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599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 사도를 통해 복음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교회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젖으로 양육한 아직은 어린 신앙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세상의 지혜를 복음에 접목하여 복음의 가치를 상승시켰고, 이로 인해 신앙의 비교 우위를 다투며 서로 분열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복음에 대한 미숙함은 분열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여러가지 세상 지혜에 편성한 명분으로 간음한 자가 교회에 아무렇지 않게 행세할 수 있도록 했고,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는 자유로움을 지식으로만 알아 낮아지는 십자가라는 복음의 근본은 망각한 체 뭔가를 알았을 때 과시하는 세상 지혜의 방식대로 자랑하듯 우상 제사에 사용된 음식 먹었다. 그 외에도 세상 지혜로 복음을 조명하고 재단하는 자신들을 높였다.

 

바울 사도는 이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선 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한 말씀으로 크게 책망한다. 바울 사도의 책망은 아주 엄하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본성으로 거듭나는 복음을 지식으로 알고 스스로 온전한 사람이라 여기는 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던 이스라엘 역사 최대의 범죄와 같다고 책망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라면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우상 숭배와 같이 심각한 타락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이건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겐 현실적인 염려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어떤 <행위>가 하나님을 진노케 하여 벌을 받을까 늘 염려한다. 고전 같지만 술 마시는 게 죄인가?와 같은 염려에서부터 신앙생활 중 자칫 삐끗할까 늘 염려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들의 이런 신앙, 이런 신앙적 염려는 모순과 허상이다. 먼저 생명은 나면 그 정체성을 버릴 수 없다. 한 번나면 그 생명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 역시 생명이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그리스도답지 못함을 염려할 수는 있어도, 행여 죄를 지어 하나님께 벌을 받아 삶이 힘들어질까 염려하진 않는다.

 

여기서 잠깐 주제의 본류에서 살짝 벗어난 이야기 같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징계로 여기고 두려워하는 육신의 고난이 그 자체로 죄에 대한 벌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게 아니라 형벌로 유인하신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기독교인들이 두려워하는 신앙의 타락은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의 영역이다. 이어 나오는 사람이 감당할 만한 시험 외에 주시지 않는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선 줄로 생각한다는 건 착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험으로 인하여 넘어졌다고 여긴다면 그 또한 감당할 생명이 아닌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역시 그렇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3장을 시작하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육신에 속했고, 어린아이 같으며, 젖으로 키웠고, 신령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건 죄가 아니라며 보란듯이 먹고, 간음한 자를 흔쾌히 용납하고, 육신의 관점으로 신앙을 재단하여 상대적 우위를 주장하려 사도의 이름을 팔아 분당했다. 한마디로 이런 어린 상태의 신앙, 더 정확히는 영에 속하지 않고 육신에 속했기에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던 것처럼 타락할 수 있고, 또 그렇다는 것이다.

 

육에 속했다는 건 신앙 세계에서 어리다 못해 온전한 생명이라 하기 힘든 단계다. 그렇다면 어떤 신앙이 육에 속한 신앙일까? 육에 속했다는 건 육신이 신앙과 가치관과 세계관의 본질이란 뜻이다. 단지 육신의 정욕에 매여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앙으로 유익을 얻는 주체, 신앙이 성취되고, 신앙을 가늠하는 주체가 육신인 신앙이 육에 속한 신앙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어 육신의 삶이 유익해지고 평안하며 뜻대로 되고 성공하기를 기대하는 신앙, 이것이 바로 육에 속한 신앙, 육에 속한 사람이다. 이 구분은 늘 이야기했듯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의 기도가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 자녀의 형통함이 전부라면 두말할 것 없이 육신에 속한 사람이다. 이 모든 건 십자가의 방향과 달리 높아지고 이기는 것이니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그리스도의 대척점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이다.

 

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타락은 정말로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미 타락을 두려워한다는 자체가 자신이 그럴 수 있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대책이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육에 속했기에 육신으로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행여 죄를 지어 하나님께 벌을 받아 육신이 곤고하게 될까 두려워한다는 건 육에 속했고, 신령하지 않은 사람이란 방증이다.

