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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명대로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만나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러 가야겠다고 말하자 애굽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더 핍박한다. 국고성을 쌓는 벽돌을 만들 때 넣는 짚을 스스로 구해서 만들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고자 하니 세상 가치 추구하는 삶을 상징하는 애굽의 왕이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일에 더 수고하도록 핍박하는 모양새다. 하나님을 바로 믿기 시작할 때 겪게 되는 시련이나 핍박의 단면을 보여준다.

 

핍박이란 단어는 의외의 이중성이 있다. (사실 신앙 용어 대게가 그렇다) 존재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본질적인 핍박을 겪는다. 반면에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저항을 자기중심적으로 핍박이나 시련이라 말한다. 사람의 생각 중에는 이타적이고 인류애적인 사회 가치관을 지키고 도전할 때 마주하는 저항과 시련은 세상도 공감한다. 그렇다고 해도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소용없다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생각하는 가치에서 벗어난다면 사람도 터부시하는 자기중심적 가치관은 물론 인류애적 가치를 추구하며 겪는 시련도 성경이 의도하는 시련과 핍박은 아니다. 그 모든 건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을 사람 생각으로 살며 겪는 마찰일 뿐이다.

 

휴대폰이 주인의 의도에 합당하게 작동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앞에 자신을 드리는 희생은 당연함에도 세상은 이를 핍박한다. 하나님의 뜻과 의는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인데 세상의 가치는 성과 탑을 쌓아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이 오르는 게 의와 가치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된 구조가 세상에 악이 관영하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다. 바로의 핍박은 이를 보여준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핍박은 낮아짐을 가치로 여기는 것에 대한 핍박이다. 모두가 높아지는 걸 가치와 의로 여기는데 낮아지는 걸 의로 여긴다는 건 당연한 조롱거리며, 조롱할 대상을 핍박하는 건 어쩌면 인지상정에 가깝다. 심지어 낮아지는 걸 핍박하며 오르려는 높은 곳은 협소하다. 모두가 오를 수도 없기에 서로를 이겨내고 밟아도 겨우 극소수만 이를 수 있는 가치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조롱하고 핍박한다. 그런 세상에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정한 가치로 여길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나서 산다는 건 모든 게 핍박일 수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게 있다. 높이 오르는 게 가치와 의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인정할 수 없지만(그렇기에 죄악이다) 이 세상은, 높이 오르려는 걸 가치로 여기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기에 제아무리 높이 올라 위세를 떨쳐도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의고 진리인 세계 속의 반란일 뿐이다. 따라서 낮아짐을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 낮아지는 성품을 표현하고자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낮아지는 게 진리고 의로움이다. 그걸 보이시려 예수님께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셨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세상의 이런 핍박을 핍박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건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죽어서 가는 천국이 어떻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죽지 않았으니 알 수 없듯 거듭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야기다. 십자가는 신념이 아니라 본성으로 지는 거라는 걸 깨닫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생명에겐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에겐 세상의 핍박이 오히려 삶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인생은 괴로운 것이라 말하면서도 애착을 가지고 즐기고 즐기듯이 십자가를 지는 본성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들에겐 심지어 기쁨이다.

 

바로의 핍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으로 성공한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가 망한다. 천동설처럼 일반적이라고 진리가 아니듯 세상이 모두 높이 올라가는 걸 찬양해도 엄연히 이 세상은 십자가를 지는 게 의로움인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다. 따라서 우선은 세상의 핍박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핍박하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 핍박이 하나님의 의를 역행하는 것이기에 더 큰 저항을 받는다. 그리고 그건 10가지 재앙 마지막에 모든 장자가 죽는 것에서 보듯 그건 자신의 사망일 뿐 아니라 자기 의로 이룬 모든 형식(아들)도 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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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목욕한 자와 세족의식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3. 8. 16. 15:19 Writer : 김홍덕

회개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말씀이 있다. 바로 세족의식이라 일컫는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 13:8-10)

 

 

<회개를 계속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구원은 '생명을 얻는 것'이라 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다는 걸 간과하면 안 된다. 그런 구원을 얻기 위한 회개가 여러 번이 될 수 없는 근원적인 이유를 설명한다. 생명을 얻는 거듭남이 한 번이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일 또한 단번에, 한 번만 있는 일이다. 이렇듯 한 번의 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절대 조건이 회개라면 회개는 당연히 한 번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목욕한 자는 바로 구원을 얻은 사람이 틀림없다.

 

그런데 목욕이나 발을 씻는 건 씻는다는 행위로만 보면 같은 부류로 보인다. 즉 목욕이라는 회개를 했다고 해도 다시 발을 씻는 회개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볼 게 있다. 발 씻기는 걸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가 발을 씻기지 않는다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다. 무엇보다 발은 예수님이 씻기는 것이지 베드로나, 우리 자신이 씻는 게 아니다. 이건 회개에 관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말씀이다.

