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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입성한 이튿날 시장하신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으려고 하셨지만,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다시는 사람이 열매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 저주하셨다. 하지만 이때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는 시절이 아니었다. 무화과나무로선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고, 예수님의 모습도 권력남용 같은 분위기 같다.

 

하지만 이 일은 사람이 먹는 무화과나무의 열매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무화과 열매를 먹는다. 우리나라도 이전에는 귀했지만, 지금은 마트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과일이다. 만약 예수님의 의도가 먹는 과일이 열리지 못하게 하는 거라면 예수님의 저주는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능력에도 의문이 들 수 있다.

 

이 일은 앞서 설명한 대로 먹는 열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하나님의 양식 이야기다. 수가성 여인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게 양식이라고 하셨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무화과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의 나무다. 그러니까 예수님 앞에 있던 무화과는 과목으로 있는 게 아니라 유대인들의 모습이다. 예수님께서는 잎은 무성한데 열매가 없다고 하셨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풍성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보내신 양식, 하나님의 의의 열매는 없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막 11:14)

 

저주 같은 이 말씀의 의미는 무화과라는 나무가 식물로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앞으로는 율법적 행위만 풍성한 신앙에서는 열매를 찾을 수가 없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서만 하나님의 양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열매는 생명에게서 만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신 사람은 의학적, 생물학적, 사회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 즉 그리스도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형식만 풍성한 신앙을 양식(열매)으로 삼지 않는다. '이제부터'라 하심은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율법과 성경을 신념과 의지로 지켜내는 풍성한 행위만 풍성한 신앙의 시대가 끝나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나서 하나님께서 양식으로 여기는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되었다. 이제부터 사람이 열매를 얻을 수 없다고 하신 건 형식만 무성한 신앙에서 영적인 열매를 얻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율법적 풍성함만을 두고 하신 말씀이진 않다. 지금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서 그렇지 성당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가 하는 많은 예식과 주를 위한다면 어떻게 하라는 수많은 가르침이 바로 예수님께서 책망한 잎만 무성한 신앙이다.

 

그 결정적 차이는 생명으로 가늠된다. 생명은 본성에서 비롯되고, 생명이 아니면 노력한다. 그리스도로 나면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고, 그리스도로 난 게 아니면 거듭났다고 교회나 자신이 말해도 노력한다. 그리스도로 살려고 노력하고,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 노력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바로 교회의 가르침이다.

 

~~게 하라는 것,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말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 아이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안다. 존재 자체로 기쁨이란 걸. 그리스도로 났다면 그 삶의 모든 게 하나님께 기쁨이다. 이 단순한 법이 믿어지지 않아서 노력한다. 그리고 노력을 치장하기 위해 잎사귀가 무성해진다. 예수님은 결국 이런 행위들을 무덤에 칠한 회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끊이질 않는다. 언제까지,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끝나는 노력인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는다. 노력하는 자들은 곧 어두운 자들이고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건 사람이 먹을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의 양식이 아니다. 흔히들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다고 하는 예수님 말씀의 의미가 이것이다.

 

대학생 시절 필자도 그랬다. 언제까지 이 신앙적인 노력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할 정도가 되면 만족할 수 있는지 너무 궁금했지만, 그 시절의 내 모습을 기준으로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자아 안팎의 소리뿐이었다. 물론 좌표도 없었다. 그건 사람이 먹을 게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드시는 양식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양식이 아니었다. 그 시절 나는 거듭났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예수님의 책망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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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천주교에서는 미사를 드릴 때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쓴다. 그나마 이건 양반인데, 이슬람은 평소에도 눈 외에는 모두 가리라고 한다. 이런 종교적관습은 분명 성경에서 비롯되었는데, 생각해보면 이슬람은 신약성경을 인정하지 않는데 구약에 나오는 남녀에 대한 관점에 바울 사도의 말씀을 더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유야 어떻든 당연히 천주교를 비롯한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의도는 아니다.

 

어쩌면 성경이 인류 역사에서 여성의 권익을 침해하는 원인을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성경을 바로 안다면 그럴 리가 없는데, 이런 어리석음은 모두 육신의 안목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과 육신을 본질로 보는 안목 때문이고, 이 안목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비롯된 일이다.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이 곧 하나님의 은혜라는 안목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말씀이 있다. 이슬람이 코란으로 삼는다는 민수기 27장에서 슬로보핫의 세 딸이 아버지의 유산을 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모세에게 청한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신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늘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한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정의한다.

 

무엇보다 근간이 되는 건 아담과 하와다. 그러니까 창조의 섭리 속 남자와 여자의 정체성이다. 고린도전서 역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말씀들의 행간을 잘 본다면, 그리고 성경의 전반이 사람의 형상이 아니라 중심을 보고 있다는 걸 알면 이 모든 말씀이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사람이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육신의 복락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란 방식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보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고자 함이다. 이 형상은 모양이 아니라 image. 즉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갤럭시와 아이폰을 보면 삼성과 애플의 제조 철학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제조철학이라는 무형의 의나 정체성이 제품으로 나타난 것처럼,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존재로 사람이 창조되었다.

