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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출 20:4)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 사람에게 신은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의 능력 이상을 가진 존재다. 그리고 우상은 그 바람의 형상이다. 결국 신과 우상은 사람이 가진 자기 욕망이란 내용과 그 내용의 형상이다. 이는 사람이 육신의 삶이 겪는 문제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상은 사람이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 만든 신이란 내용의 형상

 

이에 반해 하나님은 그 방향이 다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사람을 통해 구현하시는 존재다. 사람은 그런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인데, 그 방향을 거슬러 사람이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한 신을 두지 말라고 하셨고, 그 신을 만드는 마음을 표현하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게 십계명의 첫 번째, 두 번째 계명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두 번째 계명을 말씀하실 때 <너를 위하여>라는 부연을 다신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곧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든다는 건, 사람이 정한 기준에서 벗어난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서 만든 신이란 내용을 형식 가진 존재로 만든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 형상은 비단 물리적 형상에 한정하지 않는다. 특히 사람이 만든 가치관, 돈이나 명예가 문제를 해결한다는 가치관이므로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나 학문, 철학도 사람이 만든 우상이다.

 

결국 십계명의 근간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설정이다. 물론 그건 성경의 기본 뼈대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건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걸 사람이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수동적이고, 순종이 근간이다.

 

결국 이런 문제, 십계명으로 계몽되어야 하는 문제는 사람이 가진 생각이다. 십계명을 주실 때 '너는'이라고 하셨는데, ''는 바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사람이고, 너라는 존재를 성립하게 하는 ''는 애굽의 가치관에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따라서 사람이 애굽의 기준으로 삶을 재단하고, 그 기준으로 볼 때 미흡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순간,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 생기게 되고, 그 신에 대한 믿음을 보증하려고 형상화할면 그게 우상이다.

 

우리가 잘 아는 금송아지 사건이 전형적이다.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존재가 되려고 애굽을 떠나와서는 광야에서 죽을지 모른다는 문제 해결을 시도한 결과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다. 송아지가 문제가 아니라 육신이 광야에서 죽으면 안 된다는 가치관이 금으로 형상을 만들 정도로 중요한 문제로 정의한 까닭이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방향이 아니라 사람이 정한 사람의 문제를 신이 해결하는 방향이다. 이른 잘못된 방향이 여호와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사람이 만들고, 이를 증명하려 형상으로 만들어 우상이 된다.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신이란 생각을 가졌다면 이미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다.

 

우상은 흔히들 생각하는 불상이나 조각상 같은 게 본질이 아니다. 결국 본질은 우상이 필요한 이유, 우상을 만들려는 사람의 마음이다. 행동이야 일시적으로 참을 수 있지만, 우상을 만들려는 마음, 곧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신의 역할이라 믿는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시간과 상황의 문제일 뿐 언제나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다. 음욕을 품은 자는 간음한 자라는 말씀의 논리를 적용하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모두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다.

 

따라서 설사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가 믿는 하나님의 정체성이 뭔가, 하나님의 어떤 걸 믿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을 육신을 문제를 해결하는 신의 범주에서 믿는다면 제아무리 하나님이라 부르고, 신학이 설정한 방식에 따른 경건의 형식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건 단지 우상일 뿐이다. 이게 사실은 모든 우상보다 더 심각한 우상이다. 실체는 우상인데, 자신은 하나님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상은 무엇을 본질로, 또 문제로 보느냐의 문제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둔다는 건 결국 무엇을 본질로 또 문제로 보느냐의 문제다. 육신의 삶을 본질로 보기에 그 본질에 발생한 차질을 문제로 보고 이것을 해결하는 게 신이라는 방향성과 믿음을 가지고 믿고 의지하는 모든 대상은 다른 신이고, 그 신을 형상화하면 모든 게 우상이다. 자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로 믿는다면 강대상 벽면에 걸려 있어도, 목에 걸고 있어도 모두 우상이다. 이게 인정되지 않는 사람이 믿는 하나님도 결국 우상이다.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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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너(출 20:3)

 

하나님은 가장 먼저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너에게 두지 말라'라는 계명을 주셨다. 여기서 ''는 하나님께서 종살이하는 삶을 안식으로 여기는 삶에서 건져낸 사람이다. 명백히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앞서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사람에겐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하나님이 ''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신은 여호와 하나님뿐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사람은 자기 나름의 신을 믿는다. 신이란 내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의 능력 이상을 가진 존재다. 다시 말해 나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다. 이런 정체성 때문에 오히려 신은 사람에 의해 정의된다. 사람이 무엇을 자기 삶의 문제로 보느냐는 관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이 정해진다. 육신의 겪는 난관이나, 육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기에 버거운 문제 해결을 바라는 사람에겐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신이다. 그래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어려움이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의 해결을 바라는 사람 중에는 돈이나 권력이 신이라고 말한다.

 

신을 믿는 사람의 문제에 의해 신이 만들어진다.

 

결국 육신의 삶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신이 정해진다. 가난을 해결해 주기 바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란 말씀에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하소서!"라며 찬양하고 기대했던 마음을 버리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았다. 육신의 질병과 가난이 인생의 문제, 구원의 필요성이라고 믿는 이들의 신은 당연히 가난을 해결하는 다산의 신이다. 설사 그들이 믿는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그 신의 실체는 '바알''아세라'.

