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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4) 갈라진 홍해는 세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3. 10. 23. 16:28 Writer : 김홍덕

애굽의 군사가 좇아 온다는 걸 알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은 이내 모세를 향한 원망이 되었다. 애굽에 죽을 자리가 없어서 광야에서 죽게 만드냐며 원망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원망할 때 모세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가 행하시는 일을 보라고 했다.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기 위한 여정을 떠난 사람을 위협하는 세상의 가치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다. 모두 물에 수장되었다. 우리의 구원도 세상 가치를 추구하던 애굽의 모습을 더는 볼 수 없는 삶이 되는 것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3)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셨다. 모세가 바다를 행해 팔을 들자, 바다가 갈라졌다. 단지 바다가 갈라진 정도가 아니라 마른 땅이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넜다. 이건 세례다.

 

홍해가 갈라진 건 세상 모든 사람이 아는 이야기 중의 하나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일이 정말 자신과 관련이 있는 사람의 예수님의 말씀에 나오는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 정도뿐이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목적이 자기 일이 된 사람이 많지 않다. 존재의 신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사람이 되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의미다. 우리는 지금 그런 사람이 되려 한다. 그것이 구원이기 때문이다.

 

홍해의 기적이 자기 사건이 된 사람은 많지 않다.

 

홍해를 건넌 사람이 되려면 홍해가 어떤 의미인지 알아야 한다. 지정학적으로 중동에 있는 바다를 건너자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게 하나님의 목적이라면 온 세상을 구원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힘들다. 이건 전적으로 영적 의미가 본질인 기적이다. 내가 홍해를 건넌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가르신 홍해, 내가 건너야할 홍해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듯, 우리 각 개인도 구원의 여정이 시작된다.

 

홍해의 의미를 알아야 구원이 시작된다.

 

홍해는 바다다. 그리고 사람은 물속에서 살 수 없고 바다는 세상을 의미한다. 이건 성경뿐 아니라 사람의 일반적인 관념이다. 그리고 성경은 세상 사람을 죄와 사망에 빠져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람은 세상이란 바다에 살고 있고, 이런 사람의 삶은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없는 삶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모두 바다에 잠겨 있고, 빠져 있다. 그건 죽은 삶이다.

 

이를 증명하듯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을 대변하는 애굽, 그중에서도 가장 경쟁력 있는 군인들이 바다에 빠져 수몰되었다. 이런 참혹한 일은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은 바다에 빠진 삶이란 걸 설명한다. 이런 애굽 사람을 하나님께선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 하셨다. 이 말씀에는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 이들이 다시 이런 사람이 된다면 사망에 이를 것이란 의미도 녹아 있다. 결국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의 삶은 바다에 빠진 것과 같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갈라지고 바닥이 마른 바다를 건넌 놀라운 기적의 본질은 세례다. 바다 밑을 걸어서 건넜다는 건 바닷속으로 건넌 것이다. 물에 잠겼다가 다시 나온 것과 같다.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인 애굽의 군사들은 바다에 빠졌지만,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여정을 시작한 이들은 바다를 건넌다. 물에 잠겼다 나오는 세례가 구원의 시작임을 알린다.

 

세례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가 갈라졌듯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성취된다. 사람의 힘은 말 그대로 '1'도 보탬이 없다. 구원도, 세례도 그렇다. 하나님의 능력을 가만히 기다리고, 보고, 확인하는 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전부다. 앞에는 바다가,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는 상황에서 가만히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다만 이 구원을 믿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뿐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그렇게 잉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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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3) 후회하고 추격하는 바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3. 10. 18. 04:19 Writer : 김홍덕

막상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자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급하고 단호하게 떠나라고 했는지 이유를 설명이라도 하듯 애굽의 바로 왕과 신하들은 이를 후회한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또 바로 왕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혹이 백성의 도망한 것을 애굽 왕에게 고하매 바로와 그 신하들이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가로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 하고(출 14:5)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섬기는 섬김을 놓아주었다고 표현한다. 이 건 구원의 또 다른 표현이다. 구원받은 사람이 주어가 되면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구원받아야 할 자리를 주관하는 세력이 주어가 되면 구원받은 사람은 놓친 고기, 잃어버린 가축이 된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세력을 마귀나 사탄이라고 쉽게 표현하지만 사실 이건 사람 마음의 한 단면이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는 표현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악하게 부축였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 뜻을 분명하게 하면 할수록 구원을 등지려는 마음, 세상의 가치를 사랑하는 마음은 더 강퍅한 마음이 된다. 하나님의 의에 가까워지면 세상의 의에서 멀어지는 건 당연하다. 점점 강퍅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이건 하나님께서 그 의를 더 분명히 하신다는 표현이다.

