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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어린이 주일이면 우리는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생각해볼 건 예수님의 의도다. 어린아이 같아지라는 뜻인데, 어떤 게 어린아이 같아지는 건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여기엔 하나의 단서가 있다. 바로 어떤 상황에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지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가시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의도와 달리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오천명을 먹이는 능력으로 가난을 해결하는 왕, 그리고 로마의 속국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끄는 왕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유대인은 그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대 사람들 역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이것이 어린아이와 같아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배경이자 이유다. 그렇다면 우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를 기다리거나 믿는 사람은 어린아이 같지 않음을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어린아이는 육신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이는 먹고사는 문제를 염려하지 않는다. 염려하지 않는 일에 메시아를 기다릴 리는 더더욱 없다.

 

사람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먹고사는 문제에 매몰되어 있다. 그리고 그 문제 해결을 늘 힘들어한다. 물론 그 어려움은 하나님의 설정이 아니다. 스스로 얻은 게 아닌 삶에 자기가 정한 기준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삶의 문제가 곧 구원받아야 할 문제다. 그래서 구원자에게 이 문제를 의지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에게 중요하지 않은 우리가 가진 육신의 문제에 관심이 없다시피 했다. 왜냐하면 그건 하나님께서 이미 사람에게 충분히 또 온전히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다 주신 걸 또 달라는 어리석음은 예수님께서 밝히고자 하신 어두움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난 같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러 이 땅에 오신 게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란 말씀은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이길 기대했다. 언뜻 믿음 같지만 그건 그릇된 기대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전혀 무관한 자기 육신의 문제 해결을 기대하기에 그렇다. 예수님께선 오히려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이러 오셨다. 그리고 그 실체는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였다.

 

십자가를 진다는 건 죄는 사람이 짓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개념이 아니다. 그건 기독교 신학이 만든 대속관일 뿐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예수님께서 대속하고자 하는 죄는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정체성을 떠난 일이다.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정체성을 떠난 사람에게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모습을 십자가에서 보이시고, 사람이 이를 보고 떠났던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 게 구원이다. 이 법이 십자가가 죄를 사하는 법이다.

 

이런 십자가의 법 전후에는 어디에도 육신의 문제 해결은 없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을 이행하는 형식이다. 이건 본질이 아니다. 따라서 육신의 필요와 문제는 모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그 목적 이행을 위해 준비하시는 것이다. 이동이란 목적을 위해 자동차를 사는 사람이 주유하고 정비하는 것과 같다. 천부께서 다 아신다고 하신 이유다.

 

어린아이는 먹고 마시는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걱정도 하지 않는다. 아이의 걱정과 관심은 오직 부모와의 관계 그 자체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이유가 여기 있다. 삶의 모든 건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한 목적 아래 있다는 것을 의지하고 믿는 것, 이게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법이다. 천국의 법이다. 그리고 이 법 아래 있는 사람이어야 천국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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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8:1-13) 우상의 제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3. 1. 24. 06:35 Writer : 김홍덕

고린도전서 8장에는 우상의 제물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우리가 흔히 먹어도 되는지 묻기도 하는 제사 음식에 관한 말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씀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우상의 제물은 먹어도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태도에 관한 말씀이다. 이건 배려와 교만에 관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의 지혜로 복음을 조명하고 재단하던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은 복음은 우상의 제물이 시험 거리가 되지 않음을 머리로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아니 복음을 안다면 이런 건 문제가 없음을 알고 있음을 자랑하듯 개의치 않고 먹었다. 바울 사도가 우상 제물에 대해 권면하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먼저 알았으니 교만하게 행동하는 것, 이것이다.

 

물론 우상의 제물을 먹는 건 신앙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 말씀 이후에 바울 사도는 다시 이와 관련해 말씀한다. 그러나 그때도 우상의 제물이 문제의 중심이 된다면 먹지 않을 것을 권한다. 그러니까 우상의 제물을 먹느냐 아니냐가 신앙의 척도나 판단이 되는 상황이라면 먹지 말라고 한다.(고전 10)

 

그러니까 바울 사도는 지금 우상을 섬기는 제사에 사용된 음식을 먹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말씀하려는 건 아니다. 지금은 난 이런 문제를 초월한 사람이란 의도로 아무렇지 않게 어쩌면 더 적극적으로 먹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우상 제물의 문제에 걸림이 되지 않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바울 사도의 권면을 함축한 말씀이 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바로 81절 말씀이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하는 권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포함해서 우상의 제물은 먹는다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식으로 아는 사람은 많다고 했다. 그러나 복음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것이라는 말로 또 한번 세상 지혜로 복음을 조명하는 신앙을 책망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복음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아는 것이다. 마음과 생각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건 세상 최고의 가치관을 깨달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세상 지혜로 보면 한껏 높아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큰 반전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지혜의 실체는 바로 낮아지는 것이다.

 

존귀하신 하나님의 지혜, 세상 가장 귀한 지혜를 얻고 보면 그건 세상에서 가장 낮아지는 것이다. 이걸 모른다면 하나님 지혜의 실체를 모르는 것이다. 아니면 세상의 지혜가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존귀한 하나님의 지혜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 지혜의 본질인 십자가는 세상 가장 천하고 낮은 자리기 때문이다.

 

존귀하신 하나님의 복음을 알고 보면 세상 가장 낮은 십자가를 지는 생명이 되는 것

 

신앙인들은 우상 제물을 인용한 바울 사도의 책망의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들 구원론에 매몰되어 세상 사람들은 죄 가운데 있고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구분한다. 이런 걸 보통 선민사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애초에 예수님은 구원이라곤 하나도 없는 세상에 오셨다. 자신이 정말로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자기의 구원이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기 위함이란 걸 알아야 한다.

