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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27-33) 예수님의 권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3. 3. 19. 21:31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의 상을 엎고 책망하신 일은 유대인들, 특히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 같은 종교 지도자들에겐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물을 사고파는 명분을 그들이 주었기 때문이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시절일 뿐만 아니라, 제사의 모든 규례는 그들이 해석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와서 권세를 운운하는 이유다.

 

예수님께서는 반문하셨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어디서 온 것인지를. 그러자 그들은 백성들이 무서워 예수님께 대답하지 않겠노라 거절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그럼, 나도 나의 권세가 어디서 왔는지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시므로 무슨 권세로 이렇게(성전의 상을 엎는) 하는지에 대해 답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이후에 포도원 비유로 답을 하신다. 타국으로 간 포도원 주인 비유를 했을 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자기 이야기란 걸 찰떡같이 알아들었다는 데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잘 알아들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대제사장 일당이 세례 요한의 권세에 대해 답하지 않은 이유는, 하늘로부터 온 권세라고 하면 '왜 따르지 않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고 하기엔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고 있음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지자는 하늘의 권세로 기름 부음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제사장 무리가 답을 할 수 없었던 내면의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께 이 문제를 항의할 수밖에 없던 이유와 같다. 앞서 설명한 대로 유월절이면 먼 곳 살고 있더라도 와서 제사를 지내야 하고, 번제에 드리는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는데, 먼 곳에서 제물이 될 짐승을 데리고 오다 보면 그걸 보장할 수 없으니 성전에 와서 제물을 사서라도 제물을 드려도 된다는 명분을 그들이 백성들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어떻게든 제사는 지내야 한다는 형식에 매몰된 그들의 생각, 그들의 권세는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은 신앙이라 그 안에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먹을 게 없다고 하신 것이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처럼 행위만 풍성한 자기들 모습으로 백성들에게 유월절 규례에 대한 명분을 준 것이다. 그러나 자가 발전한 그들의 권세는 늘 예수님 책망의 대상이었다. 길거리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은 누룩이라 하셨고, 그들의 신앙을 아예 회칠한 모둠이라 일갈하기도 하셨다.

 

대제사장 무리가 정의한 권세는 어떻게든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하나님의 법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주신 권세라고 스스로 치장했다. 하지만 그들의 권세와 신앙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의 삶을 생명 없이 노력으로 지키려고 하니 행위라는 잎만 무성했고, 겉은 아름답게 칠해 놓은 무덤 같은 신앙일 뿐이다.

 

여기서는 대제사장 무리가 단순히 답을 하지 않는 정도로 피해 가려 하지만 이어지는 포도원 비유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답을 듣는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들은 백퍼센트 알아듣는다. 그들이 정의하고 있는 권세는 포도원 주인의 것을 약탈한 것이란 것을.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한 것이다. 유대인의 나무인 무화과가 잎만 풍성할 뿐 열매가 없어 말라버린 것처럼, 포도원 주인의 권세를 갈취한 종인 자신들이 심판받을 것이란 말씀임을 아주 정확히 알아들었다. 예수님께서 정말 자세히 답변해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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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장에는 많은 은사를 언급하고 있고, 또 은사에 대한 많은 말씀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앞선 글에서 설명한 대로 성령의 직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선행되어야 은사에 대한 말씀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은사는 성령의 나타남, 곧 표현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능력은 기적이 아니라 거듭나게 하시는 게 본질이다.

 

12장에는 약 9가지의 은사가 언급되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은사가 이 9가지로 한정되진 않을 것이다. 성령은 무한한 다양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이다. 이건 곧 은사가 아무리 많아도, 기적이나 역사함이 아무리 많아도 한 하나님, 한 성령에서 비롯된 것이란 의미다. 성령의 모든 은사와 능력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의 표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사람을 향해 하나의 뜻을 가지고 계신다. 그건 곧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형상,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가 되는 것, 이 하나다. 성령의 모든 은사와 능력과 역사는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을 위한다. 이는 다양하고 많은 직임이 한 주()를 위하여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맥락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능력, 행여라도 그게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현상에 주목하면서 권력이 된다. 세상 지혜처럼 높이 올라가는 근거가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단 하나의 뜻,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몸소 보이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이 그 본질인데,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육신 곧 삶과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생명이란 것을 고려하면 생명의 본성이 삶과 행동을 이끈다. 모든 생명은 생명이 가진 본성대로 산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예수님은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셨다. 모든 이를 유익하게 하셨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함이란 바울 사도의 말씀이 이것이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또한 각 사람에게 다양하게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앞서 설명한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모든 성령의 은사는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을 위해서 나타나는 역사다. 어떤 한 개인에게 하나님의 영이 크게 임해 그를 신령한 사람으로 인식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느 기도원에 가면 영빨 있는 목사나 권사가 있다는 식은 은사를 주시는 성령의 뜻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일 뿐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과는 전혀 무관하다.

