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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박스, 흰 박스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24. 3. 10. 23:16 Writer : 김홍덕

얼마 전 일이었다. 큰아들이 이번에 나온 스마트폰을 샀고 이전에 사용하던 전화기를 중고 시장에 팔기로 했다. 평소에 전자제품의 박스를 웬만하면 모아두기에 사용하던 전화기 박스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분명히 보관해 두었다고 생각한 박스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나는 그 박스가 흰색이라고 생각했기에 흰색 박스를 찾았는데, 정작 그 박스는 검은색이었다. 보관해 둔 박스를 모두 꺼내 놓고 하나씩 찾은 결과 검은색으로 된 박스를 찾을 수 있었다.

 

곤경에 빠지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 영화 '빅 쇼트')

 

인생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도 어쩌면 이와 같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인생을 힘겨워하지만, 인생을 주신 하나님은 다르게 말씀하신다. 내가 검은색 박스를 흰색이라고 생각했듯이 사람도 인생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복을 주시려는데 사람은 인생을 힘겨워하니 그렇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어쩌면 정상이다. 그들의 세계관은 인생은 힘들다고 정의하고 있고, 그 힘든 것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를 찾고, 공부하고 노력하는 걸 삶의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겐 좀 다른 이야기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에 복 주시기를 원하시고,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천국이 이미 임하였다고 하셨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인생을 힘겨워하는 건 생각해 볼 여지가 상당하다. 여기에 더해서 그 힘겨움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건 성경과 배치된다. 인생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니까?

 

기독교인이 인생을 힘겨워하는 건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다고 채무가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일은 생기지 않는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인생의 무게로 누낄 수밖에 없는 문제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이 바뀌면 문제도 달라진다. 이건 아주 신비한 세계지만, 성경은 <거듭남>이라는 말로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것이 구원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니까 여상한 인생의 문제들이 다르게 보이는 존재가 되는 게 구원이란 말씀이다. 이건 그렇지 않다면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것을 심각하게 묵상해 봐야 한다.

 

여기서 오늘 정말로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있다. 바로 성경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과연 인생의 여전한 문제를 보는 시각이 바뀌었는지 여부다. 이건 구원의 기본 상태이다, 그리고 구원은 성경이 성취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므로 구원받았다는 건 곧 성경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었는지를 반추해 봐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설교한다면 설교하는 이가 과연 그런지 검증하고서 들어야 할 것이다.

 

검증은 간단하다.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문제에 관한 설교는 단 두 가지 부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거라는 설교와 인생을 다르게 보이도록 나를 바꾸어 주실 거라는 설교, 이렇게 둘 뿐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설교는 전자에 속할 것이다. 어느 교회 어떤 목사를 만나도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문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니 이를 믿고 기도하라고 한다. 심지어 나름 깨어 있다고, 오늘날 교회가 상업화되었고, 복음적이지 않다는 깨달음을 주장하며 새로운 신앙과 교회의 모델을 개척하는 사람들도 이 범주를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과 인생의 문제에 관한 설교는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꿔 주실 거라는 설교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바꾸어 주실 것이라는 설교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문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거라고 믿는 신앙은 검은 핸드폰 박스를 흰색이라 착각하고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시라면 예수님의 잔을 물리셨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알듯이 그런 일은 없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을 바꾸는데 있다. 더 심각한 건 이렇게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으면서 이를 주장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걸 주장하기 좋은 지위와 위치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건 진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아주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도 이 상황을 매우 우려하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마 24:15-16)

 

하나님은 사람을 바꾸시는 분이시다. 더 정확히는 탕자처럼 자기 자리를 떠난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바라시고 도우시는 분이시다. 그렇게 사람이 바뀌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사람이 세상에서 문제를 겪는 건 자기 정체성, 존재의 목적을 벗어나 자기가 정한 목적대로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바뀌면 그의 세상도 바뀐다. 자고로 설교는 이래야 하고, 성경을 이야기함도 이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검은 박스를 휜색으로 알고 찾는 것과 같은 어두움일 뿐이다. 말 그대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다. 거기서 벗어나야 구원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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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는 동안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었다. 바로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 산에서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율법이 선포되고 있는데 산 아래에선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끈 모세는 어찌 됐는지 모르겠으니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신>을 만들고자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잘 생각하지 못했지만, 재밌는 게 있다. 바로 금송아지를 만든 금의 출처다. 사람들은 그저 금으로 만들었다고만 생각하지만, 금송아지를 만든 금은 귀걸이라고 특정하고 있다. 아론이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가져오라고 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출 32:2)

