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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7-1) 종에 관한 계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4. 1. 29. 06:57 Writer : 김홍덕

제단에 관한 계명 다음으로 종에 관한 계명을 주셨는데, 남자 종과 여자 종으로 나누어 말씀하셨다. 일단 우리는 먼저 ''이라는 신분에 관해 생각해 보자. 이에 앞서 성경은 하나의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이를 설명하기 위한 표현임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종의 신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아래 있는 사람의 빚(debt)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목적을 갖고 만들거나 사서 사용하는 물건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종의 정체성을 잘 알 수 있다. 스마트폰을 예로 들면, 우리는 통화를 하고, 인터넷과 뱅킹, 네비게이션 등 첨단 기능을 사용할 목적으로 스마트폰을 산다. 사람은 스마트폰 사용 목적에 돈을 낸 셈이므로 스마트폰은 사람이 의도한 목적을 사람에게 빚진 것이다. 스마트폰이 사람이 의도한 목적 아래 종인 셈이다. 이게 성경이 종에 관해 말씀하시는 의도다.

 

정리하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 곧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도록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과 이미지를 표현하겠다는 목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므로, 사람은 그 하나님의 목적을 빚진 것이다. 종 역시 빚진 자다. 옛날에는 빚지면 종으로 팔려 갔다고 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신 목적을 이뤄내야 할 빚이 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종은 바로 이런 개념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신학교 나오지 않아도 다 하나님의 종이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종은 Servant, 고용된 자로 나온다.(KJV) 그 외 교회에서는 '둘로스(δολος)'라는 말도 결국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고용된, 정확히는 창조된 존재기에 종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예수님께서도 섬기러 왔다고(20:28) 하셨고, 바울 사도도 자신을 '빚진 자'라고 했다.(1:14) 예수님과 사도 그리고 모든 사람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살아야 하는 빚을 지고 있다. 이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종이다.

 

성경이 말하는 종은 창조 목적에 빚진 것을 말한다.

 

따라서 출애굽기 21장에 나오는 종에 관한 계명은 이 목적을 설명하기 위한 말씀이다. 그게 아니라면 21세기 국가 대부분에서 이 성경이 무용지물이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기록할 수 없는 하나님을 축약하고 축약해서 쓴 성경에 그런 낭비가 있을 수는 없다. 즉 오늘날 우리 역시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것이다. 그건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다른 사람 역시 우리 삶을 통해 그리스도로 거듭나도록 수고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런 삶을 성경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 종은 십자가를 지는 삶과 연결되어 있다. 성경이 말하는 종, 하나님의 종이란, 다른 사람이 자기 삶이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에 벗어났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자기 삶을 소비하는 헌신을 할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그건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신 삶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는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명을 다하는 삶이다. 출애굽기를 통해, 또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종에 관해 말씀하시는 건, 하나님이 종이 이런 사명을 가졌다는 걸 상기시키고,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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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는 삶을 이끄는 거듭남

Category : 김집사의 뜰/십자가의 삶 Date : 2024. 1. 26. 04:56 Writer : 김홍덕

성경을 읽고 설명하다 보면 언제나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귀결된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법인 그리스도로 거듭남의 속성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려 십자가를 지시므로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의 모든 걸 보여주셨기에 그리스도로 거듭난 하나님 아들들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본성에 이끌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려 사는 삶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는 삶은 어떤 것인가?'가 문제이자 핵심이다. 이건 거듭남의 증거기에 더더욱 중요하다. 어떤 이들은 불확실한 거듭남의 증거를 객관적 사실에 접목한다. 이를테면 자기가 구원받은 증거를 달력의 날에 표시할 수 있느냐로 증거를 삼는다. 우리가 흔히 '구원파'로 일컫는 이들의 모습이다. 거듭났다는 확신을 가지기 위한 하나의 노력인데, 달력은 거듭난 이들이 의지할 시간 개념이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노력과 사회의 객관적 사실 위에 있다는 게 문제다.