 

바로와 애굽은 이스라엘을 고이 보내줄 수 없었다. 사람이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존재가 되는 걸 세상 가치가 그저 바라보고 손뼉 치며 배웅하진 않는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그 세상 가치는 하나의 세력 같지만, 실상은 우리 마음이다. 세상 가치 속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니 육신이 본질인 줄로 아는 생각이 언제나 세상에 의지하는 게 안정된 삶이라고 믿게 만들고, 그 믿음은 언제나 우리 삶을 세상 이 의와 선으로 여기는 가치에 의지하고 벗어나면 안 되는 것으로 믿는다. 이 믿음은 끈질기게 우리가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존재로 사는 걸 훼방한다. 악과 마귀는 언제나 내 마음에 있다.

 

바로가 이스라엘을 추격하는 건에서 우리는 또 한 번 구원을 향한 발걸음이 얼마나 단호하고 신속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뒤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의 일도 그렇다. 육신을 본질로 보고, 육신이 속한 세상 가치에 의지하는 마음은 이처럼 끊임없이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이런 세상 가치가 삶 전제를 지배하진 않는다. 이어 나오는 홍해를 건너므로 애굽의 추격은 끝난다. 즉 물에 잠겼다 나오는 것, 세상 가치를 추구하면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으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세례받고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건 죄악의 바다에서 사는 것임을 깨닫고 물 밖으로 나오는 세례를 통해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유혹은 끝난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세상 가치와 씨름하고, 유혹을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아야 한다. 아니 그럴 수 없다. 생명이 바뀌면 이전 생명의 DNA가 없는데 어떻게 이전 생명이 추구하던 가치를 추억할 수 있겠는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 구원받았다면서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는 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시인일 뿐 구원받은 사람의 경건한 기도는 아니다. 이것을 반추하면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이걸 속이거나 묵인하면 그게 양심에 화인 맞은 것이다.

 

구원은 세상 가치에 의지하던 본성으로부터의 탈출이다. 그렇게 세상 가치를 추구하며 살던 삶에서 돌아서니 회개고, 이전과 같은 삶을 살려고 해도 살 수 없는 존재가 되니 거듭남이다. 당신이 그렇다면, 더 이상 세상 유혹을 염려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세상 유혹을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면 구원받은 상태가 아니다. 아직 세상 가치에서 살 수 없다는 온전한 세례가 없는 것이다. 다음 시간부터 그 세례를 이야기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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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2) 불기둥, 구름 기둥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3. 10. 15. 20:47 Writer : 김홍덕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으므로 구원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성경에 기록된 여정이 40여년이라 구원의 여정 또한 그렇게 길 것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성경의 시간은 달력을 넘기듯 가는 시간이 아니다. 12시가 점심시간이 아니라 배가 고픈 때가 점심시간인 개념이다. 달력의 시간은 크로노스, 상태의 시간은 카이로스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성경의 시간은 카이로스의 개념이다. 구원의 여정이 달력으로 40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상태까지의 단계적 흐름이다. 그래서 생명이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의 여정은 생명이 성장하는 것 같은 흐름이다. 하나님은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대하는 것이 달라지듯 이스라엘을 이끄신다. 출발하자 강한 이방 민족 블레셋을 만나지 않도록 홍해로 이끄셨다. 전쟁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돌아갈까 염려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구원의 여정을 갓 시작한 이들에게 적절한 이끄심이다.

