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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전반부를 세상 지혜에 의지한 신앙을 책망하는 데 할애한 바울 사도는 후반부로 갈수록 사람의 유익을 많이 말씀한다. 그렇지만 주제 전환은 아니다. 오히려 전체적인 흐름에서 당연한 전개다. 세상의 지혜는 너 보다 내가 낫다라는 생각을 실현하는 지혜다. 하지만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한다. 고린도전서 후반부 역시 세상 지혜 아닌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는 과정이다.

 

바울 사도는 다시 우상 숭배 제물에 대한 말씀을 한다. 시장에서 파는 것이나 차려진 음식에 대해 상인이나 차린 사람이 우상의 제사에 올렸던 음식이라고 밝히지 않는다면 묻지 말고 먹으라고 말씀을 한다. 그러나 반대로 음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우상 숭배 제사에 올렸던 것이라고 알려 준다면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권면한다.

 

이 말씀을 유념해 볼 이유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모든 이의 유익을 위하라고 말씀한다. 우상 음식을 대하는 원칙을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에게 두고 있다. 사람의 유익을 위하라는 의도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전 10:31)

 

우상의 제물을 먹을 것인지의 기준이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권면한 다음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고 했다면, 결국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게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다만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게 육신의 재화와 용역을 제공하라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삶을 인하여 그리스도로 거듭나도록 하라는 의미다.

 

생각해볼 것은 또 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즉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모범이 되려면 모든 순간, 모든 상황에서 그렇게 하라는 의미인데 이게 사람의 노력이나 신념으로 될 일이 아니다. 즉 율법을 지키듯, 성경에서 이렇게 하라고 하셨으니 노력하려는 신념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람의 정체성이다.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든지라는 이 말씀이나 항상, 쉬지 말고라는 갈라디아서의 말씀은 늘 도전이다. 사람에게 이런 항상성이 있는 빈도부사를 조건으로 무엇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결국 <노력>이라는 것으로 타협하고, 하나님께서 그 마음만은 알아주실 것이라며 스스로 위안한다. 하지만 만가지를 다 지켰다고 해도 단 하나를 어기면 모든 것을 어긴 것이고, 성경 말씀 한 올이라도 다 예외 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야 한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건 없어 보이지만 사실 너무나 쉬운 방법이 있다. 남자로 태어난 사람에게 항상, 무엇을 하든지 남자로서 살라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자도 그렇다. 생명이라면 그 생명의 정체성대로 사는 건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그냥 일상일 뿐이다. 때로 그 생명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행동을 할 수는 있지만 그런다고 생명 다움이 없어지지 않는다. 성전환 수술을 한다고 해도 유전자는 원래 성별을 유지한다.

 

따라서 이 모든 말씀을 지키는 간단한 방법은 그리스도로 나는 것이다. 성경 말씀은 모두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삶이 무엇인지, 또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신 것이니 그렇게 쉽게 말하는 구원, 즉 그리스도로 나면 이 모든 건 그냥 이루어진 상태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노력>하는 신앙은 거듭난 게 아니라고 늘 설명하고 있다. 사람으로 나면 사람이 되려고 마늘을 먹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난다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 셀 수 없는 많은 사람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믿는데 정작 성경은 지키려고 노력한다. 성경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열심히 마늘을 먹고 있는 곰일 뿐이다. 노력하고 있다면 그리스도로 난 게 아니다. 단언코.

 

그리스도로 난다는 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었다는 의미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리스도라는 본성에 이끌려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그리스도로 났다면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살 수밖에 없다. 즉 너의 주장 앞에 나의 육신을,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고, 내 안에 있는 옳음을 낮추고 버릴 수 밖에 없는 본성에 이끌려 살 수밖에 없다. 이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상의 음식을 대하는 마음 역시 결이 같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대해 나의 기준으로 먹고 마실 게 아니라, 나를 보는 이의 신앙적 성숙, 나에게 음식을 주는 이의 양심을 우선으로 정하는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을 수 있는데, 그리스도로 났다면 자연스럽게 알 수밖에 없고, 뭐라하지 않아도, 별다른 코치 없이도 그렇게 행동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그리스도로 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생명이 모든 순간, 무엇을 위하든 그리스도로 사는 존재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다. 따라서 어떻게 항상, 쉬지 않고,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할 수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로 나면 그냥 된다. 이게 되지 않아 어쩧게?라는 고민을 하고 있다면 단순하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게 아니다. 심지어 신학이라는 학문까지 만들어 연구하지만 모든 게 다 무덤에 회 칠하는 거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없는데 이런 저런 궁리로 아름답에 타협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다 된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은 남의, 너의 주장에 나를 내어준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에도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여기 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기에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어길 수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는 그럴 수밖에 없다. 이 그리스도의 본성이 바로 사람으로 표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형상이자,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그리스도로 나면 모든 순간, 모든 삶, 모든 말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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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46-52) 소경 바디매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3. 3. 1. 05:55 Writer : 김홍덕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가에 소경 바디매오가 있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의 소리를 들은 바디매오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라고 알려 주었다. 거리가 소란스러울 정도로 따르는 많은 사람과 지켜보는 이들에게 나사렛 예수였다.

 

유대인들은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했다. 앞서 부자가 영생을 구하려 예수님을 부른 호칭 선한 선생속의 선()도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이 선은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만 한 행위다. 그러니까 부자도 무슨 선한 <행동>을 해야라고 물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라고 반문했다. 세상에서 축복받는 행동을 선으로 여기면서 세상의 저주인 십자가를 지는 나를 왜 선하다고 하느냐는 반문이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의 기준은 모두 영생을 구하다 돌아간 부자나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마음이다. 기대하는 사람이나 비난하는 사람이나 그 기준은 모두 영생을 구한 부자의 기준처럼 하나님께서 육신의 삶에 복락을 주시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의 행동이다. 나라의 독립이나 가난이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인지 아닌지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이 생각하는 오직 단 하나의 그리스도다.