 

바울 사도는 스스로 섰다고 여겨 어린 생명이나 다른 사람의 신앙을 생각지 않고 과시하듯 우상 숭배한 음식을 먹고, 간음한 자를 용납하는 건 금송아지 숭배라는 타락에 빗대어 책망했다. 이런 교만은 타락을 염려해야 할 정도로 아직 구원에 온전하지 않은 신앙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받았다면서 스스로의 타락을 염려하고 행여 시험을 받아 넘어질까 염려하는 이 시대 사람 역시 바울 사도가 책망하는 부류다. 노력한다는 건 아직 이르지 못한 이들의 필수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은 그런 노력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다. 생명으로 나면 그 생명으로 온전하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께 일어난 일들은 복음의 절대적 개념을 설명한다.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 물은 부자, 향유 옥합, 소경 바디매오와 같은 만남과 기적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 먼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지를 물어온 부자의 이야기다.

 

한 부자(누가복음에선 심지어 관원이라고 밝히고 있다.)가 예수님께 와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까?’ 물었다. 그의 질문에서 영생이 행실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라 칭한 것에서 영생을 얻는 선한 행동이 있다고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이건 사람 대부분의 생각일 것이다.

 

행동에 선과 악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부자에게 예수님은 먼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고 반문하셨다. 선의 대상과 기준이 무엇이냐를 이야기하고자 하신다. 그러면서 율법을 다 지켰는지 물으셨다. 율법을 지키는 게 선한 행동, 영생을 가져올 선이라는 사람의 일반적 생각을 지적하신 것이다.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행위로 지켜내려는 사람에겐 신구약 가릴 것 없이 모든 성경이 율법이다.

 

특이하게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만 선하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야 당연하다 여길지 모르지만, 문제는 하나님의 정체성이다. 하나님은 행위를 의나 선으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 한 분만 선하시다는 말씀은 선은 행함이 아니라 존재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가 ‘스스로 있는(존재하는) 자’다.

 

부자가 행위로 영생을 얻는다고 하니 예수님은 계명을 잘 지켰는지 물으셨다. 부자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켰다고 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부족하다고 하시고, 가진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에 부자는 근심하고 돌아갔다. 

 

사람들은 그가 재물이 아까워서 그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표면적인 이유가 다가 아니다. 부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을 얻는 법에 대해 동의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지를 물어온 사람이다. 그의 재물도 영생을 얻기 위해 선하게 살아온 열매임이 분명하다. 즉 그에게 재물은 자신이 얼마나 영생에 가까운지를 말하는 지표였다.

 

그의 가치관은 단지 그만의 것은 아니다. 사람이 가진 일반적인 가치관이다. 사람에게 돈은 성실한 삶의 보상이자 열매다. 자산은 그 사람의 삶을 평가하기도 하지만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부유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듯 돈은 곧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척도다. 그런 돈을 버린다는 건 결국 육신이 풍요롭게 안정되는 게 은혜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과 같다. 이 부자는 예수님 말씀의 의미가 이것이란 걸 알았다. 이런 측면에서 부자는 오늘날 신앙인들보다 생각이 있고 양심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부자가 되는 걸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라 말하고 천국에서 고래등 같은 집과 금면류관을 기대하는 오늘날 기복적이고 유물론적인 신앙인들은 이 사람을 조롱한다. 재물이 아까워 예수님께 등을 보였다고.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다. 이 길에서 가장 중요한 갈등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계속 강조해 왔다. 그리스도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라고 믿고, 예수님이 그 메시아일 것이라는 기대와 십자가를 지는 게 하나님의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계속 갈등하는 중이다. 이 부자의 근심도 바로 그 갈등의 한 단면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앞서 지식으로 우상의 제물에 대해 자유롭게 행한 이들을 권면한 바울 사도는 세상 지혜로 복음을 조명한 자유를 마치 신앙의 높은 깨달음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사도의 권한을 언급한다. 자유라면 자신이 더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권면의 취지처럼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건 부득불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전 9:15)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묵상하게 한다. 하나는 복음을 전한다는 건 분명 주의 일이므로 그에 합당한 대우가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바울 사도는 그 대우를 굳이 누리지 않는다고 하므로 장성한 신앙의 단계를 제시하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도전을 준다는 것이다.

