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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의 구원과 복음의 구원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3. 8. 14. 15:07 Writer : 김홍덕

최근에 구원받았는데 다시 회개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말씀으로 인해 몇몇 분들이 구원파와의 차이를 물어왔다. 다들 구원은 어떤 존재가 되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아는 분들이라 걱정은 하지 않지만 생각해보니 어떤 이들에겐 고민이 되리라 생각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1. 복음의 구원은 구원의 정체성이 다르다.

구원파는 물론이고 기독교, 천주교 그리고 그 아류들이 말하는 구원은 존재론적 구원이라 하기 힘들다. 현재 블로그에 연재되고 있는 출애굽기에서 자주 설명하듯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자기 생명의 본성, 삶의 목적과 의미인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존재론적 구원과 구원파를 비롯하여 일반적으로 말하는 구원의 차이는 구원을 믿는 사람들의 기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신앙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은 구원받으면 만사형통하고 죽고 천국에 가면 금면류관을 얻는 구원이다. 그래서 그들의 기도는 늘 육신의 일을 구한다.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는 힘을 주시길 구하여 그 힘으로 세상의 유혹을 이겨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기를 구한다. 이런 기도를 정리하면, '돈 달라', '밥 달라'.

 

이런 기도에 있어 구원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는 대상이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구원을 얻어야 하나님께 육신의 성공을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계층에 속하게 된다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경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께 무언가 간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흔쾌히 주실 마음이 들도록 늘 행실을 경건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표현을 용인하지 않겠지만 신앙인의 신앙 행위 대부분은 '해야 하므로', '하지 않으면 벌을 받기에', '이렇게 해야 상을 받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런 신앙 안에는 <노력>이 빠질 수 없다. 늘 깨어 있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경건하려 노력해야 한다. 이런 가치관의 집약이 천주교의 신부나 수녀 그리고 예전 수도승이다. 그러나 노력이란 분명히 이르지 못한 자의 필수적인 도덕이다. 수능에 합격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 학생은 수능 공부를 다시 하지 않는다. 거듭나서 그리스도가 되었다면 그리스도처럼 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되려고 노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복음의 구원, 존재가 바뀌는 구원은 노력해야 하고, 하지 않으면 벌 받는 그런 구원과는 전혀 다르다. 세계관과 가치관이 다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거듭남이다. 거듭난다는 건 다른 생명이 된다는 의미다. 늘 비유하듯 만약 늑대가 양으로 거듭난다면 고기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인 것처럼,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난다면 복을 받기 위해서나 벌 받지 않기 위해서 성경을 지키는 게 아니라, 행여 어기려고 해도 어길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2. 구원받았다면 회개하지 않는다.

이 문장이 구원파와 많이 겹치는 모양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근원적으로 구원이 다르다. 구원이 다른데 회개가 같을 리 없다. 공산당이 민주주의라고 말한다고 그게 민주주의가 아니듯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 아닌 다른 구원의 세계에서 회개를 몇 번 하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을 얻었다면 다시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 이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다른 구원이 한 번만 회개하면 된다고 말한다고 같은 구원, 같은 회개가 될 수는 없다.

 

구원이 다르면 회개가 다르고, 회개가 다르다는 건 죄도 다르다는 의미다. 또한 구원이 어디서부터 어디로의 구원인지도 명백히 다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에서 벗어난 자리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이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나는 구원과 육신이란 형식이 처한 사람의 곤고함에서 벗어나 육신의 문제를 기도하면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는 범주에 편입하는 건 어느 구석도 같은 데가 없는 전혀 다른 구원이다.

 

특히 회개는 한 번이면 족하다는 건 존재가 바뀌는 걸 말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벗어난 존재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삶의 본성이 된 생명으로 거듭나는 건 한 번이면 된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다음에 또 무엇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게 성경에 있는가? 이처럼 존재가 바뀌는 게 회개다. 이 회개라면 당연히 한 번이면 족하다.

 

그러나 구원파가 말하는 회개는 행위로 범하는 죄에 대한 회개다. 한 번의 회개로 다시는 죄를 범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고 말하려 하니 여러 모순에 직면한다. 그래서 구원받아도 죄를 짓는 건 어쩔 수 없다는 사족을 떨칠 수 없다. 그리고 이건 소위 정통이라 말하는 사람들 역시 벗어 버릴 수 없기에, 이런 굴레를 벗는 것처럼 말하는 구원파가 용납되지 않는다.

