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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일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함께 전해질 것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긴 시간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몰라도 전도할 때 이 사건을 중심으로 전도하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렇다는 식의 접근이 아니다. 복음이 전해진다는 건 곧 향유 옥합 사건이 있었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된 소식이 복음이라면 사람이 생각하는 복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부유하고 평안하게 살게 되는 게 복이라면 그리스도가 그렇게 해 주신다는 소식이 복음일 것이다. 그리고 복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복을 주는 그리스도 역시 이를 복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난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셨고, 자기 죽음과 장사를 위한 일이 복음으로 전해진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이 생각하는 복을 주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일이 육신의 복락을 복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될 수는 없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다.

 

앞서 정리했듯이 이 향유 옥합 사건은 그 자체가 복음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향유 옥합 사건은 데칼코마니다. 흙으로 만든 옥합이 깨어지니 그 속에 있던 향유의 향기가 넘쳐나서 모든 이들이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듯, 흙으로 만든 예수님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깨어지니 그 속에 있던 물과 피가 쏟아지므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된 게 데칼코마니다. 예수님이 쏟으신 물은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피는 그리스도라는 생명이다. 옥합이 깨어져 감춰있던 향기가 넘쳐났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니 육신이 된 말씀과 그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온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이 전해진다는 건 향유 옥합의 일이 있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로 거듭난 한 사람의 육신이 누군가는 옥합과 같이 깨지는 일이 있어야만 복음이 전해진다. 육신이 깨진다는 건 종처럼 수고하고 낮아지는 일이 있었다는 뜻이고, 향기가 퍼지듯 드러난 육신이 낮아진 모습에 성령으로 감동한 또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게 진정한 복음 전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향유 옥합이 깨어지는 일은 자기 죽음이 왜 복음인지를 설명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이 일이 과연 복음인가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복이 과연 이와 같은지, 십자가를 진다는 게 복음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이런 고찰도 없이 예수님의 복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건 경솔함을 넘어 예수님을 욕보이는 일이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님이 세상에서 높아지는 복을 주신 것이라고 믿고 구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향유 옥합 사건은 복음 그 자체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지에 관한 갈등이 종결되는 사건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가난 해결은 고사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우리의 복음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같은 운명에 귀속된다는 말씀이 우리의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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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6:1-9) 헌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3. 4. 26. 11:04 Writer : 김홍덕

부활에 대한 말씀을 끝으로 권면을 마친 바울 사도는 인사와 계획과 동역자들에 대한 당부로 고린도 교회로 보낸 첫 편지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헌금에 대해 잠깐 언급한다. 아마 당시 바울 사도가 세운 교회들은 바울 사도가 들릴 때마다 헌금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에 당부했듯 고린도 교회에도 지금의 주일(일요일)에 해당하는 첫날에 헌금을 해 두었다가 자신에게 달라고 당부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 보내는 두번째 편지(고린도후서)에서는 헌금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한다. (고후 8) 사람들은 헌금에 대해 살짝 민감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헌금은 문제 있는 제도가 아니다. 사도를 위해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서, 전도 사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헌금을 모아 사용하는 건 은혜로운 일이다. 구약성경에서도 곡식을 떠는 소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셨는데, 복음 전도 과정에서 혹은 이를 위해 어떤 수익을 얻는 건 하나님을 위한 일의 부속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헌금은 하나님의 일을 위할 때 은혜롭다. 사람 생각에 하나님의 일 같아도 진정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기시는 일이 아니라면 헌금을 사용하면 곤란하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는 게 어려울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께서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지 많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분명한 사례가 있다. 십자가를 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이를 만류했을 때의 일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하신 말씀 속에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십자가를 지는 게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막 8:3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지 묻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게 하나님의 일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이를 종합하면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는 게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일을 위하여 헌금을 사용한다면, 또 이런 일을 위해서 헌금을 모은다면 은혜로운 일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일반 상식이 된 헌금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 혹은 벌을 내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내는 헌금은 투자지 헌금은 아니다. 자기가 낸 얼마의 헌금으로 물질적인 축복을 기대하니 명백히 투자다.

 

사용하는 것 역시 그렇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진정한 그리스도임을 전하는 사람을 위하여, 이를 믿으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사람을 위하여 사용하는 헌금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은혜로운 일이지만, 세상 기준으로 높은 위세를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헌금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화려한 교회를 건축하는 일과 같은 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일을 위한 헌금 사용도 아니다.