 

다시 한번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과정에는 십자가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는 너의 주장이 옳다는 순종으로 나의 육신,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낮아짐이다. 육신이나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존재가 종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다. 이게 성령의 은사와 무슨 관련인가 싶겠지만, 성령의 모든 은사는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에게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므로 방언 한다고 더 좋은 신앙이 아니란 것이다.

 

오히려 진정한 성령의 능력은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인하여 사람을 섬기고, 벗어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삶에는 예언도 방언도 병 고침, 아니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언제든지 나타난다. 그 삶은 하나님의 뜻 대로 사는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위한 성령의 역사는 삶의 일부이고 분리할 수 없는 능력이다.

 

 

일반화하는 건 아니지만 고린도전서 12장에 언급된 은사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자면,

 

지혜와 지식 - 하나님의 영으로 난 자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의 지혜와 지식이 내재될 수밖에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믿음 - 하나님께 순종함 없이 성령의 거듭남이 있을 수 없다 (믿음 = 순종)
병 고치는 은사 - 육신을 고치는 게 본질이 아니다. 예수님이 고친 사람도 다 죽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병은 영적인 병,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건 이 관계의 회복이다.
능력 - 가장 큰 능력은 사람이 바뀌는 것이다.
예언 - 그리스도의 생명 본성 - 아버지가 아들이 군에 갈 것임을 아는 것과 같다.(앞으로 몇 번 다루게 된다.)
영분별 - 특별히 구분의 기준점이 생기는 게 아니다. 생명은 자신과 같은 생명을 안다. 어린 아이에게 굳이 사람과 개의 차이를 말하지 않아도 사람과 개는 구분한다.
방언 - 같은 언어라도 하나님 나라의 말을 한다. 암호 같아서 다들 십자가를 이야기하지만 어떤 이는 십자가를 인하여 낮아지고, 어떤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세상의 성공을 구하는 것처럼 같은 말도 이렇게 다르게 듣는다.
방언 통역 - 성령으로 난 자는 성령으로 난 사람이 사람의 말로 하는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인지하는 게 통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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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일이 있고 난 다음 날에 보니 저주하신 무화과가 정말로 말라 있었다. 이를 베드로가 언급하자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말씀하신다. 바로 전날 성전에서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다고 하신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무화과를 저주한 일이 기도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구했고 이루어졌다. 반면 성전에 가니 기도는 하지 않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유월절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무화과나무잎처럼 많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분주할 뿐 아니라 정성을 다하는 것 같았지만, 열매, 곧 하나님이 사람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의 양식은 없었다. 무성한 잎처럼 제사의 형식만 풍성하고 정작 본질은 사라졌다.

 

예수님은 믿고 구하면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셨다. 하나님을 믿고 구하면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론 성경에 산이 바다로 옮겨진 일은 없다. 그런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일상에서 사람의 기도가 예수님 말씀처럼 마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좋은 대학 입시에 임하는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의 수가 분명 입학정원보단 많다. 기도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이건 괜한 침소봉대 같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에 인생은 물론 영원한 내세를 의지한 사람이라면 이런 모순이나 괴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건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 구원과 인생의 보살핌과 영원한 내세의 삶까지 모두 의지하는 믿음에 의문을 그냥 방관한다는 건 믿음이 없는 게 아니라 인생을 외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수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흠이 없으신 예수님의 말씀이, 기도하면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 하셨다. 이 말씀을 믿든지 아니면 자신에겐 이루어지지 않는, 자신은 믿음이 없고 구원도 없다고 시인하든지 할 일이다. 그 사이 어디쯤 구원이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로 인생을 살 수는 없다. 그럴 바엔 그냥 세상의 쾌락을 즐기는 게 나을지 모른다. 어차피 자신이 가진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지 않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말씀대로 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예수님의 구원이 있다고 믿는 건 웃기는 일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다. 나무에 기대하는 건 열매지 풍성한 잎이 아니듯 육신이란 형식을 가진 사람에게 구하시는 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생명의 본성이 되는 것이지 본성을 가진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모습만 흉내 내는 형식과 외식이 아니다. 유월절의 의미가 본성이 되기를 원하시지 요란한 유월절의 격식 준수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질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경을 지키려는 노력으로써 도덕적인 품새나 경한 모양새로 예배에 참석하는 게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말씀이 본성이 되어 오히려 어기고 살려고 노력해도 되지 않는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다.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말씀을 듣고 육신의 복락과 세상의 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한껏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더 많음에도 다음에는 이루어주실 것이라 믿는 건 믿음이 아니라 도그마(독단적인 신앙이나 학설)일 뿐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믿음은 육의 일이 아니다. 육의 일이 믿음과 기도로 다 이루어지는 게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최소한 육신이 죽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세월과 함께 약해지는 전형적인 소비재의 모습인 육신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나 믿음 역시 육신의 일에 대한 게 아니라 하늘의 뜻, 하나님의 의와 뜻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땅, 곧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기도하면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께 하늘의 뜻이 자신 생명이 되길 기도하는 건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하늘의 뜻을 구한다는 건, 이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인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무엇이 있어야 자신이 온전해지는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죄(이것을 모르는 상태)를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의 원리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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