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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은 하나님께 삶의 평안을 얻으려고 지키는 계명이 아니다. '십계명은 누가 지키는 계명인가?'가 중요하다.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십계명을 전하신다. 사람들은 이 부분을 간과하지만, 십계명에 앞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와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인지를 설명하신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 그건 십계명이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오고 가는 모든 세대에서 어떤 사람을 위한 계명인지 설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애굽 땅, 곧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출 20:2)

 

애굽이 가진, 상징하는 의미는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해 왔다. 애굽은 오늘날 이집트라는 한 나라, 혹은 지명이 아니라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의 상징이다. 모든 사람이 가진 가치관, 곧 세상이 가진 가치를 인생의 가치와 의미로 알고 사는 삶이 애굽의 삶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런 종살이 같은 삶에 오히려 안식한다.

 

하나님의 견해가 그렇다. <종 되었던 집>에서의 삶이라고 말씀하신다. 집은 안식의 상징이다. 종 되었던 집이란, 종으로 사는 삶을 안식으로 여겼다는 말이다.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경쟁의 고단함에도 그것이 성취되어야 안식할 수 있다는 사람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모두가 인생은 고난이라고 한탄하면서도, 그 인생이 속한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를 어떻게든 좇아가고, 뒤처지지 않아야 평안을 느낀다. 이 알량한 평안을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하나님께서 <종된 집에서의 삶>이라고 정의한다.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삶에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의 삶은 <종된 집에서의 삶> 즉 그 고단함에서 안식하는 삶이다

 

여호와는 그런 삶에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다.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고된 삶에서 인도하신 여호와를 따라나선 사람, 그런 사람이어야 여호와가 하나님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십계명은 그런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약속이다. 십계명 이전에 하나님과 관계가, 그 관계를 위한 하나님의 정체성 인식이 중요한 이유다. 십계명은 여호와가 하나님인 사람들의 계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유지한 채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사람과는 십계명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말렉의 본성으로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을 조각하고 정의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십계명을 자기 계명으로 도용한다. 행동으로 지키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세상의 성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를 부를 때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정체성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 곧 존재의 신이라는 걸 분명하게 밝히셨다. 사람이 행동으로 십계명을 준수한다고 반응하시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 십계명은 존재의 거듭남 없이 행동으로 지킬 수 있는 계명이 아니다. 존재의 신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십계명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나를 어여삐 여겨 세상의 삶을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지킬 수 있는 계명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지, 그런 행위를 의로 여겨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한 자', 형제를 '라가()라 하는 자는 이미 살인한 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적용하면 행동으로 십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십계명은 행동으로 지켜낼 수 있는 계명이 아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이 행동으로 지킬 수 없고, 고단한 세상 가치에 안주하고 그 가치 세계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사람에 무효한 계명이라면 누가 지켜야 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을 <>라고 칭하셨다는 걸 주목해야 한다. ''는 나와 관계가 형성된 사람이란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계가 형성된 사람의 계명이지, 하나님을 하나님의 정체성과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과는 무관한 계명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여호와는 존재의 신이다. 그런 하나님과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된다는 건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그리고 나는 그로 인한 존재라는 인식과 고백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건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삶인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 세상에서 잘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사람을 하나님이 ''로 부르시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삶이 되었기에 하나님과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된 사람을 한마디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곧 창조 목적이 육신이 된 사람이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하나님의 마음을 안정시키거나 흡족케 하기 위해 지키는 계명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된 사람의 삶의 모습이라 함이 더 바른 설명이다. 늘 설명하듯 그저 살아갈 뿐인데 돌아보면 그 삶이 모두 성경을 지키고 있는 사람의 삶은 언제나 십계명을 준수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는 게 구원이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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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2) 하나님을 만나려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3. 11. 24. 05:17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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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에 시내 광야에 이르렀고, 그들 앞에 하나님께서 임하신다. 하나님은 시내산에 불꽃으로 임하셨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에 오르지 말고, 옷을 빨아 입고, 여인을 가까지 하지 말라고 하셨을 뿐 아니라, 이를 어기는 사람은 죽이되 손대지 말고 돌로 치거나 화살로 죽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흔히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서 너무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으니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다고 알고 있기도 하다. 이는 예전 영화 <십계>의 영향도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사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다. (20:1-24) 십계명은 다음에 하나씩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는 조건으로 말씀하신 명령들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십계명과 율법을 말씀하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임하신 하나님께서는 만나는 조건처럼 명하신 일들이 있다.

