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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32-42) 겟세마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3. 5. 1. 21:16 Writer : 김홍덕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이란 곳에서 땀이 피가 될 정도로 간절하게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은 마가복음에도 있지만 요한복음 17장에 잘 나와 있다. 그런데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서 졸고 있었던 제자들인 요한 사도와 마가는 어떻게 예수님의 기도를 기록했을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어떻게 알았을까?

답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다. 바로 성령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면 보혜사 성령이 오실 것인데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걸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러니까 겟세마네 동산 아래서 졸고 있을 당시만 해도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전하고 복음이라 했다. 심지어 이를 위해 목숨을 드렸다. 성령이 오시니 그렇게 갈등했던 그리스도의 정체성마저 바로 알게 되었다. 성령이 임하시므로 육신의 모든 것, 의와 삶의 가치와 방법과 모양이 모두 그리스도와 같아진 것이다. 즉 예수님이 어떤 기도를 하셨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같은 생명이 된 것이다.

 

이 사실에 오늘 우리에게 굉장한 시사점을 준다. 바로 신학이란 학문에 대해서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학문이 되었다는 건 아주 제대로 된 자가당착이다. 물과 성령으로 구원받았다는 건 성령이 오셨다는 의미다. 구원받았다는 건 곧 예수님 말씀을 학문으로 만들 이유를 지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성령강림이지 신학이 아니다.

 

그리고 생각해 볼 것은 기도 내용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가능하다면 십자가 지는 일을 물려 주시길 바라면서도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라 기도하셨다. 이 문장으로 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억지로 십자가로 보내신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될 때 그때 이미 정해진 일이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예수님은 십자가 지는 일을 피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소망을 접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셨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조차 알고 있는 예수님의 기도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문장을 알고 있을 뿐 이 말씀의 본질을 알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인류 구원의 책임감과 신념으로 십자가를 지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건 신념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본성에 이끌려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하늘의 천군을 불러서 군병을 물리치거나 못 박힌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올 능력이 없어서 매달려 있었던 게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게 우리가 말하는 그리스도로 거듭남이다. 아버지가 아들보다 모든 면에서 역량이 뛰어난데도 아들을 이기지 못하는 건 아버지라는 생명의 본성 때문인 것과 같다.

 

예수님의 기도 '나의 원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라는 말씀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의 뜻이란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이를 헬라어(그리스어)로 특별히 LOGOS라고 한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할 때 이 말씀도 LOGOS를 사용한다. 즉 하나님의 의와 계획이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다. 바로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육신이 십자가 지는 일이 두려운 일이지만 심령 안에 본성이 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는 걸 알고 계셨다.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신 기도의 본질적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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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 옥합 사건 후에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하신다. 뼈를 꺾지 않은 양과 쓴 나물 그리고 무교병(누룩으로 부풀리지 않은 빵)을 먹는 이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가룟 유다에게 자기 할 일을 하라고 하셨고, 또 베드로에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 주셨다.

 

가룟 유다는 유월절 만찬 이전에 이미 예수님은 가난을 해결하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에겐 그저 종과 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확신하고 예수님을 팔아버렸다. 이 이야기는 향유 옥합을 설명하면서 충분히 했고, 베드로에 관해서는 다음에 더 상세히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번에는 우리에게 성만찬 예식이 된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앞서 향유 옥합 사건의 구성에는 귀한 향유가 담긴 옥합이 깨어지는 장면이 있었다. 흙으로 만든 옥합이 깨어지니 그 안에 있던 향유가 흘러나와 향기가 온 방에 가득하게 되었었다. 그리고 만찬 중에 예수님은 떡을 떼시며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육신이 창과 가시에 옥합처럼 깨어지는 일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옥합을 깨트린 여인이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일을 했다고 하신 이유다.

 

깨어진 옥합은 십자가에서 깨어진 예수님의 몸

 

그리고 다시 포도주를 두고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옥합이 깨어지면서 향기가 넘치듯 예수님의 육신이 깨어지니(창에 찔리니) 물과 피가 흘렀다고 하심이 이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 온 세상에 실체를 드러냈다. 예수님 몸에서 흐른 물 곧 말씀은 예수님의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모습이 곧 우리의 본성이다. 그리고 이건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위한 일이다. 사람의 본성과 정체성 그리고 존재의 목적이 예수님의 육신이 깨어지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말씀이 된 육신의 깨어짐으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 것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성만찬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진 의미,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사람이 누리게 될 은혜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만찬 자리에 오기까지 끊임없었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에 마침표를 찍으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때도 이 말씀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또한 오늘날 예수님의 성찬이라며 주기적으로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임하는 기독교인들 역시 이 의미를 바로 알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예수님께선 이 성만찬에서 떡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시며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다. 누구를 기념한다는 건 그와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 말씀과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말씀은 그래서 같은 의미다. 말이 같은 의미라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모든 순간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걸 말씀하셨다는 걸 상기하는 게 중요하다. 결론은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만찬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기념한다는 건 그렇게 되겠다는 것,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

 

'그리스도로 거듭남'이란 어쩌면 상용구 같은 이 말씀은 곧 우리 구원을 설명하는 말이자 우리 존재의 목적이다. 우리가 존재의 목적을 회복한다는 게 정체성의 자리를 떠난 죄에서의 회복, 곧 구원이고 우리가 어떤 존재로서 사는 게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삶을 사는 존재인지를 설명한다. '그리스도로 나서 그리스도로 사는 것', 이게 우리의 구원이고 우리 삶의 목적이자 의미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몸소 보이셨다. 이를 보이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사람이 그리스도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이신 것이다. 그건 십자가를 지는 것이자, 몸과 생명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나누어주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기념하고 성찬에 참여한다는 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

 

우리가 기념해야 할,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도 사람의 주장 앞에 나의 몸과 내 의와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다. 내어주지 않는데 드러날 리 없고, 다른 사람이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다. 예수 믿는다는 건 '내가 옳다' 외치는 사람들의 주장에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회사에서 가정에서 이래 달라 저래 달라는 요청에 거저 순종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

 

이게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의 모습이다. 구원은 이 생명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향유 옥합 사건과 마지막 유월절을 통해서 이렇게 육신을 내어주는 존재가 그리스도라는 걸 보이시고, 우리도 이를 기념하고 같은 생명이 되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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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6:10-24) 끝인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3. 4. 30. 22:11 Writer : 김홍덕

디모데에 관한 언급과 몇몇 동역자에 관한 언급과 함께 고린도교회로 보내는 첫번째 편지는 마무리된다. 이 마무리 인사 중에도 바울 사도는 의미 있는 말씀을 전한다. 깨어 있어 남자 답게 강건하라는 말씀과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말씀이 그렇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 찌어다라는 말씀이 압권이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물론 바울 사도의 의도는 저주가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권면이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문제가 있어 바울 사도의 권면을 잘 듣지 않을 것 같아서 강하게 말씀한 것도 아니다. 알고 보면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 예수님이 자기 인생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건 곧 저주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지 않는다는 건 그 자체가 저주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건 예수님과 내가 의미 있는 관계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나에게 전부인 의미, 나는 거듭남으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십자가를 지심이 의미 있는 일이 되도록 하는 사람이 되는 관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사람인 우리에게 사람으로 사는 의미, 인생의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며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게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전한 모든 말씀도 이것이다. 바울 사도 뿐 아니라 모든 사도와 그 사도로부터 복음을 이어온 모든 사람이 전하는 바가 이것이다. 십자가를 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과 우리 또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게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 고린도 교회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복음이다. 이 복음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믿지 않는 건 존재의 목적도 모르면서 사는 저주 속에 인생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고린도전서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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