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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다른 복음서에 비해 적게 기술되어 있다. 이는 마가복음의 반 정도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예수님과 사람들의 갈등에 할애되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에 관한 기사들 역시 제자들이 그리스도라는 존재에 관해 예수님의 의도대로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음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이런 마가복음의 특징과 온도를 맞추어 짧게 제자들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또 부활의 핵심적 요소를 이야기해보자. 부활 전후의 기사에 대한 해설과 부활의 의미는 다른 복음서와 고린도전서를 참고하시면 되겠다.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은 여러 성경과 자신이 하신 말씀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고 직접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다. 하지만 그렇게 직접 보이셨음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성경의 기록으로 보면 갈릴리 바닷가에서 물고기 153마리를 잡은 때도 반신반의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제자들의 불신은 모순적인 측면이 있다.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를 기대할 때는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믿었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났을 때는 오히려 믿지 않았다는 게 그렇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믿지 못한 게 정상이듯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걸 믿기도 어렵다. 이래저래 제자들은 사람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바라본 셈이다.

 

그러나 앞서 가룟 유다와 제자들의 믿음을 설명한 바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걸 대한 의심은 없었다. 다만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부활도 반신반의했다. 유명한 갈릴리 바닷가에서 나눈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속 베드로의 고백이 이를 증명하기도 한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우정 같은 사랑으로 바라보았다고 고백했었다. 그리스도를 보고 믿는 자신의 안목과 믿음이 하나님의 의와 달랐다는 것을 안 것이다.

 

제자들의 의심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후에도 지속되지만 그건 오순절까지의 일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니 이전에 인정하지 않았던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했다. 그것이 복음이라고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건 곧 부활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부활이란 건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믿지 않는 건 자기 일이 되지도 않는다.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한 기적이 아니다. 부활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운명이다. 그리스도로 난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는 날마다 죽지만 하나님이 살아있는 생명으로 여기는 존재이기에 죽은 데로 둘 수 없어 다시 살리시니 부활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로서 죽은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생명으로 여겨 살리신다는 예표

 

무엇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도 똑같이 일어나는 일이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그리스도로 났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구원하신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을 예수님이 하시지 않는다. 첫 열매, 맏아들이란 표현이 이를 의미한다. 따라서 부활 역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일이 된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 죽임을 당해도 하나님이 죽은 채로 둘 수 없는 살아있고 생명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예수님처럼 그리스도라서 죽고, 그리스도라서 산다. 그리스도라는 생명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사니 세상의 심판을 받아 죽는 예수님과 같은 존재일 때 예수님의 부활이 있다.

 

결국 또다시 그리스도로 거듭남을 마주한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바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린 또다시 그리스도로 거듭난 그리스도라는 본성대로 사는 사람의 삶을 상고하게 된다. 그건 세상의 가치 앞에 나를 낮출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사는 것이다. 신념이나 노력이 아니라 본성에 끌려 거부할 수 없어 낮아지는 삶을 사는 존재로 다시 나는 것, 그리고 그렇게 났기에 그렇게 사는 게 그리스도로 거듭남이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 삶에는 날마다 죽는 죽음이 있다. 낮아지는 그리스도로 높아지는 걸 영광과 선과 의로 여기는 세상을 사니 매일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죽음을 하나님은 생명과 영광과 거룩함이라 하신다. 그러니 날마다 날마다 부활한다. 그리스도로 사는 건 이처럼 날마다 죽고 날마다 부활하는 삶이다. 이 삶에 부활의 비밀이 있다.

 

그러므로 부활은 미래의 어느 날 육신이 다시 사는 일로 한정할 게 아니다.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 '화장한 사람은 어떻하냐?' 묻는 어리석음에 처한다. 애초에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망각한다. 그러나 부활은 그게 본질이 아니다. 그리스도기에 죽고, 그리스도기에 죽으나 그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생명이라 여기시는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는 거룩한 일이 부활이다. 이 부활은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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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다. 이 과정,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동안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는데 마가복음에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의미의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만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시편 22편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하나님께 사람들의 용서를 구하는 말씀을 시작으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한다는 말씀까지의 가상 칠언 중 네 번째 이 말씀에 관한 사람들의 해석은 분분하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다는 표현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에 달려서 하신 다른 말씀과 다소 결이 다른 말씀이 된다.

