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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9) 율법 생활의 갈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3. 11. 14. 04:56 Writer : 김홍덕

이스라엘 백성은 자주 갈증을 호소했다. 애굽을 벗어나 처음 전쟁인 아말렉과의 전쟁 이전에만 두 번의 갈증을 호소한다. 상황으로 보면 광막한 광야에 물이 없는 건 당연한 상황인 만큼 그들의 호소를 불순종이라고 일갈하긴 쉽지 않다. 다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이 우리 구원의 여정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갈증을 호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조명해야 한다. 바로 나의 모습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애굽을 떠나자 바로 갈증을 호소했던 마라(쓰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물을 달게 하시면서, 당신의 행사를 '치료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먹을 것이 없다는 불만에 하나님이 내리신 만나와 메추라기를 얻었다. 그리고 다시 르비딤이란 곳에 이르러 마실 물이 없자 모세와 다투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명대로 반석을 치니 물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다투다'는 의미의 '맛사' 혹은 '므리바'라 불렀다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불평과 불만을 소재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조명할 수 있다. 하나님께 불평하면 안 된다는 식의 조명이 그것이다. 그건 잘못된 관점은 아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이 있다. 바로 율법적인 신앙생활 중에 느끼는 갈증이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벗어날 수 없는 구속처럼 어떻게 행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을지에 관한 끝없는 갈증, 그것이다.

 

광야에서 느끼는 목마름은 율법 생활 속 은혜를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간구하는 갈증이다.

 

사람은 바로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다툰다. 야곱도 그랬다. 육신의 목숨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목숨의 안위를 하나님께 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환도뼈가 부러졌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과 다툼에서 졌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의미의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었다. 사람은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 육신의 삶에 필요한 은혜를 구하려고 다투고, 그 은혜를 얻기 위해 어떤 말씀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늘 간구한다. 그러나 그런 자기 생각이 부러질 때 하나님과 다툼에서 이긴 자가 된다. 물은 말씀이고, 뼈는 의를 상징힌다.

 

사람이 구하는 이 목마름은 끊이지 않는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도 그랬다. 끊임없이 물을 퍼 나르고, 뼈와 같이 의를 상징하는 남편도 계속 갈아치웠으나 여전히 목이 말랐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속에서 영생하도록 넘쳐날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당연히 십자가의 복음이고, 속에서 넘쳐난다는 건 거듭난 생명의 본성에서 비롯된다는 의미다. 하나님께 무엇을 행하여야 은혜를 얻는지 자기 안에서 영원히 넘쳐날 것이라는 것이다. 이건 성령이 오셔서 모든 걸 알게 하실 것이란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예수님이 주는 물을 마시면,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우리를 돌아보자. 어떤 성경을 어떤 방식으로 지켜내야 벌 받지 않고 축복을 받아 인생이 형통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신앙의 전부이지 않는가? 그건 율법적인 신앙생활이고, 계속 목마른 물을 먹는 것이다. 그 율법 생활은 월반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신앙 전부로 알거나 가나안으로 설명하시는 구원받은 삶으로 알면 안 된다. 그 삶의 끝은 세례 요한이다. 그러나 천국, 곧 가나안에선 가장 작은 자보다 작다. 대단한 광야의 삶도 가나안의 삶에 비할 수는 없다.

 

오늘 나는 신앙 안에 가진 갈증이 무엇인지 돌아보자.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줄다리기하듯 구하고 실패하고 다시 구하며 하나님과 씨름하는 게 무엇인지 돌아보자. 그게 야곱이 구한 육신의 목숨이나, 이스라엘 백성이 벗어나면 안 되는 광야에서 구한 물처럼 율법 신앙 안에서 육신의 복락을 얻기 위해 벗어나지 않으려는 계명이 아닌지 돌아보자.

 

그 모든 건 야곱의 환도뼈와 같이 부서질 때, 하나님을 이긴 자,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게 구원이다. 가나안에서 물은 스스로 구하기 충분한 것처럼,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가진 본성에서 말씀이 솟아나 외면하려 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복락을 누리는 게 구원이다. 율법 생활, 광야 생활은 거기로 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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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8) 내일 일은 염려하지 말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3. 11. 11. 06:22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는 아침에는 만나를 내려 아침에 거두게 하시고,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주셨다. 그리고 누구나 하루 먹을 만큼, 장막에 거하는 사람의 수 대로 거두라고 하시니, 각 사람이 자기 먹을 만큼 먹는데 부족함이 없었다고 했다. 사람이 먹는 게 다를 텐데 같은 한 오멜씩 거둔 만나가 부족함이 없고, 남김이 없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말 그대로 각 사람에게 합당한 은혜를 주신 셈이다.

