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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변한 하수(下水), 하수에서 올라온 개구리)

애굽왕 바로는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겠다는 이스라엘을 핍박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처럼 그렇게 하면 분명히 이스라엘의 의지를 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이긴 것 같아도 문제만 더 심각해진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여기는 이들에겐 눈에 보이는 육신과 삶이라 요소를 핍박이면 될 것 같지만, 내용이자 본질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행사는 사뭇 다르다.

 

바로의 저항으로 인해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이 애굽 땅에 임하게 된다. 뱀이 지팡이가 되는 것은 그냥 몸풀기다. 물이 피가 되고, 개구리, ,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그리고 장자의 죽음까지 10가지다. 크게 중요하진 않을지 모르지만 이를 분류해보면, 물이 피가 되는 것과 개구리가 하수에서 올라오는 건 애굽의 술사들도 따라 한다는 특징이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은 하수에서 비롯된 재앙이다. 그렇지만 마시는 물과 강 이야기가 아니다.

 

처음 두 가지 재앙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 아닌 걸로 인생 정체성에 관한 갈증을 해갈하려는 사람에게 임한 재앙이다.

 

10가지 재앙 중 처음 두 가지는 하수에서 비롯된 재앙으로 물이 피가 되고, 하수에서 개구리가 올라와서 온천지에 돌아다니고 죽는 재앙이다. 이 둘은 애굽의 술사도 따라 했다는 게 눈에 띄긴 하지만 핵심은 하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악취로 인한 괴로움이다. 여기서 주목할 건 하수, 곧 물이다.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애굽의 나일강이다.

 

이 물은 사람이 느끼는 자아에 관한 갈증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수 아닌 다른 물을 먹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와 그 일이 곧 재앙임을 보여준다. 단지 바로를 심판하기 위한 이벤트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닌 걸로 인생의 목적과 자아의 갈증을 해갈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재앙이다.

 

예수님을 만난 수가성 여인의 일이 이를 잘 설명한다. 이전에 다섯이나 되는 남편이 있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또 남편 역시 그 여인의 자아를 만족시키는 남편이 아니라는 말씀과 함께 내가 주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 하신 물도 water가 아니다. 남편을 바꾸어 봐도 채워지지 않는 자아의 갈증은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있어야 채워진다는 의미다.

 

이 관점에서 애굽의 물, 나일강의 물이 피로 변하고, 그 물에서 나온 개구리가 오히려 사람을 해하는 재앙은 근원적으로 사람이 세상의 지식이나, 세상 가치에서 자기 자아의 갈증을 해결하려는 시도 자체가 재앙이라는 걸 보여준다. 마시는 물이나 강물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러 가지 않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가 아닌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세상의 지식이나,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서 나온 혜택이나 지식이나 철학이나 가치는 모두 갈증을 해결하고 생명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어서 악취가 나는 것들이기에 세상 가치를 추구하므로 재앙이 된다는 말씀이다.

 

특히 이 두 가지 재앙은 애굽의 술사들도 따라 했다고 했다. 세상의 술사란 세상에서 술수를 부리고 속이는 자들이다. 하수의 물을 피로 만들었다는 건 세상의 가치가 사람에게 생명인 것처럼 속인다는 것이고, 하수에서 개구리가 나오도록 했다는 것 역시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면 뭔가 가치 있는 일이 있을 것처럼 기만할 뿐 정작 거기서 나오는 건 많기만 할 뿐 결국 죽어서 악취를 내는 것뿐이라는 걸 보여준다.

 

애굽의 술사는 세상에서 사람을 기만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따라하고 보여주었다는 건 세상 가치가 사람의 자아 정체성을 해갈할 것이라고 속이는 것

 

애굽에 내리신 하나님의 재앙은 바로의 마음을 심판하는 이벤트가 아니다. 왜 사는지,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일갈한 세상의 철학과 지식이라는 물로 자아의 갈증을 채우려는 사람은 누구나 만나는 재앙이다. 이는 비단 처음 두 개의 재앙만이 아니다. 이어 나오는 10가지 재앙 모두가 그렇다. 단지 바로를 심판하는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목적을 저버리고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반드시 만나는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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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명대로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만나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러 가야겠다고 말하자 애굽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더 핍박한다. 국고성을 쌓는 벽돌을 만들 때 넣는 짚을 스스로 구해서 만들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고자 하니 세상 가치 추구하는 삶을 상징하는 애굽의 왕이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일에 더 수고하도록 핍박하는 모양새다. 하나님을 바로 믿기 시작할 때 겪게 되는 시련이나 핍박의 단면을 보여준다.