 

또 하나의 질문은 '왜 송아지인가?'. 기왕에 우상을 만들려면 더 강하고 의미 있는 짐승도 있을 것이고, 더구나 애굽에서 인도해 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신을 구하는 상황이라면 송아지가 아니라 독수리나 길을 찾거나 인도하는 동물을 형상화할 수도 있을 텐데, 오히려 노동의 상징인 소를 형상화했다는 건 생각의 여지가 있다.

 

또한 성경에서 귀는 들음의 상징이다. 이건 굳이 성경이 아니어도 이견이 없는 상징이다. 들음은 믿음의 시작이고, 귀걸이는 귀를 가치 있게 만든다. 따라서 금귀걸이는 무엇을 귀하게 듣는가를 설명한다. 금귀걸이로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노동, 곧 육신의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한다는 말씀을 금 같은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금귀걸이로 송아지를 만들었다는 건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걸 귀하게 여기겠다는 것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을 두고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단지 그러면 안 되는 경계의 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오늘날 기독교인 대부분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하고 있다. 모두 행동으로 성경을 지켜내야 한다는 말씀에 귀를 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올바른 길이며 복을 받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 생각이 바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이 사건의 목적이다. <우리를 위해, 우리의 신>을 만들자는 게 목적이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나의 유익을 얻겠다는 것인데, 이는 오늘날 신앙인들이 성경을 지켜서 육신의 복을 얻겠다는 것과 같다. 성경대로 살아야 육신이 평안하고 복을 누리며, 반대로 성경대로 살지 않는다면 육신이 불행한 일을 당한다는 생각에 이를 회피하려고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우리'를 위한 신앙생활인 증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를 위한 우리의 신>으로 금송아지를 만든 목적과 완전히 같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육신의 복을 구하고, 육신의 재앙을 피하려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나 그렇게 육신을 위한 신앙은 모두 우상 숭배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육신의 평안과 번영을 위해 행위를 거룩하게 하고, 행동으로 성경을 지킨 다음 그 공로를 하나님께 제시하고 반대급부로 자신을 위한 것들을 얻으려 한다. 그래서 송아지처럼 노동하고, 수고하고, 노력하면 복을 준다는 말씀을 듣고서 귀하게 여기고 그대로 행하려 수고한다. 금귀걸이로 금송아지를 만든다는 건 사람의 이런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엄히 벌하셨다. 언제나 그랬다.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마음과 그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로 육신의 평안과 번영을 얻으려는 사람의 마음을 아주 싫어하셨다. 이런 목적으로 드리는 제사가 너무 싫어서 "누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라고 하실 정도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예수님도 다르지 않았다. 하나님께 제사의 행위와 율법을 지키는 공로를 드리고, 육신의 평안을 얻으려는 걸 <장사하는 것>이라고 일갈하셨다. <우리를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처럼, 육신의 복락을 위해 소와 양과 비둘기를 드리는 건 하나님과 거래하고 장사하려는 시도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사실 이건 장사와 거래가 맞다. 이게 장사로 보이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모두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있다. 더 나아가 그렇게 하는 게 진정한 신앙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금같이 귀하게 여기며 자기 귀를 내어 주고, 그 외침대로 살려고 송아지처럼 노력한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자기 생각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우상 숭배고, 하나님과 장사하려는 시도이며, 존재의 하나님을 행위와 공로를 귀하게 여기는 하찮은 신으로 대하는 모욕이다.

