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환난과 핍박을 이겨내고 본이 되었다는 점을 많이 칭찬한다. 당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를 비롯해 널리 퍼져있던 유대인 중에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는데,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고난을 이기고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처럼 본받은 사람들이 되었음을 보증한다. 이런 훌륭한 믿음 때문인지 2장 마지막에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전한다.
우리는 다시 핍박하는 이유를 상기하고자 한다. 특히 데살로니가 전서 2장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와 선지자를 죽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는 게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과연 오늘날 유대인은 누구며, 오늘 복음을 핍박하는 건 어떤 모습인지, 그게 나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유대인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특히 개신교 교인들은 자기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복음 시대에 복음을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예수님께 책망받는 성경 속 유대인들은 구약시대에 율법을 행위로 지키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건 제대로 된 착각이다.
이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회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회개하는 잘못은 모두 자기의 잘못되고 불순종한 행동이다. 하나님께 잘못된 행동을 회개한다. 이렇게 행위로 범한 죄를 용서받고자 한다는 건 행위로 의하여 불의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행동을 의의 기준으로 보고 있다고 믿는 것이며,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믿음이다. 다만 그들은 스스로 이걸 인정하지 않지만, 사실은 복음을 핍박한 유대인들과 같은 신앙이다.
기도할 때 자기 행위를 하나님께 회개하는 사람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신앙은 행위가 의로워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믿는 신앙이 분명함에도 단지 자기가 사는 달력으로 시대가 AD라는 것만 보고 자기 신앙을 복음으로 착각한다. 무엇으로 의로워지려 하는지 살피지 않는다. 신약에 있는 말씀이라도 행동으로 지켜내려고 노력하고, 그러다 실패한 모습을 회개하는 일이 반복하고 있다면 그건 누가 봐도 분명히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임에도 자기 신앙은 복음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신앙은 그 자체로도 심각한 문제지만, 자기와 다른 사람을 핍박한다는 것 역시 문제다. 비중으로 따진다면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을 핍박한다는 건 자신만 망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신앙을 오염시키고,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들을 핍박하여 고난받게 한다. 이게 이번 주제다.
그냥 생각하면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신앙을 가졌다고 핍박하는 사람이 된다는 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핍박은 명백히 가치관의 충돌이며, 충돌하는 두 부류 중 더 많은 사람이, 그러니까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를 따르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배척하고 조롱하며 압박하는 게 핍박이다.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엔 복선이 있다. 바로 행위로 의로워져서 행위의 주체인 육신의 평안을 소망한다는 점이다. 행위와 외모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보기에 그 본질인 육신의 평안이 하나님이 축복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 축복을 얻으려면 당연히 본질인 육신의 행위가 의로워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육신의 행위가 의롭지 않으면 인생의 소망인 육신의 평안함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를 경계하고 그런 사상과 사람을 멀리하고 핍박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신앙이 그렇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는 이들을 보고 그냥 두면 자기의 신앙과 육신의 평안을 헤칠 거로 생각했기 때문에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자기들과 다른 신앙을 전하는, 게다가 선한 사람이 날 수 없는 나사렛에서 온 가난한 목수의 아들 주제에 자신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하는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그릇된 신앙은 위험하다.
세상의 평안과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믿는 이들에게 복음은 아주 위험하고 배척해야 하는 도다.
이 신앙은 세상의 평안과 성공은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높고 귀하고 좋은 것으로 믿으며 이를 추구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이걸 구하고 있다는 걸 부인하면 안 된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말은 경건한 것 같지만, 실상은 행위로 의로워져서 세상의 평안을 누리겠다는 그릇된 신앙 고백이다. 하지만 온전한 신앙이라면 낮고 천한 십자가의 존귀함을 알고 그렇게 낮아지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길 소망한다. 그 십자가를 지는 게 하나님의 의로움이다.
세상이 귀하다고 여기는 걸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으면, 소망하는 바를 얻지 못하거나 빼앗기게 되는 일을 염려한다. 그래서 행동을 경건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 노력에는 세상이 귀하다고 여기는 걸 소망하지 않는 믿음을 배척하는 게 포함된다. 결국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걸 추구하는 신앙은 그 자체로 복음을 핍박하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신앙을 가진 핍박하는 자들인데 오히려 핍박받는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어두움에서 벗어나려면 자기가 세상이 귀하다는 걸 얻기 위해 성경대로 행위를 바르게 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사실 이건 어려운 게 아니다. 평생을 노력하면서 반복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자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돌이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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