 

어쩌면 성경은 답이 정해진 말씀이다. 모든 건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한다.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는 게(거듭나는 게) 구원이고, 성경은 사람을 구원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보이러 오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드러나는 십자가에 달렸는데 하나님께서 단 한 순간이라도 예수님을 버린다는 건 성경의 흐름과 주제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말씀은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지속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말씀이다. 그리스도라면 그곳에서 내려오라는 사람들의 조롱에도 그럴 수 없는 그리스도의 본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인류의 죄를 뒤집어쓴 상태이므로 죄인이기에 하나님이 버렸다는 등의 설교는 성경의 근간을 모르는 소리다.

 

엘리 엘리 라마 사마다니라는 예수님의 외침은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고통을 당하는 그리스도를 구하시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외침이다. 사람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과 그 목적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와 다르게 육신의 고통에서 구원하실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구하신다는 건 곧 내려오라는 사람들의 조롱을 수용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안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 믿는다. 예를 들면 주님의 일을 하면 가난의 문제 같은 건 해결하실 거라는 기대 같은 게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해 주신 육신은 언제나 육신의 기능을 다한다. 사람들 앞에서 낮아지는데 그 자체가 기쁨이 되진 않는다. 예수님의 외침은 이걸 보여주신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구원, 우리가 믿는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사람의 의 앞에 나의 의를 버리므로 육신의 수고, 심지어 육신 자체를 내어주는 본성을 가진 존재다. 성경은 그런 그리스도로 거듭남을 두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육신이 십자가를 지는 건 마약에 취한 듯 그 자체가 육신의 능력이나 감각 그리고 감정을 넘어서는 즐거움이 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육신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다.

 

이는 사도들의 간구와 권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행 4:29)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 5:10)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십자가를 지는 게 고통이 아닌 게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는 건 사람들의 조롱을 못 이겨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그리스도가 되는 꼴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듯이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능력, 곧 생명의 본성을 주신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외침이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설명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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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가 유대인들의 성화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주었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로마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한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말을 조롱한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조롱했다. 그리스도라면 그곳에서 내려와 보라며.

 

십자가를 지는 초라한 그리스도를 향한 비난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어느 시대나 그리스도는 높고 귀한 존재고, 그를 믿는 사람을 세상에서 높고 귀하게 만드는 메시아다. 가난하고 초라한데 그리스도라고 하는 건 언제나 비난의 대상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잘 살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이유다. 그리고 그 믿음을 빌미로 십자가를 진 초라한 예수님께 세상의 영광을 구한다.

 

사람의 이런 비난과 실망은 사람 스스로가 가진 기대와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이 낳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예수님을 향한 유대인의 비난도 그렇다. 그들은 한 번도 매 맞고, 또 매 맞는 지경이 된 자신조차 구하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힘없이 끌려가 매 맞는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이라 말하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로마 군인도 비슷하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개념의 대상이 아니지만, 말을 들어보면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잘될 것이라고 하더니 초라하게 망한 모습은 언제나 조롱거리다.

 

우리가 다시 성경을 생각해 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조롱하는 유대인들이 불과 며칠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며 환호한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의 반전이다. 이는 그들이 기대한 그리스도가 예수님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한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했고, 죄인으로 끌려가 채찍질 당하는 모습으로 확정했다.

 

그러니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더 이상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가룟 유다의 판단은 그나마 나았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종 정도로는 봤지만, 유대인들은 강도 바라바만도 못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게 마땅한 죄인으로 보았다. 그러고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리스도라면 내려 와 보라고 조롱했다.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라 믿었던 기대를 배신했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의 분노였다.

 

지금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 대부분은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 자신의 삶을 풍족하게 해 주는 신으로서 예수님을 믿는다. 그들에게 구원은 가난한 저주의 삶에서의 구원이다. 사람으로서의 정체성 회복이나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게 구원이 아니다. 그들의 거듭남은 삶의 축복을 얻는 자격이지,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걸 존재의 목적으로 믿고자 함이 아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언제라도 유대인처럼 돌변할 수 있다. 세상적 실패는 곧 교회와 믿음을 떠나는 정당한 이유가 된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에 의지해 성공하지 못하는 삶에도 믿음을 지키겠다고 신념으로 견디는 사람들은 사후 세계에서의 축복에 기대거나 감나무 밑에 누운 사람이지 예수님처럼 십자가 지는 삶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무식하다.

 

예수님을 세상 문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언제든지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할 수 있는 잠재력을 숨긴 사람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믿음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희롱과 모독이다. 세상 초라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성공을 구한다는 게 얼마나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아주 고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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