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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3) 후회하고 추격하는 바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3. 10. 18. 04:19 Writer : 김홍덕

막상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자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급하고 단호하게 떠나라고 했는지 이유를 설명이라도 하듯 애굽의 바로 왕과 신하들은 이를 후회한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또 바로 왕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혹이 백성의 도망한 것을 애굽 왕에게 고하매 바로와 그 신하들이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가로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 하고(출 14:5)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섬기는 섬김을 놓아주었다고 표현한다. 이 건 구원의 또 다른 표현이다. 구원받은 사람이 주어가 되면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구원받아야 할 자리를 주관하는 세력이 주어가 되면 구원받은 사람은 놓친 고기, 잃어버린 가축이 된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세력을 마귀나 사탄이라고 쉽게 표현하지만 사실 이건 사람 마음의 한 단면이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는 표현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악하게 부축였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 뜻을 분명하게 하면 할수록 구원을 등지려는 마음, 세상의 가치를 사랑하는 마음은 더 강퍅한 마음이 된다. 하나님의 의에 가까워지면 세상의 의에서 멀어지는 건 당연하다. 점점 강퍅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이건 하나님께서 그 의를 더 분명히 하신다는 표현이다.

 

바로와 애굽은 이스라엘을 고이 보내줄 수 없었다. 사람이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존재가 되는 걸 세상 가치가 그저 바라보고 손뼉 치며 배웅하진 않는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그 세상 가치는 하나의 세력 같지만, 실상은 우리 마음이다. 세상 가치 속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니 육신이 본질인 줄로 아는 생각이 언제나 세상에 의지하는 게 안정된 삶이라고 믿게 만들고, 그 믿음은 언제나 우리 삶을 세상 이 의와 선으로 여기는 가치에 의지하고 벗어나면 안 되는 것으로 믿는다. 이 믿음은 끈질기게 우리가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존재로 사는 걸 훼방한다. 악과 마귀는 언제나 내 마음에 있다.

 

바로가 이스라엘을 추격하는 건에서 우리는 또 한 번 구원을 향한 발걸음이 얼마나 단호하고 신속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뒤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의 일도 그렇다. 육신을 본질로 보고, 육신이 속한 세상 가치에 의지하는 마음은 이처럼 끊임없이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이런 세상 가치가 삶 전제를 지배하진 않는다. 이어 나오는 홍해를 건너므로 애굽의 추격은 끝난다. 즉 물에 잠겼다 나오는 것, 세상 가치를 추구하면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으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세례받고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건 죄악의 바다에서 사는 것임을 깨닫고 물 밖으로 나오는 세례를 통해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유혹은 끝난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세상 가치와 씨름하고, 유혹을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아야 한다. 아니 그럴 수 없다. 생명이 바뀌면 이전 생명의 DNA가 없는데 어떻게 이전 생명이 추구하던 가치를 추억할 수 있겠는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 구원받았다면서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는 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시인일 뿐 구원받은 사람의 경건한 기도는 아니다. 이것을 반추하면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이걸 속이거나 묵인하면 그게 양심에 화인 맞은 것이다.

 

구원은 세상 가치에 의지하던 본성으로부터의 탈출이다. 그렇게 세상 가치를 추구하며 살던 삶에서 돌아서니 회개고, 이전과 같은 삶을 살려고 해도 살 수 없는 존재가 되니 거듭남이다. 당신이 그렇다면, 더 이상 세상 유혹을 염려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세상 유혹을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면 구원받은 상태가 아니다. 아직 세상 가치에서 살 수 없다는 온전한 세례가 없는 것이다. 다음 시간부터 그 세례를 이야기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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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2) 불기둥, 구름 기둥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3. 10. 15. 20:47 Writer : 김홍덕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으므로 구원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성경에 기록된 여정이 40여년이라 구원의 여정 또한 그렇게 길 것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성경의 시간은 달력을 넘기듯 가는 시간이 아니다. 12시가 점심시간이 아니라 배가 고픈 때가 점심시간인 개념이다. 달력의 시간은 크로노스, 상태의 시간은 카이로스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성경의 시간은 카이로스의 개념이다. 구원의 여정이 달력으로 40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상태까지의 단계적 흐름이다. 그래서 생명이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의 여정은 생명이 성장하는 것 같은 흐름이다. 하나님은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대하는 것이 달라지듯 이스라엘을 이끄신다. 출발하자 강한 이방 민족 블레셋을 만나지 않도록 홍해로 이끄셨다. 전쟁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돌아갈까 염려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구원의 여정을 갓 시작한 이들에게 적절한 이끄심이다.

