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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신년 인사드립니다.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24. 1. 7. 10:01 Writer : 김홍덕

안녕하십니까?

<성경은 내 이야기다>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김홍덕입니다.

어느듯 또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블로그를 지속적으로 찾아 주시는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간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 오프라인 모임에 대한 계획

- 동영상에 대한 향상 등을

자주 약속했습니다만,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블로그의 내용들은 기존 교회의 관점과 시각 차이가 분명히 있고,

오프라인 모임을 하기에는 모두의 물리적 상황 상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이런 중에 구독하시는 분들과 만나는 건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이 블로그의 내용을 통해 복음을 더 깊이 나누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만남이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기에

항상 그런 순간들을 바라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그것을 감당하기에

지금까지는 성실하지도, 상황도 넉넉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개별적인 만남부터 확장할 계획입니다.

그간 몇몇분들과, 그 중에선 아주 깊은 나눔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만남이 생각보다 좋아서 이를 바탕으로 2024년에는

개별적인 연락을 주시면, 가서, 또 오셔서 만나는 시간이 

많아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개별적인 만남을 확장하는 2024년

 

 

또 기회가 많지는 않겠지만,

이 블로그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강의를 원하시면, 이에도 응할 계획입니다.

(교통편만 제공해 주시면 강사료는 받지 않습니다.)

 

저에게 연락을 원하시는 분은

메일 : the.elphis@gmail.com 이나 fumac@naver.com으로 연락 주시고

전화 : 010-3396-5555 김홍덕 으로 연락 주십시오.

 

 

2024년을 맞아 복음의 확장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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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살인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것이다. 따라서 살인이 성립하려면 대상이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계명은 성경의 계명이므로 성경이 살아있다고 정의하는 사람이 누구냐가 가장 선행되는 관점이다. 그러니까 육신의 목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 핵심 쟁점이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어린 소자를 실족하게 하면 '라는 말씀이 있는데, 연결된 말씀이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록한 말씀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과 사람의 창조주이자 경영하는 주권자다. 시쳇말로 '자기 맘대로 하는 엿장수'. 따라서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그리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관점은 다른 게 아니다. 바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이 뜻대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 그 목적대로 사느냐 아니냐가 살인의 기준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어야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사는 삶과 기회를 앗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대로 살기 위함인데, 그 삶이나 또 그렇게 살 기회를 피조물인 사람이 앗아가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은 존재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 살 가능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창조하지도 않은, 그리고 주권도 없는 사람을 헤치고 생명을 앗아가는 건 살인 이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다.

 

살인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한 목적대로 살 기회와 삶을 피조물이 빼앗는 것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또 십계명이 말씀하시는 살인은 단지 육신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에 한정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살인과 같다. 또한 심령이나 생각 안에서 자신의 신앙에 모순을 가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답을 찾아 나서지 않는 것도 살인, 곧 자살이다. 지금의 신앙이 성경에 비추어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노력하면 될 것이라는 편의에 기대어 본토 아비 집을 떠나지 않는 건 양심에 화인 맞은 것이고, 양심을 일깨우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사람을 실족하게 하고, 양심과 성령을 훼방하는 것도 살인

 

물론 살인이란 근본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해하고 앗아가는 악한 죄다. 그러나 이건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협의의 살인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살인은 결국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사람, 곧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모든 행위가 살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 자기 안에 있는 양심이 외치는 소리를 외면하는 것 모두 살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이르는 걸 훼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너와 나'의 관계가 되기를 바라고, '너와 나'의 관계 안에서 지키기를 바라는 약속이 계명이고, 십계명이다. 그 안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다는 건 당연히 그 뜻이다. 하나님을 존재의 신이 아니라, 성경을 행위로 지키는 행위의 공로에 답하셔서 육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는 신으로 전하고 믿어야 한다고 외치는 소리는 모두 성령을 훼방하고, 사람을 실족시키는 일이다. 그게 살인이다. 최소한 끊임없는 살인 미수다. 많은 사람이 십계명을 그렇게 어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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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성경은 부모를 대하는 태도에 관해 여러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당연히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기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부모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고,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냐?'며 반문도 하셨고,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오겠다는 제자에겐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 지내게 하라'며 매몰차게 대답하시기도 했다. 또한 마지막 날이 되면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 주고,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상충하는 건 부모의 정의가 무엇이냐의 문제에 기인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부모는 누구인가?

 

우리는 부모라고 하면 당연히 육신의 혈연관계인 부모를 가장 먼저 떠 올린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것만이 부모의 정의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자아를 인식하는 육신을 낳고 기른 부모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인생으로서 자아의 가치를 부여하고 멘토가 되어 준 사람 역시 부모라는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데 사람들은 동의한다.

 

이처럼 성경은 육신의 부모를 한정하지 않는다. 사람은 내용과 형식, 의와 육신이 하나가 된 존재기 때문이다. ''란 존재에 있어 내용과 형식을 주신 이가 부모라는 게 성경의 관점이다. 의를 부여한 존재를 아버지, 형식을 부여한 존재를 어머니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가 인간의 본질이자 존재 목적이란 점에서, 의에 속하는 말씀을 주시는 아버지와 그 의를 표현할 형식인 육신이 하나가 되어 표현되는 그리스도를 성경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할 육신도 하나님이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 어머니 하나님 같은 소리는 성경의 기본 골격,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개념조차 모르는 어두운 자들의 멍청한 소리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을 살아야 하는 육신을 가진 사람은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 여자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가 공경해야 할 부모는 하나님이다.

 

결국 공경해야 할 부모는 하나님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우리 육신으로 표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나에게 전하는가의 문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땅에 만들어 놓은 사람에게 환상이나 전기 충격 같은 자극으로 전해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면 어떤 모습인가를 육신을 가진 사람이 직접 봐야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렇게 오신 예수님을 '육신이 말씀이 되었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도무지 없다.

 

복음은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해 전해진다.

 

그러니까 사람은 결국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는다. 하나님의 계획, 인생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걸 전해주는 존재는 결국 나와 같은 육신을 가진 존재다. 그리고 이런 전도를 하기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육신의 부모다. 그렇다고 육신의 부모만 가능한 일도 아니다. 나에게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말씀을 전하는 이가 육신의 부모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부모의 기준은 내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말씀을 전해준 사람이다.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

 

내 육신의 삶이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준 이가 성경이 공경하라고 말씀하시는 부모다.

 

십계명은 전체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다. 그 약속을 시행하는 대상이 부모, 이웃과 같은 사회 속 사람이기는 해도 결국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다. 복음을 주시고, 전해주신 이가 부모다. 결국은 하나님이 본질이다. 복음을 떠나서 사회적인 통념상으로도 부모를 공경하는 이유는 우리 삶이 부모에게서 비롯되고, 삶을 영위한 지혜와 철학과 심지어 재물까지 부모가 알려주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살아가도록 해 주는 이가 부모이기에 공경한다. 그렇다면 육신의 삶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전하여 주신 이와 그것을 정한 하나님을 공경하는 건 더 말할 것 없이 당연하다. 이것이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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