 

이처럼 나의 구원을 단초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차이를 즐기며 믿는 사람은 달라라는 말로 선민사상을 찬양하는 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구원과는 다른 구원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책망이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우상의 제물이 큰 의미는 없다는 걸 머리로 알고 아무렇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신감은 분명 복음을 세상 지혜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우상 제물은 먹어도 무관하다는 걸 아는 지혜에 의지하여 약한 사람이 보고 있든지 말든지 자유롭게 행하는 건 약한 사람은 자기 안에 우상 제물을 먹어도 되는 이유를 제대로 깨닫지 않은 상태에서 먹게 될 것이고, 그건 약한 자를 멸망하게 하는 일이라고 경고한다.

 

복음은 귀하다. 우상 제물은 먹어도 상관없다. 식물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게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모든 복음의 지혜는 자기 안에서 장성하여 몸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건 생명의 법이기 때문이다.

 

흙으로 창조된 사람의 심령에 말씀이 심기고, 성령으로 잉태되고 장성하여 육신으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자라서 행함이 되는 법이다. 바울 사도가 약하다고 한 사람 역시 그 심령에서 복음이 자라고, 자기 안에 우상의 제물이 별 게 아니란 걸 깨닫고 먹고 마시면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자기 안에 이유가 없는데 그냥 먹어도 되는 것으로 습득하는 건 곤란하다. 그건 세상 지혜의 방식이지 생명의 법이 아니다. 생명의 법이 지배하는 게 아니라면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약한 자가 장성할 때까지 우상의 제물에 대해 자유한 사람들은 그를 섬겨야 한다. 약한 자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섬겨야 한다. 섬긴다는 건 그를 위해 나의 자유가 구속되는 것이다. 이게 십자가다. 하나님 아들이라면 십자가를 질 어떤 이유도 없는데, 죄 가운에 있는 이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게 그리스도의 복임이다. 바울 사도는 지금 이 법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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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잠깐 시간을 내어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지금 기독교인들로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결하게 생활했다. 지금 시대 신앙인들이 성경을 지키는 건 그들의 행동 양식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들은 정말로 목숨을 다해 율법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한 많은 대화도 사실 예사롭지 않다. 오늘날 기독교는 바리새인에 대해 예수님을 반대한 부류로 재단한 상태에서 보기 때문에 그들을 깊이 보지 않는 경향도 있는데, 나중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보듯이 다른 사람은 무슨 의미인지 몰랐으나 그들은 단박에 자기들 이야기란 걸 알아들었듯 그들은 예수님 말씀의 취지를 꿰뚫고 있었다.

 

이혼에 대한 질문도 그랬다. 그들은 앞서 하신 손이나 발이 범죄하면 찍어버리라는 예수님 말씀이 무슨 말인지 제자들보다 더 훤히 알고 있었다. 말씀이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란 걸 알았다. 그 이해 위에서 그들은 신앙의 형식을 버려도 되는지를 결혼에 빗대어 질문한 것이다. 물론 예수님도 이 모든 상황을 아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반문하신 게 이를 증명한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이혼 증서가 있으면 아내를 버릴 수 있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 마음이 완악하므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 뿐 결혼은 하나님이 정한 것이므로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정리했다. 바리새인들은 계속 형식의 관점,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관점에서 말하고 있고, 예수님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사람은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오늘날 언어로 바꿀 수 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건 죄가 없다는 것이라는 분명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회개한다. 그리고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고 하면 거듭나면 도둑질해도 괜찮느냐 반문한다. 그런 반문은 그리스도라는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 도둑질하는 본성이라 우기는 것임을 알고나 그러는지 모르지만 그러면서 또 구원은 받았다고 한다.

 

이 괴리와 모순을 메우는 게 이혼 증서다. 오늘날 이혼 증서는 신학(교)에서 나온다. 나뉠 수 없는 게 나뉘어진 상태에 명분을 주려한다. 이런저런 말로 죄 없어야 받는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죄를 회개하는 명분을 정립하려 한다. 원죄가 어떻고 자범죄가 어떻냐는 말이 그렇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육신을 하나님이 맺어주시는 것이다. 정말로 그리스도로 났다면 이건 사람이 나눌 수 없다. 구원받았다면 회개할 필요가 없고, 자기 검열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학적 개념이나 사회적 이론 같은 건 필요 없다. 하나님이 도둑이 아닌 이상 도둑질하지 않는다. 남편인 하나님의 의와 하나가 된 사람의 생명과 본성을 사람이 나눌 수는 없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은 바로 이 법에서 비롯된다. 사람에게 정해진 짝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 곧 말씀이 육신이 되는 그리스도로 사는 것인데 이를 버리고 다른 가치를 좇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삶을 사는 게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이다. 

 

남편이 아내를 버린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 육신의 삶을 경건하지 못하게 사는 것이고, 아내가 남편을 버린다는 건 하나님의 뜻 아닌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건 생명이 바뀌는 일로 생명과 본성을 나눌 수 없듯이 그리스도로 났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므로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다. 즉 남편과 아내가 나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눌 수 없다고 하시는 건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로 났다는 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남편인 존재의 목적과 육신의 삶이 하나가 된 것이다. 이런 삶은 생명과 본성을 나눌 수 없듯 나눌 수 없다. 그리고 이 삶이 바로 예수님을 위하는 삶이다. 표면적으로 결혼에 관한 말씀 같은 바리새인들의 질문과 대답에 이런 깊고 재밌는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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