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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란 방 안에 있는 코끼리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4. 3. 20. 06:42 Writer : 김홍덕

<방 안의 코끼리>라는 말이 있다. 누가 봐도 심각한 문제인데, 모두가 어쩔 줄 몰라서 문제가 없는 듯 그냥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나 일을 의미한다. 이건 사회에는 누구나 알고 있는 불평등의 문제 같은 경우에는 적용하기 힘들다. 불평등은 어찌 보면 방 안에 코끼리가 있는 것보다 심각한 상황일 수 있지만, 사회 구성원 전부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해결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 안의 코끼리>는 그 같은 문제 해결 노력조차 외면하거나 묻어 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종교들은 대부분 방 안의 코끼리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관련된 모든 종교를 다 언급할 필요는 굳이 없으므로 비교적 많은 사람이 자기 종교로 신상 명세에 기록하는 기독교에 대표성을 부여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기독교 안에는 정말로 방 안에 코끼리가 있는 것 이상의 많은 문제가 있다. 문제가 분명한 모순이나 오류가 있는데 이를 문제로 다루지 않거나, 문제로 다루는 경우 신앙이 없는 거라고 도리어 지적을 받게 되는 쟁점들이다. 그중 몇 개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것들은 이 블로그에서 아주 자주 문제로 제시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1. 구원을 받았다는 건 죄 사함을 받은 거라면서 정작 기도할 때는 항상 회개하라고 한다.
  2. 안식일, 돼지고기, 십일조는 모두 구약 성경의 율법인데, 현대에 와서는 안식일은 주일로 <변경>했고,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건 <폐기>한 반면 십일조는 그대로 엄격하게 <준수>하고 있는데, 누구도 이 세 가지를 다르게 해석하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3. 예수님의 십자가는 낮고 천한 것이고,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으로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늘 기도한다.
  4.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생각해 보면 이미 하나님이 계셨기에 우주와 지구와 사람의 시작 이전의 시간이 있었다. 그렇다면 <태초>를 거저 지구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5.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는 동안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주님이 다시 오시는 걸 볼 사람이 있다"라고 하셨다. 이 성경을 부인할 게 아니라면 예수님은 이미 오셨는데, 왜 재림을 기다리는가?
  6.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이를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같은 존재로 같은 유전적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었다는 뜻인데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니까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고,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된다"라고 말하는 게 맞는 것인가?
  7. 선악과를 먹음으로 사람(육신)이 죽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모두 죽으니 그 누구도 선악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있을까?

 

우선 생각나는 것들만 정리해도 이 정도다. 하지만 이건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 1번과 7번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방 안에 있는 코끼리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을 탄핵하는 문제고, 죽어서 천국 가겠다는 희망을 모두 불태우는 문제다. 한 마디로 예수 믿는 이유를 탄핵해 버리는 쟁점이다. 그런데 이 문제들에 대해 교회와 신학을 전공한 이들은 뚜렷한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건 신학의 필요성과 가치를 유지하는 동력일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런 문제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신학이 있다는 건 곧 이 문제들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적어도 기독교가 성경을 믿고, 성경은 다 이루어진다고 믿으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또 하나님 아들로 믿는다면 이 문제들은 아주 심각한 문제가 분명하다. 아직 회개한다는 건 지속해서 범죄하고 죄인의 상태가 유지되거나 혹은 죄인과 의인인 상태가 반복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라면 회개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구원은 죄 사함이라는 말씀에 상충하고, 또 구원받은 하나님 아들이 죄가 있는 상황이 되니 이 또한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교회와 목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기도할 때는 회개하라고 하고, 심지어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두 용서해 달라고 버젓이 기도하고 있다. 죄는 시인하므로 사함 받는다고 하셨는데 자기도 모르는 죄를 어떻게 시인한다는 말인지

 

우리가 정말로 양심과 상식이 있다면 자기 신앙에 이런 모순들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구원받은 게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이걸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바로 <양심에 화인 맞은> 상태라는 걸 알아야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 관점과 사람으로서의 상식에 버젓이 어긋나는데 아무렇지 않게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게 양심적이진 않지 않는가?

