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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30)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자 이어 교회가 세워졌다. 이방인의 첫 교회는 안디옥교회다. 처음에는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아 복음을 전했는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몇몇 사람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왔고, 이를 들은 예루살렘교회에서 바나바를 파송하여 교회를 세웠다.

 

안디옥교회는 이방인이 참여한 최초의 교회다. 지구촌 전체에 전해진 복음과 기독교의 출발점인 교회라 할 수 있다. 바울 사도도 늘 안디옥교회를 자기 뿌리처럼 생각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객관적 사실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우리는 이때부터 생겨난 <그리스도인>의 의미를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적인 용어로 정착했다. 영어로는 Christan인데 이는 a christ를 의미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나라 언어에는 없지만 서양 언어에는 정관사와 부정관사라는 개념이 있다. 예를 들어 The Applea apple이 있는데, a apple은 사람이 먹는 사과 과일 즉 실물을 의미하고, The가 붙으면 실물이 아니라 사과라는 과일의 정체성, DNA를 의미한다. 이런 문화에서 비롯된 Christan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 사람을 의미한다. 즉 그 사람을 보니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한 알의 사과를 보면서 사과(The Apple)를 알 듯이.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로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 사람을 보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사람이 교회 다니더니 부자가 되었다는 인식을 주는 교회 다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는, 아니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 사람을 보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

 

안디옥교회에 모인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그렇게 생겨났다면 당연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고, 그 예수님이 보이신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걸 순종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야 한다. 교회에 다니면 병도 낫고 사업이 잘된다는 인식을 좇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낮아지는 십자가가 아닌 높은 걸 추구하는 사람인데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면 안 되는 것이다. 어 괴상한 건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자기 인생의 목적이란 걸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이 시대 속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변질되고 왜곡되었으며 도용당한 상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기를 세상에서 실패한 예수님께 간구하고 있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 자칭한다. 자기 교회에 오면 성공한 사람이 많다는 말로 사람을 현혹한다. 그런 그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세상에서 실패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과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표현하는 존재다. 삶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낮고 낮은 예수를 표현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에서 높아지는 걸 추구하지 않는다. 예수 믿어 성공하면 사람들이 우러러보면서 예수를 믿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린, 세상에서 실패한 죄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고, 자신도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이기려 하지 않는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런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그런 그리스도인처럼 자신도 살게 된다. 높은 곳을 추구하는 가치관으로 사니 아닐 것 같지만 성령이 그렇게 하신다. 그게 성령의 일이고, 그렇게 낮아지는 삶이 본성이 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며, 이런 삶을 살기 바라며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가 그리스도고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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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예수님의 시험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9. 7. 12:33 Writer : 김홍덕

(2)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

 

첫 번째 시험을 성공 못 한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곳(성전 꼭대기)으로 데려가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여기서 뛰어내려도 천사가 너를 받들 것"이라며 시험한다. 역시 평범한 육신의 능력 이상을 보여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시험이다.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6)

 

그런데 '예수님은 왜 굳이 마귀가 가자는 대로 따라갔을까?' 이유는 그리스도는 항상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언제라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시험을 당한다. 이건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숙명이다. 첫 번째 그리스도인 예수님이 몸소 이런 운명을 보이셨다. 말씀을 선포하려 하니 마귀가 시험하고, 십자가에 달리니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당했다.

 

그리스도는 마귀가 예수님에게 그랬듯,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보통의 사람과 다른 능력을 보이라고 하고, 인간이 가진 한계 이상의 능력을 보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럴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난 사람을 향한 마귀의 끝없는 시험이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죽는 게 정상인 육신을 가진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천사가 시중을 들 것이니 무사하리라는 마귀의 시험은 이렇게 우리 일상에 남아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의 한계를 넘는 능력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두 번째 시험의 본질

 

마귀가 이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란 시험을 하는 건 하나님 아들에 대한 기준의 차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사람은 육신을 연약하고 부족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 상태로는 하나님 아들이라 할 수 없고 돌로 떡을 만들고, 추락해도 다치지 않는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 아들이라고 시험한다. 육신에 관해 하나님과 다른 관점을 가지는 건 마귀의 시험에 넘어간 결과다.

 

하지만 하나님은 행위로 성경을 지킬 수 없고 추락하면 다치거나 죽는 육신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사람은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건 사람이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볼 때 그렇고 하나님은 처음 창조한 사람을 보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고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사람의 육신이면 하나님의 뜻이 임하여 하나님 아들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신다.

