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599

(고린도전서 13:1-13) 사랑, 사랑장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3. 3. 23. 07:00 Writer : 김홍덕

너무나도 유명한 고린도전서 13, 곧 사랑에 대한 말씀이다. 이 사랑장 앞에는 성령의 은사와 교회의 직분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행사하라는 바울 사도의 권면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더 큰 은사와 능력을 보이겠다고 했다. 그게 바로 사랑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은사의 주체인 성령이 지향하는 것과 같은 본성에 대한 말씀이다. 즉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도록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에 대한 말씀이다.

 

흔히들 사랑을 몇가지로 구분한다. 친구 간의 사랑, 연인 간의 사랑, 지적인 사랑 그리고 모성애와 같은 혈육의 사랑으로 나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랑보다 더 순결하고 고귀한 사랑으로서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를 정의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대신 졌다는 것을 이유로 무조건적인 사랑인 아가페를 정의한다. 물론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사랑장의 사랑도 그것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말씀과 사람이 이해하고 있는 아가페는 좀 다르다. 사람들은 아가페 사랑이 보여주는 모습, 나타난 바를 가지고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라 여긴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사람의 생각과 같은 모습이라고 해도 어떤 하나가 없으면 소용이 없는데 그 없는 하나가 바로 사랑이라고 말씀한다. 사람은 나타난 것을 가지고 사랑을 논하고, 바울 사도는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 있어 흉내 낼 수 있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 사도와 동일한 관점에서 사랑을 길게 설명한 요한 사도의 말씀도 그렇다. 요한일서 4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의 핵심은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하나님이 먼저 사랑했다는 것이다. 이건 단지 사랑이란 단 하나의 개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순서의 선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이 먼저인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건 사람의 창조목적과 사랑이 연관이 있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남을 위해 자기 손해를 감수하고,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을 사랑이라 말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그건 표현으로 사랑을 가늠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람이 가진 사랑의 모습을 이끌어내는 본질이다. 그건 존재의 의미다. 그리고 그 의미가 본성인 존재가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다.

 

바울 사도는 천사의 말을 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없다고 말씀한다. 사랑의 표현이 충분해도 그런 표현을 이끌어내는 본질이 없으면 사랑도 아니고 소용도 없다는 말씀이다. 사랑 없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건 고전 신파 드라마에서 친구들끼리 짜고 두들겨 맞으면서 여자를 구하는 것과 같은 일이란 의미다. 사랑은 사람이 생각하는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이끌어내는 뿌리자 본성, 그것이다.

 

사랑은 존재의 의미

 

사랑은 존재의 의미다. 이게 사람이 생각하는 사랑의 모습을 이끌어낸다. 연인인 남녀는 서로에게 의미 있는 유일한 남자, 유일한 여자다. 그게 존재의 의미다. 그 의미로 인해 서로에게 헌신하고, 서로를 위한다. 부모의 사랑도 그렇다. 세상 수많은 아이 중에 존재의 의미가 되어주는 남편, 아내의 관계에서 낳은 아이가 자식이고, 그 자식을 위하는 부모의 모든 헌신과 수고가 여기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사랑은 존재의 의미다. 사람이 생각하는 사랑의 모든 정의를 이끄는 본질, 그게 바로 존재의 의미, 곧 사랑이다.

 

무엇보다 존재의 의미는 모든 것을 분명하게 한다. 우리 인생을 모른다고 말하는 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게 표면적 의미지만 본질은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무엇보다 왜 인생을 사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인생이 불확실하게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보는 물건이라도 어디에 쓰는 것인지, 그러니까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면 분명해지듯 인생도 그 존재의 의미를 안다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이게 바울 사도가 말하는 그때는 우리가 얼굴을 보는 것같이 보게 된다는 말씀의 의미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말씀이 바로 이 관점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으니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있다. 우리 존재의 의미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우리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 존재의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인해 시기하지 않고 오래 참는 것이다. 십자가가 우리 존재의 목적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사람에게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 일깨우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게 바로 사랑이다. 다른 사람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의미 있는 존재의 모습이 사랑이다. 성령의 모든 역사하심이 이를 위해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보이신 사건이 십자가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목적, 존재의 목적을 알도록 하는 의미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보내신 분이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우리 인생을 분명하게 한다. 이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인생의 목적과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그보다 선명한 인생은 없다. 이 사랑이 우리 안에 장성하면 성경은 물론이고 인생의 모든 부분을 부분적으로 아는 상태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한다. 모든 게 어린 아이 같다가 온전하고 장성한 사람이 되게 한다. 이게 바로 사랑이다. 존재에게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 이상의 근원적인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 의미가 우리의 헌신을 이끈다. 노력이 아니라 본성이라 아니할 수도 없다. 이게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에도 십자가를 지신 이유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건 바로 이런 생명이 된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이 존재의 의미를 알도록 모든 것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본성에 이끌려 우리에게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셨다. 이게 예수님의 사랑으로 받은 우리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특별히 노력하거나 신학 공부하지 않아도 예수님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로 거듭났으니,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려 가신 길을 가지 않을 방법은 아예 없다. 그래서 구원을 생명 용어인 거듭남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생명의 주라고 한다.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려 몸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삶이 사랑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거듭나기만 하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전하고 있는 사랑의 모습은 피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본성이 된다. 사랑장은 거듭난 사람의 삶을 묘사한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마가복음 12:1-12) 포도원 농부의 비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3. 3. 22. 07:00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은 장사하고 있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제물을 뒤엎는 권세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 시비를 걸어온 대제사장들에게 세례 요한의 소환해서 그 권세가 어디서 온 것인지 말하지 않으시겠다고 했지만 실상은 아주 상세하게 말씀하신다. 바로 포도원 농부의 비유다.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지만 다시 살펴보면,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떠났다. 그리고 포도원의 소출이 날 때쯤 되어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종을 보내니 포도원에 고용된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죽였다. 이에 아들을 보냈는데 그마저 죽였다. 그렇다면 결론은 뻔하다. 주인이 와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는 게 비유의 내용이다.