  • 처음 이틀간 성결하게 하고, 옷을 빨며 기다리고
  • 셋째 날을 기다리며
  • 강림하는 시내산에 경계를 정하고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라.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한 때를 경건하게 기다리고,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

 

이것이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이전까지는 애굽에서의 삶에서 구해 주시길 간구한 일과 먹을 것, 마실 것 없다는 불평처럼 사람이 하나님께 요구하는 게 전부였는데, 비로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간략한 말씀을 잘 살피면 앞으로 정하는 모든 율법,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모든 말씀의 뼈대임을 알 수 있다.

 

1)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존재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건 다름아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다.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건 교리에 찌든 신앙인들도 알고 있다. 문제는 사람의 능동성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아주 능동적이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라', '경계를 지키라'라와 같이 수동적이길 바라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땅의 호소가 하늘을 움직이는 게 아니다. 땅은 하늘이 바뀌는 대로 순종한다. 하늘이 봄이 되면 땅에 꽃이 피고, 하늘에 비가 오면 사람이 우산을 쓴다.

 

하나님 말씀의 시작은 사람이 수동적이고 순종적이길 바라시는 것

 

하나님의 이런 생각을 확정하는 게 있다면 사무엘 선지자가 말씀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는 말씀이다. 제사는 규례를 하나님이 만드시긴 했지만, 순종에 비하면 분명 능동적이다. 사울 왕도 제사의 기준대로, 시간을 지켜,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드렸지만, 그것보다 순종이 더 중요하다는 게 하나님의 생각이다.

 

수동적이고 순종하는 것엔 시간도 포함된다. 이루어져야 할 시점을 사람이 정하는 것도 능동적인 태도고, 하늘을 움직이려는 시도다. 성경 속 숫자 "3"은 하나님의 수라는 걸 대입해서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흘을 기다리고 하신 건, 내가 정한 때까지 기다리는 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이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수동적인 존재라는 걸 분명히 인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 성결하고, 기다리라

그리고, 솔직히 사람으로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때까지 사람은 경건하라는 게 하나님의 계명이다. 성결하고 옷을 빨라고 하셨다. 여기서 성결(聖潔)이란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것일 수 있다. 우선 성스럽다는 게 사람의 생각과 성경의 의미가 다르다. 거룩하다는 건 구분된다는 의미인데, 이는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며, 눈에 보이는 육신 그리고 세상을 본질로 아는 사람과 구분된다는 의미다. 당연히 높아지는 걸 은혜로 아는 사람과 구분되는 것을 포함한다.

 

성결하라는 건 세상의 가치를 가지지 않은 구분된 사람이 되라는 뜻

 

성결이란 바로 이런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런 존재가 하나님 앞에 깨끗한 존재다. 따라서 하나님이 임하실 때까지 성결하라는 말씀은 세상 가치가 아닌 낮아지는 십자가를 진정한 가치로 아는 사람이 되는 깨끗함을 가지라는 뜻이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이 임하신다. 특히나 하나님의 시간은 크로노스(객관적 시간)가 아니라 카이로스(주관적, 상태적인 시간)라는 점에서 성결한 상태가 된 때가 하나님이 임하시는 때기에 더욱 그렇다.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로 나타났기에 하나님은 당연히 십자가의 의가 본성인 사람에게 임하신다. 자신과 의가 다른 사람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만든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렇다. 자기 자리 아닌 곳에 두면 쓰레기가 되기도 한다. 세상과 구분된 사람이어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임하신다.

 

옷을 빤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 사람의 일반적 관념으로도 경건하고, 성결한 자리라면 깨끗한 옷을 입는 게 상식이긴 하다. 주일 날 예배드리러 갈 때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으려는 마음이 그렇다. 그러나 그보다 좀 더 깊이 보면, 옷은 사람의 신분을 상징한다. 어떤 지위나 역할을 두고 옷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그런 지위는 세상의 가치에 의해 부여된다. 군인의 능력에 따라 계급이 정해지고 계급에 따라 옷이 달라진다.

