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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부활을 변화를 입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 육신의 변화를 목적으로 믿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거듭난다고 해서 여자가 남자가 되거나 하늘을 날고 물 속에서 숨쉬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니다. 같은 육신인데 삶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보다 삶을 이끄는 본성과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게 변화다.

 

육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창조목적, 하나님의 말씀(LOGOS, 의도)와 성품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기 전에는 육신으로 육신의 소망을 추구한다. 이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면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육신으로 육신이 추구하는 바가 아닌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표현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바울 사도가 육신을 두고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을 삼킴 바 되리라고 하신 말씀이 응한다는 게 부활이라고 설명함도 바로 이런 성경의 기본 관점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육신의 부활과 거듭남과 새롭게 됨이 육신에 초자연적 현상이 나타난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망으로 여기시는 것을 입은 듯 죄와 사망으로 살다가 썩지 않는 것을 입는 것처럼 바뀌는 것이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4)

 

부활은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사망이 이긴 것처럼 삼키지만 죽지 않는 것으로 입게 되는 것이다. 이 썩을 것 곧 육신이 사망이 이긴 것처럼 삼키는 당하는 게 부활할 수밖에 없는 죽임이다. 바로 십자가요,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인해 죽는 죽음이다. 이 죽음을 주관하는 것은 높아지려는 본성에 죽을 힘을 다해 살면서 낮아지는 본성으로 사는 것을 심판하는 사망이다. 이 사망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예수님과 같이 낮아지고,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는 삶 밖에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을 심판하고 삼킨다.

 

그러나 이 모든 게 다 헛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높아지려 하면서 낮아질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사는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죽이려 하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므로 모은 게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리스도라서 나라마다 죽는 모든 거듭난 인생에게 이김을 주셨다. 바울 사도는 이 이김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이 감사는 그리스도로 살기에 남들과 달리 낮아지고 육신의 수고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본성에 순종하는 사람만의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죽음을 당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이 자신의 이김이 될 수는 없다. 예수님을 죽인 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교회에서 하나님을 빌려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이김은 환상일 뿐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 믿음을 견고히 하라고 했다. 날마다 죽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을 견고히 하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수고를 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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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3:28-37) 깨어 있으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3. 4. 15. 07:00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을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한 개인의 신앙으로 설명한 건 별스러운 게 아니다. 오늘날 세상에서의 성공을 빌며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들을 멸망의 가증스러운 게 거룩한 데 서 있는 것이며 거짓 그리스도라고 하는 건 자극적일 수 있겠지만, 양심을 가지고 자신이 교회에서 또 다른 데서 기도하는 내용이 과연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인지 돌아보면 오히려 놀랍고 솔직해질지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보면서 이 모든 비유를 배우라고 하셨다. 저주한 무화과나무와는 결이 다르다. 생명과 하나님의 세상 경영은 징조가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벚꽃이 피면 봄이 온다 생각하는 것 같이 사람의 신앙 여정에서도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비는 믿음도 조금만 살피면 그 안에 생명이 없음을 알게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과정을 진지하게 걷다 보면 과연 이게 맞나?’라는 의심이 드는 게 정상이다. 바로 그런 깨달음이 무화과나무를 보며 여름이 오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비는 신앙 속에서 ‘이게 맞나?’ 반추하는 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징조다.

 

이를 알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신앙인들은 깨어 있다는 의미를 혹시나 죄를 범할까 염려하고 긴장한 상태로 사는 걸로 안다. 그건 엄청난 모순이다. 구원받았다는 건 죄가 없다는 것인데 죄를 범할까 염려한다는 건 자기모순이다. 오히려 이런 모순을 아는 게 깨어 있는 것이다. 자신이 가고 있는 신앙이 과연 맞는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 이게 온전한 깨어 있음이다.

 

생각해 보면 교회에서 배우고 나누는 것들에 얼마나 많은 모순이 있나? 구원받았다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하면서 회개로 기도를 시작하는 게 맞는 일인가? 천지를 창조하시고 실수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고쳐 달라고 기도하는 게 맞는 말인가? 기도하고 봉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맞는 말인가?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면서 욥의 친구들처럼 육신이 흉흉한 일을 당하면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게 없는지 돌아보거나 권면하는 게 맞는 신앙인가?