 

더 심각한 건 하나님의 구원은 분명 한 번의 회개면 충분한데 이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불신이 (다행이도) 구원파의 그릇된 구원을 감찰한 공로는 있을지 모르지만, 정작 자신들이 거듭난다는 구원 이후에 회개하고 있다는 절대적인 모순은 더 해결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왜냐하면 정통이라는 신앙 역시 죄는 행위에 관한 것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존재가 목적을 벗어난 게 죄라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 하나님이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 물으신 게 아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즉 너는 어떤 존재인지를 물으셨다. 예수님도 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사람이 예수님의 행동이 아니라 존재 정체성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는지를 물으셨다.

 

그렇다면 구원과 회개는 모두 존재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 사람의 어떤 행위가 성경과 규범을 벗어났는지로 죄를 정의하면 구원도, 회개도 미궁과 모순에 빠진다. 그래서 아직도 연구한다. 신학이란 학문이 되었다. 하나님 말씀이 연구할 일인가? 믿음으로 순종하면 거듭나는 것이지.

 

거듭남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거듭나서,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다.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고, 그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로 거듭났는데 성경을 지키려는 노력은 왜 필요하며,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게 자기 생명 본성이 되었는데 뭘 더 어떻게 회개하고, 경건해져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다윗이나 선지자들이 간음하고 후처를 얻기도 하고 또 행위라는 관점에서 죄를 범함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옥에 던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심지어 모세가 이방 여자(구스 여인)를 취했을 때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책망하자 하나님은 도리어 아론을 책망하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발하기도 했다. 이런 하나님 앞에 행위를 기준으로 죄와 구원을 논하는 게 바른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3. 맺는 말

성경이 말하는 죄는 행위가 본질이 아니다. 행위는 존재에서 비롯된다. 간첩은 제아무리 선한 일도 하면 할수록 죄가 되듯, 하나님이 원하는 존재로 거듭난 게 아니라면 말 그대로 천사의 말을 해도 소용없다. 이게 하나님의 시각이다. 따라서 당연히 구원도 존재의 회복이다. 그래서 거듭남이다. 그리고 거듭남은 생명에 관한 말이다. 생명이기에 본성이 있고, 그 거듭난 본성이 그리스도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게 구원의 회개이므로 한 번만 거듭나면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살면 그의 모든 삶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꼭 언급해야 하는 게 있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에는 도둑질이 없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생명은 하나님이 죄로 여기실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게 그리스도라는 본성의 본질이고 정체성이다. 이것도 모르면서 구원을 논하거나, 회개의 횟수를 논하는 건 오지랖에 불과하다. 구원파는 물론 자기를 정통이라 말하는 신앙들의 구원론과 회개 그리고 죄사함은 다 오지랖이다. 자기가 모르고, 자기 정체성 아닌 걸 떠드니 다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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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1) 당신은 나의 피남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3. 8. 13. 03:45 Writer : 김홍덕

(출애굽기 4:18-31)

하나님과의 줄다리기가 끝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애굽으로 간다. 그런데 성경은 이 상황을 장인에게서 떠나는 것으로 표현한다. (4:18-19) 그리고 난 뒤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신 것이다. 이에 그 아내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그 표피를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면서 당신은 나의 피남편이라 외치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놓으신다. (4:24-26)

 

왜 하나님이 갑자기 모세를 죽이려고 했을까?’ 싶은 궁금증을 유발하는 이 사건은 모세의 지나친 사양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지도자로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란 걸 알고 조명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목적이 모세를 죽이거나 어떤 대가를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이 일 후로는 지나치게 사양하던 모세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건 모세의 정체성을 확정하는 사건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

 

그런 측면에서 이 사건은 모세에게 있어 세례와 같은 사건이다. 사람의 정체성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어 육신의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순종하지 못하던 모세를 형식을 본질로 보는 가치관을 버린 존재로 확정하는 사건이다. 이 일을 겪고 애굽에 돌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만난 모세는 하나님이 보여주라는 기적을 행한다. 이젠 하나님의 능력,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의가 모세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목적은 모세를 죽이거나 겁박하기 위함이 아니라 모세의 정체성을 확정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관용적 표현을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할례라는 의식은 형식을 벗겨내는 것, 즉 형식을 본질로 보는 시각과 본성을 벗어난 존재라는 걸 확정하는 예식이다. 그리고 또 하나 성경 속 여자는 항상 형식을 의미한다. 특히 남녀가 가지는 상징성은 그리스도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육신이란 형식을 입은 존재다. 여기서 하나님 앞에 사람은 형식이고 하나님은 내용이며, 남편은 내용이고 아내는 형식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도 대표적인 사건이다. 아비 회당장은 형식은 있지만 내용은 없는 회당장의 품에서 난 자식이 딸이며 그마저도 회당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에 죽은 상태로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그 딸을 살리신 건 예수님이 바로 회당의 내용이고, 내용과 형식이 있는 상태를 하나님께서 생명이 있는 상태라 하신다는 말씀이다.