 

옷을 빨라는 건 세상 가치로 부여된 형식을 모두 버리라는 말씀

 

그런 의미의 옷을 빨라는 건, 하나님께서 창조한 상태 이후에 세상 가치에 의해 부여된 자기 신분, 정체성, 자아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뜻이다. 찬양 가사 중 '내 모습 이대로'를 의미한다.

 

3) 하나님이 정한 경계를 지키라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정한 경계를 넘지 말라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을 액면 그대로 보면 땅에 선을 긋고 넘지 말라는 애들 놀이의 한 장면 같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본질은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존재의 경계를 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순종하라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특히 사람은 하나님이 정한 자리가 있는데 이를 벗어나면 그게 죄다. 죄라는 말의 원어가 가진 의미가 '벗어나다'라는 걸 생각하면, 경계를 넘지 말라는 말씀의 엄중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벗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죄

 

멀지 않은 근래에 우리나라의 한 목사가 '하나님 까불지 마!'라고 광장에서 소리친 적이 있었다. 그건 누가 봐도 정신 나가 모습이긴 한데 아쉽게도 그렇게 선명하진 않아도 기독교인 대부분이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고 있다. 자기가 기도한 것은 이루어줘야 하는 하나님을 생각한다. 기도나 자기가 소망하는 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앙을 버리는 태도가 이를 증명한다. 하나님은 내가 정하고 바라고 그래서 간구한 걸 성취해 줘야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은 소용없다고 판결한다.

 

가룟유다가 그랬다.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란 예수님의 말씀에 '이 사람은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결정했다. 그리스도, 메시아가 아닌데, 사람이 원하는 대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은 그저 종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종의 값에 예수님을 팔아넘겼다. 이 가룟유다를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욕하지만, 자기가 바라는 것이라면 반드시 해 줘야 하는 존재로 하나님을 믿는 마음은 모두 가롯유다의 마음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한 경계를 넘는 것이다.

 

징벌

하나님께서는 명령을 어긴 사람을 반드시 죽이라고 했다. 돌로 쳐 죽이거나 화살로 죽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명을 어긴 사람에게 손도 대지 말라는 이유다. 손을 댄다는 것을 금한 이유는 번제를 드릴 때 제물에 안수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이른바 '접촉 신앙'이란 개념인데, 손을 댄다는 건 같은 정체성을 가진다는 상징성을 가진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뜻은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는 뜻이다. 능동적이고 순종적이지 않은 사람, 세상과 구분되지 않는 사람, 자기 자리를 벗어난 사람이 되지 말라는 의도의 말씀이다. 그런 사람에겐 하나님이 임하시지 않으니 그게 바로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된 사람에게 하나님이 임하시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목적을 상실한 존재고, 하나님의 뜻과 창조 목적으로 보면 죽은 존재다.

 

시내산 앞에서 하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가장 기본적 자세에 관한 말씀이다. 더 본질적으로는 이 기본적인 자세를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이런 태도가 본성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임한 사람은 이스라엘게 명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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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하나님이 모세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을 듣고 모세의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세에게로 왔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아말렉을 이긴 일이다. 그리고 장인은 딸을 낳은 사람이다. 또한 성경에서 여자는 형식을 의미한다. 잊지 말아야 하는 건 이게 육신으로 남자 여자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그가 우리의 내용, 목적, 의와 의미이기 때문이다.

 

장인은 딸을 낳은 자
– 성경에서 여자는 형식
– 장인은 형식을 정하고 지키는 신앙을 비유

 

성경에서 여자는 형식을 의미하고 육신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정체성도 남자는 내용, 여자는 형식이라는 성경의 설명 방식에 따른 표현이다. 또 예수님은 신랑, 우리는 그의 신부라는 표현도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라는 사람의 본질이자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분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육신이 옥합처럼 깨어지니 그 속에 있던 말씀과 생명이 우리가 알게 되고, 우리는 그 말씀과 생명이 내 삶의 목적과 의미인 걸 깨닫게 된다. 즉 예수님은 나의 내용이 되고, 성경이 여자로 표현하는 내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은 그 내용을 표현하는 존재, 곧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된다.