 

기독교라는 방 안에는 이처럼 버젓이 코끼리가 있다. 상식이 있다면 모순적임을 알 수 있는데 그냥 그냥 지나간다.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하니 그렇겠지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도 미리 말씀해 두셨다. 좁은 길로 가라고.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진리를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가는 다수결로 결정할 수는 없다. 이건 인생과 영혼의 본질적 문제이자, 하나님을 믿는 이유에 관한 근원적 문제다. 이런 문제와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는데 아무렇지 않고 주일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교회에 가고 있다는 건 인생과 시간 낭비일 뿐 단 "1"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다. 구원? 그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단 하나만으로도 구원이 없다는 증거가 되는 이 많은 모순을 안고?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런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이걸 해결하지 않고 '구원받았으니 기도하면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며 육신의 삶에 필요한 평안과 풍요를 구하는 건 천로역정에서 담 넘어 들어온 순례자일 뿐이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육신의 필요를 얻으려는 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하기도 어렵다. 앞에서 사례로 든 문제들부터 자기 안에서 해결이 되고, 확실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을 믿는 바른 신앙이 시작된다. 그래서 이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이 사안들이 문제임을 이야기하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과 나 자신과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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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박스, 흰 박스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24. 3. 10. 23:16 Writer : 김홍덕

얼마 전 일이었다. 큰아들이 이번에 나온 스마트폰을 샀고 이전에 사용하던 전화기를 중고 시장에 팔기로 했다. 평소에 전자제품의 박스를 웬만하면 모아두기에 사용하던 전화기 박스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분명히 보관해 두었다고 생각한 박스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나는 그 박스가 흰색이라고 생각했기에 흰색 박스를 찾았는데, 정작 그 박스는 검은색이었다. 보관해 둔 박스를 모두 꺼내 놓고 하나씩 찾은 결과 검은색으로 된 박스를 찾을 수 있었다.

 

곤경에 빠지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 영화 '빅 쇼트')

 

인생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도 어쩌면 이와 같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인생을 힘겨워하지만, 인생을 주신 하나님은 다르게 말씀하신다. 내가 검은색 박스를 흰색이라고 생각했듯이 사람도 인생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복을 주시려는데 사람은 인생을 힘겨워하니 그렇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어쩌면 정상이다. 그들의 세계관은 인생은 힘들다고 정의하고 있고, 그 힘든 것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를 찾고, 공부하고 노력하는 걸 삶의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겐 좀 다른 이야기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에 복 주시기를 원하시고,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천국이 이미 임하였다고 하셨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인생을 힘겨워하는 건 생각해 볼 여지가 상당하다. 여기에 더해서 그 힘겨움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건 성경과 배치된다. 인생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니까?

 

기독교인이 인생을 힘겨워하는 건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다고 채무가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일은 생기지 않는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인생의 무게로 누낄 수밖에 없는 문제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이 바뀌면 문제도 달라진다. 이건 아주 신비한 세계지만, 성경은 <거듭남>이라는 말로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것이 구원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니까 여상한 인생의 문제들이 다르게 보이는 존재가 되는 게 구원이란 말씀이다. 이건 그렇지 않다면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것을 심각하게 묵상해 봐야 한다.

 

여기서 오늘 정말로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있다. 바로 성경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과연 인생의 여전한 문제를 보는 시각이 바뀌었는지 여부다. 이건 구원의 기본 상태이다, 그리고 구원은 성경이 성취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므로 구원받았다는 건 곧 성경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었는지를 반추해 봐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설교한다면 설교하는 이가 과연 그런지 검증하고서 들어야 할 것이다.

 

검증은 간단하다.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문제에 관한 설교는 단 두 가지 부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거라는 설교와 인생을 다르게 보이도록 나를 바꾸어 주실 거라는 설교, 이렇게 둘 뿐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설교는 전자에 속할 것이다. 어느 교회 어떤 목사를 만나도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문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니 이를 믿고 기도하라고 한다. 심지어 나름 깨어 있다고, 오늘날 교회가 상업화되었고, 복음적이지 않다는 깨달음을 주장하며 새로운 신앙과 교회의 모델을 개척하는 사람들도 이 범주를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과 인생의 문제에 관한 설교는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꿔 주실 거라는 설교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바꾸어 주실 것이라는 설교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문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거라고 믿는 신앙은 검은 핸드폰 박스를 흰색이라 착각하고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시라면 예수님의 잔을 물리셨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알듯이 그런 일은 없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을 바꾸는데 있다. 더 심각한 건 이렇게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으면서 이를 주장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걸 주장하기 좋은 지위와 위치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건 진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아주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도 이 상황을 매우 우려하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마 24:15-16)

 

하나님은 사람을 바꾸시는 분이시다. 더 정확히는 탕자처럼 자기 자리를 떠난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바라시고 도우시는 분이시다. 그렇게 사람이 바뀌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사람이 세상에서 문제를 겪는 건 자기 정체성, 존재의 목적을 벗어나 자기가 정한 목적대로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바뀌면 그의 세상도 바뀐다. 자고로 설교는 이래야 하고, 성경을 이야기함도 이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검은 박스를 휜색으로 알고 찾는 것과 같은 어두움일 뿐이다. 말 그대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다. 거기서 벗어나야 구원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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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는 동안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었다. 바로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 산에서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율법이 선포되고 있는데 산 아래에선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끈 모세는 어찌 됐는지 모르겠으니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신>을 만들고자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잘 생각하지 못했지만, 재밌는 게 있다. 바로 금송아지를 만든 금의 출처다. 사람들은 그저 금으로 만들었다고만 생각하지만, 금송아지를 만든 금은 귀걸이라고 특정하고 있다. 아론이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가져오라고 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출 32:2)

