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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것이다. 따라서 살인이 성립하려면 대상이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계명은 성경의 계명이므로 성경이 살아있다고 정의하는 사람이 누구냐가 가장 선행되는 관점이다. 그러니까 육신의 목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 핵심 쟁점이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어린 소자를 실족하게 하면 '라는 말씀이 있는데, 연결된 말씀이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록한 말씀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과 사람의 창조주이자 경영하는 주권자다. 시쳇말로 '자기 맘대로 하는 엿장수'. 따라서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그리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관점은 다른 게 아니다. 바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이 뜻대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 그 목적대로 사느냐 아니냐가 살인의 기준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어야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사는 삶과 기회를 앗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대로 살기 위함인데, 그 삶이나 또 그렇게 살 기회를 피조물인 사람이 앗아가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은 존재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 살 가능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창조하지도 않은, 그리고 주권도 없는 사람을 헤치고 생명을 앗아가는 건 살인 이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다.

 

살인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한 목적대로 살 기회와 삶을 피조물이 빼앗는 것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또 십계명이 말씀하시는 살인은 단지 육신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에 한정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살인과 같다. 또한 심령이나 생각 안에서 자신의 신앙에 모순을 가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답을 찾아 나서지 않는 것도 살인, 곧 자살이다. 지금의 신앙이 성경에 비추어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노력하면 될 것이라는 편의에 기대어 본토 아비 집을 떠나지 않는 건 양심에 화인 맞은 것이고, 양심을 일깨우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사람을 실족하게 하고, 양심과 성령을 훼방하는 것도 살인

 

물론 살인이란 근본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해하고 앗아가는 악한 죄다. 그러나 이건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협의의 살인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살인은 결국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사람, 곧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모든 행위가 살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 자기 안에 있는 양심이 외치는 소리를 외면하는 것 모두 살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이르는 걸 훼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너와 나'의 관계가 되기를 바라고, '너와 나'의 관계 안에서 지키기를 바라는 약속이 계명이고, 십계명이다. 그 안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다는 건 당연히 그 뜻이다. 하나님을 존재의 신이 아니라, 성경을 행위로 지키는 행위의 공로에 답하셔서 육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는 신으로 전하고 믿어야 한다고 외치는 소리는 모두 성령을 훼방하고, 사람을 실족시키는 일이다. 그게 살인이다. 최소한 끊임없는 살인 미수다. 많은 사람이 십계명을 그렇게 어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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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부모를 대하는 태도에 관해 여러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당연히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기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부모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고,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냐?'며 반문도 하셨고,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오겠다는 제자에겐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 지내게 하라'며 매몰차게 대답하시기도 했다. 또한 마지막 날이 되면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 주고,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상충하는 건 부모의 정의가 무엇이냐의 문제에 기인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부모는 누구인가?

 

우리는 부모라고 하면 당연히 육신의 혈연관계인 부모를 가장 먼저 떠 올린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것만이 부모의 정의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자아를 인식하는 육신을 낳고 기른 부모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인생으로서 자아의 가치를 부여하고 멘토가 되어 준 사람 역시 부모라는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데 사람들은 동의한다.

 

이처럼 성경은 육신의 부모를 한정하지 않는다. 사람은 내용과 형식, 의와 육신이 하나가 된 존재기 때문이다. ''란 존재에 있어 내용과 형식을 주신 이가 부모라는 게 성경의 관점이다. 의를 부여한 존재를 아버지, 형식을 부여한 존재를 어머니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가 인간의 본질이자 존재 목적이란 점에서, 의에 속하는 말씀을 주시는 아버지와 그 의를 표현할 형식인 육신이 하나가 되어 표현되는 그리스도를 성경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할 육신도 하나님이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 어머니 하나님 같은 소리는 성경의 기본 골격,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개념조차 모르는 어두운 자들의 멍청한 소리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을 살아야 하는 육신을 가진 사람은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 여자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가 공경해야 할 부모는 하나님이다.

 

결국 공경해야 할 부모는 하나님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우리 육신으로 표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나에게 전하는가의 문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땅에 만들어 놓은 사람에게 환상이나 전기 충격 같은 자극으로 전해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면 어떤 모습인가를 육신을 가진 사람이 직접 봐야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렇게 오신 예수님을 '육신이 말씀이 되었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도무지 없다.

 

복음은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해 전해진다.

 

그러니까 사람은 결국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는다. 하나님의 계획, 인생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걸 전해주는 존재는 결국 나와 같은 육신을 가진 존재다. 그리고 이런 전도를 하기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육신의 부모다. 그렇다고 육신의 부모만 가능한 일도 아니다. 나에게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말씀을 전하는 이가 육신의 부모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부모의 기준은 내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말씀을 전해준 사람이다.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

 

내 육신의 삶이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준 이가 성경이 공경하라고 말씀하시는 부모다.

