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경계는 어디까지 인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5. 10. 27. 07:48 Writer : 김홍덕

우리 사회 저변에는 미신이라는 게 있다. 하지만 미신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 세계화가 되면서 이른바 징크스에 대한 인식도 보편화되었다. 신앙과 미신 사이에 묘하게 징크스가 끼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더더욱 미신과 신앙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그런데 심지어 성경에도 미신적인 일들이 몇몇 있다. 이로 인해 미신에 대한 경계는 더욱 모호해지기도 한다. 이건 아주 뜻밖의 일이고 놀랍고 의문을 가지게 한다. 많은 경우 미신적 요소가 있는 성경 구절은 신학적으로 난해한 말씀으로 간주된다. 이건 신학의 태생적 문제 때문이긴 하지만 이건 오늘 글의 주제는 아니다.

 

우선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미신이라는 건 불상이나 오색 천을 묶은 나무와 같은 물체들에게 절하는 걸 한정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멀리하는 걸 미신과 우상을 멀리하는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의도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그리고 세상을 경영하시는 의와 어떤 것을 믿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앙과 미신의 경계는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의 경계라고도 할 수 있다. 이건 아주 광범위하지만 오늘은 그 경계가 다분히 사람에 의해 정해졌고, 우리는 그걸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의와 뜻 아닌 것을 믿고 의지하는 게 미신이다.

 

성경에는 몇몇 곳에 미신적 요소처럼 보이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야곱이 그 외삼촌 라반에게서 떠날 때 사랑한 아내 라헬이 그 아버지 라반의 우상이라 할 수 있는 드라빔을 훔친 일이 있는데 이 드라빔이라는 게 나름 우상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는 우상을 만들지도 섬기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관해 어떤 언급도 하시지 않고, 오히려 야곱을 추적하는 라반에게 꿈으로 나타나서 야곱을 헤치지 말라고 하시기까지 하셨다. ( 31)

 

또 출애굽 전 10가지 재앙이 있을 때 애굽의 술사들이 몇몇 이적을 따라 행했다는 것도 그렇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도 이적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게 있는데 바로 사울 왕이 죽은 사무엘을 접신한 여자를 통해서 불러 올리는 일이다. (삼상 29) 여기서 놀라운 것은 사무엘이 귀신처럼 영혼이 나타났다는 것과 그 귀신 사무엘이 하나님의 예언을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 사울 왕에게 죽은 사무엘이 한 말은 살아 생전에 사울에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는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죽은 영이 하나님의 말을 다시 전하고, 그 말 대로 사울 왕은 죽게 된다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활용하셨다고 볼 여지도 있다.

 

이런 여러가지 성경의 몇몇 특이한 일을 언급하는 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 금기시하는 미신적 요소의 경계는 어디인지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경계의 설정이 우리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생각해 보려는 의도다. 앞서 정의한 대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아닌 걸 믿는 신앙과 그 신앙의 행동들은 미신이므로 우리가 흔히 믿는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라는 말에 의해 정해지는 우리 신앙의 경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아마도 이건 신앙인들의 일반적인 묵상 거리는 아닐 것이다. 특히나 교회 출석이 곧 구원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 이런 건 괜한 시비거리나 불량한 신앙적 고찰일 것이다.

 

이 주제를 이어가기 전에 먼저 짚어볼 사례가 있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는 신앙인데 사실 성경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것들이다. 우리(혹은 신앙의 지도자들)가 정한 신앙의 경계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술 마시는 일인데, 예수님이 오신 지역의 문화가 크게 반영되었긴 하지만 예수님 당시 포도주는 일상이었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늘 포도주와 함께 했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음에도 마냥 술은 금기한다. 확실하게 포도주는 성경이 말하는 술이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면서 음주를 금하고 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성경에는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있지만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씀은 없다.

 

또 하나, 의외 것으로 바로 혼전 순결에 관해서다. 혼전 순결에 관한 말씀은 의외로 선명하지 않다. 성경이 금하는 것은 음란이지 성관계에 관한 제한이나 자격 특히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죄나 음란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성경이 의도하는 바는 자기 짝이 아닌 대상과의 성적 접촉을 금하는 것이다. 자기 짝이 아닌 상대와 관계한다는 건 자기 존재 목적이 아닌 것을 삶의 목적과 의미로 삼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잠 30:5-6)

 

