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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4장 이후에는 표면적으로 실생활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삶의 문제나 행위에 대해 권면하는 말씀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말씀은 어디까지나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하고자 하는 주제의 위에 있다. 주제는 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인 세상 지혜에 의지하지 않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진정한 성도의 삶을 설명한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모습 그대로 주를 섬기라고 했다. 다양한 사람의 삶의 모습으로 그 성품이 표현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때문에 사람의 삶은 다양하다. 형편과 처지, 부유함과 건강, 신분과 역량이 다양하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모습이든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다양한 형편에서 부르심을 받는다.

 

하지만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자기 삶의 형편을 바꾸려 애쓴다. 그리고 어떻게 삶이 나아지기라도 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쉽게 나아지지 않으면 연단 받고 있다고 말한다. 연단이 끝나면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고문과 함께. 그러나 복음은 모든 사람의 형편을 한 곳으로 수렴시키지 않는다. 앞서 설명했듯 하나님은 다양하게 당신의 성품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자신이 부르심을 받을 때 모습 그대로 주를 섬기라고 한 이유는 또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결혼을 인용했다. 결혼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형편을 고려하고 또 염려해야 한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런 염려가 없다. 세상과 삶의 형편이 주는 염려를 결혼의 염려를 대표로 인용한 것이다.

 

바울 사도의 의도는 결혼의 여부에 있지 않다. 바울 사도는 성도가 주를 섬기는데 염려할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하고 있다. 주를 위하여 살아가는데 염려의 빌미가 되는 일을 스스로 자청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결혼했다면, 또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미 염려할 형편에 있다면 그대로 주를 섬기라고 한다. 바울 사도의 말씀은 어쩔 수 없으니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충분히 그럴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있어 그때 부르심을 받은 것이기 때문임을 설명한다.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주를 섬기고, 부르심을 받은 상태에서 주를 위하여 일하는데 염려거리가 생기는 일을 일부러 선택하지 않는데는 절대적인 조건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 자신을 경영하는 하나님의 경영이 말 그대로 실수 없는 경영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곧 하나님을 창조주로, 또 주로 온전히 인정하는 믿음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이 믿음은 크지 않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실수도 않으시는 하나님이라 찬양하는 입으로 늘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로 잡아 달라고 기도한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온전히 세상을 경영하시고 계심을 믿는다면 세상과 나라가 잘못된 건 없다. 다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안목이 하나님과 다를 뿐이다.

 

신앙인의 이런 모습을 양심을 가지고 반추한다면 부르심을 받은 대로 주를 섬기고, 주를 위하여 일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게 지금 우리의 삶이다. 따라서 이 삶을 개선하고 더 풍족하고 평안하게 되기를 바라면 주를 위한 삶에 염려를 더하지 말라는 바울 사도의 권면이다. 결혼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주신 삶 그대로 주를 섬기고 주를 위해 일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의 형편을 통해 창조목적을 이루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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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믿는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위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에 이어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보다 소나 말이 끄는 연자 맷돌을 목에 메고 바다에 뛰어드는 게 낫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막 9:42)

 

그런데 이 말씀에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있다. 현시대 기독교인들은 이 부분을 자주 간과한다. 그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소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란 것이다. 그저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게 정말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이 말씀에 앞서 그리스도라는 이유로 물 한 잔을 대접하면 천국에서 상이 클 것이란 말씀을 하셨다는 것도 중요하다.

 

실족시키면 안 되는 소자는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

 

물론 여기에도 논란은 존재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누구인가다. 하지만 분명한 건 삶의 평안과 성공을 위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분명히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 누가 그런 사람이냐 반문할텐데, 그건 기도를 보면 안다고 여러 차례 설명했다. 인생의 목적을 구하는지 아니면 삶의 도움을 구하는지로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난데없는 말씀이 아니다. 어떤 흐름 속에서 하신 말씀이다. 바로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참 그리스도인지, 십자가에서 내려와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참 그리스도인지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길목에서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실족시키면 안 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참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실족시킨다는 건 예수님을 반대하는 것과 결이 같다. 낮아지는 그리스도,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설득하고 미혹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의 문제, 육신의 삶의 문제를 도와주시는 분이라고 꼬드기는 게 바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실족시키는 일이다. 우리가 교회에 가면 언제나 듣는 그 말들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실족케 하는 말인 셈이다.

 

 

손이나 발이 범죄하면

예수님은 발이나 손이 범죄하면 손과 발이라면 찍어버리고 눈이 범죄하면 빼 버리라는 말씀을 이어가신다. 같은 맥락이란 의미다. 사실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실 때 이미 말씀하신 적이 있다. 바로 산상수훈 때였는데, 그때는 오른눈, 오른손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그런데 육신의 일부가 죄를 범한다고 그것을 버리라고 하는 건 모순이다. 눈이나 손이나 발은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독자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으므로 죄를 범하는 주체는 결국 자신이다. 더욱이 천국에서는 우리 육신이 필요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버리라는 건 신체 일부가 아니라 의로워지려는 행위와 이를 의롭게 여기는 가치관이다.

 

이 말씀은 육신의 일부를 버려 나머지 육신을 구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육신의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안목을 버려 영혼을 구하라는 말씀이다. 손과 발은 육신의 행동과 노력을, 눈은 육신의 안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른손, 오른눈이라고도 하셨다는 건 육신으로 의로워진다는 생각이 옳다는 생각을 버려야 함을 말씀하심이다.

 

또한 이 말씀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하신 말씀의 부연이다.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그러니까 노력으로 성경을 지켜내려는 마음과 이 신앙이 옳은 것이라 여기는 가치관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지옥에 간다.