 

십계명은 전체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다. 그 약속을 시행하는 대상이 부모, 이웃과 같은 사회 속 사람이기는 해도 결국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다. 복음을 주시고, 전해주신 이가 부모다. 결국은 하나님이 본질이다. 복음을 떠나서 사회적인 통념상으로도 부모를 공경하는 이유는 우리 삶이 부모에게서 비롯되고, 삶을 영위한 지혜와 철학과 심지어 재물까지 부모가 알려주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살아가도록 해 주는 이가 부모이기에 공경한다. 그렇다면 육신의 삶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전하여 주신 이와 그것을 정한 하나님을 공경하는 건 더 말할 것 없이 당연하다. 이것이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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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십계명의 1~4번째 계명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계명, 5~10번째 계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명이라고 한다. 기독교 성격을 가진 많은 종교는 처음 세 번째 계명까지를 가지고 이견을 보이지는 않는다. 잘은 모르지만, 심지어 이슬람마저도 그런 것으로 안다. 하지만 네 번째 계명은 좀 다르다. 이에 따라 다른 종파가 생겼다. 안식과 안식일에 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번째 계명을 주시면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창조 과정처럼 엿새 동안은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제7일에는 집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은 하나님이 안식하신 것처럼 쉬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7일에 주목하지만 사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일은 '자기 일''안식'이다.

 

만약 달력의 날짜로 안식일이 정해진다고 치자. 7일이라면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언제인지 하나님께서는 밝히시지 않았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 우주의 창조까지 포함해서 언제가 7일을 기산하는 기준일인지 아무도 모른다. 시차는 또 어떻게 할 건가? '안식일은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의 문제가 아니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기산일을 비밀로 하실 이유가 없음을 생각하면 이건 달력의 날로 칠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핵심은 '자기 일''안식'의 정의다.

 

네 번째 계명의 핵심은 <자기 일>과 <안식의 정의>

 

 

'자기 일'이란 무엇인가?

다시 한번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걸 상기해야 한다. 그게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람을 만드시고 안식하셨다. 하나님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고, 이 목적을 위한 존재가 사람이다. 결국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를 창조하시는 게 하나님의 일이고,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니 안식하셨다. 즉 목적이 달성되니 안식하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안식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이루어질 때 안식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된 사람은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 2:2)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형상은 곧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육신을 통해 표현되는 구조다.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그리스도고,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는 게 하나님의 창조다. 그러니까 사람의 일은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안식은 이 목적, 이 일이 달성된 상태, 그 자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안식은 별나라 이야기다.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그 노력을 일주일에 한번 쉬어가는 게 안식이 아니다. 노력한다는 건 일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게 자기 일이고, 안식은 이 일을 마친 사람의 전유물

 

그러므로 안식은 자기 일을 열심히 한 사람, 곧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전유물이다. 이 목적이 달성되지 않은 사람의 사전에 안식은 없다. 따라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집단에서 일요일과 토요일 언제를 안식일로 삼을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논쟁하는 건 그 자체가 아직 일하는 것이고 안식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과 생각 밖에서 아말렉의 본성에 매몰된 어리석은 가치관이다.

 

'안식'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안식은 무엇인가? 땀 흘리지 않고 마냥 쉬는 게 안식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안식은 목적이 달성된 상태다. 예를 들어 누리호의 성공적 발사가 목적인 사람에게 누리호의 성공적 발사는 그 자체로 안식이다. 누리호 발사 이전에도 침대에서 쉬기도 했겠지만 그건 안식이 아니다. 그건 일을 위한 안식, 곧 일하고 있는 것이지 안식하는 게 아니다.

 

안식은 존재의 목적이 달성된 상태

 

하나님의 안식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이후에 사람에게 아무런 역사도 행하시지 않은 게 아니지 않는가? 창조가 끝나고 안식하셨다는 하나님이 바다를 가르시기도 하고, 하늘에서 불을 내리기도 했고, 돌판에 십계명을 새기기도 했으며, 죽은 자를 살리셨다. 게다가 아마겟돈 같은 심판은 아직 행하지도 않으셨다. 이런 하나님을 믿으면서 단지 일요일 혹은 토요일에 짜장면 사 먹지 않는다고 안식일을 지키는 게 되지 않는다. 이런 생각도 할 수 없다면 신앙이 아니라 상식과 생각이 없는 거다.

 

또 반대로 자동차를 정지시키기 위해 엄청난 마찰을 감당하면서 엄청난 열을 견디고 자기 몸이 마모되는 브레이크는 그 엄청난 노동을 감당하는 게 안식이다. 그게 자기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오셨으므로 십자가가 곧 안식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 전 겟세마네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께서 주신 그 일을 다 이루었다고 하셨고, 십자가에서도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간다는 건 곧 안식의 집으로 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일이 안식을 넘어 영화로운 일이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그러므로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을 지키는 건 토요일이나 일요일 중 하루가 안식이라 주장하며 짜장면도 사 먹지 않는 것이라는 식의 접근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당연히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이 나올 때 안식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관계가 아닌데 사람이 안식할 수는 없다. 너와 나의 관계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을 온전히 그리고 항상 지키려면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된다. 그리스도는 생명이므로 나면 항상 안식하는 존재가 된다. 이것이 우리의 일이고 안식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게 되면 우리의 일을 마치고, 늘 안식하는 삶을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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