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54

아홉 번째 계명은 이웃에게 반대하는 증언하지 말라는 뜻의 '네 이웃에게 거짓으로 증언(증거)하지 말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이웃은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고, 또 다른 이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해 창조되었기에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좇아 사는 기회를 훼방하는 거짓을 전하지 말라는 게 이 계명의 의도다.

 

우리는 여섯 번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서 살인하면 안 되는 이유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기회를 박탈하면 안 되기 때문이라는 걸 이야기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그림자도 없는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형상이 필요해서다. 그 형상, 그 육신이 바로 사람이고, 성경은 이 사람에게 그 뜻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오직 사람이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바라시는 변함은 없는 뜻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십계명과 성경은 모두 이 하나님의 뜻 위에서 듣고, 이해하고, 전해야 한다. 이 뜻과 다르게 성경과 말씀을 듣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건 불순종과 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이와 다른 뜻으로 전하는 건 거짓 증언이고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다. 따라서 십계명 역시 이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의 목적이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깨닫는 걸 훼방하는 거짓을 전하지 말라는 데 있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 아홉 번째 계명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 어린 소자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과 연결된다. 거짓 선지자, 거짓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예수님께서 항상 있을 것이라 하신 가난의 문제처럼 세상에서 겪는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구하면 들어 주실 것이라고 전하고 외치는 게 바로 이웃에게 하는 거짓 증거고, 성령 훼방이며, 어린 소자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정체성과 다르게 하나님을 전하는 게 이웃을 향한 거짓 증거

 

하나님은 존재의 신, 우리에게 너와 관계를 원하신다. 애굽의 종살이가 집과 같았던(안식이었던) 삶에서 구원받았다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와 정체성을 생각하는 사람이니 이웃에게 나에게 임했던 구원,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종살이하던 삶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대로 사는 삶을 살게 된 이야기를 전하는 게 바른 증거고, 참인 증거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선한 마음으로 전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어도 거짓 증거다. 자기들도 온전하지 않지만, 정통 교단이라는 사람들이 이단들의 선함을 비난하는 걸 상기하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전하려면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전해야 한다. 그래야 아홉 번째 계명을 지킬 수 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최우선 의와 뜻을 기억해야 한다. 그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할 존재며, 이 육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할 도구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이 육신의 필요와 소망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 일갈하신 것이다. 도구를 위해 사는 사람이 없듯 하나님도 그렇다. 육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형식이자 도구다. 목적이 중요하지 육신이 겪는 문제가 본질인 게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으로, 마치 알라딘의 램프 속 요정인 지니처럼 생각하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거짓 증거다. 그런 거짓은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만나는 기회를 어둡게 한다. 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살인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뛰어 드는 게 나을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종살이에 안주하는 삶에서 건지셨다는 걸 믿는다면 자기를 구원한 하나님을 바로 전해야 한다. 하나님을 세상에서 나를 종으로 삼았던 세상 가치를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 믿거나 전하면 안 된다. 그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하나님이 보실 때 <>도 아니다. 그냥 죄인일 뿐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여덟 번쩨 계명은 '도둑질'하지 말라'. 도둑질은 말 그대로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자기 것처럼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건 굳이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어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윤리 상식의 영역이다. 이 말씀은 언뜻 사람 사이의 계명으로 한정해 볼 수 있다. 많은 경우 5~10계명을 사람 사이의 계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십계명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계명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사람이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건 주인이 하나님인 존재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또한 도둑질의 대상은 물리적인 물질과 물건에 한정하지 않는다. 지식재산권이 그렇듯 의에 관해, 정체성에 관해, 주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마땅히 하나님만의 영역에 있는 것을 사람이 자기 것인 양 생각하고, 주관하고, 소유하려 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도 도둑질이다. 가장 본질적인 건 바로 사람 자신이다. 자기 인생이나 내 맘대로 살겠다는 건,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신 이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가장 큰 절도는 바로 자기가 정하지도 않은 인생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인생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게 가장 근본적인 도둑질

 

우리는 가끔 가족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는 어리석은 가장들의 어이없고 비참한 소식을 듣는다. 그 어리석은 생각도 자기 인생은 자기 소유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인생을 자기 것으로 인식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보여준다. 문제는 정도의 문제일 뿐 사람들 대부분은 인생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권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다움을 보장받고, 스스로 의사 결정에 관한 권리가 있는데 그건 사회적 권리이지, 창조주 앞에서 존재적 권리는 당연한 창조주에게 있다. 노트북처럼 소유한 물건이 소유한 사람 앞에서 자기 주권을 주장하는 게 말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인생의 주권은 인생을 주신 분에게 있다.