 

핍박이란 단어는 의외의 이중성이 있다. (사실 신앙 용어 대게가 그렇다) 존재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본질적인 핍박을 겪는다. 반면에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저항을 자기중심적으로 핍박이나 시련이라 말한다. 사람의 생각 중에는 이타적이고 인류애적인 사회 가치관을 지키고 도전할 때 마주하는 저항과 시련은 세상도 공감한다. 그렇다고 해도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소용없다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생각하는 가치에서 벗어난다면 사람도 터부시하는 자기중심적 가치관은 물론 인류애적 가치를 추구하며 겪는 시련도 성경이 의도하는 시련과 핍박은 아니다. 그 모든 건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을 사람 생각으로 살며 겪는 마찰일 뿐이다.

 

휴대폰이 주인의 의도에 합당하게 작동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앞에 자신을 드리는 희생은 당연함에도 세상은 이를 핍박한다. 하나님의 뜻과 의는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인데 세상의 가치는 성과 탑을 쌓아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이 오르는 게 의와 가치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된 구조가 세상에 악이 관영하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다. 바로의 핍박은 이를 보여준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핍박은 낮아짐을 가치로 여기는 것에 대한 핍박이다. 모두가 높아지는 걸 가치와 의로 여기는데 낮아지는 걸 의로 여긴다는 건 당연한 조롱거리며, 조롱할 대상을 핍박하는 건 어쩌면 인지상정에 가깝다. 심지어 낮아지는 걸 핍박하며 오르려는 높은 곳은 협소하다. 모두가 오를 수도 없기에 서로를 이겨내고 밟아도 겨우 극소수만 이를 수 있는 가치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조롱하고 핍박한다. 그런 세상에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정한 가치로 여길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나서 산다는 건 모든 게 핍박일 수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게 있다. 높이 오르는 게 가치와 의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인정할 수 없지만(그렇기에 죄악이다) 이 세상은, 높이 오르려는 걸 가치로 여기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기에 제아무리 높이 올라 위세를 떨쳐도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의고 진리인 세계 속의 반란일 뿐이다. 따라서 낮아짐을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 낮아지는 성품을 표현하고자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낮아지는 게 진리고 의로움이다. 그걸 보이시려 예수님께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셨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세상의 이런 핍박을 핍박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건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죽어서 가는 천국이 어떻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죽지 않았으니 알 수 없듯 거듭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야기다. 십자가는 신념이 아니라 본성으로 지는 거라는 걸 깨닫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생명에겐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에겐 세상의 핍박이 오히려 삶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인생은 괴로운 것이라 말하면서도 애착을 가지고 즐기고 즐기듯이 십자가를 지는 본성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들에겐 심지어 기쁨이다.

 

바로의 핍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으로 성공한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가 망한다. 천동설처럼 일반적이라고 진리가 아니듯 세상이 모두 높이 올라가는 걸 찬양해도 엄연히 이 세상은 십자가를 지는 게 의로움인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다. 따라서 우선은 세상의 핍박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핍박하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 핍박이 하나님의 의를 역행하는 것이기에 더 큰 저항을 받는다. 그리고 그건 10가지 재앙 마지막에 모든 장자가 죽는 것에서 보듯 그건 자신의 사망일 뿐 아니라 자기 의로 이룬 모든 형식(아들)도 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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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목욕한 자와 세족의식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3. 8. 16. 15:19 Writer : 김홍덕

회개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말씀이 있다. 바로 세족의식이라 일컫는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 13:8-10)

 

 

<회개를 계속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구원은 '생명을 얻는 것'이라 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다는 걸 간과하면 안 된다. 그런 구원을 얻기 위한 회개가 여러 번이 될 수 없는 근원적인 이유를 설명한다. 생명을 얻는 거듭남이 한 번이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일 또한 단번에, 한 번만 있는 일이다. 이렇듯 한 번의 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절대 조건이 회개라면 회개는 당연히 한 번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목욕한 자는 바로 구원을 얻은 사람이 틀림없다.

