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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향하시는 예수님이 군중과 대화는 이제 거의 끝난다. 잡히시기 전엔 향유 옥합 사건 때의 대화가 거의 마지막이다. 이젠 제자들과의 대화가 중심이다. 다만 제자들은 이때까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걸 믿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그럴 것이라는 생각도 했겠지만,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변함은 없었다.

 

성전에서 마지막으로 가르치시고 떠나는 길에 제자 중 하나가 성전의 아름다움을 언급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돌 위에 돌 하나 남김없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다. 특히 이 말씀은 분명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의미다. "무너뜨려지리라"라는 말씀이 그렇다. 누군가가 무너뜨릴 것이란 의미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예수님께서 단지 예루살렘의 역사적 패망을 예언하신 것인가? 그건 아니다. 역사적인 일은 그림자고 부수적인 일이다. 이 말씀의 의미를 알려면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때부터 성전에서 나오시기 전까지 하신 말씀의 연장선 위에 있다. 율법적인 행위의 무성함에 대한 저주, 장사하는 성전을 엎으신 일, 권세 논쟁과 이에 대한 포도원 농부에 대한 비유, 서기관들에 대한 경계의 말씀, 이 일련의 말씀과 행적이 성전을 무너뜨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무너뜨리는 성전은 돌로 쌓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율법과 그 행위로 쌓은 사람의 생각 속, 사람이 신앙이라 생각하는 믿음의 성전,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과 그 신앙의 상징인 성전이 무너질 것이란 뜻이다.

 

예수님이 무너뜨린 성전은 돌로 쌓은 성전이 아니라, 사람의 행위로 쌓은 신앙의 성전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진짜 무너졌다. 그리고 율법의 상징인 성막의 휘장도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사람이 찢은 게 아니다. 사람이 찢었다면 밑에서부터 위로 찢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으로 인해 행위가 아니라 존재로, 생명의 본성에 이끌려 성경을 지킬 수밖에 없는 존재로 거듭나는 세계가 열렸다. 이게 바로 돌로 지은 성전이 무너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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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1-11) 부활과 구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3. 4. 2. 05:50 Writer : 김홍덕

긴 시간 분당에 대한 권면에서부터 각종 은사와 사랑에까지 설명하고 권면한 바울 사도는 부활을 전한다. 그리고 이 부활을 비롯해서 전한 모든 것을 믿을 때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한다. 고린도전서를 관통하는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이끈 성령의 은사, 이 모든 것은 한 하나님과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하나라는 것을 믿는 게 곧 구원임을 선명하게 정리한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그리스도를 만난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간증한다. 특히 바울 사도는 자신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연약한 자임에도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고백한다. 이렇듯 바울 사도가 부활을 설명하는 것은 자신이 전한 모든 걸 믿는 게 구원임을 확정하기 위함이다. 구원은 부활로 완성된다는 표현이다.

 

물론 구원은 죄를 시인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루어진다. 그러나 구원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지닌 생명이 어떤 삶을 사는지를 먼저 산 자로서 전하는 예언을 사모하라고 했듯,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부활을 확신하는 자신의 간증으로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은 이들 역시 부활하게 될 사람이란 걸 전하고 있다.

 

부활은 불가항력적인 능력이다. 그리스도로 난 사람은 회피할 수 없는 일이다. 굳이 믿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스도는 날마다 죽는 존재이고, 반면에 하나님께서 보실 땐 산 존재이기에 언제나 살아있다. 그래서 부활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육신을 내어 주는 그리스도, 그렇게 육신을 내어 주나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사람 만드신 본연의 모습이기에 하나님에겐 산 사람이라 늘 살리신다.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예수님이 살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으로 인해 그리스도로 거듭난 모든 사람 역시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존재기에 예수님과 같이 자기가 옳다는 주장 앞에 언제나 육신과 수고를 내어 주는 죽임을 당하나 그 죽음에서 늘 부활한다. 이게 부활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했다면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란 것도 알 수 있다. 이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그리스도라면 피할 수 없다는 것까지 안다. 이 과정 어느 한 절이라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으려고 노력하고 믿는다고 뇌까리고 있다면 부활은 커녕 구원도 없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로 난 게 아니다.

 

사람들은 다시 오신다는 주님을 만나려면 예수님의 육신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살아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려면 신비한 환상 속에 들어가거나 죽어서 천국에 가야 만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심지어 육신의 부활을 무덤에서 썩은 몸이 다시 성한 몸이 되어 살아나는 것으로 믿는다. 이렇게 믿는 이유는 부활이나 재림이 그렇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육신과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육신이 부활하는 걸 부활로 믿는다.