 

이런 관계로 인해 하나님은 항상 사람의 신랑이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그리스도가 되는 게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구원이다. 이 하나님의 법은 남녀가 동침하여 자녀를 얻는 과정으로 표현된다. 아가서의 표현이나 우리를 모두 신부라고 하는 이유다. 이 법으로 인해 남녀의 창조 순서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 창조의 법은 남녀의 창조 순서만을 뜻하지 않는다. 남자가 독처하는 게 좋지 않으므로 그의 배필을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영으로 혼자 있는 게 좋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즉 남자에게 배필이 있어야 한다는 뜻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형상 가진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하나님께서 굳이 사람을 창조하신 필연성을 말씀하심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이 말씀들을 연결하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남녀의 육신의 남녀를 말씀하시는 게 본질이 아니다. 의와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남자, 그 의와 존재 목적을 형상으로 표현하는 존재가 여자다.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라는 정체성이 남자고, 그 정체성을 표현할 육신 가진 사람이 여자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다.

 

의와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남자, 그 의와 존재 목적을 형상으로 표현하는 존재가 여자

 

그러므로 기도나 예언할 때 남자는 머리에 쓰지 않고 여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라고 한 의미는 육신으로 여자는 예배 드릴 때 머리에 수건이라도 쓰라는 의미가 아니다. 일상에서 눈만 제외하고 얼굴을 다 가리라는 이슬람은 자기들 종교 규칙이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한 건 아니다. 그냥 육신의 안목과 생각으로 만든 우상의 교시에 불과하다.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건 성경이 말씀하시는 남자는 그리스도의 의를 가진 존재라는 의미다. 그리스도의 의를 가진 존재가 머리에 무엇을 쓴다는 건 그리스도의 의를 가리는 것이다. 그건 사람이 자기 존재 목적을 외면하고 가리는 것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건 구원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기도 하다.

 

또한 여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라는 건, 그리스도의 의를 표현하는 육체는 육체의 생각을 가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 의와 생각으로 삼으라는 말씀이다. 그 의와 생각을 표현하는 형상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여자의 정체성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면,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목사 아니라 목사 할애비라도 여자다.

 

또한 이런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일면 상대적이다. 더 말씀에 장성한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이치가 여기서 비롯된다. 의에 대하여 더 장성한 사람이 바로 상대적 남자 역할이다. 앞서 말했듯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그 노력의 정도가 극한이라 해도 여자다.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말씀을 듣고 그것을 표현할 존재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1장을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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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앞에 다다랐을 때, 제자 둘을 마을로 보내어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을 것이니 끌고 오라고 하시면서, 혹시 누가 왜 나귀를 가져가는지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라고 하셨고, 제자들이 갔을 때 그와 같은 일이 있어 말하고 나귀 새끼를 데려와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타고 들어가셨다.

 

이 나귀에 대해 특이한 건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이다. 아직 아무도 타지 않았다는 건 그 누구도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그리스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상황을 언급하심이라고 보는 게 성경의 가장 본질을 보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언제나 나귀 새끼가 아니라 황금 마차를 타는 존재였다.

 

아울러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도 그렇다. 나귀의 주인은 예수님이다. 이건 그 나귀가 재산 가치로서 예수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는 존재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농사나 이동 같은 주인의 목적을 위해 자기 육체를 내어주는 가축인 나귀처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주장에 육신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그리스도라는 존재 본성의 원본(주인)이란 뜻이다.

 

여기까지는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말씀하시는 내용이라면 이후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대하는 백성들의 모습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그 생각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일 것이란 기대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막 11:8-9)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길에 깔고 예수님을 환호하며 영접했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이들은 몇 일 되지 않아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선택했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해 '네가 만일 그리스도면 거기서 내려오라'고 조롱했다. 이게 무슨 변덕인가 싶겠지만 사실 유대인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나 십자가에 못 박힐 때나 같은 마음이었다. 예수님이 자기들이 겪고 있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그리스도길 바랬다.

 

우리는 간혹 힘든 일이 있었을 때 교회에 가면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말을 듣고 교회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또 교회가 바라는 일들을 열심히 했지만, 결과가 허무하게 끝나자 돌아서며 하나님과 교회를 원망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이나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극진하게 환호하다 이내 저주하는 유대인의 기대는 같은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극진히 찬양하던 유대인들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돌변했다. 그건 이후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몇몇 일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배신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향유옥합의 일이 있을 때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란 말씀과 무력하게 끌려가서 채찍질 당하는 모습에서 자기들이 겪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던 믿음은 분노한 배신감이 되었다.

 

이 유대인들의 모습, 예수님의 기대는 오늘도 깊이 생각해야 하는 모습이다. 유대인이 숙주나물같이 변심하는 사람들이어서 그런 게 아니다. 사람은 항상 이렇다.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사람은 자기 맘대로 기대하고, 자기 맘대로 환호했다가 자기 맘대로 분노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에 대해 맘대로 재단하는 사람의 태도를 성경은 죄라고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정의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죄는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유대인들 그리고 모든 세대의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아니다. 육신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아시는 문제일 뿐 아니라 창조주는 창조 목적을 위해 피조물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지 않는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말씀도 결이 같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돌아봐야 한다. 나는 어떤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지, 내가 그리스도에게 기도하는 게 육신의 문제뿐인 건 아닌지 늘 생각해봐야 한다. 정말로 나는 십자가를 지는 하찮은 존재가 그리스도라는 걸 믿고 있는지, 무엇보다 나는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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