 

이런 종교적 노력이 난무할 만큼 거듭남에 관한 자기 확신은 아주 중요하다. 다만 거듭났다는 사실은 자기 스스로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일 때 확실한 것이지, 자기가 거듭났다는 것을 믿으려고 애쓰고, 달력의 날짜나 자기 감정의 기억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시 한번, 자기 스스로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정도이어야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스스로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할 수 없을 때 비로소 거듭났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자신의 거듭남을 부인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까? 그건 두말 할 것 없이 자기 삶이다. 자기 삶을 가장 가까이 또 상세히 아는 건 자신이고, 무엇보다 지난 시절의 자신과 무엇이 다른지를 가장 잘 아는 이가 자신이다. 그리고 다음이 가족일 것이다. 결국 자기 삶을 바라보고 반추할 때 그 삶이 원래 자기 본성이 아니라, 이전에 없던 새로운 본성으로 인한 변화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면 거듭남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본성으로 사는 자신이 발견되어야 비로소 거듭났다고 할 수 있는 것

 

결국 이전과 다르게, 또 자기도 모르게,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기 삶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은 법 안에 있다는 게 발견되고, 부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자기 삶이 거듭났다는 걸 스스로 알게 된다. 다만 주의할 것은 삶을 다르게 하는 동력이 무엇이냐를 잘 살펴야 한다. 십자가를 지는 삶을 이끄는 동력이 본성인지 아니면 종교적 노력,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니 그렇게 살아야지'라는 신념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신념은 천국에서 받을 것이라 믿는 상급이나 심지어 그렇게 해야 이 땅에서 복을 받을 것이란 기대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는 삶의 동력은 본성이어야 진정한 거듭남

 

거듭남이란 말은 말 그대로 생명이 다시 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생명으로 다시 나는 건 거듭남이 아니라 부활이다. 성경도 이를 구분한다. 이전과 다른 생명으로 거듭난 그리스도는 죽어도 다시 그리스도로 부활한다. 당연히 부활은 거듭난 사람, 즉 이전과 다른 생명으로 난 사람들에게 한정된 능력이다. 기독교인들이 흔히 알듯이 예수 믿다 죽으면 다시 그 육신으로 부활한다고 생각하는 건 사람의 기대지 성경이 말씀하시는 부활이 아니다.

 

거듭남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자기가 옳다는 대로 살아가던 사람이, 존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그 안에 심기고 성령이 그 말씀을 생명으로 잉태케 하므로 새롭게 나는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종교적 신념으로 노력하며 이루려던 삶을 본능이 이끄는 삶으로 만든다. 밖에서 보면 같은 봉사, 같은 친절 같지만 속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자기가 부인할 수 없어야 진정한 거듭남이다. 예수님께서도 생수가 자기 안에서 넘쳐날 것이라고 하셨다. 바울 사도는 불에 타지 않는 공력이라고 했다. 신념은 상황에 따라 바뀌지만(불타지만), 본성은 그렇지 않다. 죽일 수는 있어도 본성을 외부에서 바꿀 수는 없다. 즉 불에 타지 않는다.

 

거듭난 삶의 모양은 밖에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동력이 신념이냐, 본성이냐는 완전히 다른 것

 

사람들은 거듭난 삶의 실체를 궁금해한다. 이는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나 본성에 이끌린 삶이 아니라 신념에 의한 삶임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기독교인 대부분에게 거듭난 증거와 도전이 될 만큼 실질적인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늘 궁금하다. 우리 일상에서 드러나는 삶의 태도와 행동으로 거듭남을 가늠하고 싶어 한다. 하나님을 바로 믿고자 하는 이들이 그런 것은 은혜로운 일이지만,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믿는다면서 실체적 행동에서 그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자기 구원의 불확실성을 숨기는 거짓이고, 한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거듭났다면 자기 안에 이미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자아 밖에서 증거를 찾는 게 그렇다.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글 대부분은 결국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귀결된다는 걸 늘 생각한다. 어쩌면 이 블로그를 구독하는 독자 대부분도 십자가를 지는 삶, 거듭났다는 삶은 어떤 형태인지 궁금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에 관해 물어 오기도 한다. 어쩌면 이건 신앙의 마지막 단계인지 모른다. 아니 시작이다. 거듭난 생명은 생명이니 계속 자란다. 삶의 태도와 모습이 날마다 성장한다. 이런 성장은 생명으로 났을 때 이야기다. 노력으로 성경을 지켜내려는 신앙은 어느 한순간 성경을 지키지 못할 때 그간의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이끄는 자기 삶을 느끼고 보는 이들은 스스로가 자라고 장성해지고 있다는 걸 안다. 그 앎이 예수님께서 주신 기쁨이다. 세상에는 그런 기쁨이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은 세상의 의로움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의 삶을 자기 모습에 비추어 내면 그도 구원받는다. 복음은 이렇게 전해진다.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고백한 백부장의 모습이 그렇다. 하지만 세상의 가치관, 세상이 옳다는 기준으로 보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은 알아보기 힘들고 가치도 없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가진 사회적, 종교적 가치로 예수님을 보니, 죽은 사람을 살려도 결국은 심판했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십자가를 지는 삶은 사회적 가치로 조명되지 않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세상 가치관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을 십자가로 이끌고 핍박한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 삶에 그리스도로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의 모습을 비추어 보면 구원을 얻는다.