 

예수님은 짧게 지옥을 설명하신다. 소금에 절이듯 불로 절이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건 영혼이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고통당한다는 의미다. 소멸된다면 불이 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에 더해 소금은 좋은 것이나 (짠)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소금으로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셨다. 역시 산상수훈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이기도 한데, 생각해볼 것은 맛을 잃지 않은 소금으로 화목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우선 누가 큰지를 다투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물론 신앙마저 누가 더 높은지를 가늠하는 오늘날 신앙인들에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예수님을 반대하는 신앙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게 주제다. 예수님은 누가 큰지를 다투는 제자들, 예수님을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로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구원하는, 우리가 거듭나야 하는 진정한 그리스도는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금의 맛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그리스도는 낮아지는 존재인데 이것을 버리고 높아지는 걸 추구한다면 그리스도의 본질이 사라진다. 사람의 생각처럼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는 맛을 잃은 소금이며, 그런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신앙마저 누가 더 큰지 다투는 건 예수님을 반대하는 것이자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신앙이란 게 예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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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결혼에 대하여 명령 아닌 권면으로서 자신과 같이 혼자 있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바울 사도는 중요한 단서를 추가했는데 그건 각 사람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다르므로 자기 은사대로 행하라고 했다. 자신처럼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으나 그렇지 않고 결혼한다고 해서 신앙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은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굳이 책임 소재를 따진다면 하나님께 그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이런 바울 사도의 관점은 이어진 미혼, 과부, 믿지 않는 배우자와의 결혼 생활에 대한 말씀에도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미혼, 과부,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 생활 유지는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 즉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음을 허용했다. 다만 부부가 갈라지는 것은 분명히 금했다. 이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결혼 생활의 다양한 단계와 형태에 대한 바울 사도의 말씀에는 중요한 기점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때, 곧 복음을 믿기 시작한 시점이다. 복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 자신의 결혼 상태를 가급적 유지하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 사도의 말씀이 단지 결혼 생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유지한 여러 삶의 형태 속에서 복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상황을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결혼에 관해 이어진 말씀은 다분히 이런 복음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 말씀은 결혼에 관한 말씀이라 말하기보다 복음을 믿게 되었을 때부터 삶의 형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의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복음을 알게 되었을 때,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삶을 바꾸려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더 복음적인 삶으로 바꾸려는 마음 안에 있는 더 나은에 대한 기준이 세상적이란 데 있다.

 

바울 사도는 심지어 자기 신분이 종인 상태에서 복음을 믿게 되었다면 그대로 있으라고 했다. 다만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이 되고,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신분 면탈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라고 한다. 할례의 상태도 그렇고, 자기 이데올로기 역시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종이라는 신분은 세상 기준으로 볼 때 개선해야만 하는 것이지만 바울 사도는 세상의 신분이 종이라도 부르심을 받았다면 자유인임을 분명히 한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고전 7:21-22)

 

복음은 우리의 세상적 형편이나 신분을 바꾸기 때문에 복된 소식인 게 아니다.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그렇고 지금 바울 사도의 말씀도 그렇다. 복음 안으로 부르심은 육신의 형편 개선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 알 수 없는 인생의 목적을 알고 살아가게 하심이다. 하나님의 의라는 사람의 온전한 짝, 이것과 하나되어 순결한 연합을 이루는 게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다.

 

종으로 부르심을 받아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다는 말씀이 그렇다. 진정한 종은 자기 존재 목적 아닌 데 지배를 받아 그것을 사모하고 추구하는 삶이다. 바울 사도는 결혼에 대해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는데, 특히 믿지 않는 배우자가 같이 살겠다고 하면 버리지 말라는 말씀이 부르심을 받은 대로 살라는 뜻을 잘 설명한다. 그리고 이건 단지 호적상 결혼 상태를 유지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부부로서 모든 정성을 다하라는 말씀이다.

 

부르심을 받은 대로 복음을 위하여 살라는 이 말씀은 의외로 복음의 근간이다. 우리는 하나님 성품이 다양한 만큼 다양한 각자의 삶을 살다가 부르심을 받는다.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의 다양함은 곧 하나님의 다양성이다. 이 다양성을 피조물인 사람이 거부하고 일반화된 모습의 신앙을 추구하는 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감옥에서 만나 복음을 영접한 종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에게 면탈을 구하지 않았다. 주인 빌레몬은 바울 사도에게 복음을 듣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었음에도 오히려 오네시모가 입힌 손해가 있다면 자신이 갚겠으니 오네시모를 받아 주기를 청했다. 또한 굳이 육체에 할례를 할 게 아니라고 전했지만 할례당원인 유스도라는 사람과 함께 복음을 전했다. 디도에겐 할례 받지 말라고 했으나 디모데에겐 받으라고 했다. 복음을 엄격하게 전한 것 같은 바울 사도의 본심이 이렇게 곳곳에 드러나 있다.

 

부르심을 받은 대로 복음을 위하여 살라는 이유는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지만 예수님은 마주한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주어진 육신의 삶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생명이다. 따라서 이 생명으로 거듭난 그리스도라면 당연히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부르심을 받은 대로, 우리에게 주신 육신의 형편 대로 사는 그 삶이 복음을 위한 우리의 터전이고 배경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다는 것, 복음을 믿는다는 것, 부르심을 입었다는 건 육신의 형편을 세상 기준으로 더 나은 단계로 상향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주신 그 삶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형편과 삶이라는 세상의 한 절에 당신의 성품을 나타내고자 지금 같은 삶의 나를 구원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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