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성경이 말하는 아버지와 아들은 육신의 관계를 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와 생각이 형상 곧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다. 육신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한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따라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건 기도하는 사람이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겠다는 고백이다. 이걸 요한 사도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표현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표상이므로 그와 같은 육신을 가진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이 삶으로 나타나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걸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신 의도는 우리가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 사람을 통해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육신, 곧 삶인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즉, 그런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려면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으로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호칭이다. 이건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란 관계는 생명 관계로 노력으로 되지 않듯,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의 삶 자체가 되는 것 역시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즉 성경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니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말하는 건 모든 게 엉망인 상태지 겸손이나 신앙이 아니다.
사람이 가진 기도의 기본 개념은 '사람의 호소가 하늘을 감동하게 해 뜻, 곧 사람이 가지지 못했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룬다.'다. 그래서 하늘에 기도한다.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고,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한다. 하늘이 사람의 운명을 쥐고 있다는 인류의 공통적 개념이 어떤 종교든 언제나 하늘에 기도하고, 하늘에 호소한다. 하늘은 사람이 가지지 못한 모든 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늘에 기도하는 데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점은 <하늘이 어디냐?>는 것과 <사람은 가지지 못했지만 하늘이 가진 게 무엇이냐?>다.
그렇다면 먼저 예수님의 승천을 통해 사람이 구하는 걸 준다고 믿고 있는 하늘이 어디인지를 생각해 보자. 사도행전 1장 6-11절에는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그 모습을 사람들이 보고 있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승천하는 예수님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
"어찌하여 하늘을 보고 있느냐?"는 흰옷 입은 사람의 말에서 예수님은 우주 공간으로 올라가신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2,000여 년이 지났다고는 해도 사람이 볼 수 있는 속도로 올라갔다면 몇만 광년(빛이 일 년간 가는 거리)을 논하는 우주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 승천 당시 올라가신 방향이 우주 어느 방향인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우주 어디를 봐야 예수님이 가신 하늘인지 특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무심코 또 당연히 머리에 이고 있는 하늘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지만,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이 우주 공간을 한정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년부 시절 불렀던 '저 높은 우주에 천국을 만들고 주 믿는 사람 오라네'(물론, 이건 그냥 시적 표현이다.)라는 노래 가사처럼 하늘을 생각하는 건 주기도문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은 우주와 같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주기도문의 하늘은 우주 공간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건 하나님이 우주 공간의 어느 특정 공간에 머무시면서 사람을 감찰하신다는 게 아니라 사람의 운명을 정하시는 분이라는 개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는 있고 사람에겐 없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호칭에 관해 중요한 두 가지 중 두 번째를 이야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알 수 있다. 바로 사람의 운명, 이것이 하나님께는 있고 정작 당사자인 사람에겐 없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해서 얻어야 하는 본질은 바로 사람의 운명, 이것이다.
하나님께는 있고 사람에겐 없는 건 바로 <사람의 운명>
사람이 흔히 <운명>이라고 말하는 건 사실 정체성과 존재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 목적대로 살아야 알 수 있는 삶의 의미다. 존재가 목적을 벗어나서 의미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통신과 인터넷이라는 목적을 벗어나 망치질하는 곳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정작 사람의 존재 정체성, 곧 존재하는 목적과 삶의 의미가 당사자인 사람에게는 없고 하나님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은 창조주고 사람은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자기가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 목적과 의미를 스스로 정립할 수 없다. 반면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 곧 정체성을 <스스로 있는(존재하는) 자>라고 밝히셨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하는 건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라는 고백
따라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어야 사람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 만약 사람이 창조되지 않고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진화한다는 건 스마트폰이 자기 존재 목적을 스스로 정립하고 스스로 형성했다는 논리다. 게다가 기능 향상도 자기 스스로 정립했던 정체성에 부족함을 인정하고(스스로 부인하고) 더 나은 기능을 스스로 정립한 다음 정체성을 발전시킨다는 이야기가 된다.(그런 능력이 있다면 처음부터 완전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일은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사람도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게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삶의 목적과 의미를 궁금해할 사람은 없다. 어쩌면 목적이니 의미 같은 개념조차 의미가 없다. 자기가 스스로 창출하는데 필요가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건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고백하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건 하나님을 창조주로 나는 그의 피조물인 관계를 믿고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육신과 함께 삶을 주신 뜻, 이 하나를 구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내가 존재하는 목적과 내 삶의 의미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니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건 내 삶의 목적과 의미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삶의 목적과 의미를 구하는 게 유일한 기도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당연하게 하나님께 육신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걸 기도라고 생각하는 건 많은 걸 잘못 아는 것이다. 하늘이 물리적 우주 공간이 아니듯 기도도 형이하학적인 육신의 문제 해결을 구하는 게 아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이 아님을 확정했다.
