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모든 것, 구원과 영생과 죄사함과 복락과 영생과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절대적 권능으로 경영하신다는 믿음 위에 있다. 한마디로 실수도 않으시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을 믿지 않는다면 모든 건 허사가 된다. 따라서 우리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인식하고 믿는 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뿌리다.
하나님이 절대자라는 건 신앙에 있어 많은 편리를 제공한다. 이해 불가한 많은 것들 앞에서 ‘절대자의 뜻과 능력’이라는 말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권능이 상충하는 것들도 적지 않다. 대부분이 “왜(Why)”로 시작하는 이 의문들은 ‘보지 않고 믿는 게 믿음이다’라는 말처럼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는데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말로 대충 넘기고들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죄를 원치 않는 절대자신데 피조물인 사람은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 허점이 있거나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이나 무오류성에 모순이 있는 건 아닐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실수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창조한 피조물이 자기가 원치 않는 죄를 범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을 용납하신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범할 것을 몰랐는가? 아니면 그냥 허용한 것인가?
한편에서는 마귀가 사람을 시험에 빠뜨리고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한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절대자로서 하나님의 지위에 큰 흠집을 내는 논리다. 그럼 마귀는 하나님과 대적하고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아마겟돈과 최후의 전쟁이 있을 때까지는 하나님과 대등한 세력으로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것 역시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게 할 수 있는 구도다.
이런 쟁점들을 정리해 본다면
하나님은 사람이 죄 짓는 것을 방치했다가 회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인가?
라고 정의할 수 있고, 여기에 대한 교회의 명확한 답변은 사실상 듣기 힘든 상황이란 것이다. 여기서 명확한 답변이란 그냥 믿으라는 게 아니라 일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논리가 있는 답변을 말한다. “신앙이 상식으로 되는 건가?”라고 반문을 하기도 하는데, 우리에게 상식이라는 게 없다면 서로 다른 사람이 성경을 공동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는 점을 안다면 그런 무식은 드러내지 않는 게 좋다.
사실 기독교와 교회 그리고 교리에는 기독교의 근간을 흔드는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구원받았다면 죄가 없다는 것인데 왜 우리는 죄를 범하는가?’ 같은. 이런 모든 의문이 다 해결되었다면 신학(神學)이라는 학문은 임무를 다한 것일테다. 그러나 아직도 신학은 있고, 그렇게 학문으로 성경을 공부한다는 건 아직 성경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것임에도 모든 의문을 해결하지 도 않은 사람들이 목사라는 자격을 가지고 교회를 세운 다음 설교를 하고, 어쩌다 성도들이 아직 신학도 다 해결하지 못한 의문들을 묻기라도 하면 기껏 하는 답이 “보지 않고 믿는 게 믿음이다”, “성경을 너무 깊이 알려고 하면 시험에 빠진다”, “교회에서 알려 주는 것 외에 알려고 하는 건 이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와 같은 말로 대응한다.
말이 나온 김에 신학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본다면, 사실 신학을 불필요한 학문이다. 그런데 그 신학을 기반으로 기독교와 천주교 같은 종교가 서 있다. 이건 아주 아주 비 성경적인 구조다. 다른 분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령께서 오시면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성령만 오시면 모두 알게 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학문으로 만들어 공부하고 있는 셈이다.
구원은 물과 성령 곧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듭남이다. 즉 구원을 받았다는 건 성령이 임재했고 체험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럼 구원을 받았다면 성령을 받은 것이므로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알아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이건 아주 상식적인 논리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신학은 그다지 쓸모 없어야 정상이다. 성경의 역사적 배후 상황이나 당시 문화 같은 정도만 다루면 되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이 신학자들보다는 몇 수나 위에 있다. 따라서 신학은 전혀 필요 없고, 신학을 수학했다는 걸 기준으로 목사나 교역자를 임명하는 건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근거가 없더라도 우리가 앞서 제기한 “하나님은 사람이 죄 짓는 것을 방치하시는가?”와 같은 질문에 상식적인 답변을 제시할 수 있다면 다행인데 앞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그런 대답을 듣기 힘들다. 오히려 그런 의문을 해소하려 들면 믿음이 없거나 이단에 빠질 위험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구도 속에 갇혀 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런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는데 구원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다. 구원의 근원적인 의문과 죄에 대한 명확한 답 없이 구원을 받을 있는지는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다. 자칫 구원받은 줄 알고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는데 “그거 아닌데?”라는 말씀을 듣는다면, 그게 진짜 지옥이 될 것이다. 다시 기회도 없는데 자기가 옳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거짓이고 허사인 걸 알게 되었다면 평생 자기 자식인 줄 알고 키웠는데 원수의 자식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비하지도 못할 괴로움이 될 것이다. 나는 그게 지옥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답이 있는가?
