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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기적과 함께 애굽을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리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목이 말랐고, 마침 발견한 물은 써서 마시기 어려웠다. 그러자 놀랍게도 하나님을 원망했다.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한 게 불과 얼마 전인데, 마실 물이 쓰다고, 그래서 마실 수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이런 태도는 광야를 지나는 동안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우선 출애굽기 15장 후반에서 17장 전반부에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세 번 원망한 기록이 있다. 쓴 물이 먹을 수 있게 된 후에 이름을 붙인 '마라(쓰다)'라는 곳과 신 광야 그리고 르비딤(마사 혹은 므리바)라는 곳에서다. 마라와 르비딤에서는 물이 없다고, 신 광야에서는 먹을 게 없다고 불평했다. 하나님께서는 마라에서는 나무를 물에 던져 먹을 수 있게 만드셨고, 신 광야 이후에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다. 그리고 다시 물이 없다는 불평에 모세가 반석을 치니 마실 물을 얻게 되었다. 참고로 흔히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원인으로 알려진 반석을 두 번 친 사건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이 중에서 처음에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어서 하는 불평과 먹을 게 없어서 하는 불평에 관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지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아울러 율법을 지키면 애굽에 있었던 각종 질병(재앙)을 겪지 않을 것인데, 이는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여호와 라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신다. 애굽에 내린 재앙이 내리지 않는 게 이스라엘 백성을 치료하시는 것이란 뜻이 된다.

 

율법을 지키면 재앙이 내리지 않는 예방이 아니라 치료를 하신다?

 

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치료와는 조금 개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치료는 병이 발한 사람, 이미 아프기 시작한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굳이 따진다면 재앙이 내리지 않는 건 예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재앙이 내리지 않는 게 '하나님의 치료'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치료는 육신의 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치료다.

 

사람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존재인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치료, '여호와 라파'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동안 많은 병자를 고치신 일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일 역시 우리가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존재, 곧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가 되는 일의 표상이다. 육신의 병을 고치시는 게 아니라 육신의 병으로 설명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지 못한 사람의 상태를 회복시키시는 게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본질적 이유고, 능력이다. 곧 하나님의 치료, 예수님의 신유(병 고침)는 모두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능력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치료가 무엇인지를 안다면 율법을 지키면 치료하시겠다는 말씀이 쉽게 이해된다. 율법을 지킨다는 건 육신의 신념과 종교적 노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주일날 예배를 빠지지 않는 노력과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란 의미다. 율법을 지킨다는 건 율법이 자기 본성이 된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거듭난 존재는 율법이건 복음이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생명의 본성인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려고 시도해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대로 그 생명과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듯 우리도 그렇게 되는 게 구원이고, 우리가 그렇게 되라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 존재의 근원적 치료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지음 받았는데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와 애굽과 같은 세상의 의를 추구하며 사는 삶은 육신의 건강 여부와 무관하게 잘못된 상태다. 이걸 바로 잡는 게 구원이다. 그래서 이게 하나님의 치료와 치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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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5) 찬양의 본모습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3. 10. 25. 13:56 Writer : 김홍덕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로 놀라운 기적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기적의 혜택을 제대로 누렸다. 자신들은 바다를, 그것도 마른 바다 바닥을 걸어서 건넜고, 자신들을 죽이려던 애굽의 군사들은 모두 바다에 수장되는 것을 보았다. 이런 상황이면 누구라도 그 기적을 베푸신 이를 찬양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찬양했다. 그럼 이번에는 찬양에 관해 짧게 이야기 해 보자.

 

무엇이 진정한 찬양인가?

오늘날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찬양 집회를 열기도 한다. 또 이전에 없던 새로운 노래들, 아주 감동적인 새로운 노래들을 만들고, 아주 좋은 음향기기와 연주 능력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다만 자기 구원이 너무나 기적적이어서 드리는 찬양인지는 의문이다. 자신을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본성인 삶으로의 거듭난 삶이 된 것을 찬양하는지 의문이란 의미다. 그건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십자가를 지는 본성으로 살아야 하는 구원을 주신 것을 찬양하는지 의문이다.

