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599

(고린도전서 12:1-3) 신령한 성령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3. 3. 15. 07:06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신령한 것에 대한 말씀을 이어간다. 오늘날도 신령한 것에 대한 사람의 관심은 높다. 경계하면서도 성령의 은사, 기적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높다. 무엇보다 자기 삶에 그런 기적이 필요한 순간들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사람의 생각과 많이 다르다. 본질에서부터 다르다.

 

무엇보다 다른 건 성령의 정체성이다. 사람은 성령을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영으로 생각한다. 그 말이 틀린 것 아니지만 기적의 본질이 다르다. 성령은 사람의 생각처럼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일을 일으키는 능력을 일으키는 게 본업인 영이 아니다.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성령의 능력은 바로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필요하면 태양도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이지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게 본성인 영이 아니시다.

 

앞서 바울 사도는 성찬에 대해 말씀하면서 자기를 돌아보라고 했고, 그건 자신이 그리스도 거듭난 사람인지를 돌아보라는 말씀임을 설명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고서 탈이 나지 않으려면(죄가 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령한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은사를 말씀하신다. 성령에 대해 바로 알아볼 시간이다.

 

앞서 성찬에서 합당하지 않게 성찬에 임하는 건 주의 몸과 피에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심과 같은 맥락으로 성령으로 말하는 자는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는다고 말씀한다. 무엇보다 성령이 아니면 예수님을 주라 할 수 없다고 분명히 한다. 여기서 주목할 건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이란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천한 사형수로 실패한 예수, 그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지 세상에서 이긴 자거나 이긴 자가 되게 돕는 예수가 아니다.

 

즉 세상 기준, 세상 지혜로 볼 때 분명히 실패인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실패자가 아니라 나의 구주로 부른다는 건 성령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가장 근원된 능력이고 신령 능력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주라 부르는 예수는 세상에서 자신을 이기게 도와주는 주님이고, 세상의 실패와 세상 기준에서 낮은 처지의 자신을 구원할 주님이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아니다. 이걸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

 

따라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주로 부르는 건 한국사람이 일본 수상을 국가원수로 대하는 것과 같다.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패배자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육신의 성공과 평안을 달라고 하는 것 이상의 조롱도 없다. 이 모두가 예수님을 저주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으로 난 사람은 그럴 수 없다.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자기 육신의 영화를 구할 수 없다. 이건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아는 마음이다. 마음에 천불이 나도 자식을 이길 수 없는 부모처럼 눈에 보이는 게 아무리 많고 급해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로 여기고 부를 수 없다는 걸 안다.

 

이게 바로 신령한 일이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은데 마음이 그렇게 이끌리고, 오히려 성경대로 살려고 애쓴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자신을 느낄 때 그 신령함을 맛본다. 바울 사도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신령함이 바로 이것이다. 무엇보다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것, 이렇게 거듭나게 하는 것, 이것이 성령의 능력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리하신 일은 오병이어처럼 모든 복음서에 기록된 유명한 말씀이다. 그리고 잎만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의 중간에 있다. 잎 곧 성경을 지키려는 행위만 풍성한 신앙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여기시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양식이 되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신 다음 사건이란 걸 주목해야 한다.

 

당시 성전 상황은 일면 이해되는 부분이 있긴 하다. 유월절에는 번제를 드려야 하고, 제사엔 제물을 바쳐야 하지만 멀리서 오는 사람은 가지고 오기 힘들기에 성전에 와서 제물을 사는 상황이었다. 일면 합리적인 일이고 어떻게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장사하는 이들의 상과 앉은 의자를 엎어 버렸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고 화를 내었다. 제물을 사고파는 걸 강도의 일이라고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을 황폐시켰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우리가 잘 아는 주기도문이다. 이 주기도문에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건 없다. 있다면 그건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땅이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지배하도록 나를 허용 곧 순종하는 게 기도임을 말씀한다. 사람은 땅의 흙으로 지음을 받았고, 땅은 하늘의 변화에 종속되어 순종하듯 기도는 하나님의 의가 내 삶의 본질이 되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기도는 Give and Take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나는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하나님께 드리고 육신의 복락을 구한다. 모든 종교인의 기도가 이렇다.

 

오늘날 종교인들의 기도 역시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러 온 사람들에게 하신 책망의 대상이다.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드리고 육신의 복락을 얻으려는 기도는 강도질과 같다. 강도는 자기 것은 주는 건 없이 상대의 것을 빼앗으려는 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건 드리지 않고 원하지 않는 걸 내놓고 자기는 원하는 걸 가지려 하니 강도다. 그리고 하나님과 거래를 시도하니 장사다.

 

이런 이유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 사이에 이 말씀이 있다. 유대인의 나무 무화과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는 그리스도란 열매 없이 율법적 행위의 풍성함만 내놓는 유대인의 신앙을 저주하신 것과 같은 맥락에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강도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지키는 노력으로 육신의 복락을 얻으려는 오늘날 기도 역시 예수님 책망의 대상이다.

