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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1-5)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은 신비하다. 떨기나무가 불타고 있는데 정작 나무는 타지 않고 불꽃만 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다양하게 해석하지만, 핵심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밝히시는 것이다. 이것을 보지 않고 신비한 능력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성경을 잘못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건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겠다는 뜻과 하나님의 정체성이 연결되어 있다. 모세를 부르는 장면 속에 보이신 하나님의 능력은 모두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의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과 그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일이다.

 

<출처 : Freepik>

 

불이란 게 원래 연료(가연물)가 있어야 한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다면 떨기나무가 연소하여야 한다. 그런데 나무가 타지 않는다는 건 스스로 타는 불이란 의미다.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스스로 타는 불꽃으로 나타난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떨기나무는 타지 않고 스스로 타는 불꽃으로 임하신 것

 

스스로 존재한다는 건 단지 하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만이 아니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건 존재의 시작과 의미와 목적을 모두 가진 존재라는 뜻이다. 그건 사람이 인지하는 스스로와 세상의 모든 존재, 자기 의지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존재의 기원과 의미와 목적을 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의미다.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아 너의 존재 목적과 의미는 내가 정한다."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간구를 들으시고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부르시는 자리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정체성을 말씀하셨다는 건 이스라엘에 베푸실 구원이 하나님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애굽의 국고성을 쌓는 삶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이나, 세상 가치 추구에 매인 삶을 사는 모든 세대의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스스로 존재한다는 하나님의 정한 사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베푸는 구원은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

 

불타지 않는 떨기나무의 신비함은 이처럼 단순한 기적이 아니다. 연료인 나무가 타지 않는 불꽃, 스스로 타는 불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은 바로 존재의 회복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 곧 모든 존재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정하는 하나님이 정한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모세를 불러 베푸시려는 구원임을 말씀하시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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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 물의 선지자 모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3. 6. 18. 23:25 Writer : 김홍덕

출애굽기 2장에서는 모세의 출생과 성장 과정이, 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모세와 관련하여 가장 특징적인 건 바로 ""이다. 모세라는 이름의 의미마저 '물에서 건진 자'.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 모든 율법의 뿌리인 십계명을 받았고, 율법적인 삶을 상징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 여정 동안의 지도자다. 그의 모든 게 물과 관련이 있다.

 

홍해를 가르는 모세 (DALL-E가 그린 그림)

 

특별히 물은 성경에서 늘 말씀을 의미한다. 그중에서 광야의 지도자인 모세와의 관련성은 아무래도 율법적 측면이다. 물은 성경에서 말씀을 의미하는데 어떤 사람,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율법적인 측면으로 해석될 수 있고, 또 복음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십자가에서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몸에서 나왔다는 물이 그렇다. 육신이 된 하나님 말씀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율법적인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 가치를 좇는 삶과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려는 율법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본성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삶의 의미와 목적,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인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본성이 된 사람이 되는 게 구원이다. 신호에 따라 움직이듯 자아 밖에 있는 말씀을 좇아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본성대로 살기만 해도 모든 게 귀하게 되고, 모든 행위가 성경을 지킬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게 구원이다. 그런 존재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다.

 

그러나 그 이전에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긴 세월 동안 율법적인 생활을 한다. 사람들은 이걸 간과한다. 출애굽기와 모세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이 세월을 설명한다. 40년의 세월, 광야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이 율법적인 의식을 벗고 복음적인 사고를 하기까지 세월이 적지 않다는 걸 설명한다. 모세는 이 세월을 상징하는 사람이고, 율법에 깊이 찌들어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걸 벗고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으로 거듭나는지를 설명하는 사람이다.

 

모세는 남자아이가 나면 물에 던져버리라는 바로의 명이 집행되던 시절에 태어났다. 이에 그 어머니가 태어난 후 3개월 동안을 숨겨 키웠으나 더 이상 숨겨 키울 수 없어 상자에 넣어 강물 갈대 사이에 두었다. 이때 바로의 딸이 이를 보고 양자로 삼아 키웠다. 바로의 딸이 '물에서 건져낸 자'라고 이름한 이유다. 그리고 모세는 홍해라는 큰물을 건너고, 율법 생활의 상징인 광야 생활을 인도한다. 물에서 건져진 사람이 율법의 삶을 끝단까지 구원의 여정을 이끌고 여호수아에게 바통을 넘긴다. 마치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바통을 넘기듯.

 

앞서 애굽-광야-가나안이라는 3개의 과정으로 구원을 설명했지만 그렇다고 이 과정이 분리되었거나 독립된 건 아니다. 이어진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처럼 이건 한 사람 안에서 연결된 과정이다. 특히 유념해야 하는 건 이건 한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란 점이다.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에서 율법적인 신앙 세계를 지나 복음으로 거듭나는 것이므로 구원의 여정은 연결된 일련의 과정이다.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세례 요한에서 예수님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율법적 습성을 버리는 것이다. 물론 율법적인 사람이 되기 이전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사는 세월이 있지만 정말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과정은 율법적인 과정이다. 출애굽기라는 긴 성경을 통해서, 아니 어쩌면 구약성경 전체를 할애할 정도로 사람이 율법의 관습을 벗는 게 중요하다. 율법적인 삶도 복음의 삶이 아닌 건 세상적인 삶과 같기 때문이다. 어쩌면 복음도 아닌데 괜히 성경을 지키며 살아가는 억울함마저 묻어 있는 삶이 율법적인 삶이다.