당연히 답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감추고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를 관음하는 신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제는 우리를 비밀을 감추지 않는 친구라고 하셨다. 당연히 하나님은 알기 쉽게, 더 나아가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면서까지 우리에게 그 마음을 전하셨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의문을 가지는 건 하나님의 탓이 아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재단하고 믿기 때문이지 하나님께서 감추신 탓은 아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잘못 믿어서 그렇다. 그게 아니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면서까지 자기 뜻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를 리가 없다.
성경이 어려운 건 사람이 자기 맘대로 해석하기 때문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간과하는 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이 그걸 믿지 않는다고?”라고 반문하겠지만 여기서 핵심은 창조했다면 그 창조의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신학자나 목사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라고 하셨다’라고 창조의 목적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답변들이 우리 갈증을 해갈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있는 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 명료한 진리는 독립적인 명제가 아니다. 이 하나의 말씀은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를 창조하셨다는 건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고, 또 사람을 그렇게 창조하셨을 때는 사람이 어떻게 할 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달성이 된다는 기준도 함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동차를 만들 때는 ‘이동’이라는 필요가 있고, 어떻게 해야 그 목적이 달성되는 지에 대한 기준으로 안전과 품질 평안함과 속도와 같은 기준이 있는 것과 같은 구도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의 행간과 주변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품을 표현할 존재를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분명 실존하지만 물리적 실체가 없으시다.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는 말씀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와 성품과 뜻을 표현하려면 물리적 실체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은 육신이라는 물리적 실체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거저 연약하다고만 한탄하는 이 육신은 이래서 아주 중요하다. 육신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과 같아야 하나님의 뜻을 바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표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이다. 그 총화가 바로 십자가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이라는 사명감 앞에 신념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예수님도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셨다. 마지 못해서 지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이시기에 지실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십자가를 지는 본성이란 뜻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지는 건 능력이 모자라서나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본성 때문인 것과 같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본성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십자가의 본질은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사람을 창조하셔서 표현하시고자 한 하나님의 성품을 보이신 것이다. 그건 낮아지는 마음, 섬기고, 겸손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들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보고 “너는 세상의 낮은 자 이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라는 주장에 자기 육신을 내어 주시므로 표현됐다. 억지나 신념이나 인내로 표현한 게 아니다. 그게 본성이라서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곧 뜻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이니 하나님이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본성이었고, 그 본성 때문에 거짓 주장 앞에 자기 육신을 내어 주실 수밖에 없었다.
