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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6) 제단에 관한 계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4. 1. 24. 06:04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건 십계명으로 마감된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백성들을 뒤로하고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가서 많은 계명을 받는다. 31장까지 이어서 받는 계명은 사실상 십계명의 주석과 같은 성격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기도가 주기도문 안에 함축되었듯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십계명 안에 함축되어 있다.

 

하나님은 먼저 제단에 관해 말씀하신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금이나 은으로 상을 만들 수 있으니 이를 금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걱정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으로 송아지를 만든다. (32)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장면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신비로움을 의지하고자 했다.

 

십계명을 설명할 때 언급한 대로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행하는 존재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의 불확실성을 만회하기 위해 형상, (물리적 혹은 철학적) 우상을 만든다. 문제는 그렇게 우상이라는 형상이 있어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은 형식에 의지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많은 사람이 가진 마음이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육신의 삶에 어떤 증거가 있어야 하나님 혹은 자기가 의지하는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상태의 사람이다. 무엇보다 출애굽 당시 사람들만 이런 마음을 가졌던 건 아니다.

 

사람은 신비한 능력을 경험하면 좋은 신앙으로 여긴다.

 

오늘날 사람들도 하나님의 임재나 함께 하심을 육신으로 체험하고자 한다. 그게 신비로운 경험이라면 더더욱 좋다. 더 나가서 주변에 그런 체휼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마음으로 확정한다. 불치병이 낫는 경험이나, 절망적인 사업 환경에서 벗어난 경험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이라며 추종한다. '간증 집회'라는 게 그 증거다. 그들의 간증은 모두 육신의 삶이나 형편 혹은 상황이 개선된 일을 전한다. 예수님께 구한 '하늘에서 온 표적'이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원치 않는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은 표적을 구하지만, 나는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게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요나의 표적을 바로 알지 못한다. 말이야 십자가에 달리시는 기적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평안하고 부유하게 되는 걸 구한다. 자기를 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자기를 도와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마음의 불확실성을 만회하려고 유무형의 우상을 만들고, 기적을 바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건 예수님처럼 육신이 말씀이 되고,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표현하는 것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려면 제단을 만들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하나님을 기념하라 하셨다. 기념한다는 건 하나님이 자기 마음에 있다는 의미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제단을 쌓을 때 토단, 곧 흙으로 단을 쌓으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사람 자신으로 단을 쌓으라는 의미다. 사람은 흙으로 창조된 존재다.

 

산 제사를 드리는 게 흙으로 제단을 쌓는 것

 

이와 같은 맥락으로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 (12:1)'라는 말씀이 있고, 우리 몸을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이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 번제와 화목제의 제물은 나를 대신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제물인 건 아니다. 우리 몸이 성전이고, 산 제사를 드리라고 하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육신이 되는 걸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시겠다는 뜻이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인해 잉태되고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어, 우리 육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이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고, 그런 존재가 되었다면 하나님이 거하시니 성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흙으로 빚어진 사람으로 쌓은 토단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돌로 단을 쌓는다면 다듬지 말라고 하셨다. 정으로 쪼아, 그러니까 사람이 가공한 돌을 쌓는다면 부정한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대로 가공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십계명의 2, 3계명과 연결되어 있다. 사람의 생각대로 조각한 신은 여호와라 불러도 우상이고, 사람의 생각이나 땅의 호소에 반응하는 신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정의 내린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다.

 

다듬은 돌은 사람이 맘대로 해석한 하나님의 말씀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돌은 법, 율법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섬기는 제단을 돌로 쌓는다면 그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임의로 수정하고 가감하여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릴 수 없다. 성경을 사람 맘대로 해석하고 수정해서 지킬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고 하셨다. 같은 구약의 말씀인데도 십일조는 원문 그대로 지키라고 하고, 안식일은 일요일로 바꾸어 지키고, 돼지고기 먹지 말라는 말씀은 아예 무시하는 것과 같은 교리 기준은 돌을 정으로 다듬어서 단을 쌓는 것이다.