 

사람이 육신의 평안을 위해 노력으로 성경을 지키라는 말을 귀하게 여기고, 그 말대로 노력하는 건 심각한 우상 숭배인데 사람들은 오히려 그걸 금처럼 귀하게 여기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은 반면교사를 위해서 기록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성경이 그렇듯 오늘도 금송아지는 곳곳에서 만들고 숭배하고 있다. 금같이 귀한 대접을 받는 육신의 수고에 하나님이 감동해서 복락을 주신다는 다양한 신앙 대부분이 이것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육신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복락을 귀하게 여긴다. 이것만 보고 좇아가니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못 본다. 더욱이 지금은 달력으로 예수님 오신 이후니 뭘 해도 다 복음일 것이라 착각한다.

 

우리는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약 성경의 말씀도 <해야 한다>가 되는 순간 율법이 되고, 행위로 의로워지는 시도가 된다는 걸 간과하면 안 된다. 이 둘을 보지 못하면 육신의 복락을 주신다는 말씀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금송아지를 섬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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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죄 사함

Category : 김집사의 뜰/십자가의 삶 Date : 2024. 3. 1. 12:14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알듯이 사람,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해서다. 이건 진리다. 다만 이것을 진리로 믿느냐 아니냐는 사람의 선택이다. 성경은 진리로 믿는다면 죄가 사하여질 것이라 약속한다. 성경을 믿는다면 그걸로 문제는 해결된다. 이와 같은 개론은 여기까지로 정리하고 몇 가지 관점을 이야기 해 보자.

 

우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생각해 보자. 여기서 포인트는 죽은 자도 살리신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다. 이 의문에 관해 가장 보편적인 의견은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참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신념과 인내와 노력으로 그 엄청난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셨다는 관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물론이고 성경의 모든 말씀은 사람의 노력이나 신념으로 하나님의 의와 뜻을 이룰 수 없다고 말씀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건 신념이나 인내가 아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에도 십자가를 지신 건 신념이나 인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 때문

 

예수님은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생명이다. 하나님이 살았다고 여기는 생명이다. 생명은 본성이 있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이다. 말은 의와 뜻의 표현이다. 이 본성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본성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정체 곧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정체성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한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그리스도를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일게 된다는 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모습을 보고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이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 백부장은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을 알게 했다. 이게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존재 정체성을 깨닫고 회복하는 게 죄 사함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람의 죄를 사하는 건 이 법에 따른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명제를 아는 것과 같은 게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안다는 체휼이다. 물에서 살려면 수영할 줄 알아야 한다는 <안다>가 아니다. 물에서 헤엄치고 수영할 수 있게 된 상태를 말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안다는 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와 그 하나님의 말씀(의와 뜻)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내가 어떤 관계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안다고 말한다.

 

죄와 죄사함

이같이 하나님을 안다는 건 더 깊은 의미들로 이어진다. 가장 결정적인 건 예수님께서 '나도 예수님처럼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과 예수님과 내가 그렇게 같은 본성을 가진 존재라는 걸 아는 것을 포함한다. 예수님과 내가 같은 본성을 가졌다는 건 생명의 유전자가 같다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근거고, 예수님과 우리가 형제요 하나가 되었다는 말씀의 본질이다.

 

여기까지 왔다면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아울러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의 죄는 행동에 관한 게 아니다. 거짓말하고 화내고 도둑질하는 것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사한 죄가 아니다. 예수님이 그같은 행위의 죄를 사하셨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헛되다. 구원받았다는 사람도 여전히 화를 내고 짜증내며 욕을 하고 심지어 사회 규범이 죄로 여기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예수님이 사한 모든 인류는 여전히 죄를 범하고 있으니, 예수님의 십자가는 헛되다. 이게 보인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한 죄는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는 게 올바른 말씀 묵상이다.