 

육신의 문제를 신께 의탁한다면, 그 신을 하나님을 불러도 실체는 바알과 아세라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신 배경에는 하나님의 정체성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먹을 것, 입을 것을 해결하는 신이 아니라, 먹을 것, 입을 것 얻는 것에 종이 된 삶을 안식의 상징인 집으로 여기는 삶에서 구원하시는 신이다. 결국 십계명 첫 번째 계명의 본질은 "너는 무엇을 구원으로 여기느냐?"에서 출발한다. 먹고 입는 것이 삶의 문제라고 여기는 이들에겐 여호와 하나님이 신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신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무엇을 구원으로 여기느냐가 곧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지키는 기준이 된다.

 

하나님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 같아 보일 순 있지만, 실상은 다른 신을 믿는 것

 

사람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지 않으려 경계한다. 경계한다는 건 자신이 이 계명을 어길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첫 번째 계명을 어길까 감찰도 한다. 계명을 어겼을 때 지불해야 하는 대가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계명을 지킬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없다. 즉 하나님과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첫 번째 계명은 전혀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 아니다. 하나님과 자신이 '너와 나'의 관계라면 계명이라 하기보다 관계를 설명하는 말씀이다. 하나님과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된 사람에게 계명은 지켜야만 하는 법이 아니라, 자기 삶의 모양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본성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에겐 비단 첫 번째 계명뿐 아니라 십계명이나 모든 계명이 그렇다. 그저 살기만 하면 지켜지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 삶이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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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은 하나님께 삶의 평안을 얻으려고 지키는 계명이 아니다. '십계명은 누가 지키는 계명인가?'가 중요하다.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십계명을 전하신다. 사람들은 이 부분을 간과하지만, 십계명에 앞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와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인지를 설명하신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 그건 십계명이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오고 가는 모든 세대에서 어떤 사람을 위한 계명인지 설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애굽 땅, 곧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출 20:2)

 

애굽이 가진, 상징하는 의미는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해 왔다. 애굽은 오늘날 이집트라는 한 나라, 혹은 지명이 아니라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의 상징이다. 모든 사람이 가진 가치관, 곧 세상이 가진 가치를 인생의 가치와 의미로 알고 사는 삶이 애굽의 삶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런 종살이 같은 삶에 오히려 안식한다.

 

하나님의 견해가 그렇다. <종 되었던 집>에서의 삶이라고 말씀하신다. 집은 안식의 상징이다. 종 되었던 집이란, 종으로 사는 삶을 안식으로 여겼다는 말이다.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경쟁의 고단함에도 그것이 성취되어야 안식할 수 있다는 사람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모두가 인생은 고난이라고 한탄하면서도, 그 인생이 속한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를 어떻게든 좇아가고, 뒤처지지 않아야 평안을 느낀다. 이 알량한 평안을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하나님께서 <종된 집에서의 삶>이라고 정의한다.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삶에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의 삶은 <종된 집에서의 삶> 즉 그 고단함에서 안식하는 삶이다

 

여호와는 그런 삶에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다.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고된 삶에서 인도하신 여호와를 따라나선 사람, 그런 사람이어야 여호와가 하나님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십계명은 그런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약속이다. 십계명 이전에 하나님과 관계가, 그 관계를 위한 하나님의 정체성 인식이 중요한 이유다. 십계명은 여호와가 하나님인 사람들의 계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유지한 채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사람과는 십계명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말렉의 본성으로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을 조각하고 정의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십계명을 자기 계명으로 도용한다. 행동으로 지키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세상의 성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를 부를 때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정체성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 곧 존재의 신이라는 걸 분명하게 밝히셨다. 사람이 행동으로 십계명을 준수한다고 반응하시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 십계명은 존재의 거듭남 없이 행동으로 지킬 수 있는 계명이 아니다. 존재의 신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십계명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나를 어여삐 여겨 세상의 삶을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지킬 수 있는 계명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지, 그런 행위를 의로 여겨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한 자', 형제를 '라가()라 하는 자는 이미 살인한 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적용하면 행동으로 십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십계명은 행동으로 지켜낼 수 있는 계명이 아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이 행동으로 지킬 수 없고, 고단한 세상 가치에 안주하고 그 가치 세계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사람에 무효한 계명이라면 누가 지켜야 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을 <>라고 칭하셨다는 걸 주목해야 한다. ''는 나와 관계가 형성된 사람이란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계가 형성된 사람의 계명이지, 하나님을 하나님의 정체성과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과는 무관한 계명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여호와는 존재의 신이다. 그런 하나님과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된다는 건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그리고 나는 그로 인한 존재라는 인식과 고백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건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삶인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 세상에서 잘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사람을 하나님이 ''로 부르시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삶이 되었기에 하나님과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된 사람을 한마디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곧 창조 목적이 육신이 된 사람이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하나님의 마음을 안정시키거나 흡족케 하기 위해 지키는 계명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된 사람의 삶의 모습이라 함이 더 바른 설명이다. 늘 설명하듯 그저 살아갈 뿐인데 돌아보면 그 삶이 모두 성경을 지키고 있는 사람의 삶은 언제나 십계명을 준수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는 게 구원이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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