 

제단에 관한 마지막 말씀은 계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제단에 오르지 말라고 하셨다. 만약 계단으로 하나님의 제단에 오른다면 너의 벌거벗은 모습이 드러날 것이라는 이유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계단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 계단은 위와 아래가 단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철학적 개념으로 계단은 한 칸 한 칸이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지금은 부족하니 더 나은 존재,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과정을 계단을 올라가는 걸로 생각한다. 이 말씀은 돌로 계단을 만든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제단,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생명을 드리는 것이다. 생명은 계단과 달리 단락되지 않고 연속되고 이어져 있다. 한 살과 스무 살이 계단처럼 스무 칸 차이가 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 이게 생명이고, 이 생명이 자신을 드리는 게 제사고 제단에 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겐 계단이 익숙하다. 교회에 가도 성도의 급이 있다. 목사가 있고, 목사도 급이 있고, 강대상에 오르는 계급이 따로 있고, 장로와 권사가 맡을 수 있는 교회 직분이 따로 있다.

 

부끄러움의 원조는 아담

 

벌거벗은 부끄러움의 원조는 단연 아담이다. 자신이 벗었다는 게 부끄러웠는데, 하나님께 부끄러웠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다. 자기의 벌거벗은 모습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 탓이다. 더 나은 모습이 필요했던 그는 무화과 잎 곧 율법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었다. 무화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춘 상태가 계단 한 칸 위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돌로 계단을, 특히 정으로 쪼아서 계단을 만든다는 건, 지금 나의 모습 이상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생각의 표현이다. 여기에 더해 그 돌을 자기 생각대로 다듬는다면 하나님의 법마저 자의적으로 리모델링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생각은 지금도 만연한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창조된 우리 모습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기에 합당한, 그러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서 온전함을 일관되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벗어나는 건 사람 생각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우상을 조각하여 섬기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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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모두 말씀하실 때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가 나고, 산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 현상을 본 백성들은 매우 두려워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강림은 사람을 시험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안심시킨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출 20:20)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강림은 사람에게 두려운 일이다. 자신의 죄가 드러날까 염려한다는 말이다. 이런 두려움의 시초는 아담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 자기가 벗었다는 게 부끄러웠다는 이유다. 즉 자신이 드러나는 게 두려웠다는 의미다. 그리고 아담은 '붉다'라는 의미의 단어로, 흙으로 만든 사람 모두를 뜻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오직 자기 죄가 드러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건 자기 죄가 드러날까 하는 두려움 때문

 

사람들은 이렇듯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이 자기 죄를 드러나게 하고, 그로 인해 심판받을까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의 기저에는 아담처럼 자기가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게 목적이 아님을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은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죄를 범하지 않는 성결에 있다. 더 본질적으로 보면 죄를 범하지 않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사람은 왜 두려워하는가의 문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지킬 수 없음을 알고 있고, 또 계명을 많이 어겨왔을 뿐 아니라, 자기가 기억하지 못했거나 죄로 인지하지 못한 범죄마저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행동과 생각이 성경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이게 양심이다.

 

사람은 이 두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노력'이라는 타협점을 발굴했다. 특히 신학(神學)이라는 영역에서 성경을 모두 지켜낼 수 없어 근심하는 사람에게 궁여지책으로 노력을 제시했다. 사람은 예수님과 다르므로 예수님처럼 성경을 지킬 수 없으니 최대한 노력해야 하면 하나님께서 그 노력을 인정하실 것이라는 타협안을 신앙인들에게 제시했고, 사람들은 여기서 위안을 찾고 있다.

 

사람의 두려움에 대한 신학의 해결책은 모순적인 '노력하라'

 

하지만 노력이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신앙에는 많은 모순이 있다. 사람이 예수님과 같을 수 없다는 문제의 대안으로 노력을 제시하면서 신분은 예수님과 같다고 믿는다고 한다. 자신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아들이 되었고, 모든 죄는 사함을 받았다고 한다. 예수님과 다른데, 신분은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들이 되고, 성경을 다 지키지 않았는데 죄는 사함을 받았다는 모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모순을 방치한 체 그냥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 다 되겠지', '교회가 시키는 것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에 자기 영혼을 맡기는 도박으로 신앙을 일관하고 있다.

 

여기에 교회는 한 발 더 나가서 예수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아들이 된다고 가르치는 동시에, 기도할 때는 회개부터 하라고 가르친다. 이런 교회의 모순에 상식과 이성을 가진 교인들은 모순 속에 갈등하면서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더 나은 말씀이 없나 찾기도 한다. 이때 교회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벌 받는다."라고. 이건 분명 가스라이팅이다.