 

물론 블레셋을 피해 더 심각한 홍해로 이끄셨다는 걸 두고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게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홍해는 일단 건넌다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이유일 것이다. 물론 홍해를 건너기 위해서는 기적이 필요했지만, 홍해가 갈라진 건 단지 구원은 기적이 필요한 은혜라는 걸 보이시기 위함이 아니라 세례, 즉 애굽이나 세상의 가치를 좇아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통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게 한다. 블레셋을 만나면 다시 돌아갈까 염려하신 것과 대비된다.

 

그렇게 구원의 여정이 시작되자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나 이스라엘을 인도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구원이자 하나님께서 뜻하신 인생의 자리(정체성)는 사람이 가보지 않은 자리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단지 길 안내를 위해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인 건 아니다. 애굽, 곧 세상의 가치를 떠난 구원의 여정은 율법적인 과정을 거친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율법적인 신앙 여정의 상징이다.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넌 이후 여정은 광야와 사막의 여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 요한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쳤고, 그래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고, 무엇보다 여자가 낳은 자, 곧 율법의 세계에서 가장 큰 자라고 했다. 예수님 이전에 세례 요한이 있었듯,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전엔 광야의 여정이 있다.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자, 존재의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적인 여정은 피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우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사막과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존 환경을 제공한다. 낮에는 그늘 하나 없고, 밤엔 매우 추운 광야를 낮에 구름 기둥 아래 그늘을 따라 진행하고, 추운 밤에는 따뜻한 기운을 제공한다. 그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의미다. 지키면 살고, 어기면 벌을 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율법을 지키는 삶의 모습 그 자체다.

 

이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차례다. 우리가 교회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하지 않으면 큰일 나(벌 받아)'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너무나 일상이 되어 있어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게 오히려 정상처럼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행동이 기도나 십일조라고 할 때 그게 자기 생명의 본성이라서 하는 게 아니라 벌을 받지 않겠다는(혹은 상을 받겠다는) 목적과 이유로 기도하거나 헌금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벗어나면 안 되는 상황과 같다. 그러니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니 해야 한다'라고 설교하고, 그 설교를 듣고 그렇게 노력하는 신앙은 모두 율법적인 신앙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온전한 구원에 이른 게 아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여정에 나타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며,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능력 있는 신이라는 자부심은 아직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땅과 같은 흙으로 창조된 사람이 되기까지 여정 중에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초입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서 머물며 아직 어리고 온전하지 않은 신앙을 심화시키려고만 한다. 어떻게 하면 더 성경을 잘 지킬 수 있는지 연구한다. 신학이란 게 그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에 이르지 못한 구원의 초입에 머물며 반복적인 노력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신념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에 대한 연구다. 거듭나서 생명이 되면 거저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는 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고 삶인데, 그 하나를 모르니 노력하지 않으면 쓰러진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서 신념을 가지고 노력한다. 그게 율법적인 신앙이다.

 

당연히 율법적인 신앙으로는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율법적인 신앙을 건너뛸 수는 없다. 누구나 그런 여정을 지난다. 세상 가치를 사모하는 삶을 대변하는 애굽의 국고성을 쌓는 종으로는 살 수 없어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듯, 율법적인 삶의 모습은 광야의 삶에 머물 수 없어 요단강을 건너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야 구원이 성취된다.

 

다만 이 여정은 달력의 세월로 얼마를 충족해야 하는 개념이 아니다. 세상 가치를 버림과 동시에 율법적인 신앙도 함께 버릴 수도 있다. 반대로 모태 신앙이라고 해서 세상 가치를 좇는 삶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이 귀하다고 하는 걸 얻으려는 건 모양은 기독교인이나 실상은 애굽의 국고성을 쌓는 종이다. 말 그대로 '때가 차면'이란 조건이 성취되면 된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존재인 사람이 애굽이나 광야에서 머물 수는 없다. 지금 내가 율법적인 신앙에 속했음을 알게 된다고 실망할 게 아니다. 이건 여정이고, 생명의 자람과 같다. 지금 내가 세상이나 율법 세계에 속했다는 걸 시인할 수 있다면 오히려 축복이다. 실상의 삶은 세상에, 율법 세계에 있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구원받았다고 믿는 게 문제다.

 

곤경에 빠지는 건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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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에는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게 있다. 금은보화, 곧 돈 이야기다. 애굽을 떠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에게서 금은보화를 얻어서 떠났다. 430년 노예 생활의 급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출애굽이란 게 세상 재물과 가치를 상징하는 애굽을 떠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출애굽의 목적에 반하는 사건이 아닌가 생각할 여지가 있다. 실제 오늘날 기독 신앙은 재물을 탐하는 것은 물론 바라는 것도 터부시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 구원받은 신앙인에게 돈은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여기서는 출애굽기 전체적인 흐름에서 좀 도드라지는 면이 있어도 '' 이야기를 좀 하려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존재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게 이 글에서 말하는 구원의 기본 뼈대다.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건 여호와 하나님, 곧 존재의 신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게 아님을 설명해왔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될 것인지를 믿는 게 존재의 신을 믿는 믿음이고 구원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믿음과 구원은 왠지 육신의 평안과 번영을 가져다주는 금은보화, 즉 재물은 멀리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을 준다.

