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54

(2:43-47)

베드로의 설교에 양심이 찔린 사람들은 어찌할지를 물었고,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3,00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초대교회가 사람 사회 속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썼다. 교회가 어떤 곳인지, 어떻게 시작하는지를 설명한다.

 

3,000명의 회개, 그리고 교회의 시작

 

우리가 알고 있고 길에서 볼 수 있는 교회는 일반적으로 먼저 목사 라이선스를 가진 사람이 건물을 임대하고 사람을 모으는 걸로 시작한다. 이런 시작은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실 사도행전 교회의 시작과는 명백히 다르다. 시작이 다르다는 건 미세한 차이가 아니다. 천로역정에서 담 넘어 순례를 시작한 사람을 생각하면 된다. 결국 그는 순례를 다 마치지 못했다.

 

잠깐 부연하자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내재한 생명의 본성이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도하고, 봉사하고, 착한 말씨로 살아가면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생각한다. 행동이 자기 정체성을 하나님 아들로 바꾼다고 믿고 있다. 명백히 방향이 반대다.

 

교회의 시작도 마찬가지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내재한 그리스도의 본성이 삶으로 나타나는 게 하나님 말씀의 방향성인 만큼 교회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모이는 게 먼저다. 그리고 건물이 필요해지면 그때 그 용도만을 위해 마련하면 족하다. 이런 교회가 이 시대 기독교의 로망인 초대교회의 본질이다. 건물이 있어야 교회가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돌아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만남 자체가 곧 교회다.

 

또 하나 우리를 주목하게 하는 초대교회에 관한 말씀이 있다. 바로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소유와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라는 말씀이다. 어쩌면 낭설처럼 이 말씀이 공산주의의 씨앗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말씀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교회가 어떤 사람이 어떻게 모인 곳인지를 먼저 생각하고서 이 말씀을 봐야 한다. 그저 교회는, 또는 하나님을 믿으려면 자기 물건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방향도 그게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니 그렇다는 것이지, 이렇게 살아야 교회다워지는 게 아니다.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면 마치 공산주의 사회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정체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건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 곧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표현하시겠다는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즉 자기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이 된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자기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이 된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삶이 된 사람은 모든 게 하나님의 말씀에 수렴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항상', '범사'와 같은 빈도 부사를 충족시키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이같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렇게 사는 생명체가 되는 것뿐이다. 현재 기독교인들이 하듯이 노력으로는 어렵다.

 

모든 걸 통용한다는 건 모인 사람 모두가 자기 인생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

 

모든 물건을 통용한다는 건 내 것, 네 것 없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그저 사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교회에 모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데 자기의 모든 걸 사용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누구나 가릴 것 없이 자기가 가진 물건을 모두 하나의 목적에 사용하는 것, 이것이 모든 걸 통용하는 것이다. 마치 자동차 공장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모두가 가진 걸 가지고 자동차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것과 같다. 자기 삶의 모든 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데 쓰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들의 삶을 통틀어 모두가 모든 걸 주를 위해 통용하는 것이다.

 

소유와 재산을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눈다는 말씀 역시 같은 맥락이다. 부자가 가진 재산으로 가난한 자의 필요를 돕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필요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의 필요다. 누군가 그런 삶으로 거듭나는 데 필요한 필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의 어려움을 돕는 필요다. 무작정 재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역을 위해서, 또 그런 사람의 형편을 돕기 위한 필요다. 노숙자에게 밥 나누어주는 것과 같은 것을 한정하는 게 아니다.

 

재산을 팔아 나누어 주는 필요는 사람이 거듭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을 돕는 데 필요한 필요를 말한다.

 

그렇다면 떡을 떼고 교제에 힘쓴다는 말씀도 여기에 귀속된다. 떡은 거듭난 영혼의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의 믿음을 보증하고 위로하는 말씀과 간증이고, 교제는 그것을 나누는 것이다. 그것을 나눔으로 서로가 자기 삶이 하나님께 영광됨을 보증받고, 위로받으며, 그 삶에 더욱 힘쓰게 되는 것이다. 이건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만족스럽지 못한 교회 생활에 '좋은 말씀과 교회가 없을까?' 방황하는 사람이 쉽게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모든 건 결국 교회가 무엇으로 시작하고, 무엇을 함께하는 공동체인가에서 결정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육신의 삶의 축복을 공유하고자 하는 교회라면 먼저 건물을 구하고 사람을 모아 노숙자에게 밥 지어주는 걸 재산을 나누어 주는 걸로 알고 그렇게 교회를 운영할 것이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의 만남이 교회의 시작이란 걸 알면 그리스도의 생명 본성으로 사는 삶의 모습이 모든 걸 통용하고, 주를 위한 필요를 위해 자기 가진 걸 내어놓고, 거듭난 삶의 열매를 나누고 교제하는 교회인 걸 알 것이다. 이 차이가 교회에 대한 만족을 나누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차이를 만든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2024 주기도문) 우리 아버지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5. 9. 19:3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성경이 말하는 아버지와 아들은 육신의 관계를 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와 생각이 형상 곧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다. 육신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한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따라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건 기도하는 사람이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겠다는 고백이다. 이걸 요한 사도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표현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표상이므로 그와 같은 육신을 가진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이 삶으로 나타나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걸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신 의도는 우리가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 사람을 통해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육신, 곧 삶인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 그런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려면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으로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호칭이다. 이건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란 관계는 생명 관계로 노력으로 되지 않듯,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의 삶 자체가 되는 것 역시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즉 성경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니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말하는 건 모든 게 엉망인 상태지 겸손이나 신앙이 아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사람이 가진 기도의 기본 개념은 '사람의 호소가 하늘을 감동하게 해 뜻, 곧 사람이 가지지 못했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룬다.'. 그래서 하늘에 기도한다.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고,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한다. 하늘이 사람의 운명을 쥐고 있다는 인류의 공통적 개념이 어떤 종교든 언제나 하늘에 기도하고, 하늘에 호소한다. 하늘은 사람이 가지지 못한 모든 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늘에 기도하는 데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점은 <하늘이 어디냐?>는 것과 <사람은 가지지 못했지만 하늘이 가진 게 무엇이냐?>.