 

사람의 두려움을 악용하는 교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주기 위해서나, 심판 자체를 목적으로 계명과 성경을 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신다는 건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시면서 죄를 범하는 순간 각성하고, 유혹을 이기고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런 환경을 인위적으로 저성한 후에 사람이 어떻게 하나 시험하신다고까지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험은 그런 유혹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고 선택하는지를 기다리시는 기다림이 하나님의 시험이다. 사람에게 창조하신 목적을 분명히 알려주시고, 사람이 그 목적을 자기 삶으로 순종하는지 기다리시는 기다림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이다.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사람이 순종하는 건 사람으로선 충분히 가능한 일일 뿐 아니라, 오히려 당연하기에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하신다고도 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신다는 건 사람의 행동이 죄가 되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럴 값이라면 하나님께서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걸 인정하셔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의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이 어떤 존재냐는 것에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어떤 존재가 되면 그의 행위가 죄가 되지 않는다는 법 안에 있다. 아들로 나면 아들의 행위로 인해서 아버지와 아들이란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건, 죄를 범하지 않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시겠다는 뜻

 

따라서 사람이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 자체가 죄와 무관한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존재가 죄와 무관한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의미다. 이를 거듭남이라고 한다. 죄를 범하지 않는 다른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이유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사람이 창조 목적에 합당한, 그 목적이 육신이 된 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다. 행위를 바르게 하라고 주신 게 아니다. 행위는 생명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독립된 게 아니다. 이 법 아래에서 십계명을 주셨고, 성경 말씀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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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은 행간에 숨긴 뜻이 더 중요하긴 하지만 표현된 문자 자체도 당연히 중요하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가진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삶은 생명 본성의 표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먼저다. '거듭남'이란 말을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거듭나면 생명이 바뀌고, 바뀐 생명의 본성에서 비롯된 삶을 살게 된다. 그 삶의 형태가 바로 성경이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말씀은 액면 그대로 남의 물건에 욕심을 내지 말라는 말씀이다. 생각해 볼 건 '소유'. 사람의 모든 건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사람은 거저 '맡은 자' 일뿐 자기가 소유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하셨다. 탐내지 말라고 한 이웃의 소유는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소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신과 삶과 삶에 필요한 재화와 공급을 예비하시고 마치 사람의 소유처럼 주신 것은 사람에게 기대하시는바, 계획하시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웃의 소유는 하나님이 이웃에게 기대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맡기신 것이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게 있는데,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맡겨진 게 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 육신의 삶이 핵심이다.

 

우리가 가진 가장 중요한 소유는 우리의 삶

 

이런 개념으로 볼 때 많이 알고 있는 달란트와 충성, 청지기 같은 말씀들이 여기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 위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웃에게 또 나에게 주신 소유에 대한 바른 생각이 필요하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가 이것일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낙심하여 물고기 잡는 본업으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가서 153마리의 고기를 잡도록 그물 던지는 방향을 말해주신 일이 있었다. 그리고 유명한 베드로와의 대화가 있는데, "내 양의 먹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지막에 베드로가 누구나 요한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을 두고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한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이 사람을 머물게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모두에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있다는 분명한 선언이다.

 

사람은 모두 셀 수 없이 다양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다.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성품과 환경과 철학과 삶을 가진 이유다. 우리가 가진 남다른 것이나 공통적인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 안에 있다. 탐나는 이웃의 맡은 바가 있다면, 나에게도 맡기신 게 있고, 개인의 삶을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이웃의 소유보다 나에게 맡기신 것이 더 중요하다. 이웃의 소유를 탐할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달란트와 소유를 먼저, 귀중하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이 당연함에 관한 말씀이다.

 

이웃의 소유보다 나에게 맡기신 달란트가 중요

 

사람은 마땅히 이웃의 물건을 탐내는 게 옳지 않다. 욕심은 결국 죄와 사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웃이 가진 모든 소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와 뜻, 목적을 위해 주신 것이다. 물질이나 환경 모두가 그 목적 아래 있다. 그러니 이웃과 남의 소유를 모두가 그렇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안다면 이웃의 모든 소유는 나에게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삶을 위해 주신 것이므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소유를 맡기셨다. 이웃에게 무언가를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뜻에 집중해야 한다. 남의 소유를 보면 '나도 저런게 있다면 주를 위해 더 잘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나에게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여기고 인생을 주신 뜻대로 사는 게 중요하다. 그것이 모든 계명을 지키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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