 

그러나 사람은 돈 없이 살 수 없다. 이건 명백한 현실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육신이나 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세상 일부다. 즉 존재의 신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돈 없이 살 수는 없다. 이런 상충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쉽게 자유로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이 세상을 의미하는 애굽에서 특별히 수고하여 얻었다고 말하기 힘든 재물을 가지고 애굽을 떠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할 건 돈에 관한 관점이다. 돈이 목적이나 본질 또는 하나님 은혜의 척도인 것과 수단인 것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르다. 한마디로 돈을 본질이나 목적으로 삼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삶의 수단으로 인식하는지의 문제다. 이건 표면적으로는 아주 비슷한 문제지만, 실상은 구원의 문제, 구원받은 사람이냐 아니냐의 차이다.

 

신앙인에게 있어 돈 문제의 결국 어떤 사람이냐의 문제다.

 

사람은 돈을 보는 자기 관점을 바꾸면 돈에 대해 경건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관점을 바꾸는 것인지, 아니면 관점은 생명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니 생명을 바꾸는 것인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결국 이것 또한 구원과 거듭남의 문제이다.

 

돈을 목적으로 보는지 수단으로 보는지는 의외로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느냐로 구분된다. 돈을 본질로 보는 사람은 하나님께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며 기도하고, 그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내려 한다. 반대로 돈이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사람은 하나님께 돈을 구하지 않는다. 먹을 것 입을 것도 딱히 구하지 않는다. 그런 모든 건 살고 있는 사회에서 구하는 방식을 따라 구한다.

 

하나님을 기도하고 간구하면 돈을 주시는 신으로 믿는 사람은 육신을 삶의 본질로 보고 육신의 평안과 성공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 믿는다. 이런 사람에게 돈은 그저 목적이다. 돈으로 대변되는 육신의 형편이 곧 하나님 은혜의 척도라는 건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처럼 육신의 삶을 본질로 보는 신으로 믿는 신앙이다. 이건 분명 하나님을 존재의 신 여호와로 믿는 신앙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에게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많은 재물을 빼앗듯 얻어서 떠나는 건 구원은 곧 육신의 평안이라는 자기 믿음을 확신하는 착각을 낳게 한다. 마치 육신의 문제 해결이 구원인 듯, 또 구원은 곧 육신의 형편 개선인 양 믿는 일반적인 기독 신앙을 보증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건 회칠한 무덤과 같다.

 

돈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여기는 가치관을 가지려면 먼저 바로 잡아야 하는 게 있다. 바로 육신에 관한 관점이다. 육신을 하나님을 표현할 형식이자 도구로 보는 관점이 있어야 한다. 이 관점이 없는 사람에게 돈은 절대로 수단이 될 수 없다. 사람은 삶의 한 절에서 경험하는 깨달음으로 이게 바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관점은 생명이 바뀌어야 바뀐다. 돈이란 한 가지를 두고 목적으로 보는 가치관이 수단으로 바뀌는 건 생각만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니다. 섞은 고기를 양식으로 알던 늑대가 냄새나는 부정한 것으로 보는 양으로 거듭나듯 생명이 바뀌어야 한다. 즉 구원이 있어야 한다. 구원 없이 돈에 대한 가치관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돈은 노력이나 다짐으로 돈에 대한 관점이 바뀌지 않는다. 물론, 이건 비단 돈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 전체가 그렇다. 생명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고 가치관도 바뀐다. 한 마디로 구원받으면 굳이 별다른 조치나 관점을 전환하려는 노력이 없어도 그 사람에게 돈은 그저 수단이 된다. 구원받은 사람,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건 무엇이든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된다. 돈도 마찬가지다. 있으면 있을수록 유용하지만, 그렇다고 없어서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많은 재물을 취한 건 이제는 유월절을 넘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러 가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애굽에선 그 모든 금은보화가 세상 가치로 존재하지만,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사람에게 주어진 금은보화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이므로 그 육신이 사용하는 동안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제물과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 돈 문제 역시 구원의 문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 거듭난 사람에게 돈은 있으면 있는 대로 또 없으면 없는 대로 그 삶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다. 또 부유하고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나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육신이 된 말씀대로 사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이니 숨만 쉬어도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그런 사람에게 돈은 수단이고, 이미 예비하신 세상의 법으로 충당하고 소비하며 산다.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므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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