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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만 해도 본질적인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던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언제 무너질지 질문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외치고, 난리와 난리 소문이 넘쳐나고, 나라와 민족이 서로 다투며 지진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라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세상 종말을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세대의 사람들이 전부 돌로 지은 성전이 무너진다는 말로 듣고 그때를 질문을 한 제자들과 같은 안목을 가졌기에 이 말씀을 단순하게 지구 종말이라고만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고, 눈에 보이는 육신의 행위로 성경을 지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가지고 종말을 조명하니 지구의 종말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지구 종말로 보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육신과 세상과 외식이 신앙의 본질인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 일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사람의 미속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이 그 뜻이다. 육신의 일과, 육신의 눈이 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사람은 성경을 육신의 일로, 육신의 행위로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도 보고서 지구의 종말을 이야기할 것이라며, 그 종말 전에 행위를 바르게 해야 한다고 미혹할 것이라 경계하신 것이다. 딱 오늘날 신앙인들은 물론이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예언하신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외치는 사람은 단순하게 그렇게 외치지 않는다. 세상이 망할 것이라는 말없이 혼자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않는다. 위험이 없는데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말을 이기려면 자신을 믿으라는 게 모든 유혹의 법칙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예수님께 이 세상, 이 지구의 종말은 문제가 아니다. 말씀으로 만드신 세상인데 한 번 더 만들면 그뿐이다. 육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려면 이 정도 상식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선 이 정도로 놀라면 안 된다고 하셨다. 본 게임은 따로 있다는 의미다. 심지어 곳곳에서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도 본 게임은 아니라고 하셨다. 실제로 이런 일은 역사적으로 계속되었었고, 그래서 모든 세대가 세상의 종말을 외쳤다. 물론 지금은 더 심하다. 그러나 이건 그저 시작일 뿐이다. 종말을 맞이해야 하는 건 지구가 아니라 자아, 자기 철학, 자기 세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무너진다고 하신 성전은 돌로 만든 성전이 아니라 사람의 신앙이다. 돌은 언제나 율법이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것이란 말씀은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건 어떤 것도, 어떤 공적도 될 수 없다는 뜻이지 돌로 만든 성전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을 지키려는 행위를 드리는 성전, 이 성전이 예수님께서 무너뜨리겠다고 하신 성전이다.

 

우리가 주목할 건 예수님께서 무너뜨리겠다는 점이다. 그렇다는 건 무너져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구원은 사람이 행위를 드리는 성전이 무너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무너져야 구원이 있다는 의미다. 무너지지 않고 새로운 것을 새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건 이전 생명과 다른 생명으로 난다는 뜻이다. 이전 생명, 이전 본성, 이전 신앙 이 모든 걸 드리던 성전이 무너져야 새로운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종말 다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온다고 하신 말씀이 이 뜻이다. 예수님께서 이전 모든 신앙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이게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고, 십자가의 능력이다.

 

실제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본성이 되고, 육신이 되기 전에는 반드시 깊은 회의에서 시작한 신앙의 무너짐이 있다. 옛사람은 죽는다, 육은 죽는다는 말씀이 이것이다. 자신이 믿는 신앙에 대한 의심이나 회의 없이 새로워질 수는 없다. 또 회의나 의심이 드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그 또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전 나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고백과 시인이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세상의 종말, 지구의 종말은 걱정할 게 아니다. 그게 끝나는 상황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정말로 맞이하고 대비해야 하는 종말, 아니 오히려 반드시 만나야 하는 종말은 자기 세상, 자기 신앙으로 건축한 성전이다. 육신으로 의로워지는 신앙,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본질로 보는 안목, 육신의 풍요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믿음, 이것들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자기 인생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없다. 구원이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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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였으리라(고전 15:13)

 

부활에 있이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부활이란 단어의 의미에 매몰되어 있지만 정작 부활은 특정 죽음과 연결된 일이라는 걸 모른다. 단순하게 누구나 죽는 죽음 이후에 예수를 믿었다는, 더 정확히는 죽기 전에 교회 다녔다는 조건 그 하나에 의지해서 부활이 있을 것이라 믿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부활은 그렇지 않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그리스도가 죽으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것이 산 것이라 여기시기에 살리시는 게 부활이다. 사람의 생각처럼 썩은 육신이 다시 형상을 입는 것이 아니다. 그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육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사람의 생각이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이 아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했다는 말씀이 바로 이 의미다. 이 부활은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스도이기에 얻는 부활이다. 예수님 이전에도 엘리야와 엘리사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과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일이 있었지만 그들은 다시 죽었다. 나사로나,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다비다, 유두고 모두 지금은 죽고 없다. 다만 그리스도만 있다. 육신의 부활을 두고 하나님께서 부활이라 하시지 않는 이유다.