 

예수님께서 모세가 우리를 고소한다고 하셨는데, 이는 율법일 우리를 고소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율법일 우리를 죄인으로 만든다는 의미인데,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한다는 뜻이다. 죄를 깨닫는다는 건 독립된 행위가 아니다. 죄를 깨닫는다는 건 곧 자기 죄를 시인하는 것이고, 그건 구원의 시작이다. 신호가 있어야, 율법의 삶을 의미하는 모세가 이끄는 광야 생활에 이어 가나안으로 대변되는 구름 기둥이나 불기둥 같은 신호가 없어도 하나님의 의를 좇아 사는 복음의 삶, 구원으로 삶으로 이어진다. 물의 사람 모세의 역할이자 율법의 역할이 이것임을 보여준다.

 

내가 너희를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모세니라(요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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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 구원은 어떤 변화인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3. 6. 10. 12:17 Writer : 김홍덕

출애굽 과정은 크게 3단계를 거친다. 애굽-광야-가나안. 그리고 하나의 전환마다 큰물을 건넌다. 이 과정이 바로 우리 구원의 과정, 단계를 설명한다.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던 우리의 삶이 세례를 받고 광야를 지나듯 율법적인 신앙 여정을 거치고, 율법적인 삶의 끝에 자유의 복음을 누리게 된다. 이 중에서 특히 주목해야 하는 건 광야의 삶이다. 출애굽기 분량 대부분이 광야 생활이라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된다.

 

 

이런 출애굽의 과정은 다시 크게 보면 2단계다. 복음 전의 삶과 복음 후의 삶. 애굽이나 광야는 어차피 가나안이 아니다. 복음의 삶이 아니란 의미다. 이 둘의 차이는 나를 움직이는 이유, 목적, 동기, 의미가 내 안에 있는지 아니면 내 밖에 있는지의 차이다. 애굽에서는 애굽 병사의 신호에, 광야에서는 불기둥이나 구름 기둥의 신호에 맞추어 살았지만, 가나안에서는 자의로 움직이고 결정하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내 안에 있는 본성에 이끌려 살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건 정체성이 다른 존재다. 외형적으로 노예에서 자유인이란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광야의 삶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낮에는 너무 덥고, 밤에는 또 너무 추운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은 그늘과 온도라는 생존의 절대 조건을 제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갔다. 구름 기둥, 불기둥이 길라잡이였고, 이동과 멈춤의 신호였다. 이걸 벗어날 수 없다.

 

구름 기둥, 불기둥은 율법적 신앙의 본질적 모습

 

구름 기둥, 불기둥과 함께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 모습이 율법적인 신앙의 모든 걸 보여준다. 율법적인 신앙은 구약성경을 지키려는 신앙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일요일이 아닌 금요일 해 질 녘부터 토요일 해 질 때까지를 안식일로 지킨다는 것이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신앙을 말하는 게 아니다. 율법적인 신앙은 신구약을 가리지 않고 해야만 한다. 그래야 복을 받는다 혹은 벌을 받지 않는다는 신앙이다. ‘기도해야 복을 받는다봉사해야 복을 받는다같은 사고나 말, 반대로 주일날 예배 빠지면 벌 받는다는 사고나 말이 율법적인 신앙이다. 당연히 그런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행여 어겨서 벌을 받을까 염려하는 것 역시 율법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하는 걱정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아니 일반적이고 심지어 그런 걱정을 깨어 있는 신앙이라고 말하는 기독교인의 신앙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벗어날 수 없는 이스라엘처럼 성경대로 살지 않았을 때 벌어질 일들을 감당할 수 없어 어떻게든 성경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신앙이다. 심지어 자신도 자신의 행위와 본심이 일치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행한다. 벗어나면 일어날 큰일이나 바라는 평안과 복락을 얻을 수 없게 되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어서가 아니라 밉보이면 불행한 일을 당할까 염려함이 신앙의 동력이다. 이런 마음으로는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행위로 의로워져 이득을 구하기 때문이다.

 

구원, 진정한 구원은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다. 광야의 삶과 같은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존재에서 자기 안에 성경을 지킬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거듭나는 게 구원이다. 불행을 당하지 않으려, 세상에서 복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성경을 지키고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성경을 지키지 않으려 해도, 그냥 살 뿐인데 모든 삶이 가나안의 삶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냥 사는 것 같은데도 성경을 다 이루고 지킬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 이게 구원이다. 당연히 오늘 나의 삶이 이렇지 않다면 구원받은 게 아니다. 이것이 출애굽기를 통해 발견될 때 구원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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