 

이렇게 바울 사도가 헌금을 언급한 것을 빌미로 간략하게 헌금을 이야기했다. 결국 결론은 그리스도다. 십자가를 지는, 너 옳다며 육신이 한 걸음 더 수고하는 본성으로 사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런 그의 모든 수입과 지출은 다 헌금이다. 이런 사람, 이런 그리스도가 되는 게 바로 복음이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전했기에 헌금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한다. 오늘 우리도 바른 헌금을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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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라는 존재의 정체성에 관한 두 견해는 예수님 당시에는 물론이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충돌과 갈등을 오래전에 깔끔하게 정리하셨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바리새인과 같은 안목으로 보기에 아직 정리가 안 되었을 뿐,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지 확정하셨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죽음을 위한 사건, 우리가 잘 아는 향유옥합 사건에서 먼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확실히 정리하셨다.

 

향유옥합 사건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두 의견, 두 가지 의가 모든 패를 드러낸 사건이다. 이때까지 비유와 은유로 맞서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의와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는 의가 향유옥합이 깨어질 때 바닥까지 각자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는 가치를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하는 그리스도가 낭비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며 비난하는 사람들은 확고하게 그리스도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 정체성을 확정했고,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는 말로 그리스도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존재가 아님을 확정하셨다.

 

이처럼 패가 다 드러났을 때. 자기의 운명과 생각도 확실히 결정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가룟유다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의 생각 앞에 분명하게 '그건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가난한 자는 항상 있다'라고 일갈하는 예수님을 보고서 '저 사람은 내가 기대한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또한 확정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어떤 그리스도인지를 가장 먼저 안 사람이 가룟유다인지 모른다. 알았다기보다 사람이 원하는 그리스도가 아닌 건 확실하다는 걸 알았다고 해야겠다.

 

가룟유다에게 가난을 해결하지 않는 그리스도는 한낱 종일 뿐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그에게 예수님의 가치는 그저 종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버린 값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그의 유산은 오늘날 뿌리 깊이 남아 있다. 바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혹은 예수님을 생각하는 기본적인 개념이 그렇다. 기독교인들은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데 오늘날 기독교인들 분명 예수님을 종처럼 여기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본질로 보시거나, 육신의 행위를 의롭게 보시지도 않고,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시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의 필요는 먼저 아시고 이미 다 주셨음에도 사람은 육신을 본질로 보기에 육신의 영화를 위해 자기가 필요한 걸 하나님께 구하면 도깨비처럼 구해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구조를 양심을 가지고 보면 램프의 주인도 지니에게 필요한 게 아니라 자기 필요를 능력자에게 구하듯, 사람도 자기가 필요한 것을 능력자에게 구하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

 

가룟유다는 이 구조 안에서 예수님을 봤고,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이런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분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적어도 그리스도에 대한 분별은 분명했다. 문제는 온전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것이다. 자기가 가진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과 다른 그리스도를 기대하고 믿었고, 예수님은 자기가 믿는 그리스도가 아니란 것만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런 그의 기준에 예수님은 특출하긴 하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는 종과 같았다. 그런데 막판에 예수님은 자신이 그런 존재가 아님을 선언하셨다. 그렇다면 가룟유다에겐 더 이상 예수님은 소유할 가치가 없는 종이었다. 그래서 팔아버린 것이다. 딱 종의 몸값에.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가룟유다의 인류 최고의 배신 아이콘으로 조롱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가룟유다의 유산을 이어받아 살고 있다. 더 한심한 건 그런 자신은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이라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 그리고 자녀의 복락과 같은 육신과 세상의 일 뿐이면서 가룟유다를 조롱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도 예수님을 육신의 재화를 능력으로 구해주는 램프의 지니처럼 여기면서 가룟유다와 자신은 다르다고 믿고 있다.

 

십자가를 진 패배자 예수에게 육신의 성공을 구하는 사람은 가룟유다의 후손

 

그리스도는 가룟유다나 육신의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존재다. 육신이 십자가를 지고 완전한 패자가 된 예수님께 육신의 성공을 바라는 어둡고 모순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게 구원이라고 한다면 어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인지는 알아야 하는 게 지극히 상식이다. 이런 상식적 접근도 없이 그러 '그리스도'라는 단어만 생각하면서 그리스도로 거듭났으니 그 그리스도에게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걸 믿음으로 여기고 사는 건 정말 아니다. 그건 가룟유다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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