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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끊임없이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대부분이 여자에게 불리한 관점이다. 그러나 아주 많이 설명했듯 성경이 말씀하시는 건 육신으로 여자 이야기가 아니다. 인생으로서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가 없는 모든 사람이 남편 없는 여자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계시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여자다. 조금 더 확장하면 하나님의 의에 더 밝은 사람 앞에서도 여자다.

 

여자가 무엇을 배우려 한다면 남편에게 물으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먼저 교회에서 무엇을 배우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교회에서 배우는 건 앞서 방언과 예언 같은 은사를 사람에게 배움이 있도록 행하라는 말씀 속 배움이다. 성령으로 인하여 배우는 것, 이것이 여자가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게 바로 배우는 내용이다. 여기서도 분명히 이 여자가 육신으로 여자가 아니란 게 분명해진다.

 

하나님 앞에 여자인 사람에게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다.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해 그리스도로 거듭남이 열쇠다. 여자가 남편을 만나 그의 아들을 생산하는 것같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새생명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육신의 모든 건 어머니가 자녀를 위함 같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좇아 산다. 이게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말씀의 본질이다. 그리고 성령은 바로 우리를 이렇게 이끄시는 분이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는 또한 우리의 남편일 수 있다. 교회에서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지체들을 보며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날마다 새롭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의 말씀에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고 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배우고 자신의 삶을 보증 받는 곳이 교회다. 이 교회에서 여자 곧 배워야 할 사람이 말을 하는 건 유익하지 않다.

 

여자는 교회에서는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집에서 남편에게 물으라고 했다. 말과 질문은 다르다. 말을 한다는 건 주장한다는 것이고 묻는다는 건 배우고 순종하는 것이다. 관계가 상반된다. 세상 지혜를 경계하고, 사람의 유익과 배움을 위해 성령의 은사를 행하라는 고린도전서의 맥락에서 보면 그리스도에 대한 배움이 아닌 말을 교회에서 하지 말고, 자신에게 하나님의 의를 보이는 사람을 통해 배우라는 의미다.

 

이 말씀은 은사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정리하는 마무리다.  모든 은사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을 위하여 행하고, 성령의 은사를 보는 사람은 은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임을 정리하는 말씀이다. 남자와 여자의 격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결국 성경의 주제대로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 은사도, 남자 여자 이야기도 모두 그렇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이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모른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행여 스스로를 선지자로 여긴다면 더더욱 이것이 주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 것이라고 일갈했다. 명령이란 반드시 그렇다는 의미이므로 은사에 대한 모든 말씀은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유익에 관한 말씀이란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 마무리로 다시 한번 예언을 권했다. 예언은 그리스도로서 먼저 살아가는 사람이 여자와 같은 자, 아내와 같은 자들에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예언이다.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하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은혜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활을 이야기한다. 그 부활은 곧 구원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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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28-34) 가장 큰 계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3. 3. 29. 07:00 Writer : 김홍덕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한 서기관이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것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 이 두 가지라고 하셨다. 이에 질문한 서기관은 그 말씀을 순종하므로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고 칭찬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니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하나님만이 신이므로 신께 할 수 있는 모든 건 그냥 하나님께 할 것이란 말씀이다. 자녀가 하나라면, 외동아들이나 외동딸이면 그 부모가 자식을 위한 모든 것을 그에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사람의 일상은 신을 섬기는 일만 있는 게 아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에서 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다만 우리는 모든 행위를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는 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하나의 생각, 하나의 행동, 한마디의 말을 할 때마다 하나님을 위해 하려고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무의식적은 행동이나 말도 수없이 많은데 모든 걸 의식적으로 행한다는 건 불가능하기에 이런 말씀 앞에 사람들은 노력하란 의미라고 타협한다. 사실 성경의 많은 말씀을 그렇게 노력하라는 의미라고 쉽게 타협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라도 예외 없이 이루어야 한다는 성경의 분명한 선언이다. 또한 일만 가지 율법을 행동으로 지키다가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모든 걸 지키지 않은 것이라 분명히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타협은 자기 최면일 뿐 하나님의 의사에 완전히 반하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죄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다해서, 뜻을 다해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다. 그렇게 모든 마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쓴다면, 우리 생각의 얼마를, 우리 마음의 얼마를 나누어 자녀를 혹은 연인을 사랑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했고, 우리가 사는 사회를 형성하셨으며 실수도 하지 않고 경영하시는 분이다. 그런 모순된 말씀을 하실 리가 없다.