 

그런데 주목할 게 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 이야기가 자신들을 가리키는 이야기란 것을 바로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의 종과 아들을 죽인 농부가 바로 자신들이란 걸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의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니라 도용한 것이라고 하신 뜻을 바로 알아들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 생각해볼 것은 농부들은 왜 포도의 소출을 주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자기 포도원도 아니고, 주인이 달라는데 주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왜 주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 답은 이 비유 전후, 아니 성경 전반에 흐르는 바리새인, 대제사장들과 예수님의 갈등 속에 있다. 그들(농부)에겐 포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나무인 무화과나무는 대제사장들,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과 같은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그들에겐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무성했으나 열매가 없었다.

 

포도는 그리스도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했다. 예수님의 비유 속 포도원 농부는 누구라도 하나님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건 그리스도다. 그러나 농부들,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없고 무성한 행위만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는 곧 그들의 권세였다. 그 권세가 유월절을 지키는 편의를 합리화해 주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선 그들의 그 권세를 강도짓이고 장사하는 것이라고 책망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무슨 권세로 이러는지 따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건 행실이 아니다. 행실은 생명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종속변수다. 그리스도로 나면 그리스로 살고, 사람으로 나면 사람으로 산.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에 대한 기술이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나고 그리스도는 어떤 삶의 모습인지 말씀하신 글이고 책이다.

 

이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로 나지 않았는데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고, 하나님과 장사하는 자며, 자기가 하나님께 드릴 것은 드리지 않고 원하기만 하는 강도며, 엄연히 주인이 있는 농장을 자기 것 삼는 파렴치한이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바로 이런 말씀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모두 이 집합 속에 있다.

 

다시 한번 성경은 그리스도로 나면 다 지켜진다. 그리스도는 생명이므로 본성이 있다. 그 본성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끌었고, 그 본성은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그리스도로 나기만 하면 된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났다고 하면서 노력하는 사람들은 포도원 주인에게 드릴 소출이 없다.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다. 노력하고 있다는 건 없다는 말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은사를 덕을 세우는 것과 남을 위하는 일에 쓰라고 권면한다. 이유는 은사의 주체인 성령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본능을 가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를 이와 같은 성령의 본성과 상충되게 신앙의 우위 혹은 더 좋은 신앙으로 간주하면 고린도 교회처럼 신앙을 기조로 분열하거나 더 좋은 신앙이라는 착각이 대접받게 된다.

 

이는 일반적인 사람의 관점과 사뭇 다르다.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남을 유익하게 하는 것의 의미도 다르다. 병 고치는 은사로 아픈 사람을 고친 일을 예로 보면, 예수님께서도 또 사도와 선지자들도 그렇게 아픈 사람을 고쳤으니 남을 위한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그 일로 나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사람이 생각하는 그리스도 또한 바울 사도가 전한, 무엇보다 예수님이 전하신 그리스도와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이고, 복음 속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육신의 존재 목적을 회복시키는 존재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졌다. 그러니까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본성이 그렇다. 그래서 생명이고, 그래서 거듭난다고 한다.

 

앞선 글에서 설명한 각 은사의 개요 역시 이 관점에서 봐야 한다. 육신의 일을 예언하는 게 예언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자람에 따라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지를 전하는 게 예언인 것처럼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일에 관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만 이처럼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는 건 노력으론 되지 않는다. 신학 같은 것으로 어림도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된다. 그리스도로 나면 그리스도라는 생명이니 그 안목과 관점이 바로 그리스도로써,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성령의 모든 은사는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나서 하나의 목적을 지향한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에서 비롯되고 성령의 가장 본질적 직임이자 능력이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일이니 너무 당연한 것일 뿐 아니라, 이것이 바로 성령을 보는 유일한 하나님의 관점이다. 성령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가 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를 바라시며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더더욱 당연한 이치다.

 

이런 관점이 있다면, 즉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라면 성령의 은사를 우리 몸에 견주어 몸의 각 지체로 설명하는 건 아주 훌륭한 설명임을 알게 된다. 우리 몸의 어느 지체라도 나의 자아가 지향하는 바를 협력하기 위해 자신의 수고를 내어 주기 때문이다. 본다는 건 눈이 종 노릇 한다는 것이고, 걷고 달린다는 건 다리와 발이 종 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몸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가 이렇다면 복음 안에서 직분 역시 같은 이치다. 하나님의 영이 행하는 능력이 그리스도를 위함이라면,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인 교회에서 맡은 직분 역시 그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성령의 은사도, 하나님의 직분도 아니다. 또한 은사와 직분이 이와 같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삶과 박리되어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교회도 아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쟁점이다.

 

직분이 당회처럼 어떤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이거나, 교회 학교의 부장이 되는 조건이라면 그건 남을 위한 게 아니다. 설마 당회원과 교회의 부장이 남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일로 사람이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아마 모르긴 해도 당회의 논의는 교회가 세상적인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 논의할 것이고, 교회학교는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기를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그건 정상적인 사고를 가졌다면 십자가를 지는 것의 대척점에 있단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몸의 지체는 서로를 배척하거나 몸을 위해 더 나은 지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이게 바울 사도 비유의 내용이다. 은사나 능력도, 교회의 직분도 바로 우리 몸의 지체가 가진 것과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야 성령의 은사고 하나님 나라의 직분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거역할 수 없는 생명의 본성에 이끌려서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역사를 위해 자기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는 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더 큰 능력을 보이겠다고 하고 사랑을 말한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