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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이 변하는 재앙

2. 재앙은 여호와를 알게 함

 

 

여섯 번째 재앙과는 좀 다르게 일곱 번째 재앙부터는 그 강도가 아주 커진다. 그리고 재앙들이 모두 하늘에서 임한다. 우박, 메뚜기, 흑암은 모두 하늘의 변화다. 메뚜기가 땅에 속한 재앙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메뚜기는 동풍 곧 바람을 타고 온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그 말씀들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지나왔다.

 

모세의 간구대로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이 내릴 때 불도 함께 내린다. 그런데 이때 여호와를 두려워한 애굽인들은 밖에 나오지 않아 최소한 자기 몸은 해를 입지 않는다. 애굽인들 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이 정도에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 재앙이 내리자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특히 이때는 재앙에 앞서 바로에게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 뜻을 전하신다.

 

너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출 10:2)

 

이 말씀은 재미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강퍅하게 한 바로에게 여호와이심을 바로에게 알게 하신다는 말씀인데, 일면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출애굽기는 바로가 주인공인 이야기도 아니고, 수천 년 전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탈출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려는 관점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우리 각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심령의 변화,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종살이에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나는 구원에 관한 말씀이다. 그 관점에서 보면 우리 안에는 언제나 바로와 같은 강퍅함이 있다.

 

아닐 것 같지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찾으러 나설 기회를 많이 만난다. 기독교인은 특히 그 기회에 가깝다. 하지만 늘 발걸음을 멈춘다. 사람의 이런 마음을 잘 표현한 찬송가 가사가 있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맘이 조려서 못 간다.
(찬송가 302장 3절)

 

찬송가 가사처럼 이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많은 기회 앞에서 돌아서는 사람의 강퍅한 마음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출애굽기가 우리 각 개인의 구원 여정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때, 바로의 상태는 세상 가치에 대한 미련으로 구원의 기회를 저버리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리고 앞서 한 번 설명했듯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다는 건 바로 마음의 고집을 강하게 하신다는 의미라기보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더 분명하게 밝히시는데 바로와 같이 사람이 자기 상태를 고집하면 하나님을 기준으로 더 강퍅해진 것이 되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굽에 내린 재앙들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회를 저버릴 때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회를 저버리면 하늘에서 우박이 내리고, 미련을 둔 세상의 양식마저 메뚜기 떼가 다 먹어 치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 아닌, 다른 것에 둔 미련 때문에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어떤 재앙을 당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게 출애굽기의 재앙이다.

 

출애굽기는 우리 자아 안에서 세상의 가치를 버리는 과정에 관한 말씀이다. 애굽의 국고성을 쌓는 노예의 모습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구원 이전 우리의 모습이다. 그리고 많은 재앙에도 끝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러 가는 걸 방해하는 건 우리 자아 안에 구원을 향한 발걸음을 붙잡는 또 다른 우리 자아다. 그리고 그 자아는 언제나 우리 삶에 재앙을 가져온다. 우선 보기에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아도 결국은 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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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에 내린 하나님의 재앙은 애굽에 한정된 이벤트성 재앙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삶 그 자체다. 구원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사람이 자기 삶을 괴롭게 여기고, 삶에서 마주하는 많은 일들을 벌이나 재앙으로 여기는 것에서 구원 없는 삶이 재앙적 삶이란 걸 확인할 수 있다. 사람 스스로가 그렇게 믿는다. 그러므로 이 재앙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내린 재앙만이 아니라 구원 없는 삶, 그 자체다.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10가지 재앙은 여러 관점에서 보고 또 분류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구원 여정에 관한 말씀이란 주제를 벗어나면 안 된다. 10가지를 2-4-4(3-1)로 분류하면,

  • 1, 2번째는 인간 자아 정체성에 관한 갈증을 세상 것으로 채우므로 겪는 재앙이고,
  • 3~6번째 재앙은 사람이 눈에 보이는 걸 본질로 여길 때 겪는 재앙이며,
  • 7~10번째 재앙은 하늘, 즉 자기 의와 가치가 무너지는 재앙이다.

 

먼저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기 존재와 삶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갈증을 세상이 귀하다고 하는 것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이들이 일생을 바쳐 추구한 결과 앞에 언제나 허무함을 호소하는 게 인생의 재앙임을 보여준다. 이런 재앙은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에겐 삶 그 자체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2)

 

그리고 이어지는 이, 파리, 악질, 독종까지, 세 번째에서 여섯 번째까지 재앙은 사람과 육축의 몸에 임하는 재앙이다. 그렇다고 이게 육신이 병드는 걸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사람이 삶의 본질이라 여기는 것, 눈에 보이고, 사람이 실체를 소유하는 게 삶의 본질이라 생각하는 것들이 해를 입는 재앙을 말씀하신다. 즉 땅의 것을 생각하는 이들이 소중히 여기는 땅의 것에 임하는 재앙이다.

 

세 번째에서 여섯 번째까지의 재앙은 사람이 인생의 본질로 여기는 땅의 것들이 해를 입는 것

 

사람은 인생의 목적을 세상의 지혜에서 찾고, 그 목적이 실현되었다는 증거를 눈에 보이는 형상 있는 것에서 찾는다. 인생의 평안과 부유함이라는 가치는 몸이 평안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상태가 되면 성취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추구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부질없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특히 이때부터는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너의 것"에 재앙이 생길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너의 백성, 너의 가축, 이렇게.