 

그런데 백성 중에는 자기 필요 이상으로 거두고 남겨 두었더니 벌레가 생겼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불순종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만나와 메추라기가 없으니 아예 나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매일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면서도 자기 생각에 '내일 없으면 어떡해?'라며 나름대로 준비 정신을 발휘한 것이지만, 본질은 불순종이고 하나님에 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끄신 은혜처럼 내일도 그럴 것이란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사람은 지금까지 은혜와 내일 일을 다르게 믿는다.

 

사람들은 과거가 된 시간에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는 감사하고 놀라며 찬양한다. 그러나 내일 일을 생각할 때는 지금까지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과 내일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다르게 대한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은 확률로 하나님을 대한다. 역사적으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확률도 이번 경기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스포츠 경기처럼, 내일 일을 염려한다. 홍해를 가른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 그대로라면 먹고 마실 것을 염려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행여라도 내일 먹을 게 없을까 싶은 마음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더 챙기는 게 사람이다.

 

하루치 이상의 만나를 챙긴다는 건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

 

갈라진 홍해를 건너고 세상 어디 그런 마음이 있을까 싶게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이 없다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불확실성을 해결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믿는 건 어려워하지 않는데, 내일 일은 늘 염려한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상실하고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삶에서 건져내신 하나님께서 그 삶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달성하는 동안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주시지 않을까 걱정한다. 광야에서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이 없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 믿음의 실체를 보여준다.

 

만약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이나 자동차가 '주인이 지금까지는 충전하고 주유해 주었는데 내일도 해 줄까?'라고 생각한다는 걸 내가 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셨다고 믿고 말하면서, 내일 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확실한 일은 마치 다른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믿지 않는다면 그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한 뜻이 이루는 동안 은혜를 베푸신다.

 

사람이 이런 모순에 빠지는 건, 과거가 된 일은 사람이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는 반면에, 아직 이루어진 일은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자기 의와 자기 가치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과거는 하나님 은혜로 여기는데 저항이 별로 없지만 미래는 어떻게 과거가 되어야 하는지 자기가 정해 놓은 게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가 정한 대로 해 주시길 기대하고 믿지만, 아직 손에 쥐지 않은 탓에 결과가 정해질 때까진 늘 의심한다. 내일 일을 염려한다는 게 바로 이거다. 그 불확실성을 돌베개 베고 잔 야곱처럼 혼자서 씨름한다.

 

자기가 시작하지 않은 인생의 미래를 스스로 정하는 사람의 마음이 율법에 얽매이게 한다.

 

이런 마음 때문에 이틀 분량의 만나를 취하는 것이다. 이게 광야 생활이다. 이 불확실성이 두려워 성경대로 행하려고 한다. 자기가 정하고 기대한 대로 미래를 견인하려고 성경을 지키려 그렇게 노력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의 삶을 서술한 말씀인데, 그러니까 성경을 지키는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지킬 수밖에 없는 삶의 모습인데 육신의 복락을 추구하는 사람에겐 성경을 지키는 목적이 있다. 그래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 밖으로 나가지 않는 광야 생활이라 설명했다. 오늘날 성경대로 살아서 세상의 축복을 얻으려는 율법 신앙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확률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확률의 문제가 아니다. 괜히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 무궁히 한결같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생명과 본성으로 이어진 육신의 부모처럼 지금까지 보살폈다면 내일도 보살피시는 게 하나님이다. 지난날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믿는다면 내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거다. 행여 내일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어떡할까 염려한다는 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다. 그건 거듭난 생명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다. 결국 구원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본성으로 살기에 내일 일이 이미 자기 안에 있다.