 

이런 수많은 모순 속에 살고 있는 자기 모습이 바로 무화과나무 잎에 무성해진 것이다. 그저 기본적인 상식만 있어도 의심할 수 있는 교리와 종교 속에 살면서 징조를 알지 못한다는 게 바로 잠자는 것이다. 이것에서 깨는 것, 그래서 지금 자신의 신앙이 많은 모순 속에 있다는 것, 더 나아가서 지금의 신앙을 이루는 하늘이 무너지고 이 신앙이 만든 세상이 종말을 맞아야 비로소 예수님을 바로 만날 수 있다. 그제야 비로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 중에 이렇게 깨어 있는 이들이 있었다. 자기 가치관의 종말을 맞이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누구도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없다. 먼저 제자들은 성령이 오시므로 자신들이 알고 있고 믿었던 그리스도를 버렸다.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독립과 가난과 질병 없는 세상을 이룰 것이라 믿던 세상의 종말을 맞았다.

 

그들은 깨어 있었다. 예수님이 자기가 믿었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갈등했다. 그래서 빌라도의 뜰에 찾아갔다. 그리스도는 왕이 되고 기적을 일으켜야 하는데 어째서 채찍질 당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성도들은 어떤가? 수많은 모순 속에서, 자기 스스로조차 하나님께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어떻게 되겠지?'라는 마음인지 그냥들 살고 있다. 그저 육신의 일에 어떤 흉사가 생기지나 않는지 전전긍긍하면서. 큰 문으로 가는 많은 사람을 떠나면 육신의 삶이 힘들어지지 않을지 염려할 뿐이다. 그 생각이 바로 육에 속한 것이고, 높아지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데도 깨어 있지 않는다.

 

예수님께선 분명히 모든 사람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오늘 나의 신앙에 여름일 올 것을 알리는 무화과잎의 무성함과 같은 징조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지금은 다들 높아지는 그리스도, 육신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를 믿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그렇다는 걸 아는 게 깨는 것이다. 조금만 양심이 있다면 알 수 있다. 이것을 알아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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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35-49) 몸의 부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3. 4. 14. 07:00 Writer : 김홍덕

사람은 암묵적으로 몸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부활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부활을 육체의 죽음 그 이후의 일로 한정한다. 하지만 이런 개념으로는 바울 사도가 말씀한 날마다 죽는다는 개념 같은 건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럼 화장한 사람은 어떻게 돼?와 같은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활은 그런 게 아니다.

 

바울 사도는 육체를 구분한다. 설마 이걸 가지고 신분을 정할까 싶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사람은 그렇게 해석하고 자기를 높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구분, 아니 성경의 모든 구분과 정의는 하나님의 의가 기준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람의 육체, 짐승과 새와 물고기의 육체가 있다. 또한 하늘에 속한 육체와 땅에 속한 육체가 있다. 이 모든 기준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의가 기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여기는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의미다.

 

창세기의 천지창조 과정을 보면 물고기에서 새 그리고 짐승 마지막에 사람이 창조되었다. 이것은 동물원처럼 각 개체로서 동물들을 열거한 것 같지만 가장 본질적 의미는 한 사람의 신앙 여정,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게 바뀌는 과정이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사람으로 거듭나면 그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서 안식하신다고 창세기가 기록하고 있다.

 

하늘과 땅도 그렇다. 사람은 분명 땅에서 나고, 흙과 같은 존재나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듯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다. 이 사람은 하늘의 뜻이 자기 삶이 되었으므로 겉모습은 땅에서 온 사람 같으나 본질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하늘에서 온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졌으나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같이 사람 중에도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하늘에 속한다. 무엇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안다.

 

몸의 부활은 바로 이런 이들의 이야기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는 것으로 난다는 건 흙으로 돌아갈 육신의 삶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건 바로 십자가다. 세상의 가치와 내가 옳다는 주장 앞에 육신의 수고나 심지어 목숨도 내어주는 패배자의 욕된 모습이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으므로 이를 영광스럽게 또 다시 나기 강한 존재가 되었음을 말씀하심이다.

 

그리스도로 난 사람은 누구나 이와 같다. 처음에는 다른 모든 이와 같이 흙에 속했고, 신령하지 않았으나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사람이 된다. 이게 첫 사람과 둘째 사람이다. 흙으로 지은 사람은 첫번째 아담이고 하늘의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두번째 아담이다. 따라서 하늘에 속한 존재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가 기준이다. 사람은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해도 여전히 흙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산다. 그러나 같은 돈이지만 악한 데 사용되기도 하고, 같은 형상의 돈이지만 또 선한 데 사용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전혀 다른 육체다. 그리고 이 육체를 가진 이들,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로서 십자가를 지며 매일 죽는 이들에게 부활이 있다. 부활은 이들의 미래이자 현재다. 부활은 이런 이들에게만 있는 역사와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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