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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에는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게 있다. 금은보화, 곧 돈 이야기다. 애굽을 떠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에게서 금은보화를 얻어서 떠났다. 430년 노예 생활의 급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출애굽이란 게 세상 재물과 가치를 상징하는 애굽을 떠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출애굽의 목적에 반하는 사건이 아닌가 생각할 여지가 있다. 실제 오늘날 기독 신앙은 재물을 탐하는 것은 물론 바라는 것도 터부시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 구원받은 신앙인에게 돈은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여기서는 출애굽기 전체적인 흐름에서 좀 도드라지는 면이 있어도 '' 이야기를 좀 하려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존재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게 이 글에서 말하는 구원의 기본 뼈대다.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건 여호와 하나님, 곧 존재의 신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게 아님을 설명해왔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될 것인지를 믿는 게 존재의 신을 믿는 믿음이고 구원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믿음과 구원은 왠지 육신의 평안과 번영을 가져다주는 금은보화, 즉 재물은 멀리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을 준다.

 

그러나 사람은 돈 없이 살 수 없다. 이건 명백한 현실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육신이나 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세상 일부다. 즉 존재의 신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돈 없이 살 수는 없다. 이런 상충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쉽게 자유로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이 세상을 의미하는 애굽에서 특별히 수고하여 얻었다고 말하기 힘든 재물을 가지고 애굽을 떠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할 건 돈에 관한 관점이다. 돈이 목적이나 본질 또는 하나님 은혜의 척도인 것과 수단인 것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르다. 한마디로 돈을 본질이나 목적으로 삼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삶의 수단으로 인식하는지의 문제다. 이건 표면적으로는 아주 비슷한 문제지만, 실상은 구원의 문제, 구원받은 사람이냐 아니냐의 차이다.

 

신앙인에게 있어 돈 문제의 결국 어떤 사람이냐의 문제다.

 

사람은 돈을 보는 자기 관점을 바꾸면 돈에 대해 경건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관점을 바꾸는 것인지, 아니면 관점은 생명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니 생명을 바꾸는 것인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결국 이것 또한 구원과 거듭남의 문제이다.

 

돈을 목적으로 보는지 수단으로 보는지는 의외로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느냐로 구분된다. 돈을 본질로 보는 사람은 하나님께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며 기도하고, 그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내려 한다. 반대로 돈이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사람은 하나님께 돈을 구하지 않는다. 먹을 것 입을 것도 딱히 구하지 않는다. 그런 모든 건 살고 있는 사회에서 구하는 방식을 따라 구한다.

 

하나님을 기도하고 간구하면 돈을 주시는 신으로 믿는 사람은 육신을 삶의 본질로 보고 육신의 평안과 성공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 믿는다. 이런 사람에게 돈은 그저 목적이다. 돈으로 대변되는 육신의 형편이 곧 하나님 은혜의 척도라는 건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처럼 육신의 삶을 본질로 보는 신으로 믿는 신앙이다. 이건 분명 하나님을 존재의 신 여호와로 믿는 신앙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에게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많은 재물을 빼앗듯 얻어서 떠나는 건 구원은 곧 육신의 평안이라는 자기 믿음을 확신하는 착각을 낳게 한다. 마치 육신의 문제 해결이 구원인 듯, 또 구원은 곧 육신의 형편 개선인 양 믿는 일반적인 기독 신앙을 보증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건 회칠한 무덤과 같다.

 

