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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1-17)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가 선뜻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바로를 친 다음에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날 수 있을 것임을 미리 알려 주신다.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출 3:19-20)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이 말씀과 모세의 태도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는 애굽 왕 바로는 물론이고 구원의 혜택을 누릴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과 심지어 모세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누구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벗어날 날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의 이러함을 알고 계신다.

 

이러한 불신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믿지 않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능력을 보이신다. 강퍅한 바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도, 겸손처럼 보이나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모세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에는 믿지 않겠지만 지팡이가 뱀이 변하는 기적과 문동병이 생기고 낫는 기적을 보여주면 믿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신이 바로 기적이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같은 기적을 봐도 애굽의 왕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은 믿지 않는다. 아니 믿지 않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그런 이들은 인생의 목적을 회복한 사람을 봐도 믿지 않는다.

 

이처럼 구원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기에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구원의 삶이 가볍고 쉬운 것이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에 목을 매고 사는 인생이 그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창조한 목적대로 사는 존재가 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기적이다.

 

사람은 이렇듯 인생의 목적 회복을 쉽게 구원으로 여기지 않는다. 사람이 이렇기에 기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셔야 돌이킬 정도로 사람이 어둡기에 기적을 행하신다. 그러나 가장 큰 기적은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일에 종처럼 매여 살던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람이 바뀌는 것, 그것이 가장 큰 기적이다.

 

사람이 바뀌는 게 가장 큰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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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애굽왕 바로에게 가서 히브리 사람의 여호와 하나님이 임하셨으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러 사흘 길쯤 광야로 가는 걸 요청하라 명하셨다.(3:18) 애굽의 종살이를 벗기 원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세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희생이 애굽의 종으로 사는 이스라엘이 바라는 구원이란 말씀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구원 역시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 구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규례는 오늘날 예배가 되었고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려는 마음은 여전히 충만하다. 하지만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다는 생각을 가장 잘 대변하는 사례는 아마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나 선교사로 가는 것과 같은 일들이다. 희생이라는 자체가 자기의 유익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께 희생을 드린다는 건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인생이 되겠다는 의미로, 번제물이 죽고 번제물을 드린 사람은 하나님 앞에 깨끗해진다는 제사의 본질이 그렇다. 깨끗해진다는 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다. 따라서 하나님께 희생을, 제사를, 예배를 드린다는 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순종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모세에게 명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아 구원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희생을 드린다는 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

 

다행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한다. 대학에 진학하는 순간에도, 결혼을 앞두었을 때도, 직장을 얻거나 사업을 할 때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한다. 어떤 선택을 마주했을 때 어디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지 알려 한다. 그런데 사람의 이런 태도가 희생이 곧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생각에 부합하는지는 생각의 여지가 있다. 육신이 마주한 선택 어느 한쪽에만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는 것인지 생각할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육신의 일을 두고 어느 선택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려는 걸 성경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사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자 하는 선택을 요하는 일은 거의 육신의 일이다. 양심이 있다면 이를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사람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은 어떤 선택이 성공을 보장하는지 알고 싶다는 게 사실상 본질이다. 하나님이 이걸 모르시지 않건만 사람은 이걸 감추려 한다.

 

 

게다가 하나님의 뜻이 무언지를 알고 싶은 선택을 마주한 사람 대부분은 자기가 원하는 게 이미 정해져 있다. 순종보다 하나님이 자기 생각에 명분을 더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기가 바라는 성공을 담보할 목적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 한다. 성경을 지키는 경건한 행동, 본능에서 비롯되는 생각까지 떨쳐버리려는 노력, 당장 경제적 어려움을 무릅쓰고 헌금을 드리는 것들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이런 마음을 두고 하나님과 장사, 곧 거래하려는 것이라고 일갈하셨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다른 데 있다. 앞서 설명한 하나님 뜻에 관한 사람의 태도 속 하나님의 뜻은 사람 밖에, 자아와 심령 밖에 있는 일이라는 게 문제의 본질이다. 하나님께 희생을 드린다는 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심령에, 자아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것인데, 정작 사람이 알고 싶은 하나님의 뜻, 곧 선택들은 모두 사람 밖에 있는 세상일이라는 걸 간과하면 안 된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먹고 입는 세상일의 결론이나 미래를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고 있는 셈이다. 이게 중요한 건 하나님의 뜻이길 바랄 정도로 간절하게 세상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은 다음 아니라 애굽의 국고성을 쌓는 노예로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표현된 세상 가치 추구에 매인 종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베푸시려는데 구원받았다면서 어디에 세상 가치가 있는지를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로 회칠한 다음 그걸 순종하겠다고 예배드리는 걸 구원받은 사람의 희생이라 할 수는 없다.