 

그리고 가축들에게 심한 악질이 발한다. 가축은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땅에서 나는 걸 먹고, 땅을 간다. 그리고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동력을 제공하고 식량이 된다. 생축에게 악질이 발생하여 죽는다는 건 그 모든 기능과 역할을 상실되었다는 의미다. 본질로 여기는 땅의 것, 눈에 보이는 것, 육신의 것을 본질로 아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본질로 여기는 땅의 것들에 재앙이 임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땅의 것이 해를 당할까 늘 염려하고, 무엇보다 사람이 느끼는 삶의 괴로움은 전부 이 땅의 것이 원만치 않거나 해를 당할 때 느낀다.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의 삶은 재앙 한 가운데 있음을 실증한다.

 

그리고 이어서 파리가 창궐하게 된다. 이때 바로는 모세에게 이 땅, 곧 애굽에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한다면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돌로 칠 것이라며 거절한다.

 

재앙이 이어지는 중에 스치듯 있는 이 대화는 놀랍게도 오늘날에 바로의 희망대로 되어 있다. 교회 안에서,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걸 얻겠다고 예배드리는 게 그것이다. 하나님께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걸 얻기 위해서 예배드리고 있다는 건, 세상 가치 속, 곧 애굽에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과연 모세의 말대로 애굽 사람들의 돌을 모질게 맞고 있다. 세상의 법으로 늘 교회가 심판받고 비난받고 있다.

 

구원받지 못한 삶은 그 자체가 재앙이다. 인생을 고난이라 탄식하는 게 그렇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에게 인생은 운동선수에게 주어진 운동장 같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존재로 거듭나면 사람들이 탄식하는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조건이고 환경이란 걸 본능적으로 안다. 어떻게 하든지 육신의 수고를 피하려는 사람들, 육신이 조금 더 수고하는 걸 고생과 실패로 알고 사는 세상은 육신을 내어주는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게 감사한 것뿐이다. 우리가 재앙과 구원을 잘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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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변한 하수(下水), 하수에서 올라온 개구리)

애굽왕 바로는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겠다는 이스라엘을 핍박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처럼 그렇게 하면 분명히 이스라엘의 의지를 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이긴 것 같아도 문제만 더 심각해진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여기는 이들에겐 눈에 보이는 육신과 삶이라 요소를 핍박이면 될 것 같지만, 내용이자 본질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행사는 사뭇 다르다.

 

바로의 저항으로 인해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이 애굽 땅에 임하게 된다. 뱀이 지팡이가 되는 것은 그냥 몸풀기다. 물이 피가 되고, 개구리, ,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그리고 장자의 죽음까지 10가지다. 크게 중요하진 않을지 모르지만 이를 분류해보면, 물이 피가 되는 것과 개구리가 하수에서 올라오는 건 애굽의 술사들도 따라 한다는 특징이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은 하수에서 비롯된 재앙이다. 그렇지만 마시는 물과 강 이야기가 아니다.

 

처음 두 가지 재앙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 아닌 걸로 인생 정체성에 관한 갈증을 해갈하려는 사람에게 임한 재앙이다.

 

10가지 재앙 중 처음 두 가지는 하수에서 비롯된 재앙으로 물이 피가 되고, 하수에서 개구리가 올라와서 온천지에 돌아다니고 죽는 재앙이다. 이 둘은 애굽의 술사도 따라 했다는 게 눈에 띄긴 하지만 핵심은 하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악취로 인한 괴로움이다. 여기서 주목할 건 하수, 곧 물이다.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애굽의 나일강이다.

 

이 물은 사람이 느끼는 자아에 관한 갈증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수 아닌 다른 물을 먹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와 그 일이 곧 재앙임을 보여준다. 단지 바로를 심판하기 위한 이벤트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닌 걸로 인생의 목적과 자아의 갈증을 해갈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재앙이다.

 

예수님을 만난 수가성 여인의 일이 이를 잘 설명한다. 이전에 다섯이나 되는 남편이 있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또 남편 역시 그 여인의 자아를 만족시키는 남편이 아니라는 말씀과 함께 내가 주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 하신 물도 water가 아니다. 남편을 바꾸어 봐도 채워지지 않는 자아의 갈증은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있어야 채워진다는 의미다.

 

이 관점에서 애굽의 물, 나일강의 물이 피로 변하고, 그 물에서 나온 개구리가 오히려 사람을 해하는 재앙은 근원적으로 사람이 세상의 지식이나, 세상 가치에서 자기 자아의 갈증을 해결하려는 시도 자체가 재앙이라는 걸 보여준다. 마시는 물이나 강물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러 가지 않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가 아닌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세상의 지식이나,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서 나온 혜택이나 지식이나 철학이나 가치는 모두 갈증을 해결하고 생명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어서 악취가 나는 것들이기에 세상 가치를 추구하므로 재앙이 된다는 말씀이다.

 

특히 이 두 가지 재앙은 애굽의 술사들도 따라 했다고 했다. 세상의 술사란 세상에서 술수를 부리고 속이는 자들이다. 하수의 물을 피로 만들었다는 건 세상의 가치가 사람에게 생명인 것처럼 속인다는 것이고, 하수에서 개구리가 나오도록 했다는 것 역시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면 뭔가 가치 있는 일이 있을 것처럼 기만할 뿐 정작 거기서 나오는 건 많기만 할 뿐 결국 죽어서 악취를 내는 것뿐이라는 걸 보여준다.

 

애굽의 술사는 세상에서 사람을 기만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따라하고 보여주었다는 건 세상 가치가 사람의 자아 정체성을 해갈할 것이라고 속이는 것

 

애굽에 내리신 하나님의 재앙은 바로의 마음을 심판하는 이벤트가 아니다. 왜 사는지,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일갈한 세상의 철학과 지식이라는 물로 자아의 갈증을 채우려는 사람은 누구나 만나는 재앙이다. 이는 비단 처음 두 개의 재앙만이 아니다. 이어 나오는 10가지 재앙 모두가 그렇다. 단지 바로를 심판하는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목적을 저버리고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반드시 만나는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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