돈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여기는 가치관을 가지려면 먼저 바로 잡아야 하는 게 있다. 바로 육신에 관한 관점이다. 육신을 하나님을 표현할 형식이자 도구로 보는 관점이 있어야 한다. 이 관점이 없는 사람에게 돈은 절대로 수단이 될 수 없다. 사람은 삶의 한 절에서 경험하는 깨달음으로 이게 바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관점은 생명이 바뀌어야 바뀐다. 돈이란 한 가지를 두고 목적으로 보는 가치관이 수단으로 바뀌는 건 생각만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니다. 섞은 고기를 양식으로 알던 늑대가 냄새나는 부정한 것으로 보는 양으로 거듭나듯 생명이 바뀌어야 한다. 즉 구원이 있어야 한다. 구원 없이 돈에 대한 가치관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돈은 노력이나 다짐으로 돈에 대한 관점이 바뀌지 않는다. 물론, 이건 비단 돈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 전체가 그렇다. 생명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고 가치관도 바뀐다. 한 마디로 구원받으면 굳이 별다른 조치나 관점을 전환하려는 노력이 없어도 그 사람에게 돈은 그저 수단이 된다. 구원받은 사람,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건 무엇이든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된다. 돈도 마찬가지다. 있으면 있을수록 유용하지만, 그렇다고 없어서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많은 재물을 취한 건 이제는 유월절을 넘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러 가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애굽에선 그 모든 금은보화가 세상 가치로 존재하지만,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사람에게 주어진 금은보화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이므로 그 육신이 사용하는 동안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제물과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 돈 문제 역시 구원의 문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 거듭난 사람에게 돈은 있으면 있는 대로 또 없으면 없는 대로 그 삶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다. 또 부유하고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나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육신이 된 말씀대로 사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이니 숨만 쉬어도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그런 사람에게 돈은 수단이고, 이미 예비하신 세상의 법으로 충당하고 소비하며 산다.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므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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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이 죽임을 당하자 애굽의 왕 바로는 그제야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러 가는 것을 허용한다.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 막을 내린 것이다. 장자의 죽음으로 마무리된 출애굽은 세상 가치를 떠나는 게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것임을 설명한다. 출애굽을 바로의 고집과 하나님의 재앙이라는 대결 끝에 바로가 패배한 것에 한정해서 이 일을 조명하면 곤란하다. 다시 한번 출애굽은 각 사람 심령 안에서 일어나는 구원의 과정이란 걸 상기하자.

 

출애굽 당시 양식으로 쓸 빵을 준비할 시간조차 없이 그냥 애굽을 떠나라고 하심에서 구원은 아주 신속하고 단호한 세상 가치와의 이별을 요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출애굽 당시를 보면 애굽은 10가지 재앙으로 이미 저항할 힘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아마도 애굽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들 그림자만 봐도 혼비백산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게 정상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호되게 당했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요구하는 각종 귀금속이나 재물을 거저 내 줄 정도였다. 그런 상태라면 굳이 빵도 준비하지 못할 정도로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속하게 떠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이 서두름은 세상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느긋하고 여유롭게 관망하듯 떠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왕 역시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군사를 동원해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을 추격했다는 것에서 하나님 말씀의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세상 가치는 우리를 구원으로 쉽게 배웅하지 않는다. 출애굽 과정은 이렇게 세상 가치를 떠나는 구원은 단호하고 신속한 결단이 있어야 함을 우리에게 말씀한다.

 

그러나 이런 단호한 결정은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니다. 430년간 지긋지긋하게 노예로 지냈으니 금방이라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지만, 반대로 애굽을 벗어난 곳에서 삶은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구원도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 죄와 사망 가운데 거하는 삶이었다는 걸 깨닫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다. 선뜻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만을 믿고 나서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진정한 믿음이 필요하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다.

 

구원받은 삶은 사실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

 

만약 지금까지의 삶과 신앙이 온전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면 그 자리를 떠나는 게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고 온전한 것이다. 우리가 육신 가진 인생으로 살며, 육신이 속한 사회에서 습득한 상식이나 이성은 어쩌면 이런 때를 위한 것일지 모른다. 구원받았다면서 회개하는 자기 모습이 모순이란 걸 알게 되었다면,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라곤 세상에서의 평안과 성공뿐이란 걸 알게 되었다면 그때까지 삶을 떠나야 한다. 모순이고 온전한 신앙이 아니란 걸 알고서도 머문다는 건 명백히 그릇된 것이다. 게다가 이전의 삶이 가진 유혹이 떨치기 힘든 것이라면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신속하게 떠나는 게 정답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국처럼 교육 수준이 높고 아주 높은 수준의 이성을 가진 사회에서도 신앙이란 가면 뒤에 숨은 육신의 소망이 다른 사람이 하면 미신적이라는 행동을 서슴지 않게 한다. 신권으로 헌금하는 정성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합리적이지 않음에도 믿는 것 같은 게 그것인데 평안과 부유를 바라는 간절함이 신앙의 모든 의도를 어둡게 만든다. 그런 모습들은 분명 신앙이라기 보다는 자기 최면이나 요즘 말로 정신 승리일 뿐이지만 이제는 오히려 교리가 되어가고 있다. 신앙이란 장막 안에서 정성이란 이름으로 회칠한 육신의 간절함이 이런 불합리가 하나님 말씀이나 상식을 삼키고 있다.