 

먼저 사도에 대한 대우를 생각해보면, 군인이 자기 돈으로 밥 먹지 않는 것처럼 주의 일을 한다면 그 필요를 주님이, 그의 성도가 감당하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라는 게 바울 사도의 관점이다.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신 율법도 같은 관점이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사도의 정의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일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사람이 높아지려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몸소 십자가를 지신 게 예수님이 하신 하나님의 일이다. 그렇다는 건 우리의 일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할 때 일 역시 하나님의 일이다.

 

바울 사도는 사도로서 자신의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그 복음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복음에 대해 약간 안다고, 그래서 자신이 율법에 대해 자유롭다고 우상의 재물을 보란듯이 먹고, 간음한 자가 교회에 있어도 되는 명분을 만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도됨은 이것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사도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정체성을 버리고 세상 가치관으로 살던 사람이 스스로의 죄를 깨닫도록 십자가에 달리는 본성으로 사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자 그리스도의 본성이며 사도의 삶이다.

 

이렇게 복음을 위한 삶을 사는 사도에게 육신의 재화를 공급하는 건 일면 당연하다. 모세의 율법도, 복음의 도리로도 당연하다. 군인이 자기 돈으로 밥 먹지 않고, 곡식 터는 소가 터는 곡식 일부를 먹도록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모두 이를 보장한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그 필요를 다 아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바울 사도 당시의 사도들 중에는 그런 혜택을 나름 누리는 이들도 있었다고 바울 사도는 언급한다. 그렇지만 바울 사도는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이런 마음은 나중에 받을 상을 위해 적금하듯 참는 것은 아니다. 바울 사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전9:16)

 

그러나 우리가 복음으로 사는 게 그렇게 하기 싫음에도 감옥에 갇힌 포로처럼 강제로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씀한 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바로 생명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표현하는 건 그리스도는 생명이기 때문인데, 생명으로 나면 그 생명이 가진 본성으로 살 수밖에 없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로 난다는 건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다.

 

바울 사도와 성경이 말씀하시는 성경적인 삶은 모두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난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가진 본성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생명없이 보면 ~하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거듭난 안목으로 보면 자기 삶이 그럴 수밖에 없음에 동의한다.

 

복음을 전하나 자랑할 게 아니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에게 종처럼 또 낮은 자세로 대하는 이유는 그들을 얻기 위함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한다. 이는 모든 사람을 얻기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난 사람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음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셨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사도의 권한을 다 쓰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은 사도라는 존재는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존재며, 생명의 본성을 거스를 수 없으니 그리스도로 났다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 걸 말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그의 삶은 경주에서 이기는 것이라는 말로 그 가치를 설명했다.

 

아무리 생명의 본성 때문이라고 해도 어딘가 억지로 사는 삶처럼 보이는 사도의 삶, 그리스도의 삶이 상을 받는 것이란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부모가 되었을 때 월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녀에게 지고, 섬기듯 수고할 수밖에 없는 부모의 본성대로 살지만 그것이 기쁘고 보람 있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와 의미를 누리는 것과 같다.

 

또 사람으로서 사람 다울 때 스스로 느끼는 자부심 또한 그렇다. 생명의 본성에 구속되어 표면적으로 억지로, 그럴 수밖에 없어서 사는 것 같은 그 삶이 진정한 가치인 것을 사람은 충분히 알고 있다는 뜻이다. 오히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전한 삶에서 자신이 이탈할까 두려워했다.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부모로서 미흡할까 염려하는 부모라는 본성을 알면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다. 이런 게 사도의 운명,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의 삶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