이처럼 신앙인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심지어 확고하게 지키려는 신앙의 여러 부분에서 성경과 다른 경계와 교리를 정하여 준수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사람의 이런 모습을 이미 예견하고 있다. 오히려 사람의 그런 모습에 하나님은 진노하시거나 아니라는 뜻을 많이 밝히고 계신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 왕이다. 그는 사실 유다나 이스라엘의 다른 왕처럼 이방신을 섬긴 일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왕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리려고 했는데, 그게 하나님의 뜻과 달라서 버림을 받았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면 성경을 아예 지키지 않는 것이나 가감하여 지키는 것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신앙의 경계를 신봉하고 있다는 걸 잘 설명하는 사건이 있는데 고넬료의 집으로 가기 전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꿈으로 나타나 말씀하신 일이다. 베드로가 어릴 적부터 율법에 따라 먹지 않은 부정한 것을 하늘에서 내려 보이시며 먹으라고 하시니 베드로는 자기 신앙의 관습에 따라 먹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에 하나님께서 내가 정하게 여기는 것을 네가 부정하게 여기지 말라고 하셨다. 사람은 자기 생각에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지만 실제는 하나님이 좋고 기쁘게 여기시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많은 영역에서 그걸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있고, 무엇보다 그걸 구분하려는 것보다 습관의 관성을 더 편리하게 생각하고, 그걸 확정편향적으로 신앙하고 있다.

 

앞선 사울 왕과 베드로의 사례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의 뜻과 다른 두 가지를 너무나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울은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리려 했는데, 그 좋다는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이 좋다고 하는 기준이었다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세상 기준으로 좋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더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건 하나님이 사울 선택하신 걸 후회하게 할 정도로 나쁜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 사람들이 범하는 아주 심각한 죄악이다.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것, 하나님께 정성으로 헌금한다는 의미로 신권으로 헌금하는 것 같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수 억원짜리 파이프 오르간으로 예배를 드리는 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교회의 생각, 더 나아가서 사회 정의를 교회가 실현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여기 해당한다. 정성과 영광과 정의는 모두 세상이 선하고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원하신다고 기독교인들은 이미 충분히 세뇌되어 있다. 문제는 하나님은 그런 걸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일화에서도 우리는 신앙인들의 큰 오해를 엿볼 수 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미 헌법이 된 교리들 중에서 사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닌 게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음주나 혼전 순결 문제가 그렇다. 이 글의 주제는 아니지만 논란의 소지가 있으므로 혼전 순결 문제를 논하자면 상대가 내 짝인지 아닌지가 문제의 핵심이지 시점이 문제는 아니라는 걸 이야기할 뿐이다. 결혼식이라는 게 사람이 정한 예식이라는 것도 그렇고, 역설적으로 정식으로 결혼을 한다고 해도 정략적이거나 다른 목적에 의한 결혼이라면 혼전 순결이 신앙적으로 별다른 소득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렇듯 우리는 신앙의 경계에 관해 하나님의 뜻과 다른 설정을 하고 있다는 게 이 글의 주제다.

 

교회를 어느 정도 다녔다면 분명히 이런 질문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목사님 OOO일 해도 되나요?”라는 질문. 질문의 대상이 꼭 목사가 아닐 수는 있다. 80년대 많이 했던 질문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술 마셔도 되나요?”, “노래방 가도 되나요?”, “기독교인들도 데모해도 되나요?” 같은. 여기서는 그 질문의 정당성이나 해답을 논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저런 질문들은 우리가 신앙의 경계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걸 증명한다는 걸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을 믿는 사람, 더 정확히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도 잘 모르지만 신앙에는 경계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 사람은 다르다. 이건 뒤에 나온다.)

 

앞서 말했듯이 그 신앙의 경계는 성경이 정한 게 아닌 경우가 적지 않다. 이건 세상의 모든 백조는 다 흰색이냐는 논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의 경계 일부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게 밝혀진 이상 그럼 우리가 아는 신앙의 경계는 바로 설정되어 있는지 전체를 고찰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경계 가까이 가지 않고 절대 틀리지 않는 영역 안에서 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복잡해진 사회 속에서 그런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도 없고, 무엇보다 그런 사람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다.

 

이제 답을 이야기할 시간이다. 문제는 사실 경계가 어디까지 인지가 아니다. 문제가 틀렸으므로 답이 틀린 것이다. 술을 마셔도 되는지를 묻는 질문은 바른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핵심은 <나는 어떤 존재인가?>. 세상의 많은 경계들이 있어도 그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경계는 효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무력화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신앙도 마찬가지다.