 

앞서 살인이나 간음도 분명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명이지만,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강제로 빼앗는 것이기에 살인하지 말라 하셨다고 설명했고, 간음도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존재 목적 아닌 것으로 자기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의미까지 생각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같은 맥락에서 도둑질 역시 하나님이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주신 인생을 자기 것인 양 훔치지 말라는 말씀이 근간이다. 이어지는 9, 10계명 역시 이런 관점으로 봐야 한다. 모든 계명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대해 원하시는 정체성이고, 삶의 태도다.

 

하나님의 계명은 창조주가 피조물이 기대하는 바

 

도둑질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가장 귀한 남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신 인생이기에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있다. 즉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하나님께 ''라는 인생을 훔치는 것이다. 그렇게 내 인생이 작물이 된다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해도 소용없다. 아니 여전히 도둑놈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된다는 스트레스를 미리 염려할 수 있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자기 의가 육신이 된 자녀를 수단이나 도구로만 생각하는 부모가 없듯, 자기 성품과 의를 표현할 육신으로 창조한 사람이 그 뜻대로 거듭나 아들 그리스도가 되었는데 그의 행복을 외면하면서 하나님의 목적만 채우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1'도 믿을 수 없다.

 

일상에서 우리, 즉 그리스도로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된다. 사실 거듭났다면 그런 본성이 없기에 그걸 경계하고, 주의할 필요조차 없다. 거듭난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따라서 도둑질하지 않으려면 도둑질하지 않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어느 순간 도둑질을 할지 모른다. 신념과 의지는 상황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도둑질하지 않는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건, 하나님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목적으로 창조한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이 자기 인생을 훔치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 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장 귀하고, 가장 근원된 자기 존재를 도둑질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또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간음은 남녀 간의 부정을 의미한다. 남녀의 관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 짝이 아닌 상대와의 관계, 그리고 서로가 의미가 되는 관계가 아니라, 탐욕이나 돈의 대가로 맺어지는 관계 등이 간음이다. 이 모든 걸 정리하면 '자기 짝이 아닌 상대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간음이다.

 

그런데 성경은 자기 짝을 육체적인 관계에 한정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여자와 같고,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성경적 개념도 간음을 정의하는, 즉 무엇이 올바른 짝인지를 가늠하는 기준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사람의 짝인데, 이를 벗어나 다른 의를 받아 추종하고, 다른 의를 표현하는 육신의 삶을 산다면, 그 삶이 바로 간음이다.

 

하나님의 의와 뜻을 자기 남편, 자기 의로 삼지 않는 삶이 바로 간음의 본질

 

결국 사람이란 존재가 어떤 의를 자기 정체성으로 삼는지가 쟁점이다. 사람이란 존재의 목적이 자기 삶의 의미와 본질이 되었다면 바른 짝을 찾은 것인고, 사람의 존재 목적 아닌 것을 삶의 의미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삶 자체가 간음이다. 존재의 목적을 벗어난다는 건 요리용 칼이 흉기가 된 것 같은 일이다. 그게 간음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가 자리를 벗어났다는 의미란 걸 생각하면 더 선명하게 알 수 있다.

 

간음은 존재 목적을 벗어난 삶을 사는 것

 

보통 일반적인 생활 속 시각에서 잘 생각해 보지 않지만, 존재하는 모든 건 존재하는 목적이 있다. 존재하는데 목적을 상실하거나 목적대로 소비되면 가치를 상실한다. 그래서 사람은 낯선 물건을 대하면 가장 먼저 '이건 어디에 사용하는 물건인가?'를 생각한다.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사람이란 존재 자체 역시 목적이 있는 존재란 의미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삶의 목적을 찾으려 하고, 삶의 의미를 존재 목적에서 찾는다. 그 목적이 바로 사람의 배필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이 사람의 배필

 

따라서 사람이 자기 배우자가 아닌 이성과의 부정한 관계처럼 사람이 자기 인생의 목적, 자기 존재의 목적 아닌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의 본질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이 간음이 육신으로 표현된 예시가 바로 남녀 간의 간음이다. 자기 배우자, 자기 결혼을 위한 목적을 벗어난 관계와 같은 모양이다.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오직 사람의 구원이다, 또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건 구원받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 사는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이자 사람에게 존재 목적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짝이요 배필이다.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을 육신 가진 사람이 삶으로 표현하는 구조다. 이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는 것, 그게 간음이다. 여기서 벗어나지 말라는 계명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