이 모습이 하나님이 우리가 표현해주기 바라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창조하신 목적이 이것이다. 하나님이 표현하고자 하신 이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사람을 성경은 <그리스도>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다. 그리고 이건 거듭나야만 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이 이걸 설명한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성령이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이 본성이 된 존재로 거듭나게 하신다. 본성이란 생명이 가진 속성이므로 생명의 용어인 거듭남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인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육신 곧 본성과 삶이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고, 그렇게 삶과 본성이 되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남을 구원이라고 하고, 그렇게 거듭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a Christ)라고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의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이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을 선택하셨다. 당신께서 창조한 사람이므로 얼마든지 사람인 죄를 범하지도 않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 외에는 모르는 존재로 만드실 능력이 없는 분이 아니심에도 사람이 자기 맘대로 살도록 허락하신 건 전적으로 사람이 선택하여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창조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사람에게 보이시고 사람이 스스로 순종하도록 하셨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법칙이 선명하게 존재한다. 자기 뜻이 아닌 계약 등이 무효가 되고,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아바타처럼 행한 것들은 인정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 외에는 다른 건 인식도 못하는 존재로 만드셨다면, 그래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답시고 산다면 그건 그냥 짜고 치는 고스톱에 불과하다. 그래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사람이 전적으로 자기 뜻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달성하는 거듭난 존재가 되는 것이지 아바타를 원하신 게 아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도가 실현되려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자유 의지>가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표현할 목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지만 아바타처럼 행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 뜻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듣고, 그 들은 말씀이 심령에 거하여 하나님을 사모하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령께서 오셔서 그 순종한 말씀이 육신과 삶이 되도록 잉태케 하시고 그렇게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뜻을 정하셨지만 그걸 순종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사람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고 그 목적을 정하셨지만 사람이 그걸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을지 말지를 결정할 권한을 주셨다는 건 심판이 있다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에게 책임이 없다면 하나님이 심판하는 건 독재고 폭력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시는 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고, 그걸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면서까지 분명하게 보이시고서 사람이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인지를 맡기셨기 때문이다. 달리 청지기라 하신 게 아니다. 그런 책임이 있기에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스스로 순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신 권한으로 인생을 자기 것으로 삼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으로 세상을 살면 심판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 책임이 없는데 무자비하게 심판하시는 경우 없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시는 건 사람에게 책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창조의 원리,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그 목적이 어떻게 달성되기를 바라시는 지를 간과한다. 그리고는 “왜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을 방치하느냐?”고 의문을 가진다. 이건 이렇게 단순한데, 이렇게 성경에 있는 말씀만 잘 살펴도 알 수 있는데, 이걸 신학의 영역으로 가져가서 온갖 어려운 말로 특정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논쟁 거리로 벽을 만든다. 웃기는 건 그렇게 만든 격벽 안에도 답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능하시거나 사람을 방치하시지 않는다. 불꽃 같은 눈으로 지키시고 머리카락까지 세신다는 말을 허투로 들으면 안 된다. 말 그대로 하나님은 실수도 않으시며, 사람들이 보기에는 문제 투성이인 것 같은 이 세상도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경영하고 계신다. 사람이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렵고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데 필요해서 주신 자유로운 선택의 권한과 능력과 지성을 가지고 인생의 존엄성을 논하면서 자기가 선택하지도, 조성하지도 않은 인생을 자기 것으로 삼고, 자기가 옳다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고, 서로 옳다고 주장하니 다투고 싸우는 것뿐이다. 이렇게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다.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인생을 사는 것, 그렇게 자기가 옳고 그럼을 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것이고 모든 죄의 근본이다.
우리는 상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묵상해야 한다. 이렇게 출발해 보자. 이 인생을 내가 결정했는지 부터 생각해 보자. 내가 스스로 인생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지금 이 꼬라지를 선택했을 지를 생각해 보자.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인생이라는 건 이 인생을 정한 분이 있다는 반박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다. 그렇다면 누가 이렇게 정했는지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찾고 찾으면 만나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가 선택도 조성도 하지 않은 인생이라면 그게 내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카페 빈테이블의 노트북과 스마트폰이 내 것이 아니어서 내 맘대로 하지 않듯이 내가 선택도 조성도 하지 않은 인생이라면 내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 이게 상식이고 지성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내가 뭔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현실을 자각했다면 그건 내 맘대로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또 주님으로 인정하고 믿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내게 인생을 주신 목적을 탐구하게 될 것이고, 십자가를 통해 그 목적의 실체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면 나에게 인생을 맡기시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신 건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자 내 인생의 존재 목적이며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에 내가 스스로 순종하기 위함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무능해서, 또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죄를 범할 여지를 주신 게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 주신 권한과 자유를 인생을 자기 것으로 삼는데 사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를 방치하시거나 허용하시는 게 아니다. 사람이 스스로 순종하기를 바라시며 맡긴 인생을 사람이 자기 것으로 삼기에 죄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이라는 책임을 지게 된다.
그래서 출발은 창조 목적 이해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다. 영이신 하나님은 내용이고 나는 그걸 표현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관계에 대해 사람이 선택하고 순종할 때만 관계가 형성되도록 하셨다. 강제로 그렇게 되도록 하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할 때 진정으로 창조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창조와 사람의 정체성과 이른 바 자유의지와 순종과 구원과 거듭남과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십자가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본성 그리고 성령의 직임과 능력까지 이 모든 것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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