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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께서는 3번째로 자기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다. 죽임당하러 간다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마음은 복잡했다. 두려움도 있었다. 이런 마음은 오순절 성령이 오셔서야 해소되지만, 예루살렘으로 앞장서서 가시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었을 때 높은 자리를 얻으려는 마음도 숨길 수 없었다. 이렇게 제자들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런 중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면 자기 형제들 좌우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너희가 구하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고, 다른 제자들은 분개했다. 특히 주목할 건 다른 제자들의 태돈데 그들이 화를 낸 것은 그들 역시 높은 자리에 대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육신의 나라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리스도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선 우선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의 잔과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물으셨다. 야고보와 요한은 당당하게 그럴 수 있다고 했지만, 예수님께선 설사 그렇다고 해도 나의 좌우에 앉는 건 예수님의 소관이 아니며 예비된 자들의 것이라고 일축하셨다. 예수님이 정하지 않은 예비되었다면 그건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이다.

 

그 하나님이 정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어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바로 종이 되는 사람,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도 이를 위하여 오셨다고 하셨다. 제자들은 세상에서 높아진 예수님을 기대하고, 그때 자신들도 높아질 걸 기대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낮아짐으로 답하신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반복되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예루살렘을 향하시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들의 생각은 완전히 반대다.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예수님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높은 사람이길 기대하고 있고, 예수님은 능욕당하고 십자가를 지러 가시고 있다. 이런 차이는 군중들에겐 분노를, 제자들에겐 좌절을 주었다.

 

예루살렘을 향하시는 예수님을 둘러싼 갈등은 당시에 있었던 한시적이거나 사례로서 성경에 기록된 일이 아니다. 바로 오늘날의 중요한 신앙 쟁점이다. 정말로 양심이 있다면 기독교인 대부분이 교회에 가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구한 것을 구하고 있다는 걸 알 것이다. 하지만 그 일말의 양심이 지금 없다.

 

낮고 낮은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께 임금이 되면 높은 자리를 얻을 것이라 기대하는 제자들의 생각이나, 세상에서 가장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세상의 성공과 평안을 구하는 기독교인은 전혀 다르지 않다. 오히려 오늘날의 상황이 더 좋지 않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다.’라고 하신 것처럼 제자들은 이 모든 게 바뀔만한 게 심령에 있었지만, 오늘날 신앙인은 기승전결 모두 육신의 평안과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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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1-13) 시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3. 2. 19. 08:26 Writer : 김홍덕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바울 사도는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시험이라 말하는 어려움을 이야기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의 넘어짐과 달리 하나님의 시험은 감당할 수 있는 역치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바울 사도의 말씀은 일면 사람에게 위로가 된다. 어려움에 봉착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하나님의 시험이라 생각한다고 해도 이는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는 건 사람의 한계를 알고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고 하는 건 하나님께서 사람의 능력과 한계를 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공산품의 성능과 한계를 가장 잘 아는 이들은 바로 개발하고 제조한 사람들이듯 사람의 한계와 능력을 온전히 안다는 건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자란 의미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시험이라고 말하는 어려움들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아래에 있는 하나님 경영의 일환이다. 사람은 육신의 어려움을 이긴 만큼 육신의 복을 주신다는 관점에서 시험을 이해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이 주신 육신은 어차피 소모품이고, 주신 삶의 기간 동안 하나님의 뜻을 표현할 도구와 같은 형식이다. 그래서 늙고 약해진다. 한 마디로 소비된다.

 

사람의 입장에서 육신이 소비되는 건 어떤 형태로든 어려움이고 피하고 싶은 일이다. 일면 사람이 시험이라 느끼는 일면들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인생을 살면서 겪는 어려움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로서 겪는 당연한 일이고, 어쩌면 의무적인 소비와 곤고함이다.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는 건 바로 이런 의미다.

 

자동차 브레이크를 생각해 보자. 브레이크, 더 정확히는 브레이크 패드를 생각해보면 만든 이의 의도는 패드가 디스크와 마찰하면서 자동차의 속도를 줄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패드는 마찰로 인해 필연적으로 자신이 갈리고 열나고 닳아 없어진다. 하지만 그 힘든 어려움은 시험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목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제조자나 사용자는 성능 이상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처럼 하나님도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허락하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험은 우리의 존재 목적에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에 순종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환경 속에서 소비되는 육신의 삶과 그 소비 속에서 겪는 어려움은 원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일부인 것을 알지만, 창조목적을 알지 못하고 또 순종하지 않는다면 육신의 삶이 겪는 어려움은 마냥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인식될 수밖에 없다.

 

이런 불순종이 낳은 그릇된 인식은 엉뚱한 해결을 도모하게 된다.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을 조각하면 형상 가진 우상이 된다. 그리고 생각 속에서 의지할 대상을 정하거나 만들면 그 또한 우상이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이라 이름을 붙여 불러도 하나님의 뜻과 정체성과 달리 육신의 문제 해결을 의지하는 존재라면 그게 이방신이고 우상이 된다.

 

우리 삶 속에 겪는 어려움은 육신을 소비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죄로 인함이 아니다. 더 나은 육신의 복락을 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이 어려움을 죄로 여기거나 더 나은 육신의 복락을 위한 연단이나 시험으로 여기는 생각이 진정한 죄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정체성과 그로 인한 사람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험으로 여기는 육신의 소비와 그로 인한 어려움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우리 존재 목적 때문이다. 이게 우리가 감당해야 할 우리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에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고 하신 것이다. 낮아지는 삶은 상대적으로 높인 사람의 뜻을 위해 육신을 소비할 수밖에 없다. 유대인의 뜻에 따르니 십자가에 육신을 내어 주실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같은 이유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육신의 삶을 주신 이유다. 이게 복음이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다. 이 삶 속에 있는 곤고함은 하나님의 괜한 시험이 아니라 우리가 감당할 우리의 존재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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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지 물었으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건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부연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랐다고 했다. 제자들이 놀란 건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부유함은 하나님의 은혜고, 모든 사람을 부유하게 하는 게 그리스도라고 믿는 믿음을 인하여 놀란 것이다.