 

그러나 부활은 자기 안에서 만나야 한다. 자신의 삶이 부활한 삶이란 걸 부인할 수 없어야 한다. 그렇게 느끼는 것이고,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이 부활하신 주님과 같음을 즐기며 살아야 거듭난 것이다. 바울 사도가 먼저 받아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한 것이다. 전했다는 것은 그들도 그렇게 될 수 있고, 되었다는 것이다. 즉 구원의 거듭남을 얻었다면 부활도 이와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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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35-44) 서기관과 과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3. 3. 31. 07:00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 어떤 계명이 첫 번째 계명인지 묻고 칭찬받은 서기관이 있긴 하지만 서기관 대부분은 늘 예수님께 책망받기 일쑤였다. 십자가를 지러 가는 이 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서기관을 삼가라, 서기관의 누룩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서기관들의 모순을 지적하셨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말했는데 서기관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다는 건 그들이 그리스도를 육신의 안목으로 보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런 그들이기에 외식을 일삼는다는 의미다.

 

서기관에 대한 책망은 그리스도를 육신의 혈통으로 보는 가치관을 가졌으니 성경을 지키는 것도 행위로 보고, 행위를 본질로 보니 육신의 형편이 곧 하나님 은혜의 척도, 하나님 앞 신분의 척도로 여기게 되고, 그렇게 되니 서기관, 장로, 제사장, 목사라는 신분으로 사람의 문안을 받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오늘날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서기관의 모습과 누룩과 외식에서 왔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뿌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다. 육신의 형편이 좋아지는 걸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는 가치관이 그렇고, 하나님을 섬기는 노력으로 신앙을 치장하니 그렇다. 헌금을 많이 하는 형편이 되는 것을 은혜로 여기고, 육신의 노력으로 공부하고 그렇게 공부한 사람끼리 경쟁한 목사를 우대하는 게 그렇다. 그 무엇보다 그렇게 노력한 이들이 성도들에게 말씀대로 살기를 노력하라고 가르치고, 육신의 복을 구하는 성도들은 육신을 기준으로 은혜 입었다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빌려준다. 그런 신앙이 기독교의 뿌리이자 전부가 되었다. 이게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에서부터 이어져 왔다.

 

그런데 이 서기관과 다르게 초라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과부다. 남편이 없는 여인이다. 성경적으로 남편 없는 여인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사실 겉모습은 부유하고 권세가 있었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진정 과부다. 그들에겐 의가 없기 때문이다. 의가 없다는 게 바로 남편이 없다는 것이고, 과부라는 의미다.

 

반면 적은 헌금밖에 드릴 게 없는 가난한 과부는 예수님께 칭찬받았다. 그녀는 가진 모든 재산을 드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 말씀은 두 렙돈이라는 금액과 이로 대변되는 그녀의 상황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모든 소유는 돈이 아니라 과부라는 신분 그 자체다. 하나님 없는 자로서 하나님을 구하는 자기의 모든 것을 드렸다는 뜻이다. 단지 그 마음이 두 렙돈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잔치의 상석에 앉는 서기관이나 당시 종교적, 사회적 지도자들은 육신이 풍족했고, 종교적 행위도 무화과나무잎처럼 풍성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열매가 없었다. 오늘도 그가 와야 예배가 시작하는 목사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이 모든 육의 형편을 누룩이라고 하셨다. 심지어 무덤에 칠한 회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행위를 구하러 오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은 우리 먹을 것을 공급하는 호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건 분명 뜻이 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먹을 것, 입힐 것을 주는 일이나 하자고 사람을 만드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육신의 형편이 하나님 은혜의 척도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그걸 은혜라고 구하는 건 하나님을 아주 제대로 희롱하는 것이다.

 

앞서 첫 번째 계명에 대한 말씀을 다시 상고하면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려면 남편인 하나님 말씀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기 때문이다. 남편인 하나님의 말씀, 어기려고 해도 성경을 어길 수 없는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존재가 여자, 곧 사람이다. 서기관들은 이 남편이 없는 진정한 과부지만 자신이 과부란 걸 모른다.

 

그러나 육신으로 과부인 이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다. 자신의 모든 걸 드린다는 건 자신에게 어떻게 해도 좋다는 순종이다. 하늘의 뜻이 흙으로 만들어진 자신에게 임하시고 이루어져 그리스도로 거듭나겠다는 간절함, 그 마음이 바로 가진 모든 걸 드린 마음이다.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는 진정한 과부들에게 이 마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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