 

안식일 논쟁을 일으킨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다윗이 제사장만 먹는 진설병을 먹은 일을 언급하시면서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의 주인, 안식일을 정한 목적이 육신이 된 예수님에게는 안식일의 모든 규례, 지킬 것과 금하는 것의 모든 경계가 필요가 없다. 그 경계를 두어 이루려고 의도한 모든 목적이 달성된(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존재에 따라 경계는 필요하기도 하고, 불필요하기도 한 것이다. 결국 내가 어떤 존재인지가 경계를 결정한다. 경계가 어디인지를 알려고 할 게 아니라, 내가 경계와 무관한, 경계를 설정한 목적이 달성된 사람이 되는 게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다.

 

우리가 잘 아는 축복의 장이라는 신명기 28장에는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어디에 가면 복을 받거나 무슨 행동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기가 어디든 내가 가면 그 장소가 복을 받도록 하시겠다는 게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 앞에 떠나면 곧 죽음이었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사라지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라고 하셨다. 쉽게 말해 내가 가면 길이 되고, 내가 가면 그곳이 거할 곳이 된다는 말씀이다. 경계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가 본질이다.

 

복을 받기 위해서 신앙의 경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가면 복의 지경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게 구원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거듭남으로 구원을 얻는다. 거듭난다는 건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다른 생명, 다른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게 거듭남이다. 그리고 그렇게 거듭난 존재에겐 경계가 없다. 신앙의 경계가 없다. 그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행동이 된다. 이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 거듭나기만 하면 도둑질도 괜찮다는 뜻인가 싶겠지만, 하나님 말씀의 뜻을 살핀다면 거듭남이 그와 다른 것이 될 수가 없다. 이걸 안 믿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다. 특별히 거듭났다면 도둑질해도 되느냐고 의심을 가지거나 묻는 사람은 단언컨데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다. 이건 정말로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는 존재라고 믿지 않는 이상 그럴 수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존재로 거듭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으로 거듭나서 살아보면 이전에 알던 내가 아닌 삶을 이끄는 본성을 체험할 것이고, 그 이끄심은 도둑질 같은 게 아니라 낮아지고 섬기는 겸손한 마음이라는 걸 몸소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게 아니라면, 그게 본성이 되지 않고 성경대로 살려고 발버둥치며 노력하는 게 신앙이라면, 그래서 결국 다 지키지도 못할 거라면 굳이 예수 믿으면서 삶을 피곤하게 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무엇은 해도 되고, 무엇은 하면 안 되는가?’라는 고민 속에 살아왔다. 그런 삶은 나의 자아 밖에 경계가 있고 내가 그것을 지켜야 하는 삶이다. 성경은 이런 삶을 율법적인 삶이라고 정의한다. 해야 하는 게 있고, 가야 하는 곳이 있다는 건 나의 존재가 외부에 있는 기준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가면 복된 땅이 되고, 내가 밟는 지경이 나의 것이 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인 삶이다. 이건 하나님이 약속한 땅, 약속한 삶이 아니다. 한 마디로 구원받은 거듭난 삶이 아닌 것이다.

 

내 안에 있는 본성대로 하는 게 말씀대로 사는 삶이 되는 게 거듭남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의가 내 본성이 된 거듭난 사람이 되면 내가 가는 곳이 복을 받고, 내가 밟는 땅이 나의 지경이 되며,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 되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나의 삶이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의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이끄는 생명의 본성이 된다는 뜻이다.

 

거듭남과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과 생명과 본성이 무엇인지 문자적인 이해만 있어도 우리 신앙의 경계는 내가 정하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정한다고 해서 내가 원초적인 결정을 한다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므로 나는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결정하는 존재이므로 나의 삶이 하나님의 결정과 의도대로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믿고 그 뜻대로 살기 원하며 그렇게 알고 싶고 경계하고 심지어 두려워했던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디를 가야하고 어디를 가면 안 되는지, 어떤 일을 선택해야 하고 어떤 일을 선택하면 안 되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내 안에 있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는데 경계가 있다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왕은 감옥부터 왕궁까지 경계 없이 드나든다. 왕자도 마찬가지다. 경계가 어디인지, 그걸 넘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사는 사람에게 삶의 경계, 신앙의 경계는 있을 수 없다.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는 오직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 정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는 게 거듭남이고 구원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은 하면 안 되는지를 알기 위해 고민한 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건 출애굽의 여정에 비추어 보면 광야를 지나는 것과 같은 세월이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평생을 그런 고민과 갈등과 생각 속에 사는 건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발로 밟는 모든 땅이 자기 지경이 되었듯이, 온전히 거듭난 사람이 되어 오히려 내가 하면 하나님의 일이 되는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 그게 사실 구원과 거듭남의 시작이다. 그 생명으로 살면서 생명이 장성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여정이다. 그리고 그게 우리가 꿈꾸는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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