 

세상일의 선택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건 오히려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세상 가치에 종으로 매인 것

 

하나님의 뜻은 사실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미 사람을 향한 목적과 뜻을 분명하게 밝히셨으므로 목사님이나 기도원에 가서 알려 할 게 아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이미 선명하게 다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건 이미 분명하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삶의 목적과 의미로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향한 모든 뜻을 이미 밝히셨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은 이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표현하는 존재로 창조한 사람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종으로 매인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하나님의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종살이를 벗고자 간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구원을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 우리가 알아야 하는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그 하나다.

 

예수 외에는 구원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말씀도 이를 뒷받침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곧 뜻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삶이 된 존재가 그리스도 예수이기에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드릴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인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사는 것,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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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1-5)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다. 따라서 구원을 이끄는 그에겐 하나님의 구원이 있어야 한다. 자기 안에 없는 걸 가르치거나, 자기가 알지 못하는 정체성의 자리로 사람을 이끌 수는 없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모세를 불러 자신의 정체성을 보이신다는 건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이 어떤 구원인지를 설명하시겠다는 의도다. 그러므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많은 걸 설명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이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의 신이라는 걸 밝히시면서 "네가 서 있는 땅은 거룩하니 신을 벗으라." 하셨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니 신을 벗는 게 당연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이 말씀 속 '거룩'과 땅 그리고 신을 벗으라고 한 말씀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땅은 곧 흙으로 지어진 사람이고, 존재의 신이라는 유일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

 

성경이 말하는 땅은 특정한 지점을 말하는 게 아니라 흙으로 창조된 사람을 의미한다. 출애굽기를 견인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역시 그렇다. 가나안이라는 좌표나 지점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는 게 구원인지를 설명하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이 땅에 임하여 거룩한 땅이 된다는 건 곧 하나님의 뜻이 임하여 사람이 거룩해진다는 뜻이다.

 

이건 우리가 잘 아는 주기도문 통해서 선명하게 알 수 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하라는 건, 하나님의 뜻이 사람인 나에게 임하기를 구하라는 뜻이다. 이를 통해 사람에게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뜻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다. 예수님은 그걸 간구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땅에 임하시면 이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이자, 사람의 존재 목적이 회복되는 것이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뜻이 흙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임하신 것이기에 사람으로선 존재의 목적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회복한다는 건 거룩하신 하나님이 땅(흙으로 창조된 육식)에 임하신 것이므로, 그 사람도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져 거룩하게 된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두고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라고 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흙으로 창조된 육신 안에 임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이루어진 사람이며, 하나님이 임한 거룩한 땅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건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흙으로 창조된 육신을 가진 사람이 거룩해졌다는 의미다.

 

이것을 알고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을 다시 보면,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떨기나무는 타지 않고 스스로 타는 불꽃으로 임하신 땅은 그 자체로 거룩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역시 이처럼 거룩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게 구원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임하신 거룩한 땅에 흙으로 창조된 사람인 모세가 신으로 단절된 상태로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흙으로 창조된 모세에게 신을 벗고 거룩한 땅에 서라고 하신 것이다.

 

만약 거룩한 땅에 모세가 있는 자체가 문제라면 떠나라고 하시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모세가 그곳을 떠나는 게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의 정체성과 베푸실 구원을 깨달아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베푸실 구원을 이끌 지도자로 모세를 부르고 계신다는 걸 잊지 않았다면 이걸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모세가 땅과 구분된 상태가 아니라 땅을 바로 밟고 서는 존재, 곧 하나님이 임하신 땅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면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는 것이다.

 

떨기나무는 타지 않는 불꽃으로 임하셔서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임을 밝히신 하나님께서 당신이 임한 땅에 선 모세에게 신을 벗고 서라고 하시는 건 일면 간단한 사건 같지만,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임한 거룩한 땅과 하나가 되라는 의도의 말씀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뜻이 임해야 하는 존재고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또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시는 구원이 임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는 뜻을 가지고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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