 

물론 블레셋을 피해 더 심각한 홍해로 이끄셨다는 걸 두고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게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홍해는 일단 건넌다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이유일 것이다. 물론 홍해를 건너기 위해서는 기적이 필요했지만, 홍해가 갈라진 건 단지 구원은 기적이 필요한 은혜라는 걸 보이시기 위함이 아니라 세례, 즉 애굽이나 세상의 가치를 좇아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통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게 한다. 블레셋을 만나면 다시 돌아갈까 염려하신 것과 대비된다.

 

그렇게 구원의 여정이 시작되자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나 이스라엘을 인도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구원이자 하나님께서 뜻하신 인생의 자리(정체성)는 사람이 가보지 않은 자리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단지 길 안내를 위해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인 건 아니다. 애굽, 곧 세상의 가치를 떠난 구원의 여정은 율법적인 과정을 거친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율법적인 신앙 여정의 상징이다.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넌 이후 여정은 광야와 사막의 여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 요한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쳤고, 그래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고, 무엇보다 여자가 낳은 자, 곧 율법의 세계에서 가장 큰 자라고 했다. 예수님 이전에 세례 요한이 있었듯,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전엔 광야의 여정이 있다.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자, 존재의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적인 여정은 피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우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사막과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존 환경을 제공한다. 낮에는 그늘 하나 없고, 밤엔 매우 추운 광야를 낮에 구름 기둥 아래 그늘을 따라 진행하고, 추운 밤에는 따뜻한 기운을 제공한다. 그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의미다. 지키면 살고, 어기면 벌을 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율법을 지키는 삶의 모습 그 자체다.

 

이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차례다. 우리가 교회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하지 않으면 큰일 나(벌 받아)'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너무나 일상이 되어 있어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게 오히려 정상처럼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행동이 기도나 십일조라고 할 때 그게 자기 생명의 본성이라서 하는 게 아니라 벌을 받지 않겠다는(혹은 상을 받겠다는) 목적과 이유로 기도하거나 헌금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벗어나면 안 되는 상황과 같다. 그러니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니 해야 한다'라고 설교하고, 그 설교를 듣고 그렇게 노력하는 신앙은 모두 율법적인 신앙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온전한 구원에 이른 게 아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여정에 나타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며,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능력 있는 신이라는 자부심은 아직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땅과 같은 흙으로 창조된 사람이 되기까지 여정 중에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초입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서 머물며 아직 어리고 온전하지 않은 신앙을 심화시키려고만 한다. 어떻게 하면 더 성경을 잘 지킬 수 있는지 연구한다. 신학이란 게 그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에 이르지 못한 구원의 초입에 머물며 반복적인 노력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신념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에 대한 연구다. 거듭나서 생명이 되면 거저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는 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고 삶인데, 그 하나를 모르니 노력하지 않으면 쓰러진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서 신념을 가지고 노력한다. 그게 율법적인 신앙이다.

 

당연히 율법적인 신앙으로는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율법적인 신앙을 건너뛸 수는 없다. 누구나 그런 여정을 지난다. 세상 가치를 사모하는 삶을 대변하는 애굽의 국고성을 쌓는 종으로는 살 수 없어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듯, 율법적인 삶의 모습은 광야의 삶에 머물 수 없어 요단강을 건너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야 구원이 성취된다.

 

다만 이 여정은 달력의 세월로 얼마를 충족해야 하는 개념이 아니다. 세상 가치를 버림과 동시에 율법적인 신앙도 함께 버릴 수도 있다. 반대로 모태 신앙이라고 해서 세상 가치를 좇는 삶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이 귀하다고 하는 걸 얻으려는 건 모양은 기독교인이나 실상은 애굽의 국고성을 쌓는 종이다. 말 그대로 '때가 차면'이란 조건이 성취되면 된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존재인 사람이 애굽이나 광야에서 머물 수는 없다. 지금 내가 율법적인 신앙에 속했음을 알게 된다고 실망할 게 아니다. 이건 여정이고, 생명의 자람과 같다. 지금 내가 세상이나 율법 세계에 속했다는 걸 시인할 수 있다면 오히려 축복이다. 실상의 삶은 세상에, 율법 세계에 있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구원받았다고 믿는 게 문제다.

 

곤경에 빠지는 건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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