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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의 피를 바른다는 게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예수님의 생명이 나를 구원한다는 걸 믿는 것이듯, 그 어린양을 먹는 것 역시 그리스도의 본성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 먹는다는 건 너무나 당연하게 나의 육신과 하나가 되는 행위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거듭나면 당연히 그리스도로 산다. 양의 고기를 먹는다는 건 그리스도 같이 행하는 육신이 된다는 의미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뼈를 꺾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뼈는 많은 경우 '()'를 의미한다는 걸 알면 좋을 듯하다. 따라서 어린양의 뼈를 꺾지 않는다는 건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의(), 곧 하나님의 의를 그대로 순종한다는 의미다. 이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도 일관된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의 가치를 가감하는 것, 곧 좌로나 우로 치우치는 건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이다. 대표적으로 모세나 엘리야가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하시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말을 듣는 걸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변화산을 떠올리면 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뼈를 꺾지 않을 뿐 아니라, 불에 구워서 먹고, 양념을 더하지도 말며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 물에 삶으면 고기의 성분이 빠져나간다.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삶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이루어낸다는 의미다. 말씀이 육신이 된 육신의 삶은 어느 하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아울러 남기지 말고, 남으면 불에 태우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순도 그대로의 삶이라는 의미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 34:19-20)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요 19:32-33) /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요 19:36)

 

이를 정리하면 구원은 일점일획도 더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본성 그대로 거듭난 사람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다. 피를 문설주에 바른다는 어린 양의 생명이 내 집, 내 족보의 정체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란 의미고, 뼈를 꺾지 않는다는 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그대로 따른다는 의미다. 또한 물에 삶으면 고기의 성분이 빠져나가지만, 불에 구우면 그대로를 취할 수 있다. 뼈를 꺾지 않는다는 것, 불에 구워 먹는다는 것, 어떤 것도 더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본성 그대로가 나의 본성이 된다는 의미다. 우리 구원과 신앙의 정체성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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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란 존재의 의미가 그렇다면 이제는 유월절 어린 양의 규례가 가진 의미를 살펴볼 차례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 안에서 어린 양을 먹으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내가 그 피를 보면 그 집을 넘어가 재앙이 임하지 않게 하시겠다 약속하셨다. 그러니까 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려 있다면, 그 집에는 양을 대속 제물로 드린 사람, 곧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바라고 하나님이 대속하시는 법에 순종하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다는 건 기본적으로 순종의 마음이다. 어린양의 피가 나를 재앙에서 건져낸다는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순종이다. 그건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구원한다는 믿음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구원한다는 건 그리스도의 피에 화학적 작용이나 주술 같은 능력이 있어서 구원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를 구원한다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이 되었을 때 내가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다.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다는 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를 구원한다는 믿음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그렇지 않은 애굽의 집과 달리 재앙이 임하지 않았다. 어린양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의인임에도 죄인이 되신 예수님이다. 다시 말해서 의롭지만 그리스도라는 본성에 이끌려 낮아지는 존재의 상징이다. 생명을 상징하는 어린양의 피가 재앙을 면하게 할 것이란 걸 믿고 문설주에 바르는 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낮아지는 본성을 가지는 게 곧 구원이란 걸 믿는다는 의미다.

 

이건 높아질 때 의롭다는 세상의 가치와는 상반된 의로움이다. 더욱이 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은 노력이 아니라 피 곧 생명이다. 본성이 되어야만 자기 것이 되는 의로움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 용어인 거듭남이 구원이라 한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건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된다는 의미다. 그건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는,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된다는 의미다. 이것이 바로 어린양의 피가 나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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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홉 번째 재앙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재앙을 당하지 않기 위해 뭔가를 할 필요나 요구는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은 달랐다. 재앙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엄격한 하나님의 요구사항에 순종해야 했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 안에서 금방이라도 나설 수 있도록 차림을 한 상태로 어린양과 무교병(누룩이 들어가지 않아 부풀지 않은 빵)을 먹으라는 말씀에 순종한 사람만 이 재앙을 면할 수 있었다.

 

10번째 재앙을 포함한 모든 재앙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출애굽기는 수천 년 전 애굽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 상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서술해 놓고 이것을 믿는 게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프레임 속에 사람을 초대하는 말씀이 아니라, 한 사람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일로 정의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에 순종하는 존재가 되는 과정에 관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당연하게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존재가 되는 과정에서 결별해야 하는 이전 삶과 가치관이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10가지 재앙이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애굽에 내려진 10가지 재앙은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존재가 되지 않았을 때 삶이 겪는 일들이다. 그리고 그 모든 재앙의 본질이 수렴한 끝판왕이 바로 장자의 죽음, 10번째 재앙이다.

 

10번째 재앙은 떠나야 하는 구원 이전 모든 삶의 고난이 수렴된 사건이자 모델, 곧 우리가 구원받아야 하는 이유와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얻는지를 보여준다.

 

 

(1) 어린 양이 가진 의미

앞서서 우리는 10번째 재앙의 대상이 된 장자, 그러니까 아들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봤고, 아울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도 함께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유월절 규례에서 제물이 된 어린양이 가지는 의미를 같이 생각해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의 대속이 있는 사람에게는 10번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당시에는 염소도 제물이 되었지만 결국은 어린양이 대표다.

 

1년 된 수컷 어린양(혹은 염소)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집 안에서는 허리에 띠를 띠고 지팡이를 든 상태로 양고기를 먹되 뼈를 꺾지 않은 채 먹고, 양고기와 함께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과 쓴나물을 함께 먹으라는 것이 유월절의 규례다. 양의 대속,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를 대속한 어린 양이라고 한다.

 

이처럼 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상징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했을 때부터 대속의 제물이었다. 어린양은 언제나 사람의 죄를 대신하는 제물이기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다. 우리가 만약 구원을 얻는다면 그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아담의 때부터 구원은 대속이 있었다. 이는 차비를 대신 내주는 것이나, 곤장을 대신 맞는 게 아니다. 이 대속의 본질은 본이 되는 것이다. 굳이 본을 보이지 않아도 되는 존재, 즉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이 되어 죄인의 운명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죄에서 회복된 삶의 모습까지 기꺼이 보이신 게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이다. 그것을 보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사람이 보라고 높이 달리신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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