 

그렇지만 십자가를 지는 삶은 거듭난 생명이 이끈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피할 수 없게 이끈다. 절대 종교적 노력으로 이룰 수 없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그리스도로 살도록 노력하십시오"라는 설교를 원인으로 노력하는 삶은 모두 거짓이다. '노력하라.'는 설교는 기만이고, 그런 노력으로 이를 수 없다는 건 조금만 노력해 본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는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 삶은 세상 가치로는 인정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사회적 가치관은 그렇게 평가한다. 다들 높은 데로 가려고 아들은 낮고 낮은 십자가로 보낸 하나님도 끌어들이는 게 세상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치관을 의와 선으로 삼는 세상에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삶으로 이끄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삶은 당연히 세상과 반대로 가는 것이니 세상이 조롱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과 세상의 조롱이다.

 

세상에서 천한 삶임에도 세상과 바꿀 수 없는 게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그렇지만 이 삶은 아주 기쁘고 행복하다. 거듭난 삶이 당장에 닥친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지는 않는다.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란 말씀이 이것이다. 그렇지만 삶이 아무리 곤해도 세상이 조롱하는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삶과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을 바꾸고 싶지 않다. 그건 삶의 선택지에 아예 없다. 본성이 이끄는데 그럴 수는 없다. 이게 생명의 법이다. 이 정도가 되어야 스스로 거듭남을 부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이런 존재, 이런 사람, 이런 삶이 되겠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정도는 알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은 곧 십자가를 지는 삶이 된다. 모두가 위로 가는 것이 의롭고 선한 일이라고 믿고 인생을 걸고 달려가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본성은 낮은 자리로 이끈다. 모두가 육신을 더 편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몸은 편한데 돈은 벌리는 삶을 성공이라 말하는데, 다른 사람이 보고 구원을 얻도록 육신이 수고로운 삶으로 이끌기에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 본성이 같으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십자가를 진다는 건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는 삶이다. '내가 하면 되지!'라는 생각이 천국의 상급과 무관하게 자기 안에 있는 본능에 이끌려서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때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로 거듭난 것이다. 이건 우리 일상 모든 작은 순간에서 행할 수 있는 일들로 나타난다.

 

십자가를 지는 삶은 전혀 거창하지 않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은 말구유에서 나는 초라한 것이다. 우리 일상에서 전혀 귀해 보이지 않는 일들을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려서 하게 되는 소소한 삶들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건 전혀 거창하지 않고 작은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다면 절대 할 수 없다. 이 하나가 없어 사람이 서로 다툰다는 걸 안다면 더 선명해질 것이다.

 

이 블로그에 방문하는 모든 이들의 삶도 이와 같은 거듭난 생명으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기 늘 바란다. 이건 하나님의 소망이고 사람을 향한 기대와 목적이다. 때로는 지금의 기독교가 반대로 가고 있음을 지적하는 일에 치중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디로 갈지 방향을 제시하는 게 의도한 바다. 이런 목적에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누구라도 겪는 일들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틈틈이 글을 쓸 예정이다.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소소한 일상에 얼마나 많은 십자가의 삶이 숨어 있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거듭난 삶이 어떤 삶인지 알고 싶어하는 이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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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6) 제단에 관한 계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4. 1. 24. 06:04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건 십계명으로 마감된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백성들을 뒤로하고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가서 많은 계명을 받는다. 31장까지 이어서 받는 계명은 사실상 십계명의 주석과 같은 성격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기도가 주기도문 안에 함축되었듯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십계명 안에 함축되어 있다.

 

하나님은 먼저 제단에 관해 말씀하신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금이나 은으로 상을 만들 수 있으니 이를 금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걱정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으로 송아지를 만든다. (32)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장면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신비로움을 의지하고자 했다.

 

십계명을 설명할 때 언급한 대로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행하는 존재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의 불확실성을 만회하기 위해 형상, (물리적 혹은 철학적) 우상을 만든다. 문제는 그렇게 우상이라는 형상이 있어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은 형식에 의지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많은 사람이 가진 마음이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육신의 삶에 어떤 증거가 있어야 하나님 혹은 자기가 의지하는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상태의 사람이다. 무엇보다 출애굽 당시 사람들만 이런 마음을 가졌던 건 아니다.

 

사람은 신비한 능력을 경험하면 좋은 신앙으로 여긴다.