 

발은 자기가 씻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계속 회개하라는 의도로 하신 말씀이 아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는 말씀, 곧 메시지는 목욕했더라도 계속 회개하라는 게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게 예수님의 의도다. 본을 보였으니 너희도 행하라는 게 예수님의 의도다. 그러니까 발을 씻기고, 서로 사랑하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의 다른 버전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이건 구원을 좌지우지하는 회개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십자가를 지신다. 분명히 지지 않아도 되는 십자가지만 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생각처럼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각오하고 신념을 가지고 지신 십자가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에 이끌려서 지신 십자가다. 이 또한 구원과 회개 못지않게 기독교인들이 모르고 착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의도는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즉 나와 같이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고, 다른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주장 앞에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라는 의도다. 신념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그렇게 하는 게 복음인데,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이미 그런 존재가 되었다고 확증하신다.

 

물론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실 때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가룟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건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룟유다는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에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확정했다. 예수님께서 그를 깨끗하지 않다, 목욕하지 않았다고 하신 이유다. 목욕했다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11명의 제자는 십자가를 진다는 예수님으로 인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두고 이들로 인하여 영화롭게 되었다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17) 그리고 발을 씻기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발을 씻겨야만 상관있어진다는 게 아니다. 이미 상관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그 상관성,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듯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답게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고, 남에게 육신과 그 수고를 내어 주어야 예수님과 상관이 있다는 말씀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신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앞서 설명한 것처럼 발은 자기가 자기 발을 씻는 게 아니다. 자기가 자기 죄를 회개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구원을 좌지우지하는 죄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다움에 관한 말씀이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사랑을 표현할 때 목욕한 자, 곧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다움이 표현된다는 의미다.

 

예수님과 상관이 있다는 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로 거듭났으면 그리스도다움을 나타내어 그 상관성을 보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구원의 단 하나의 조건인 자기 죄를 회개하는 건 아버지를 갈아타지 않는 이상, 한 번만 하면 되는 일이다. 다만 아들로 살아갈 때 아버지의 아들다움으로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아들이란 정체성이 바뀌진 않는다. 죽을 수는 있어도 이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들이 간혹 잘못된 행동을 해도 그 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끊어질까 염려하진 않는다. 이건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는 게 아닌가? 염려하는 것과 다른 차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있어 일상의 회개는 늘 자신이 그리스도답지 못함에 대한 반성을 하게 한다. 이런 반성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는 출발점이다. 분명한 건 거듭난 사람은 잘못 때문에 구원에서 멀어질까? 아니면 천국에 가지 못할까? 염려하지 않는다.

 

물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구원받은 사람도 사회적인, 또 도덕적인 죄나 실수를 범한다. 그러나 단언컨대 진정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일로 벌을 내리거나 구원에서 떨쳐내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아들과 아버지 둘 중 하나가 죽을 수는 있어도 그 관계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있어 일상의 회개는 그리스도로 살지 못한 순간에 대한 반성이다. 남의 발을 씻기고,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다른 사람에게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지 못한 일에 대한 반성이지 구원의 변경시키는 죄가 아니다. 이것에 관한 믿음도 없다면,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확신이 없다면, 아닐거라 아무리 부인해도 자신이 구원받은 존재라는 걸 오히려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면 지금 구원받은 게 아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오히려 구원받을 만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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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의 구원과 복음의 구원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3. 8. 14. 15:07 Writer : 김홍덕

최근에 구원받았는데 다시 회개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말씀으로 인해 몇몇 분들이 구원파와의 차이를 물어왔다. 다들 구원은 어떤 존재가 되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아는 분들이라 걱정은 하지 않지만 생각해보니 어떤 이들에겐 고민이 되리라 생각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1. 복음의 구원은 구원의 정체성이 다르다.

구원파는 물론이고 기독교, 천주교 그리고 그 아류들이 말하는 구원은 존재론적 구원이라 하기 힘들다. 현재 블로그에 연재되고 있는 출애굽기에서 자주 설명하듯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자기 생명의 본성, 삶의 목적과 의미인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존재론적 구원과 구원파를 비롯하여 일반적으로 말하는 구원의 차이는 구원을 믿는 사람들의 기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신앙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은 구원받으면 만사형통하고 죽고 천국에 가면 금면류관을 얻는 구원이다. 그래서 그들의 기도는 늘 육신의 일을 구한다.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는 힘을 주시길 구하여 그 힘으로 세상의 유혹을 이겨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기를 구한다. 이런 기도를 정리하면, '돈 달라', '밥 달라'.

 

이런 기도에 있어 구원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는 대상이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구원을 얻어야 하나님께 육신의 성공을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계층에 속하게 된다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경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께 무언가 간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흔쾌히 주실 마음이 들도록 늘 행실을 경건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표현을 용인하지 않겠지만 신앙인의 신앙 행위 대부분은 '해야 하므로', '하지 않으면 벌을 받기에', '이렇게 해야 상을 받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런 신앙 안에는 <노력>이 빠질 수 없다. 늘 깨어 있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경건하려 노력해야 한다. 이런 가치관의 집약이 천주교의 신부나 수녀 그리고 예전 수도승이다. 그러나 노력이란 분명히 이르지 못한 자의 필수적인 도덕이다. 수능에 합격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 학생은 수능 공부를 다시 하지 않는다. 거듭나서 그리스도가 되었다면 그리스도처럼 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되려고 노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복음의 구원, 존재가 바뀌는 구원은 노력해야 하고, 하지 않으면 벌 받는 그런 구원과는 전혀 다르다. 세계관과 가치관이 다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거듭남이다. 거듭난다는 건 다른 생명이 된다는 의미다. 늘 비유하듯 만약 늑대가 양으로 거듭난다면 고기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인 것처럼,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난다면 복을 받기 위해서나 벌 받지 않기 위해서 성경을 지키는 게 아니라, 행여 어기려고 해도 어길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2. 구원받았다면 회개하지 않는다.