 

죄는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야 할 사람의 자리를 떠나 자기 옳음을 추구하는 사람의 상태

 

성경이 말하는 죄는 존재의 이탈이다.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아닌 다른 것을 자기 인생의 의미와 목표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게 성경이 말하는 죄다. 예수님께서 사하신 인류의 죄는 행위로 범한 죄가 아니라 이 죄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떠난 죄에서 구원한다. 앞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리고 그 모습이 나의 모습이란 걸 알게 된다면 자기 의로움으로 살아온 자기 모습을 돌이키게 된다.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건 이전의 삶이 그렇지 않다는 깨달음과 고백 그리고 뉘우침을 수반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죄 사함에 대해 깊이 묵상해야 한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 우리가 사회적으로 죄라고 말하는 행동으로 범하는 죄를 사하기 위해 엄청난 고통을 참고 참는 인내와 신념으로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기에 그리스도가 가진 본능에 이끌려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죄 사함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 아들은 어떤 존재인지, 구원받은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신 사건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 사는 사람의 모습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며 사람은 저 모습이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이란 걸 깨달을 때 하나님이 나를 만든 목적에서 내가 벗어나서 살았다는 걸 알게 되고, 시인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인생의 정체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순종하므로 자리를 떠난 죄가 사해지고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각양의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로움을 주장하며 "이것이 옳은 것이며, 이것이 그리스도다"고 외치는 그릇된 외침 앞에 나를 내주며, 그들의 주장에 따라 심판도 받고, 그들의 요구대로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고 심지어 육신의 목숨도 내어 줄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존재라는 걸 보이셨다.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 본성 때문에 매 맞고, 끌려가고 못 박는데도 순종하는 모습이 신념이나 인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기 때문이란 걸 보이셨다.

 

그리스도는 자기 옳음을 주장하는 사람의 의로움에 육신을 내주는 본성을 가진 사람

 

그러므로 사람은 그것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사는 생명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걸 발견하고 이전까지 내가 옳다는 대로 살고 내가 옳다는 생각대로 사람을 움직이고 명령하고 따르기를 바라면서 소리치고 윽박지르던 모습을 돌이켜 오히려 내가 수고하는 존재가 되는 게 구원이고 죄 사함이다. 이 변화는 오직 생명이 바뀜으로만 일어나는 것이기에 거듭남이라고 한다.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신념이나 인내가 아니듯, 그리스도로 사는 것 역시 노력이나 신념이 아니기에 생명이 바뀌는 거듭남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십자가로 이끌었듯, 그리스도로 거듭나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게 구원의 삶이다. 괜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게 아니다.

 

십자가와 죄와 죄 사함과 회개와 구원에 관한 바른 묵상

우리는 구원과 죄 사함을 대충 생각하면 안 된다. 구원을 이야기할 때는 어디서 어디로 구원을 받았는지를 생각해야 하고, 죄와 죄 사함을 이야기할 때는 죄가 무엇인지부터 정의해야 한다. 이게 핵심인데 구렁이 담 넘어가듯 죄는 사람들이 말하는 죄, 구원은 무작정 상황이 좋아지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죄가 사람들이 말하는 죄라면 교회 다니는 사람, 소위 구원받았다고 자칭하는 사람들도 사회가 말하는 죄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여전히 죄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무런 효용이 없는 상태라는 걸 주목해야 한다. 또한 구원이 죽어서 천국에 가면 금 면류관 쓴다는 맥락처럼 육신의 삶과 형편이 나아지고 기대하는 바가 쉽게 이루어지는 집합에 속한 것으로 여기면 안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의 성공이고,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의 향상이란 이야긴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라고 하셨다.

 

십자가와 죄와 죄 사함과 회개와 구원에 관한 "과연 그런가?" 하는 묵상이 필요하다.

 

이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십자가, , 죄 사함, 구원은 성경의 사람에게 베푸신 은혜의 핵심임에도 여러 모순적 상황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건 말 그대로 <방 안의 코끼리>. 심각한 모순과 오류와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어쩔 줄 몰라하는 상황인 셈이다. 그나마 제시된 해결책이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니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정도인데 그건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지겠다는 소리니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성경에 역시 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자임에도 십자가를 지신 건 그리스도시기에,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렸기 때문이란 것과, 그 본성에 이끌려 십자가를 지신 모습이 우리가 되어야 할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란 것을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깨닫는 게 바로 죄 사함과 구원이란 걸 묵상해야 한다. 따라서 죄는 우리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로 사는 것임을 알고, 자기 의로움을 좇아 살았음을 뉘우치는 회개를 거쳐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로 거듭나는 게 구원임을 상고해야 한다. 결국 구원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정체성이 회복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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