 

마귀의 시험에 빠진 사람의 생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예수 믿는다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 "교회 다닌다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게 아니냐?", "신학은 했느냐?", "직분은 뭐냐?", "성경은 몇 번 읽었느냐?", "십일조는 하느냐?"는 말들은 모두 교리라는 가면을 덮어쓴 교묘한 마귀의 시험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이런 요구는 언뜻 신앙의 성장을 인도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아들이라면 남들과 달리 성경을 지키고, 능력을 보이라는 마귀의 시험이다.

 

일반적인 사람의 능력 이상을 할 수 있어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시험

 

예수님은 이 시험을 "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시므로 물리친다. 마귀가 시험하는 상황 속에서 마귀의 구체적인 시험에 답하시지는 않고 거저 시험하지 말라는 말로 회피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들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육신을 가진 사람을 부족하다고 우기는 건 그 자체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뿌리를 둔 각양의 유혹과 그럴듯한 말은 모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신 건 마귀의 의도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 시험은 실체를 알면 이길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사람이 육신의 능력 이상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시험은 단지 사람을 시험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이 분명한 선언으로 이 시험을 이기셨다. 우리 역시 그렇게 이 시험을 이긴다는 의미다.

 

육신을 가진 사람의 한계와 능력 이상을 보이는 게 하나님 아들이란 생각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이 우리가 받는 시험이자 주기도문에 나오는 시험이다. 주기도문은 하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로 결국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기를 구하는 기도다. 이 간구에 이어 시험에 들지 않기를 함께 구하라고 하셨다는 건 당연히 그리스도로서 받는 시험을 이기기를 구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건 곧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걸 알면 이 시험은 이긴다. 예수님께서 "네 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다는 말씀만으로 이 시험을 이기신 게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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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8)

베드로는 고넬료의 청을 수용하여 수일을 고넬료의 집에 머무르다 돌아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건 할례자, 곧 유대인들의 비난이었다. 비난의 이유는 이방인과 함께 먹고 마시고 유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같이 먹는다는 건 의를 같이 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공산당원과 먹었다면 공산주의를 인정한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했다. 비난하는 상황은 당시 유대인들의 가치관을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알았을 때 모두 순종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행 11:17)

 

베드로는 자기 일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고넬료의 집에 가기까지의 신비한 경험을 이야기했고, 무엇보다 고넬료의 집에서의 설교를 이야기한다. 그가 고넬료의 집에서 한 설교는 거의 자기 경험에 바탕을 둔 설교였다.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라는 말이 이를 대표한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행 11:15)

 

베드로는 자기 안에 있는 경험과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 같다는 걸 알았다. 자기가 경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베드로의 말을 들은 유대의 형제들도 베드로가 자기 경험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할 때 수긍했다. 그들도 같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이 성령을 받았는데, 그 모습이 자신들이 성령 받을 때와 같았다고 베드로가 전했더니 이방인과 먹고 마시는 건 안 된다던 사람들이 믿었다. 같은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간증대로 하나님의 성령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는다. 한 하나님께서 같은 성령으로 임하신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정한 하나의 목적을 가진 존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사람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성령을 알기에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임한 성령이 하나님의 성령이란 걸 알았고,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유대인들 역시 베드로의 말에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다는 걸 인정했다.

 

베드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자기 안에 거하시는 복음을 전했다. 학습한 걸 전하거나 성령을 설명한 게 아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에도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걸 믿지 못했던 그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전하는 사람이 된 건 오직 성령강림 때문이었다. 베드로 안에 있는 성령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게 하는 영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게 하는 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서로의 경험을 공감한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고넬료의 집에 있던 이방인 그리고 유대의 형제들 모두가 한 성령을 받았다는 건 그들 모두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성령은 그 일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성령강림, 성령 충만을 경험했다면 당연히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건 대부분 믿고 있겠지만, 정작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간과한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건 세상에서 실패했다는 의미다. 세상 기준에 의해 실패자, 죄인으로 심판받았다는 의미다. 그렇다는 건 세상에서 실패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는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 세상의 성공을 간구한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는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고 기만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런 믿음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세상의 성공을 간구하는 신앙의 대상인 예수를 믿는다는 건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게 아니다.

 

물론 그 거짓 영을 받은 이들도 서로 공감한다. 마치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임하는 성령에 공감하고, 베드로의 말을 들은 유대의 형제들이 공감했던 것처럼 세상에서 성공한 간증을 들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망해가던 사업이 갑자기 흥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이라 공감한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성령을 체휼한 경험과 공감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세상에서 실패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알게 하는 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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