 

열매, 곧 그리스도의 생명 없이 구하는 건 역시 열매 아닌 형식이다. 그리스도의 생명 없이 기도하니 육신의 일을 구한다. 이런 신앙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언제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육신도 구하지 못한 그리스도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육신의 일을 구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 역시 육신의 일이고, 기도도 육신의 행위를 드려 육신의 복락을 구한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란 말씀을 들으면 오히려 가룟 유다처럼 배반하는 게 솔직하다.

 

하지만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날 기독교인 역시 그렇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세상 법으로 더 이상 낮고 천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세상의 성공을 구하면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자신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았다고 떠든다. 이런 강도가 또 없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11:27)

 

성찬식은 어쩌면 그나마 경건을 유지하고 있는 종교의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성도들이 나름 정성을 다하는 예식이다. 그 바탕은 바로 바울 사도의 이 말씀 때문이다. 성찬식을 경건하지 않게 임하는 건 죄를 짓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실은 죄가 무서운 게 아니라 죄로 인하여 받게 될 형벌을 무서워하기 때문인데, 그 형벌은 지극히 육신적인 것임도 부인할 수 없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성만찬에 참여하지 않았다. 시기적으로 보면 그때는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바울 사도는 이 예식을 주님께 받았다고 했다. 포도주와 떡을 먹는 형식에 성만찬의 본질이 있는 게 아니란 의미다. 합당하게 잔과 떡을 먹고 마신다는 건 예식에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고전 11:23)

 

먼저 생각해볼 것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게 무엇인가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의 본질은 한마디로 거듭남이다.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식인의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렇다고 이게 그렇게 간단한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아마 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건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된다는 것

 

예수님을 설명하는 성경 말씀 중에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는지,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은 아마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일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구원도 역시 이것이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되는 것, 즉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 곧 나의 삶이 되는 게 하나님의 뜻이다. 사람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본성, 삶의 본성이 된다는 의미다. 이것이 그리스도다. 그리고 예수님은 육신으로 처음 그리스도가 된 분이다. 그런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건 곧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된다는 말이므로 성찬의 의미는 곧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며 십자가와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니 주님께 이 성찬을 받았다고 하는 게 진정 합당하다. 그뿐 아니라 진정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모두 예수님의 몸과 피를 주님께 받은 것이다.

 

성찬을 합당하게 받는다는 건 성찬식을 앞둔 얼마간의 기간 동안 착하게 살고, 말도 조심하고, 음란한 생각도 하지 않고, 경박스럽지 않게 성찬식에 참여하는 게 아니다. 그건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의 경건이다. 무엇보다 그런 식으로 성찬의 경건을 생각하는 게 바로 합당하지 않게 주의 잔과 떡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존재를 의롭게 하신 것이니 행위를 의롭게 하려고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바울 사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고 했다. 무엇을 먹거나 마셔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려면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가진 하나님의 영광으로 되지 않는다. 그걸 먹지 않는 순간이 더 많고, 세상의 먹거리가 모두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먹고 마셔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려면 먹고 마시는 존재, 사람이 영광스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사람이 이렇게 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합당하게 성찬에 참예하는 건 일정기간 경건한 행위로 준비하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 존재여야 한다. 그건 바로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해마다 성찬식은 주기적으로 돌아온다. 성찬에 임하기 전 행동을 경건히 해야 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그리스도로 거듭난 게 아니다. 늘 말하지만 노력한다는 것은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런 태도로, 그런 마음 가짐으로 성찬에 임하는 것 그것이 성찬에 합당하지 않은 모습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성찬에 임하기 전 자기를 살피는 것은 행동의 경건함이 아니다. 이건 지금도 동일하다. 바울 사도가 살피라고 한 건 자기 정체성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셔서 탈이 나지 않으려면 자신이 그리스도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거부반응이 일어날 게 분명하다. 이건 그림자처럼 육신의 유전적 특성으로 예시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성찬을 베푸신 의도도 그리스도고, 바울 사도가 살피라고 한 자신 역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기준이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인 사람을 위한 성찬이다. 성찬에 앞서 자기 <행위>를 돌아보는 자는 본성이 그리스도인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시늉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자기 본성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생명은 없다.

 

바울 사도가 책망하는 고린도 교회의 모습도 같은 맥락이다. 먼저 와서 많이 먹는 걸 책망하는 게 아니다. 지혜에 밝은 자신은 성찬에 지분이 더 많다는 태도다. 역시 행위를 기반으로, 세상 지혜로 조명한 신앙의 모습이 큰 사람으로서 자기를 더 높인 교만으로 성찬에 임하는 사람의 모습을 책망하는 것이다. 성찬은  먹는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니 시장하면 집에 가서 먹으라고 한 것이다. 육신의 경건을 살피는 것도 아니고, 육신을 위해 먹는 것도 아니란 책망이다.

 

해마다 성찬은 두어 차례 돌아온다. 그 전 일주일 정도 혹은 그 이상의 행실을 깨끗하고 경건하게 유지하고 성찬에 임하는 게 합당하게 성찬에 임하는 것이나 자기를 돌아보는 게 아니다. 핵심은 행위가 아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와 몸과 피가 같은 지의 문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자신인지 돌아보라는 뜻이다. 지표는 간단하다. 성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으로 성찬에 임하고 있는가? 그럼 성찬을 범하는 사람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