 

특히 이런 자기 최면 상태에선 간간이 자기 신앙의 모순을 깨달아도 그 모순을 타개하는 계몽이나 결단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심각한 문제다. 구원은 모든 죄를 씻고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것이라 믿는다면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는 회개부터 하는 게 분명 이상한 일임에도 문둥병자처럼 아무렇지 않다. 이렇게 누적된 어이없는 모순들은 신앙인 대부분에게 이때껏 유지해온 신앙의 형태를 벗어나면 그렇게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번영이 날아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 두려움이 이성적으로 분명 이상하고 모순적임을 깨달아도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에 안주하게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건 사람의 생각이고 하나님은 사람의 그런 자기 최면을 일절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이 그런 신앙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과 은혜를 얻을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건 하나님을 기만하려는 시도일 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다. 이걸 외면하는 걸 양심에 화인을 맞은 상태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런 미온적인 태도는 신앙의 왜곡을 낳는다. 하나님의 의도와 다른 믿음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할 형식으로 육신을 주셨는데 사람은 그 육신을 하나님 은혜와 영광의 척도로 착각하고 어떻게든 육신의 번영을 갈망하는 게 그 왜곡이다.

 

현대 기독교 신앙의 진정한 신이자 주인은 사실 자기 육신이다.

 

이렇게 왜곡된 신앙은 육신이 평안하면 하나님의 은혜고, 육신이 곤경에 처한다는 건 하나님이 벌을 주셨기 때문이라 믿는다. 육신을 본질과 척도로 삼는 것이다. 육신의 형편과 상태 그리고 바라는 바가 모든 걸 결정한다. 육신을 본질로 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척도로 보니 자연스레 하나님의 뜻이나 의도 심지어 사람을 향한 목적까지 육신의 어떠함에서 찾는다. 결국 육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가 하나님의 생각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행위와 소유의 신으로 왜곡한다. 이건 십계명부터 어기는 것이지만 신앙의 모든 걸 볼모로 잡은 육신의 평안과 번영은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진다고 믿게 된다.

 

하지만 거듭남이란 구원은 생명이 바뀌는 것이다. 자기 행위로 인해 구원이 없어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는 건 생명이 아니라 행위가 기준이기에 이미 모순이다. 또 인생은 자신이 선택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 말하면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인생이 될까 두려워한다는 관점에서 봐도 분명한 모순이다. 이처럼 육신에 거하는 사람에게 육신을 본질로 보는 생명 없는 가치관과 신앙관은 구원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중력 같은 힘이다. 이 어두움과 두려움으로 관철된 신앙은 언제라도 우리를 애굽에 붙잡아 두려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띠고 지팡이를 들고 마치 5분 대기조처럼 구원의 절기인 유월절을 지키고 기념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깨달았다면 즉시 떠나는 각오로 구원을 간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어떤 계기, 어떤 말씀을 듣고 자신의 신앙이 육신의 평안과 번영을 바라는 어리석은 희망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면, 구원받았는데 왜 회개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면 즉시 그리고 아주 단호하게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 이런 신속하고 단호한 결단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게 허리띠를 띠고 지팡이를 들고 유월절 규례를 지키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다만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이전의 삶을 버리는 데에는 또 다른 두려움도 있다. 그건 바로 구원은 경험해보지 않은 삶이자 미지의 세계다. 예수님의 여러 말씀처럼 구원받은 삶은 세상에 없던 것이다. 세상에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으로 오실 이유가 없다. 세상에 있다면 그걸 활성화해서 사람이 보게 하면 될 일이다. 세상에 없었기에 하나님 아들이 직접 육신으로 오셔야 했다. 그만큼 구원받은 삶은 사람에게 미지의 세계다.

 

바로 이런 이유로 믿음이 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성이라 불리는 건 아브라함이 보여준 태도가 믿음이라는 의미다. 아브라함은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 말씀 하나를 믿고 떠났다. 지시할 땅이 도무지 어딘지도 모르는데 이전 삶을 모두 청산하고 떠난 것이다. 이건 사막이나 밀림에서 살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문명화된 도시의 삶을 모두 청산하고 떠난 것과 같다. 그리고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역시 아직 어딘지도 모르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추상적 장소를 향해 떠났다. 이처럼 지금 그 자리가 온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떠나기를 바라는 자리란 걸 인지했다면 즉시 떠나는 게 믿음이다. 십일조 잘하면 이생에서 부자가 되거나 죽어서 천국에서 부유할 것이라 믿는 건 믿음이 아니다.