 

그렇다면 먼저 예수님의 승천을 통해 사람이 구하는 걸 준다고 믿고 있는 하늘이 어디인지를 생각해 보자. 사도행전 16-11절에는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그 모습을 사람들이 보고 있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승천하는 예수님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

 

"어찌하여 하늘을 보고 있느냐?"는 흰옷 입은 사람의 말에서 예수님은 우주 공간으로 올라가신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2,000여 년이 지났다고는 해도 사람이 볼 수 있는 속도로 올라갔다면 몇만 광년(빛이 일 년간 가는 거리)을 논하는 우주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 승천 당시 올라가신 방향이 우주 어느 방향인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우주 어디를 봐야 예수님이 가신 하늘인지 특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무심코 또 당연히 머리에 이고 있는 하늘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지만,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이 우주 공간을 한정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년부 시절 불렀던 '저 높은 우주에 천국을 만들고 주 믿는 사람 오라네'(물론, 이건 그냥 시적 표현이다.)라는 노래 가사처럼 하늘을 생각하는 건 주기도문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은 우주와 같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주기도문의 하늘은 우주 공간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건 하나님이 우주 공간의 어느 특정 공간에 머무시면서 사람을 감찰하신다는 게 아니라 사람의 운명을 정하시는 분이라는 개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는 있고 사람에겐 없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호칭에 관해 중요한 두 가지 중 두 번째를 이야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알 수 있다. 바로 사람의 운명, 이것이 하나님께는 있고 정작 당사자인 사람에겐 없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해서 얻어야 하는 본질은 바로 사람의 운명, 이것이다.

 

하나님께는 있고 사람에겐 없는 건 바로 <사람의 운명>

 

사람이 흔히 <운명>이라고 말하는 건 사실 정체성과 존재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 목적대로 살아야 알 수 있는 삶의 의미다. 존재가 목적을 벗어나서 의미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통신과 인터넷이라는 목적을 벗어나 망치질하는 곳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정작 사람의 존재 정체성, 곧 존재하는 목적과 삶의 의미가 당사자인 사람에게는 없고 하나님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은 창조주고 사람은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자기가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 목적과 의미를 스스로 정립할 수 없다. 반면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 곧 정체성을 <스스로 있는(존재하는) >라고 밝히셨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하는 건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라는 고백

 

따라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어야 사람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 만약 사람이 창조되지 않고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진화한다는 건 스마트폰이 자기 존재 목적을 스스로 정립하고 스스로 형성했다는 논리다. 게다가 기능 향상도 자기 스스로 정립했던 정체성에 부족함을 인정하고(스스로 부인하고) 더 나은 기능을 스스로 정립한 다음 정체성을 발전시킨다는 이야기가 된다.(그런 능력이 있다면 처음부터 완전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일은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사람도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게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삶의 목적과 의미를 궁금해할 사람은 없다. 어쩌면 목적이니 의미 같은 개념조차 의미가 없다. 자기가 스스로 창출하는데 필요가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건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고백하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건 하나님을 창조주로 나는 그의 피조물인 관계를 믿고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육신과 함께 삶을 주신 뜻, 이 하나를 구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내가 존재하는 목적과 내 삶의 의미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니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건 내 삶의 목적과 의미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삶의 목적과 의미를 구하는 게 유일한 기도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당연하게 하나님께 육신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걸 기도라고 생각하는 건 많은 걸 잘못 아는 것이다. 하늘이 물리적 우주 공간이 아니듯 기도도 형이하학적인 육신의 문제 해결을 구하는 게 아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이 아님을 확정했다.

 

주기도문의 의도대로 존재의 목적이 분명해지면, 그 목적을 위한 삶에 필요한 건 모두 주신다. 무엇이든 구하면 주시겠다는 약속하신 당연한 이유다. 예수님께서 단 하나의 기도만 주신 것도 같은 이유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온전히 정립되어 사람이 하나님과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인식하고 그 존재 목적대로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아들도 내어 주시는 분이다. 주기도문은 이 하나님께 나를 창조하신 뜻, 곧 나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을 구하는 기도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