. 28. 06:33 Writer : 김홍덕

(4:32-37)

우리가 널리 아는 대로 초대교회는 소유를 공유하다시피 했다. 핵심은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두니 사도들이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라는 것 안에 들어 있는데 바로 <필요>. 이 필요는 다양하고 후에 나오는 일곱 집사를 선출하게 된 이유에서 보듯이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도 사도들이 판단한 필요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필요는 교회가 간구하는 것, 또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 주제에서 알 수 있는 복음 전파다. 이것이 교회가 생각하는 가장 우선적인 <필요>.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교회에 가장 필요한 건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 그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필요를 충당하기 위해서 지출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지출이다. 교회가 전심으로 기도하는 것을 위한 지출이 아니라면 그건 낭비다. 즉 교회의 필요는 곧 교회의 정체성이고, 교회가 어디에 지출하는지는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합당한 교회인지를 증명한다.

 

교회의 필요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

 

신학을 전공한 이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기반으로 교회의 책무를 교육, 친교, 기도, 봉사 등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이같은 교회의 책무나 특성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므로 나타나는 결과지 추구해야 하는 목표나 표상이 아니다. 추구한다는 건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고, 나타난다는 건 감추려고 해도 그저 나타나는 상황을 말하므로 방향성이 반대인 전혀 다른 모습이다.

 

교회의 지출은 교회의 정체성

 

교회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지출이 결정된다. 교회의 책무라는 걸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라면 그 노력을 위해 지출할 것이고,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교회라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지출할 것이다. 여기에는 복병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인데, 이는 <하나님의 예정하신>이라는 말 속에 답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정하신 뜻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 이 하나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며 많은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자기가 생각하는 문제에 하나님은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생각하는 사람의 문제는 단 하나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목적 안에 있느냐다. 그 외에 사람이 정의한 문제는 모두 자기가 가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이루지 못한 문제일 뿐이다. 사람이 모인 교회가 정의하는 문제 역시 그렇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과 연관된 하나님의 뜻은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교회에 바치고, 사도들은 그것을 필요에 따라 사용했다는 건 단지 가난을 구제하는 일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교회처럼 교회의 책무를 다한답시고 지출하는 것 역시 초대교회의 모습과는 별개다. 심지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며 지출한다. 이런 모습이 그저 나쁘기만 한 건 아니지만, 선행되어야 할 게 있고, 그 선행되어야 할 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사랑이 없으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어도 소용없듯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초대교회를 동경하고 앙망한다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먼저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모습에 동경을 가지고 돌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진심이라면 먼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구하는 게 교회의 근본임을 상고해야 한다. 성경을 제대로 보고 있다면 모든 것에 앞서 항상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 그 나라와 그 의가 먼저임을 알 수 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면 그렇게 바라고 앙망하는 성경대로 사는 삶, 초대교회의 모습은 저절로 따라온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라는 씨앗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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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4 – 교회의 기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5. 26. 10:09 Writer : 김홍덕

(4:1-31)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치유한 일로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에서 심문받게 되었는데 오히려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더 믿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나사렛 예수가 앉은뱅이를 치유했다는 설교는 그들을 놀라게 했다.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듯 추궁한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과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나름 종교 지도자들로 오늘날과 대조한다면 신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오히려 그들이 생각하기에 보통 사람인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에 놀랐다는 건 신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깊이 생각할 부분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잡히고 풀려나는 동안 교회는 기도했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나자, 교회는 더 아름다워졌다. 교회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이번에는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교회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나?

교회가 기도한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고쳤다는 이유만으로 잡힌 게 아니다. 핵심은 앞서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어떤 권세>로 능력을 행하느냐인데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다고 했고, 이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었다. 그들의 신앙관, 그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요구하는 신앙관에 따르면 나사렛은 선한 게 나올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칭하려면 모든 율법을 지켜내고, 가난과 독립 같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것이 또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달랐다.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인간이 구원을 얻을 유일한 이름이라고 전했고, 이를 인해 사람들이 (남자만) 오천 명이 더 믿게 되었다. 이건 종교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도전이었다. 그들의 신앙은 물론이고 유대교와 유대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 오히려 백성들의 신앙이 되고 있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진정한 교회는 이런 흐름을 바로 인식했다. 더욱 기도에 힘썼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와 요한이 붙잡혀 있으니 풀려나기를 기도한 것 같지만 본질은 더 깊은 의미가 있다. 교회가 기도한 것은 예정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주기도문처럼.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8)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면 따라오는 성령 충만

교회는 단지 베드로와 요한의 육신이 구속된 상태에서 풀려나기를 구한 게 아니다. 이 성경을 통해 우리는 교회가 육신의 문제 해결을 하나님께 간구한 게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래야 한다. 세상과 사회의 정치문제나 성도들 삶의 문제는 교회의 본질적 관심 대상이 아니다. 그런 문제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면 다 해결되는 종속된 문제다.

 

여기서 핵심적인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은 다른 게 아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은 육신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생각한다. 사람의 이런 생각은 확정적이고 고착되어 있다. 그래서 취직할 것인지, 대학원 갈 것인지, 이 사람과 결혼할 것인지, 저 사람과 결혼할 것인지를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그걸 알고자 한다. 모두 육신의 문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런 걸 기도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건 무당 짓이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은 단지 하나다.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그 하나다. 그 목적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표현하시겠다는 것이며, 표현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십자가를 지는 낮아짐이다. 하나님께 그런 성품이 있다는 걸 나타내시려는 게 사람을 향한 단 하나의 뜻이다.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를 바로 읽었다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들 성경을 자기중심적으로 읽어서 이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어둡다고 하신다.

 

앉은뱅이를 고치는 능력의 근원인 나사렛 예수를 믿는 믿음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낮아지는 하나님의 성품이자 그리스도의 본성 이것이 사람인 나에게 이루어져야 하는 단 하나의 하나님의 뜻임을 믿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바로 이걸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게 바로 나의 정체성이며, 내 인생의 의미이자 목적이란 걸 믿는 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다. 교회는 이걸 구하는 공동체다.

 

놀라운 건 교회가 이것을 구했더니 성령이 충만해졌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 성령의 충만을 구한다. 그러나 이 성경에서 보듯 성령은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그 자체다. 성령은 기적을 일으키는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되도록 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말씀하신다. 성령은 사람이 나사렛 예수를 믿게 하시는 분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게 바로 성령 충만

 

따라서 교회와 사람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 사람이 믿어야 하는 유일한 이름을 구할 때 응답하시고, 그렇게 사람이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게 되는 그것이 성령의 충만이다. 즉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사람의 삶이고, 결과지 성령 충만 그 자체를 목적으로 구하는 대상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한 그 뜻을 주기도문의 의도대로 구하면 성령은 그저 충만해진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하나님의 영이 본성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 이상으로 충만할 수는 없다.

 

교회는 많은 것들을 구한다. 심지어 사회 참여를 사명으로 여기고 정당을 만들기까지 한다. 또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무료로 급식한다. 그리고 이런 활동을 하는 교회가 더 발전하고 동참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능력이 나타나기를 구한다. 사람들이 동경하는 일들이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사례가 많아지기를 바라고, 얼마 간의 성공을 전도할 때 사람들에게 전한다.

 

오늘날 교회가 기도하고 힘쓰는 모든 건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면 자연스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게 있다. 바로 사람을 향해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앞에 열거한 오늘날 교회의 기도와 간절함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진 사람에겐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처럼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이 모여 계획하고, 예산을 편성하고, 당번을 정해가며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은 그렇게 된다는 걸 이어서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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