 

오늘날 사람들도 하나님의 임재나 함께 하심을 육신으로 체험하고자 한다. 그게 신비로운 경험이라면 더더욱 좋다. 더 나가서 주변에 그런 체휼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마음으로 확정한다. 불치병이 낫는 경험이나, 절망적인 사업 환경에서 벗어난 경험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이라며 추종한다. '간증 집회'라는 게 그 증거다. 그들의 간증은 모두 육신의 삶이나 형편 혹은 상황이 개선된 일을 전한다. 예수님께 구한 '하늘에서 온 표적'이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원치 않는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은 표적을 구하지만, 나는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게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요나의 표적을 바로 알지 못한다. 말이야 십자가에 달리시는 기적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평안하고 부유하게 되는 걸 구한다. 자기를 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자기를 도와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마음의 불확실성을 만회하려고 유무형의 우상을 만들고, 기적을 바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건 예수님처럼 육신이 말씀이 되고,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표현하는 것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려면 제단을 만들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하나님을 기념하라 하셨다. 기념한다는 건 하나님이 자기 마음에 있다는 의미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제단을 쌓을 때 토단, 곧 흙으로 단을 쌓으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사람 자신으로 단을 쌓으라는 의미다. 사람은 흙으로 창조된 존재다.

 

산 제사를 드리는 게 흙으로 제단을 쌓는 것

 

이와 같은 맥락으로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 (12:1)'라는 말씀이 있고, 우리 몸을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이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 번제와 화목제의 제물은 나를 대신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제물인 건 아니다. 우리 몸이 성전이고, 산 제사를 드리라고 하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육신이 되는 걸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시겠다는 뜻이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인해 잉태되고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어, 우리 육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이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고, 그런 존재가 되었다면 하나님이 거하시니 성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흙으로 빚어진 사람으로 쌓은 토단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돌로 단을 쌓는다면 다듬지 말라고 하셨다. 정으로 쪼아, 그러니까 사람이 가공한 돌을 쌓는다면 부정한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대로 가공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십계명의 2, 3계명과 연결되어 있다. 사람의 생각대로 조각한 신은 여호와라 불러도 우상이고, 사람의 생각이나 땅의 호소에 반응하는 신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정의 내린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다.

 

다듬은 돌은 사람이 맘대로 해석한 하나님의 말씀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돌은 법, 율법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섬기는 제단을 돌로 쌓는다면 그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임의로 수정하고 가감하여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릴 수 없다. 성경을 사람 맘대로 해석하고 수정해서 지킬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고 하셨다. 같은 구약의 말씀인데도 십일조는 원문 그대로 지키라고 하고, 안식일은 일요일로 바꾸어 지키고, 돼지고기 먹지 말라는 말씀은 아예 무시하는 것과 같은 교리 기준은 돌을 정으로 다듬어서 단을 쌓는 것이다.

 

제단에 관한 마지막 말씀은 계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제단에 오르지 말라고 하셨다. 만약 계단으로 하나님의 제단에 오른다면 너의 벌거벗은 모습이 드러날 것이라는 이유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계단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 계단은 위와 아래가 단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철학적 개념으로 계단은 한 칸 한 칸이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지금은 부족하니 더 나은 존재,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과정을 계단을 올라가는 걸로 생각한다. 이 말씀은 돌로 계단을 만든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제단,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생명을 드리는 것이다. 생명은 계단과 달리 단락되지 않고 연속되고 이어져 있다. 한 살과 스무 살이 계단처럼 스무 칸 차이가 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 이게 생명이고, 이 생명이 자신을 드리는 게 제사고 제단에 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겐 계단이 익숙하다. 교회에 가도 성도의 급이 있다. 목사가 있고, 목사도 급이 있고, 강대상에 오르는 계급이 따로 있고, 장로와 권사가 맡을 수 있는 교회 직분이 따로 있다.

 

부끄러움의 원조는 아담

 

벌거벗은 부끄러움의 원조는 단연 아담이다. 자신이 벗었다는 게 부끄러웠는데, 하나님께 부끄러웠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다. 자기의 벌거벗은 모습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 탓이다. 더 나은 모습이 필요했던 그는 무화과 잎 곧 율법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었다. 무화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춘 상태가 계단 한 칸 위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돌로 계단을, 특히 정으로 쪼아서 계단을 만든다는 건, 지금 나의 모습 이상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생각의 표현이다. 여기에 더해 그 돌을 자기 생각대로 다듬는다면 하나님의 법마저 자의적으로 리모델링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생각은 지금도 만연한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창조된 우리 모습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기에 합당한, 그러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서 온전함을 일관되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벗어나는 건 사람 생각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우상을 조각하여 섬기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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