 

그런데 목욕이나 발을 씻는 건 씻는다는 행위로만 보면 같은 부류로 보인다. 즉 목욕이라는 회개를 했다고 해도 다시 발을 씻는 회개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볼 게 있다. 발 씻기는 걸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가 발을 씻기지 않는다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다. 무엇보다 발은 예수님이 씻기는 것이지 베드로나, 우리 자신이 씻는 게 아니다. 이건 회개에 관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말씀이다.

 

발은 자기가 씻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계속 회개하라는 의도로 하신 말씀이 아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는 말씀, 곧 메시지는 목욕했더라도 계속 회개하라는 게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게 예수님의 의도다. 본을 보였으니 너희도 행하라는 게 예수님의 의도다. 그러니까 발을 씻기고, 서로 사랑하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의 다른 버전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이건 구원을 좌지우지하는 회개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십자가를 지신다. 분명히 지지 않아도 되는 십자가지만 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생각처럼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각오하고 신념을 가지고 지신 십자가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에 이끌려서 지신 십자가다. 이 또한 구원과 회개 못지않게 기독교인들이 모르고 착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의도는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즉 나와 같이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고, 다른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주장 앞에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라는 의도다. 신념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그렇게 하는 게 복음인데,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이미 그런 존재가 되었다고 확증하신다.

 

물론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실 때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가룟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건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룟유다는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에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확정했다. 예수님께서 그를 깨끗하지 않다, 목욕하지 않았다고 하신 이유다. 목욕했다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11명의 제자는 십자가를 진다는 예수님으로 인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두고 이들로 인하여 영화롭게 되었다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17) 그리고 발을 씻기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발을 씻겨야만 상관있어진다는 게 아니다. 이미 상관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그 상관성,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듯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답게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고, 남에게 육신과 그 수고를 내어 주어야 예수님과 상관이 있다는 말씀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신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앞서 설명한 것처럼 발은 자기가 자기 발을 씻는 게 아니다. 자기가 자기 죄를 회개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구원을 좌지우지하는 죄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다움에 관한 말씀이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사랑을 표현할 때 목욕한 자, 곧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다움이 표현된다는 의미다.

 

예수님과 상관이 있다는 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로 거듭났으면 그리스도다움을 나타내어 그 상관성을 보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구원의 단 하나의 조건인 자기 죄를 회개하는 건 아버지를 갈아타지 않는 이상, 한 번만 하면 되는 일이다. 다만 아들로 살아갈 때 아버지의 아들다움으로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아들이란 정체성이 바뀌진 않는다. 죽을 수는 있어도 이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들이 간혹 잘못된 행동을 해도 그 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끊어질까 염려하진 않는다. 이건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는 게 아닌가? 염려하는 것과 다른 차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있어 일상의 회개는 늘 자신이 그리스도답지 못함에 대한 반성을 하게 한다. 이런 반성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는 출발점이다. 분명한 건 거듭난 사람은 잘못 때문에 구원에서 멀어질까? 아니면 천국에 가지 못할까? 염려하지 않는다.

 

물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구원받은 사람도 사회적인, 또 도덕적인 죄나 실수를 범한다. 그러나 단언컨대 진정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일로 벌을 내리거나 구원에서 떨쳐내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아들과 아버지 둘 중 하나가 죽을 수는 있어도 그 관계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있어 일상의 회개는 그리스도로 살지 못한 순간에 대한 반성이다. 남의 발을 씻기고,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다른 사람에게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지 못한 일에 대한 반성이지 구원의 변경시키는 죄가 아니다. 이것에 관한 믿음도 없다면,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확신이 없다면, 아닐거라 아무리 부인해도 자신이 구원받은 존재라는 걸 오히려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면 지금 구원받은 게 아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오히려 구원받을 만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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