 

구원은 신속하고 단호히 이전 삶을 떠나는 것

 

구원은 이처럼 신속하고 단호한 회개(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섬)와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오늘 자기 신앙이 사람이 가진 상식으로도 모순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속히 회개하고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 그런 결단 없는 구원은 없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만 먼저 자기 자리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다행히도 온전한 여호와 하나님, 존재의 신을 찾고자 한다면 언제나 만나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다. 이 믿음이 있다면 지금이 온전한 신앙이 아니라는 의심이 들 때 하나님을 부르면 응답하신다. 어쩌면 이 글도 그런 부름의 소리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부른 하나님은 당연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육신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그게 유월절로 설명한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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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9) 무교병과 쓴나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3. 10. 1. 05:42 Writer : 김홍덕

(1) 무교병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교병을 어린양과 함께 먹으라고 하셨다.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인 무교병을 먹으라는 건 부풀리지 않은 존재가 되라는 뜻이다. 이는 있는 그대로, 창조한 목적대로의 존재가 되라는 의미지 일상에서 항상 무교병을 먹으라는 계명이 아니다. 그러니까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라는 건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의 모습 그대로 일 때 임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누룩 없는 무교병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건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 외에 다른 의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고백

 

하지만 사람은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식으로 신앙을 생각한다. 세상이 좋다고 한다면 그것을 가미하는 게 좋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아주 비싼 전자 오르간을 설치해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일반화되고 오히려 좋은 신앙으로 인식되고 있다. 비싼 전자 오르간은 세상의 가치 기준에 의해 높은 가격, 좋은 물건으로 결정된 것인데, 그렇게 세상이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위해 사용한다는 건 하나님을 대단히 위하는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게 있다. 비싼 오르간을 좋은 것으로 가늠하는 세상 기준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심판의 기준이란 것이다. 나사렛이란 천한 동네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세리와 창녀와 먹고 마시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하나님은 세상의 가치로 가장 귀한 것으로만 대칭하던 유대인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신성모독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진즉에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유대인의 신앙 기준과 세상의 가치 기준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결국 예수님의 경계대로 그들의 누룩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유대인을 비난하면서도 더 열정적으로 세상 가치로 신앙을 조명하므로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누룩이 되었다. 교회는 더욱더 세상이 귀하다고 가치를 부여한 자재로 건축하고, 교인이 세상이 성공이라 여기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 칭송하며, 간증을 청하고, 자녀들에게 본이라 가르친다.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막 8:15)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수없이 보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하나님의 진노와 그 진노에 이어진 재앙이란 전개에서 이스라엘의 타락은 대게 여호와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사건들이 아니다. 대부분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함께 섬긴 일들이다. 에스겔 8장에서는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이 서 있는 환상을 말씀하시기도 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타락은 모두 <하나님 + 세상 가치>를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 외에 다른 것을 사람이 섬기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질투하신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무교병을 먹는다는 건 자신은 하나님의 어린 양의 의와 하나가 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삶의 가치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신앙 고백이다. 구원의 본질적 정체성과 맥락을 같이하는 신앙 고백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의가 나를 주관하도록 나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이고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건 곧 그리스도가 되는 것, 즉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게 구원이다.

 

 

(2) 쓴 나물

유월절에 관한 말씀을 제외하면 성경에서 쓴 나물에 관한 말씀은 그리 많지 않다. 이곳 출애굽기 12장과 민수기 9장 정도가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유월절에 관한 말씀이다.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유월절에 쓴 나물을 먹으라는 말씀은 누구에게나 그 시절의 어려움을 기억하라는 의미라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은 인생을 쓴 나물처럼 생각한다. 그 삶에서 벗어나는 게 바로 구원이다.

 

쓴 나물을 먹으라는 말씀의 의도대로 구원 이전의 삶은 쓴 나물을 먹는 것과 같은 삶이다. 그래서 사람은 인생을 한 단어로 '()'라고 정의하고, 그런 정의에 대부분 공감한다. 그런데 만약 사람의 인식 그대로 인생이 쓴 나물 같기만 하다면 하나님은 그야말로 고약한 신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우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신다. 다만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복과 소망이 다르다.

 

이제 애굽을 벗어나게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쓴 나물을 대속 제물인 어린양과 함께 먹으며 여호와의 구원을 기념하라고 하신 건, 구원이란 사람이 생각하듯 괴로운 인생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은 더 이상 쓴 나물 먹는 것 같은 삶이 아니다.

 

구원받았다면 구원 이전이 어땠는지 명백해야 한다. 무엇에서 구원받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건 구원받은 게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은 모두가 괴로움 그 자체라고 말하는 인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구원받았다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기쁜 삶이어야 한다. 그게 구원의 증거다.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삶이 쓴 나물로 대변되는 삶에서 구원받은 삶이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인생이 쓰지 않고 괴로움이 없다는 것에 대한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건 인생의 말초적인 부분까지 모두 기쁨으로만 가득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게 맞는다면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희락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세상과 다른 기쁨은, 세상의 가치가 주는 기쁨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삶이란 구원의 정의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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