이 문장이 구원파와 많이 겹치는 모양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근원적으로 구원이 다르다. 구원이 다른데 회개가 같을 리 없다. 공산당이 민주주의라고 말한다고 그게 민주주의가 아니듯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 아닌 다른 구원의 세계에서 회개를 몇 번 하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을 얻었다면 다시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 이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다른 구원이 한 번만 회개하면 된다고 말한다고 같은 구원, 같은 회개가 될 수는 없다.

 

구원이 다르면 회개가 다르고, 회개가 다르다는 건 죄도 다르다는 의미다. 또한 구원이 어디서부터 어디로의 구원인지도 명백히 다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에서 벗어난 자리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이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나는 구원과 육신이란 형식이 처한 사람의 곤고함에서 벗어나 육신의 문제를 기도하면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는 범주에 편입하는 건 어느 구석도 같은 데가 없는 전혀 다른 구원이다.

 

특히 회개는 한 번이면 족하다는 건 존재가 바뀌는 걸 말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벗어난 존재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삶의 본성이 된 생명으로 거듭나는 건 한 번이면 된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다음에 또 무엇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게 성경에 있는가? 이처럼 존재가 바뀌는 게 회개다. 이 회개라면 당연히 한 번이면 족하다.

 

그러나 구원파가 말하는 회개는 행위로 범하는 죄에 대한 회개다. 한 번의 회개로 다시는 죄를 범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고 말하려 하니 여러 모순에 직면한다. 그래서 구원받아도 죄를 짓는 건 어쩔 수 없다는 사족을 떨칠 수 없다. 그리고 이건 소위 정통이라 말하는 사람들 역시 벗어 버릴 수 없기에, 이런 굴레를 벗는 것처럼 말하는 구원파가 용납되지 않는다.

 

더 심각한 건 하나님의 구원은 분명 한 번의 회개면 충분한데 이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불신이 (다행이도) 구원파의 그릇된 구원을 감찰한 공로는 있을지 모르지만, 정작 자신들이 거듭난다는 구원 이후에 회개하고 있다는 절대적인 모순은 더 해결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왜냐하면 정통이라는 신앙 역시 죄는 행위에 관한 것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존재가 목적을 벗어난 게 죄라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 하나님이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 물으신 게 아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즉 너는 어떤 존재인지를 물으셨다. 예수님도 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사람이 예수님의 행동이 아니라 존재 정체성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는지를 물으셨다.

 

그렇다면 구원과 회개는 모두 존재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 사람의 어떤 행위가 성경과 규범을 벗어났는지로 죄를 정의하면 구원도, 회개도 미궁과 모순에 빠진다. 그래서 아직도 연구한다. 신학이란 학문이 되었다. 하나님 말씀이 연구할 일인가? 믿음으로 순종하면 거듭나는 것이지.

 

거듭남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거듭나서,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다.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고, 그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로 거듭났는데 성경을 지키려는 노력은 왜 필요하며,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게 자기 생명 본성이 되었는데 뭘 더 어떻게 회개하고, 경건해져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다윗이나 선지자들이 간음하고 후처를 얻기도 하고 또 행위라는 관점에서 죄를 범함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옥에 던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심지어 모세가 이방 여자(구스 여인)를 취했을 때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책망하자 하나님은 도리어 아론을 책망하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발하기도 했다. 이런 하나님 앞에 행위를 기준으로 죄와 구원을 논하는 게 바른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3. 맺는 말

성경이 말하는 죄는 행위가 본질이 아니다. 행위는 존재에서 비롯된다. 간첩은 제아무리 선한 일도 하면 할수록 죄가 되듯, 하나님이 원하는 존재로 거듭난 게 아니라면 말 그대로 천사의 말을 해도 소용없다. 이게 하나님의 시각이다. 따라서 당연히 구원도 존재의 회복이다. 그래서 거듭남이다. 그리고 거듭남은 생명에 관한 말이다. 생명이기에 본성이 있고, 그 거듭난 본성이 그리스도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게 구원의 회개이므로 한 번만 거듭나면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살면 그의 모든 삶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꼭 언급해야 하는 게 있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에는 도둑질이 없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생명은 하나님이 죄로 여기실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게 그리스도라는 본성의 본질이고 정체성이다. 이것도 모르면서 구원을 논하거나, 회개의 횟수를 논하는 건 오지랖에 불과하다. 구원파는 물론 자기를 정통이라 말하는 신앙들의 구원론과 회개 그리고 죄사함은 다 오지랖이다. 자기가 모르고, 자기 정체성 아닌 걸 떠드니 다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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