 

성경은 육신이 다시 사는 것을 부활이라 하지 않는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부활은 그리스도기 때문에 죽는 죽음이 있고, 그리스도로 인한 죽은 사람이 다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산 존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살았다고 여기는 유일한 존재기 때문에 어떤 죽음이 선행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다. 이게 부활이다.

 

이와 같이 유일한 부활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그리스도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는 이미 한번 새롭게 산 존재다. 그리스도가 되는 법은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게 어떤 것인가? 거듭난다는 말씀은 이전 것은 죽고 새롭게 났다는 의미다. 이 과정을 성경을 세례라고 한다. 그러니까 죽을 것은 죽고, 살아야 할 것만 있는 존재인 그리스도는 죽어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유일하게 산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인 거듭남은 이전 것, 죄와 사망에서의 삶은 죽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다시 사는 것이다. 이때 죽어야 할 것이 다 죽고, 살아야 할 것으로 살아난다. 이게 구원이다. 이전과 전혀 다른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 이게 거듭남이다. 생각해보면 부활과 비슷한 면이 없지 않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게 거듭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듭남과 부활은 절대적으로 다른 게 있다. 거듭남은 죽어야 할 게 죽고 다시 사는 것으로 죽어야 할 게 있어 죽어야 할 게 죽으므로 다시 나는 것이나, 부활은 살아야 할 게 죽으니 다시 사는 것이다. 거듭남은 이전과 다른 생명이 되는 것이고, 부활은 죽어서는 안 될 게 죽으니 그 정체성에 맞게 다시 사는 것이다.

 

거듭남은 죽어야 할 게 죽고 이전과 다른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이고, 부활은 죽을 수 없는 생명이 죽으니 다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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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향하시는 예수님이 군중과 대화는 이제 거의 끝난다. 잡히시기 전엔 향유 옥합 사건 때의 대화가 거의 마지막이다. 이젠 제자들과의 대화가 중심이다. 다만 제자들은 이때까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걸 믿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그럴 것이라는 생각도 했겠지만,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변함은 없었다.

 

성전에서 마지막으로 가르치시고 떠나는 길에 제자 중 하나가 성전의 아름다움을 언급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돌 위에 돌 하나 남김없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다. 특히 이 말씀은 분명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의미다. "무너뜨려지리라"라는 말씀이 그렇다. 누군가가 무너뜨릴 것이란 의미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예수님께서 단지 예루살렘의 역사적 패망을 예언하신 것인가? 그건 아니다. 역사적인 일은 그림자고 부수적인 일이다. 이 말씀의 의미를 알려면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때부터 성전에서 나오시기 전까지 하신 말씀의 연장선 위에 있다. 율법적인 행위의 무성함에 대한 저주, 장사하는 성전을 엎으신 일, 권세 논쟁과 이에 대한 포도원 농부에 대한 비유, 서기관들에 대한 경계의 말씀, 이 일련의 말씀과 행적이 성전을 무너뜨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무너뜨리는 성전은 돌로 쌓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율법과 그 행위로 쌓은 사람의 생각 속, 사람이 신앙이라 생각하는 믿음의 성전,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과 그 신앙의 상징인 성전이 무너질 것이란 뜻이다.

 

예수님이 무너뜨린 성전은 돌로 쌓은 성전이 아니라, 사람의 행위로 쌓은 신앙의 성전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진짜 무너졌다. 그리고 율법의 상징인 성막의 휘장도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사람이 찢은 게 아니다. 사람이 찢었다면 밑에서부터 위로 찢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으로 인해 행위가 아니라 존재로, 생명의 본성에 이끌려 성경을 지킬 수밖에 없는 존재로 거듭나는 세계가 열렸다. 이게 바로 돌로 지은 성전이 무너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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