 

바디매오 주변에 예수님을 따라가는 군중이나 서서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사람이나 모두 이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다. 천하고 가난하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하나님의 선함이 없는 가난한 나사렛에서 온 예수님께서 세상을 그들의 기준으로 구원할 것인지를 보고 있다. 기준이 이것이기에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라 부르고,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다. 그리고 지금은 교회에서 세상의 복락을 주는 주님으로 부른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달랐다. 그는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본 적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왕 다윗의 자손으로 불렀다. 육신의 눈을 뜬 자들은 육신의 행위가 세상의 복락이라는 선을 가져온다고 믿느라 예수님을 바로 보지 못하지만, 육신의 눈을 볼 수 없는 바디매오는 육신의 어떠함과 무관하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하나님의 메시아로 바로 보았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했지만,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했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 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바디매오가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니 조용히 하라고 나무랐다. 그러나 그를 더 큰 소리로 외쳤고 예수님께서 듣고 그를 오라고 불렀다. 많은 군중 속에 있어도 자기 이름 부르는 소리는 들린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신 것이다.

 

문제는 다음이다. 예수님이 오라고 하셨을 때 바디매오는 자기 겉옷을 벗어버리고 뛰어갔다. 소경이 뛴다는 건 자살행위다.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 전혀 볼 수 없는데 뛰어간다는 건 너무나 위험한 일이다. 더구나 날 때부터 소경이었다면 알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부딪히고 넘어지며 다친 경험을 가진 그가 오라는 말 한마디에 전 재산인 자기 겉옷을 버리고 뛰어갔다는 건 정말로 놀랍고, 대단한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너를 구원한 믿음이라고 하신 믿음이 바로 이것이다. 단지 위험을 무릅쓴 용감한 행위나 그런 행위를 이끈 마음을 칭하시는 게 아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믿고 그가 자신이 처한 불쌍한 처지를 회복시키실 것이란 믿음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예수님의 정체성 그대로 보는 안목을 가진 믿음, 이 믿음이 그를 보게 했다. 예수님을 바로 인지하고 있으니 그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소경이 보게 되는 게 앞서 말한 선함이나 육신의 축복이라고 하겠지만, 그가 보게 된 이후 세상 만물을 보러 간 게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간 그의 모습에서 예수님께서 칭찬한 믿음이 나사렛과 연관된, 부자의 영생과 연관된 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가 예수님을 부를 때 호소한 자신의 불쌍함은 만물을 보지 못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바디매오에게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보는 믿음, 이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말씀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황금마차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면, 아니면 능력을 발휘해서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와 가난을 해결했다면, 예수님을 보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게 어렵진 않다. 그러나 말구유에서 나고 천한 나사렛 사람인 것도 모자라 세상 가장 천하고 낮고 비참한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믿는다는 건 세상 관점에서 제정신 아닌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바로 구원이란 걸 바디매오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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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14-22) 우상숭배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3. 2. 25. 04:28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견딜 만한 시험만 주신다는 말씀 전후에 우상 숭배의 일을 언급했다.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하는 마음은 출애굽 당시 금송아지를 만든 것처럼 우상을 숭배한 것과 같은 마음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사람이 우상이나 신을 섬기는 이유는 어쩌면 단순하다.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자기 원하는 대로 되기 바라며 의지하는 대상이 신과 우상이다. 따라서 해결하고자 하는 일과 문제의 성격이 신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신이 많은 이유는 인류는 농경사회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농사의 핵심인 기후가 사람의 손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이나 우상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는다. 따라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고 섬기는 신이나 지혜는 모두 육신의 문제를 주관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건 눈에 보이는 육신과 육신의 일을 본질로 보고 있다는 증거다. 육신의 형편이 나아지면 축복이고, 육신이 불행한 일을 당하면 징벌이라는 말하는 게 이를 설명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다. 앞서 설명한 신을 찾는 이유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은 여호와(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행위나 육신의 어떠함이 아니라 존재가 무엇인지를 의로 삼는 분이다.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무엇인지가 정립될 때 만날 수 있는 신이 여호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창조주기 때문이다. 창조하셨다는 건 목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성경이 유일신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오직 하나님만 육신의 일,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지 않는 신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육신의 일을 기준으로 복이나 벌을 주지 않고 육신의 형편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께서 다른 신과 마찬가지로 자기 말에 육신으로 수고한 보상으로 육신의 풍요를 주는 신이라면 예수님이 말구유에 나지도 않고 황금마차를 타고 내려왔을 것이고, 십자가 같은 일은 아예 없었을 것이다.

 

우상은 산이나 절이나 신당에 있는 게 다가 아니다. 오히려 그건 빙산의 일각이다. 진정한 우상은 일상의 마음 가짐에 있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라고 주신 육신의 삶이란 형식의 어떠함이 곧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라 믿는 게 우상이고, 그 믿음 위에서 육신의 삶에서 겪는 육신의 문제와 소망이 해결되고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의지하는 모든 대상이 바로 우상이며, 그 섬김이 우상 숭배다. 그 대상을 설사 하나님이라 부른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바울 사도가 교회를 향해 우상 숭배를 경고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특히 스스로 선 줄로 아는 이들, 세상 지혜로 복음을 조명하는 걸 수준 높은 신앙이라 여기는 이들은 우상 숭배하는 것을 조심하라고 권면한다. 이 말씀은 오늘날 세상의 지혜나 철학을 가지고 신앙을 조명하고, 설교하고, 훈계하는 이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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