 

다음으로 그런 마음은 육신의 일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다가올 내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는 본성을 살 수밖에 없음을 안다면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다. 내일 일도 이미 자기 안에 본성으로 있기 때문이다. 본성에 있다는 건 육신의 복락을 기준으로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란 의미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것이다. 구원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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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시작하자 물이 없다고, 먹을 게 없다고 불평했다.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본 게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불만을 토로하겠는가 싶겠지만 물과 음식은 생존의 문제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단순한 불순종의 문제가 아니라, 육신의 삶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육신의 삶을 보는 신앙적 관점의 대명사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은 모두 육신의 먹고 마심에 관한 것이었다. 심지어 처음 가나안 땅을 마주했을 때도 네피림 같은 가나안 백성의 위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 한달도 걸리지 않는 광야를 40년 헤매게 되었다. 이 모든 건 자기 육신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를 핵심으로 보는 가치관에 매몰된 탓이다.

 

문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보는 오늘 우리의 자세다. 그들은 우리 구원의 여정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육신이 먹고 마시는 문제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아주 먼 옛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원망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존재로 거듭나기까지 과정에서 육신의 먹고 마시는 문제에 매몰된 우리 모습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라면 먹고 마시는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다.

 

구원의 여정에서 육신의 먹고 마시는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하나님의 기본적인 견해는 '사람이 염려할 게 아니다'. 이건 하나님이 모든 걸 주관하시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과 공급하실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하시는 이유는 사람을 향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한 분명한 목적이 있기에 사람이 그 목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신이 먹고 마시는 문제는 육신의 생존 문제거나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가지신 유일한 창조주로 인정하고 믿느냐의 문제다. 먹을 것, 마실 게 없는 상태를 하나님을 원망할 일로 본다는 건 하나님이 그 일의 책임자라는 생각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당신은 나의 먹을 것 입을 것을 공급해야 하는데 왜 안 해?'라는 의미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회칠해도 인생의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의 마음이 이것이다.

 

궁극적인 사람의 모습이자 하나님이 목적하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떡이 아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자기의 양식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양식은 육신이 된 말씀대로 사는 것이란 뜻이다. 입으로 무언가를 먹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내어 놓느냐의 문제라는 의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구원의 여정이고, 그건 예수님처럼 그리스도가 되는 과정(생명이 바뀌는 거듭남의 과정)이다. 그러니까 먹고 마신다는 게 육신의 떡과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존재가 되는 게 구원이고, 거기에 이르는 여정이 구원의 여정이고 광야의 삶이다. 이제 막 그 여정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건 아직 먼 이야기다. 이 모습은 하나님께 먹을 것과 마실 걸 구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구원이 아직 멀리 있는 사람이라 계몽하는 것이다.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러 가는 여정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하나님께 불평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구원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를 의탁하는 존재라는 걸 드러낸다. 그리고 그건 단지 불평불만일 뿐 신앙이 아니라는 걸 말씀하신다. 오늘날 사람들이 세상의 법과 자기 힘으로 살다가 하나님을 믿겠다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하나님께 의지하는 모습이 어떤 신앙인지 설명한다.

 

먹고 마시는 일로 불평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육신을 의지하는 신앙은 곧 불평하는 신앙임을 알게 하심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문제나 해결하는 신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이 육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의지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선행되어야 할 게 있기 때문이다. 먼저 그리스도로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 그 전에 육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다투는 건 모두 불만이고 불순종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모습은 이걸 설명한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가면 언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모두 해결하시고 공급해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또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로서 살아가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를 잘 이루려면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함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노력으로 지켜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노력으로 될 것이라면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실하고 노력하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것이고,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의 역량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육신의 생존과 더 나아가서 사회적 관념이 정의해 가는 삶의 수준과 편리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이유로 무조건 외면하고 터부시하는 건 어리석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은 환경에 적응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생명이란 자체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활용하며 사는 존재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서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한다. 그듭난 생명,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살면 육신의 삶은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뜻대로 사는 존재가 될 것이며, 때로는 벅차 보이는 사회적 관념이 정의해 가는 삶의 수준과 편리는 먹고 마실 걸 구해야 하는 역경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가는 도화지로 여겨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생으로 보내신 목적으로 산다면 그 목적이 유효한 동안 마실 것과 먹을 것을 공급하실 것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육신을 보존하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기적처럼 공급하신 게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하시는 이유도 그렇다. 죽어 썩을 육신에게 먹고 마실 것을 공급하면서 '내가 베푸는 은혜'라고 거드름 피는 하나님이 아니다. 먹고 마시는 정도가 은혜의 척도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은 육신의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를 인생으로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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