 

또 하나의 질문은 '왜 송아지인가?'. 기왕에 우상을 만들려면 더 강하고 의미 있는 짐승도 있을 것이고, 더구나 애굽에서 인도해 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신을 구하는 상황이라면 송아지가 아니라 독수리나 길을 찾거나 인도하는 동물을 형상화할 수도 있을 텐데, 오히려 노동의 상징인 소를 형상화했다는 건 생각의 여지가 있다.

 

또한 성경에서 귀는 들음의 상징이다. 이건 굳이 성경이 아니어도 이견이 없는 상징이다. 들음은 믿음의 시작이고, 귀걸이는 귀를 가치 있게 만든다. 따라서 금귀걸이는 무엇을 귀하게 듣는가를 설명한다. 금귀걸이로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노동, 곧 육신의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한다는 말씀을 금 같은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금귀걸이로 송아지를 만들었다는 건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걸 귀하게 여기겠다는 것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을 두고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단지 그러면 안 되는 경계의 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오늘날 기독교인 대부분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하고 있다. 모두 행동으로 성경을 지켜내야 한다는 말씀에 귀를 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올바른 길이며 복을 받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 생각이 바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이 사건의 목적이다. <우리를 위해, 우리의 신>을 만들자는 게 목적이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나의 유익을 얻겠다는 것인데, 이는 오늘날 신앙인들이 성경을 지켜서 육신의 복을 얻겠다는 것과 같다. 성경대로 살아야 육신이 평안하고 복을 누리며, 반대로 성경대로 살지 않는다면 육신이 불행한 일을 당한다는 생각에 이를 회피하려고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우리'를 위한 신앙생활인 증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를 위한 우리의 신>으로 금송아지를 만든 목적과 완전히 같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육신의 복을 구하고, 육신의 재앙을 피하려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나 그렇게 육신을 위한 신앙은 모두 우상 숭배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육신의 평안과 번영을 위해 행위를 거룩하게 하고, 행동으로 성경을 지킨 다음 그 공로를 하나님께 제시하고 반대급부로 자신을 위한 것들을 얻으려 한다. 그래서 송아지처럼 노동하고, 수고하고, 노력하면 복을 준다는 말씀을 듣고서 귀하게 여기고 그대로 행하려 수고한다. 금귀걸이로 금송아지를 만든다는 건 사람의 이런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엄히 벌하셨다. 언제나 그랬다.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마음과 그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로 육신의 평안과 번영을 얻으려는 사람의 마음을 아주 싫어하셨다. 이런 목적으로 드리는 제사가 너무 싫어서 "누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라고 하실 정도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예수님도 다르지 않았다. 하나님께 제사의 행위와 율법을 지키는 공로를 드리고, 육신의 평안을 얻으려는 걸 <장사하는 것>이라고 일갈하셨다. <우리를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처럼, 육신의 복락을 위해 소와 양과 비둘기를 드리는 건 하나님과 거래하고 장사하려는 시도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사실 이건 장사와 거래가 맞다. 이게 장사로 보이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모두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있다. 더 나아가 그렇게 하는 게 진정한 신앙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금같이 귀하게 여기며 자기 귀를 내어 주고, 그 외침대로 살려고 송아지처럼 노력한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자기 생각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우상 숭배고, 하나님과 장사하려는 시도이며, 존재의 하나님을 행위와 공로를 귀하게 여기는 하찮은 신으로 대하는 모욕이다.

 

사람이 육신의 평안을 위해 노력으로 성경을 지키라는 말을 귀하게 여기고, 그 말대로 노력하는 건 심각한 우상 숭배인데 사람들은 오히려 그걸 금처럼 귀하게 여기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은 반면교사를 위해서 기록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성경이 그렇듯 오늘도 금송아지는 곳곳에서 만들고 숭배하고 있다. 금같이 귀한 대접을 받는 육신의 수고에 하나님이 감동해서 복락을 주신다는 다양한 신앙 대부분이 이것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육신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복락을 귀하게 여긴다. 이것만 보고 좇아가니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못 본다. 더욱이 지금은 달력으로 예수님 오신 이후니 뭘 해도 다 복음일 것이라 착각한다.

 

우리는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약 성경의 말씀도 <해야 한다>가 되는 순간 율법이 되고, 행위로 의로워지는 시도가 된다는 걸 간과하면 안 된다. 이 둘을 보지 못하면 육신의 복락을 주신다는 말씀을 귀하게 여기게 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금송아지를 섬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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