주기도문의 의도대로 존재의 목적이 분명해지면, 그 목적을 위한 삶에 필요한 건 모두 주신다. 무엇이든 구하면 주시겠다는 약속하신 당연한 이유다. 예수님께서 단 하나의 기도만 주신 것도 같은 이유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온전히 정립되어 사람이 하나님과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인식하고 그 존재 목적대로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아들도 내어 주시는 분이다. 주기도문은 이 하나님께 나를 창조하신 뜻, 곧 나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을 구하는 기도다.
베드로의 설교 중에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 인용이 있다. 말세에 남종과 여종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겠다는 예언, 자녀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라는 유명한 내용이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예언.(요엘서의 해설은 블로그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이 예언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이 예언이 이루어지는 때를 <말세>라고 한 것이다. 사람들은 말세라고 하면 그저 이 지구의 멸망으로 확정하여 생각하는데, 성경이 말하는 말세는 자기 세상, 자기가 생각하는 의로움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종말을 말한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의로움과 하나님의 생각으로 봐야 하는데 사람은 자기 생각으로 세상을 조명하고, 판단하고, 확정한다. 그런 사람의 생각과 자기 주장이 끝나는 때가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말세>다.
이치적으로도 그렇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하나님의 생각이며 말씀이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임하려면 세상을 보는 사람의 생각과 의와 뜻과 기준이 없어져야 한다. 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세상과 자기가 정의하는 세상, 이 두 가지가 공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가진 자기 의로움이 사라질 때, 더 정확히는 자기가 세상을 재단하는 의로움을 가지고 있다는 게 죄라는 걸 알고 시인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신다.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자기 세상의 종말
이러한 말세에는 하나님께서 영을 부어주신다는 것 외에도 여러 징후가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된다고 했다. 이같은 예언은 자주 인용된다.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해가 어두워진다는 건 곧 빛이 없어진다는 뜻인데, 이는 인식하는 기준과 조건이 어두워진다는 의미다. 우리가 어떤 세계를 바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빛이 비췬다', '눈을 떴다'고 말하는 반면, 어떤 세계를 바로 인식하지 못하면 '컴맹', '문맹'처럼 어둡다고 한다. 해가 어두워진다는 건 이처럼 자기 의로움으로 세상을 조명하는 빛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예언은 이어 나오는 '누구든지'가 어떤 사람인지를 정의한다. 아무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구원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다. '누구든지'와 '아무나'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개념에서 그 한정하는 의미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누구든지는 아무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그 누구든지는 바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진 사람, 자기가 가진 의의 기준으로 세상을 정의하고 조명하며 살던 세상이 종말을 맞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 구원은 주의 이름을 부른 부름의 대답인 셈이다. 그러려면 사람이 부른 이름이 하나님의 정체성과 일치해야 한다. 이름은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신데 부르는 사람은 행위를 드리면 소유로 갚아 주시는 신으로 하나님을 부르면 정체성이 같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답하지 않으신다. 길을 가는데 누군가가 '엄마' 혹은 '아빠'라고 부르면 자녀 있는 사람이 돌아보긴 하겠지만 자기 자녀가 부르는 게 아닌 게 확인되면 이내 답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자기 의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 사람이 구원을 얻는 누구든지에 속하는 사람이다.
또한 구원도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이 베푸는 구원과 사람이 원하는 구원이 같아야 의미가 있다. 사람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 안으로 들어오는 걸 구원으로 여기시는 하나님께 삶의 위기와 어려움에서 구해주시는 걸 구원으로 여기는 간구는 의미가 없다. 죄에서 단번에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내내 회개하는 사람이 말하는 죄도, 구원도 일치하지 않는다. 죄의 개념과 구원의 개념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이 구하는 간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여!, 주여!'라고 외치지만 의미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을 부름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 이건 있어도 되고, 없으면 그만인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느냐는 식으로 볼 성경 말씀이 아니다. 분명히 이해하고, 확실히 알아 자신이 그 '누구든지'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어야 한다. 이건 영혼과 영원히 나의 문제가 되는 구원의 문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정체성과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일치하지 않는 호소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생각해야 한다. 자기 의로움으로 세상을 조명하고, 판단하고, 확정하는 자기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 그 하나만이 자기 의로움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불러야 구원을 얻는다. 육신의 삶이 당면한 어려움에서 구원을 구하거나, 하나님이 생각과 달리 행위로 범한 죄에서 구원받기를 바라는 구원은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얻을 수 있는 구원이 아니다. 그건 하나님의 정체성과 사람의 존재 목적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