 

육신이 불행한 일을 당하면 모르긴 해도 하나님께 어떤 잘못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처럼 제자들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게 어렵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사람은 이렇듯 육신의 형편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생각하는 지표로 여긴다. 이런 사람의 생각으로 기대하는 그리스도는 늘 육신의 문제 해결을 돕는 구원자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건 돈 많은 사람은 천국에 가기 어렵다는 말씀이 아니다. 말씀의 의도는 육신의 형편은 하나님 나라의 자격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사람으로선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이 이를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천국에 갈 사람을 일일이 정한다는 의미라기보다 천국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들어가는 곳이라는 말씀이다.

 

이에 베드로는 우리(제자들)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선 그 말을 쉽게 인정하지 않으셨다. 베드로는 아직 가슴에 칼을 품고 있었고(민족의 독립을 도모하는 열심당원이었고)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막 10:29-31)

 

현세(現世)와 내세(來世)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현세내세는 어떤 세계인지 또 먼저나중의 기준은 무엇인지가 중요한데, 이 둘은 앞서 말씀하신 사람으로 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 영생과 구원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고 말씀이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인 것처럼 현세와 내세, 먼저와 나중 역시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나뉜다. 그러니까 거듭난 삶이 바로 내세고 사람의 존재 목적이 또한 먼저다. 존재보단 존재해야 할 목적이 먼저기 때문이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구원이 사람에겐 가장 먼저이고 거듭난 내세다.

 

그리스도로 거듭나기 전의 삶이 현세,
그리스도로 거듭난 후의 삶이 바로 내세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 거듭난 이후의 삶이 바로 내세이자 천국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고, 거듭났다는 건 하나님의 의(말씀)가 육신이 된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의로 살고 있으니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에서 사는 삶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거듭난 사람의 삶이 천국이 임한 삶이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세다.

 

부모와 형제 그리고 전토를 버린 후 백배나 받는다는 말씀 역시 이 기준으로 하신 말씀이다. 간혹 이 말씀을 교회 다니는 걸 반대하는 부모님과 환경을 배척하고 전 재산을 교회에 바치는 걸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건 전형적인 이단이다. 백배로 얻는 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에서 얻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부모는 육신의 가치관이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다.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을 향하시는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진정한 그리스도라는 가치관을 준 세상이 바로 부모고 형제다. 그리고 그 가치관이 귀하게 여기는 게 바로 영생을 구하려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가 가진 재산이다.

 

그리고 내세에 백배로 받는 데는 조건을 말씀하셨다. 바로 핍박이다. 핍박도 함께 받는다고 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핍박은 삶의 평안을 얻기 위해 주일날 교회에 가야 하므로 특근을 거부해서 받는 눈총이나 비난 같은 게 아니다. 높이 올라가고, 평안하고 부유하게 되는 걸 하나님의 은혜와 선으로 아는 세상에서 그와 달리 낮고 낮은 십자가를 지는 삶을 의로 여기므로 받는 세상의 조롱이다.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만 질 수 있다. 하나님 아들이라는 전지전능한 능력에도 아버지의 피조물인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다. 이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게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남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남은 육신의 가치관을 주는 부모, 육신의 정욕이 귀하게 여기는 재산을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버릴 때 얻을 수 있다. 육신의 가치관, 세상의 가치관은 높아지는 것이고 많은 재산을 얻는 것을 축복으로 아는 삶이다. 십자가는 이 반대에 있으니 복음을 위한다는 건 곧 이것을 버리고 돌아서는 것이기에 하신 말씀이다.

 

먼저 된 자, 나중 된 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먼저와 나중 역시 하나님의 기준으로 먼저와 나중이 결정된다. 사람으로서 할 수 없으나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의가 그 기준이다. 육신의 가치관으로 볼 때 먼저 된 자가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보면 나중이라는 의미다. 복음을 위하여 부모와 전토와 자식을 버리는 것과 뿌리가 같은 개념이다.

 

사람의 기준으로 먼저 된 자는 육신으로 먼저 된 사람이다. 먼저 태어난 사람, 교회에 먼저 출석한 사람 그리고 육신의 가치관으로 볼 때 앞선 사람, 이긴 사람, 높은 사람, 부자가 되려는 경쟁에서 먼저 골인한 사람이다. 영생을 얻을 선한 행동을 물은 부자와 같은 사람, 육신의 가치관으로 이긴 것을 먼저라고 한다. 이들은 이런 먼저를 하나님의 은혜라 말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육신의 가치관으로 나중 된 사람은 세상의 기준으로 경쟁한 경쟁에서 뒤진 사람이다. 모두가 높아지기를 소망하며, 심지어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서라도 높아지려는 중에 낮아질 수밖에 없는 본성인 그리스도로 거듭났기에 낮아진 사람, 그들이 바로 나중 된 사람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가장 나중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법은 그렇지 않다. 먼저가 나중이 되고 나중이 먼저가 되되 그 수가 많다고 하셨다. 즉 구원을 얻을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심지어 교회에 모여서도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기도하는 게 사람의 모습 전부일 것 같지만 낮아지는 본성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듯 하늘의 별보다, 바닷가의 모래보다 많다. 단지 이들을 알아보려면 거듭난 생명이 주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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