 

이런 성경의 흐름에서 보면 장인에게서 떠난다는 건 형식을 떠나겠다는 의미다. 입이 둔하여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가치관을 떠난다는 의미다. 이런 모세 앞에 모세의 품속에서 나온 아들의 할례가 행해졌다는 건 모세의 생명이 입이 둔하여 하나님의 일을 못하겠다는 형식에 매인 상태를 벗어났다는 걸 확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모세의 의가 육신이 된 아들에게 행한 할례는 피는 생명이고, 남편은 내용이며, 할례는 형식을 벗어버리는 예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피남편이라는 건 모세가 아내 십보라에게 생명의 남편이란 걸 넘어 모세는 이제 형식에 매몰된 존재가 아니라 생명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다.

 

이 사건은 이제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격 있는 지도가 되었다는 걸 확정하는 사건이다. 모세에 대한 자격 인증이 이 사건의 목적이자 본질이란 의미다. 출애굽 과정에서 처음 바로 왕을 대면했을 때 어느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 모세가 말을 잘하지 못해서 아론이 나서야만 하는 상황은 별로 없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므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끄는 온전한 지도자로서가 되었음을 확정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우리 역시 모세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바로 형식이 본질이 아니라는 걸 아는 존재,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란 형식이 된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게 구원이고, 그런 존재가 그리스도기 때문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가나안까지 이끄는 여정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란 내용이 육신이란 형식이 되는 존재,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 구원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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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0) 말에 능치 못한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3. 8. 3. 12:18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가 다시 지팡이가 되는 기적과 문둥병이 발하였다가 깨끗해지는 기적을 보이셨음에도 모세는 자신이 말에 능하지 않다는 핑계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또 사양한다. 결국 하나님은 진노하시면서 형 아론을 데리고 가라고 말씀하신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입을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것을 모세에게 상기시킨다.

 

겸손 같아 보이는 모세의 모습은 단지 이스라엘의 지도자 역을 사양하는 게 아니다. 모세의 모습은 하나님의 일, 구원에서 순교에 이르는 모든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어떤 조건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람의 일반적인 태도다. 사람이 생각하는 조건은 다분히 사람의 생각이고, 분명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이지만 사람은 대개 이렇다. 그리고 그 조건은 대부분 돈, 곧 경제적인 것들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일에 사람의 조건은 필요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어 제시하는 조건은 하나님께서 부자가 되게 해 주시면 그 돈으로 주의 일을 하겠습니다!’라는 다짐 같은 것인데, 이게 복음의 사역은 물론이고 심지어 구원도 그렇게 생각한다. ‘먹고 살기도 급한데 인생의 의미가 무슨 소용이냐?’는 식이다. 말이 둔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어렵다는 모세의 항변이 사람의 이런 모습을 대변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이런 태도를 장사하는 것이라 일갈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출 4:11)

 

또한 모세의 사양과 변명에 관해 네가 걱정하는 입과 말은 내가 지은 것이란 말씀으로 탄핵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천부께서 이미 다 아신다.”라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표현할 사람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아시고 미리 다 준비하시는 분이다. 이게 <여호와 이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사람의 육신과 말은 형식일 뿐, 본질은 하나님의 의다. 그리고 의가 온전하면 형식은 자연스레 온전하다.

 

모세가 언급한 말에 관해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게 있다. 바로 말은 형식이란 것이다. 본질은 말로 표현하는 의도다. 말이 어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기 어렵다는 모세의 변명은 의도보다 형식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건 모든 사람의 생각이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일이 갖추어져야 하나님의 일이 온전하게 된다는 사람의 생각이다. 교회를 잘 건축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이 모인다는 생각이 그렇다. 그런 교회에는 형식이 중요한 사람이 모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는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형식을 가진 존재가 필요해서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는 하나님의 반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 이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까지 언급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입을 만드셨다는 건, 하나님의 의라는 무형의 뜻이 입으로, 말로 표현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입과 말은 의가 분명하면 그에 종속된다.

 

사람은 때로 예수만 믿으면 도둑질해도 되느냐?” 묻기도 한다. 그건 그리스도가 도둑질하는 본성을 가졌느냐?”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질문이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같은 본성에서 비롯된다. 마귀의 자손들은 마귀의 본성대로 행동하며 산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게 자기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형식은 의에 종속된 것이다. 무엇이 본질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보이는 태도다.

 

하나님이 조성한 입의 말이 어눌해서 순종하지 못하겠다는 모세의 모습은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는 사람의 모습이자, 사람이 생각하는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사람의 불신을 대변한다. 모세에게 한정된 마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이란 뜻이다. 생각해보면 구원은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형식이 아닌 본질이 바뀌는 것, 생명이 바뀌고 바뀐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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