 

이와 같은 말씀을 노력으로 지켜내는 건 있을 수 없다.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 말씀을 이루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생명이, 존재가 하나님을 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예수님 말씀대로 살려면, 모든 말씀을 행하고 지키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면 된다. 이게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외에는 구원받을 이름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거듭난 사람에겐 어떤 계명이 첫 번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몸 어느 부위든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듯, 거듭난 사람의 모든 삶은 아니라고 우겨도 계명을 지키는 삶이다. 이게 믿어지지 않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라든가, '그건 예수님이나 그렇지, 우리가 어떻게?'라고 생각한다면 단언컨대 거듭난 삶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다. 거듭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니면 생명이 무언지 모르거나. 그건 그것대로 또 생명없는 죽은 상태라는 증거다.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과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정의다.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그 생명의 본성이 어떤지를 설명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로 나면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셨다. 그게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스도가 아닌 상태로 살아가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대신하셨다고 하는 의미다.

 

서기관과 예수님의 대화를 읽고 들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겠구나!, 그렇게 노력하는 게 예수 잘 믿는 것이구나!' 생각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니 급식 봉사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이 말씀의 방향성이라고 생각한다면 세상 착하게 하는 모습을 얼마간 보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리스도로 거듭난 구원받은 삶은 아니다. 생명은 그 본성을 위해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성은 어쩔 수 없다. 거듭났다면 어느 날 자기 삶을 돌아보니, 또 자기 삶의 모습이 성경대로인 걸 발견하는 상태일 때 첫 번째부터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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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26-33) 화평의 하나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3. 3. 28. 07:00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방언과 예언 통역과 묻고 답하는 일이까지 권면을 이어간다. 핵심은 질서를 수반한 화평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은사를 사용하라는 말씀과 궤를 같이 한다. 방언과 예언만이 아니라 성령의 모든 은사는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본질을 계속 말씀하고 있다. 이는 성령은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존재 목적인 그리스도가 되는 것 이상의 위함이나 은혜는 있을 수는 없다.

 

구체적으로 방언하는 둘 셋이 모여 말하고 다른 사람은 분별하라고 했다. 방언을 하거나 들어 본 사람이라면 그 뜻을 알기도 분별하기도 힘들다는 걸 알 것이다. 바울 사도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방언은 앞서 이야기했듯 이상한 언어 같은 방언이 아니라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생각대로 말하고 듣는 것이다. 기도라는 단어는 하나지만 육신의 안목으로 신앙을 보는 사람은 육신의 복락을 구하는 것으로 말하고 들으며,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하늘의 뜻이 자기 삶을 주관하기를, 또 자신은 순종하기를 구하는 것으로 말하고 듣는다.

 

성령의 은사는 이와 같이 사람을 위한다. 하나님께서 만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가 되어 인생의 목적과 삶의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돕는다. 하나님의 영이시니 하나님께서 만든 사람을 창조의 목적대로 이끄신다. 이것이 성령의 일이고 직임이다. 따라서 성령의 모든 은사와 능력과 역사는 이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다.

 

예언을 순서대로 한 사람씩 하라는 말씀과 통역과 함께 방언을 말하므로 사람들이 배움이 있게 하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도 이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도가 되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가 전하는 성령의 은사가 성령의 본성과 직임과 일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을 바로 안다면 뭔가 질서를 지키라는 말씀처럼 보이는 이 말씀들의 본 뜻도 결국 성령의 뜻대로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절대적 유익을 위하라는 말씀이다.

 

앞서 은사와 직분을 설명함에 있어서 한 몸과 그의 지체를 비유한 것이 그렇고, 성령은 한 성령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말씀을 했다는 것을 잘 이해했다면 예언과 방언과 통역을 비롯한 모든 은사가 한 성령의 같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행하시는 능력이란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한 성령의 하시는 일에 질서가 없을 리가 없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은사에 대해 제법 많은 설명을 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성령의 은사를 사람이 크게 오해하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설명하듯 성령의 정체성과 직임은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 하나만 분명히 알아도 성령의 은사를 분명히 알고 오해하지 않는다. 바울 사도의 모든 권면이 거듭난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다는 뜻이다.

 

다시 한번 성령의 모든 은사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는 사람의 유익은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스스로를 존재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에게 그 존재의 목적을 모르는 것만큼 어둡고 답답하고 암울한 게 없으므로 이것을 밝히는 것 보다 더 사람을 위하는 건 없다.

 

성령은 이를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성령의 모든 은사는 이 결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같이 온전한 성령의 은사는 사람에게 배움을 주기에 유익한 방법으로 행하신다. 필요하면 차례차례, 또 필요하면 통역과 같이 설명으로 행하신다. 일만마디 방언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한 마디로 임하시는 게 성령이시고, 성령의 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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