 

이처럼 성경에서 '남과 여'는 단순히 육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란 형식을 가진 우리 삶의 내용과 본질임을 설명하는 이야기다. 그런 관점에서 장인, 장모, 아내, , 여자를 조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은 상태의 삶은 육신이란 형식만 있고 내용은 없는, 그러니까 존재 목적이 없는 죽은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앞에 신부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장가든다는 건, 그의 말씀이 우리 육신에 들어와 성령으로 잉태되어 그리스도라는 새로 거듭난 생명을 낳는다는 의미다. 그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이다.

 

이제 다시 모세와 장인 이드로의 이야기의 이야기를 이어가자. 모세의 장인은 모세에게 와서 형식을 제안한다. 모세를 찾아와서 모세가 백성을 통치하는 아주 유용한 제도, 그러니까 형식을 제공한다. 바로 십부장, 백부장과 같은 제도를 제안한 것이다. 형식을 낳은 장인이라는 그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보니 하나님의 종인 모세가 하루 종일 백성들의 민원을 듣고 해결하는데 시간을 쓰고 있었다. 이에 이드로는 모세에게 그런 방법이 좋지 않음을 설명하고, 백성 중에 재덕이 겸비한 현명한 사람들을 단계적으로 두어 사소한 일들은 그들을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모세는 장인의 제안대로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을 두어 작은 재판은 그들에게 위임했다. 백부장은 백 명의 수장이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이 일을 마친 후에 돌아간다. 그는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와 모세의 두 아들을 모세에게 데려와서 이스라엘 사회에 제도를 제안하고 떠났다. 모세의 형식인 아내를 데려온 것처럼 모세에게 새로운 형식을 제안한 셈이다.

 

성경에는 이와 동일한 사건이 있는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일곱 집사를 세운 일이다. 사도들이 복음 전하는 일과 성도들의 구제하는 일까지 함께 하니 복음 전하는 일의 효율이 낮아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 교회 안에 여러 행정적인 일은 집사에게 맡기고 사도들은 복음 전하는 데 전념하게 한 일이다. (6)

 

십부장, 백부장, 집사와 같은 직분은 신앙 세계의 형식이다. 세례와 기도, 예배 역시 그렇다. 성경을 읽는 일도 그렇다. 육신으로 표현할 수 있는 행위나, 제도 그리고 사람에게 부여되는 직분은 모두 형식의 영역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이런 형식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형식은 내용의 표현이므로 내용이 본질이다.

 

형식은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내용이다.

 

그렇다고 형식을 외면할 수는 없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은 형식으로, 행동으로 나타날 게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형식이다. 그런 사람이 행함으로 표현할 내용이 없다는 건 죽은 것과 다름 없다. 이게 바로 죄와 사망으로 죽은 사람의 모습이다. 만약 하나님의 내용이 함께하는 모세라는 사람 없이 십부장, 백부장을 세웠다면 그건 그냥 죽은 자들의 제도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은 사람이 집사, 장로라는 형식을 입는 것도 아무런 의미 없다. 그런 사람을 집사, 장로 심지어 목사로 세우는 교회 역시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모세의 장인이 제안한 형식과 제도가 의미가 있는 이유는, 모세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하는 사람이 나타낼 형식이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은 많은 종교적 형식 속에 있다. 주일 성수, 기도, 찬양, 봉사 등등 한 번에 다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의 신앙적 형식이 있다. 그 행위 자체가 잘못되거나 나쁜 건 아니다. 그 모든 건 분명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본질적 의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삶이 그렇다는 말씀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가 없는데 지키고, 세우고, 행하는 형식이나 종교적 규레는 아무 소용 없다. 그런 행위에 관해 하나님께서는 누가 성전 문을 좀 닫아 주면 좋겠다고 한탄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예배와 기도, 집사와 장로 이전에 먼저 그런 형식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게 우선이다. 낮아지고, 세상 가치로 볼 때 죄인이고 실패자요 사형수가 된 예수님처럼, 그럴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나는 게 먼저다. 그렇게 거듭나면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더니, 장인이 와서 형식을 세운 것처럼 형식은 자동으로 형성된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아무런 의문 없이 지키고만 있는 많은 신앙적 형식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볼 때다. 율법 신앙의 모습을 조명하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보면서, 또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니 형식을 낳는 사람이 와서 그 형식을 돕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먼저 그 나라와 그 의가 먼저임을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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