 

찬양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음악을 중심으로 한 예술적 행위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내용이 없으면 소리 나는 꽹과리다. 그리고 그 내용은 찬양하는 존재 자체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존재는 삶의 한 순간 한 순간, 한 절 한 절이 찬양 자체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창조되었으므로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의 모든 순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런 삶에는 굳이 음악적 연습이나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도 그걸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찬양은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구원받은 사람의 삶, 그 자체

 

찬양이란 행위와 행위가 잘 숙련되고 연출된 집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찬양의 본질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게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이자 구원이다.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찬양하는 모습은 구원받은 자의 찬양 모습이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 하나님이 정한 사람 창조의 목적이 본성이 된 사람이어야 찬양이 된다. 그게 아니면 그저 소리 나는 꽹과리다. 모든 게 그렇듯,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 이루어지면 그게 찬양이고 구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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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4) 갈라진 홍해는 세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3. 10. 23. 16:28 Writer : 김홍덕

애굽의 군사가 좇아 온다는 걸 알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은 이내 모세를 향한 원망이 되었다. 애굽에 죽을 자리가 없어서 광야에서 죽게 만드냐며 원망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원망할 때 모세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가 행하시는 일을 보라고 했다.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기 위한 여정을 떠난 사람을 위협하는 세상의 가치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다. 모두 물에 수장되었다. 우리의 구원도 세상 가치를 추구하던 애굽의 모습을 더는 볼 수 없는 삶이 되는 것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3)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셨다. 모세가 바다를 행해 팔을 들자, 바다가 갈라졌다. 단지 바다가 갈라진 정도가 아니라 마른 땅이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넜다. 이건 세례다.

 

홍해가 갈라진 건 세상 모든 사람이 아는 이야기 중의 하나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일이 정말 자신과 관련이 있는 사람의 예수님의 말씀에 나오는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 정도뿐이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목적이 자기 일이 된 사람이 많지 않다. 존재의 신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사람이 되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의미다. 우리는 지금 그런 사람이 되려 한다. 그것이 구원이기 때문이다.

 

홍해의 기적이 자기 사건이 된 사람은 많지 않다.

 

홍해를 건넌 사람이 되려면 홍해가 어떤 의미인지 알아야 한다. 지정학적으로 중동에 있는 바다를 건너자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게 하나님의 목적이라면 온 세상을 구원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힘들다. 이건 전적으로 영적 의미가 본질인 기적이다. 내가 홍해를 건넌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가르신 홍해, 내가 건너야할 홍해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듯, 우리 각 개인도 구원의 여정이 시작된다.

 

홍해의 의미를 알아야 구원이 시작된다.

 

홍해는 바다다. 그리고 사람은 물속에서 살 수 없고 바다는 세상을 의미한다. 이건 성경뿐 아니라 사람의 일반적인 관념이다. 그리고 성경은 세상 사람을 죄와 사망에 빠져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람은 세상이란 바다에 살고 있고, 이런 사람의 삶은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없는 삶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모두 바다에 잠겨 있고, 빠져 있다. 그건 죽은 삶이다.

 

이를 증명하듯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을 대변하는 애굽, 그중에서도 가장 경쟁력 있는 군인들이 바다에 빠져 수몰되었다. 이런 참혹한 일은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은 바다에 빠진 삶이란 걸 설명한다. 이런 애굽 사람을 하나님께선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 하셨다. 이 말씀에는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 이들이 다시 이런 사람이 된다면 사망에 이를 것이란 의미도 녹아 있다. 결국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의 삶은 바다에 빠진 것과 같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갈라지고 바닥이 마른 바다를 건넌 놀라운 기적의 본질은 세례다. 바다 밑을 걸어서 건넜다는 건 바닷속으로 건넌 것이다. 물에 잠겼다가 다시 나온 것과 같다.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인 애굽의 군사들은 바다에 빠졌지만,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여정을 시작한 이들은 바다를 건넌다. 물에 잠겼다 나오는 세례가 구원의 시작임을 알린다.

 

세례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가 갈라졌듯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성취된다. 사람의 힘은 말 그대로 '1'도 보탬이 없다. 구원도, 세례도 그렇다. 하나님의 능력을 가만히 기다리고, 보고, 확인하는 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전부다. 앞에는 바다가,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는 상황에서 가만히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다만 이 구원을 믿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뿐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그렇게 잉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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