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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형이 죽으면 그 아내 그러니까 형수와 결혼해서 후사를 잇는 풍습이 있었다. 이른바 계대 결혼이다. 예수님 당시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예수님께 계대 결혼을 빌미로 부활에 대한 시비를 걸어왔다. 유대인들이 한 부류씩 예수님께 도전하는 듯해서 영화에서나 본 도장 깨기 같은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사두개인들은 거창하게 질문을 만들어 왔다. 형제가 일곱 있었고 모든 형제가 후사를 얻기 전에 차례로 죽어서 첫째 아들의 아내였던 여인이 모든 형제의 아내가 되었다는 설정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라면 부활 후에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는지를 물었다. 세상 논리로 친다면 제대로 만든 질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몰라서 오해하고 있다고 일갈하셨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산 자들에게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육신의 부활, 육신의 일을 말씀하시려고 부활시키시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시는 부활은 육신의 부활이 본질이 아니란 의미다. 비단 그뿐 아니라 사실 성경은 육신의 일을 본질로 보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은 부활이 다른 종교에는 없는 차별성이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 시비 건 사두개인처럼 부활이 뭔지를 바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기도 힘들다. 죽임당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건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존재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후략) (막 12:27)

 

하나님께서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건 묘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목적이 이루어진 사람, 곧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로 난 사람이 생명 있고 산 사람이고, 그런 그리스도에게만 하나님은 하나님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언제나 산 생명이고, 그리스도로 난 사람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생명의 주님이란 뜻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리스도인데 사람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죽인 죽음이다. 예수님은 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십자가를 진다는 건 그리스도라는 본성에 이끌렸다는 의미고,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렸다는 건 그리스도란 의미다. 그렇다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살았다고 여기는 유일한 존재인 그리스도는 산 자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 산 존재이기에 사람의 의로 죽이거나 멸시해도 하나님은 살리시고 영광스럽게 하신다. 이런 하나님의 뜻은 성경 전반에 널리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부활이 허락된 것은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전제 하에 하시는 말씀이다. 성경은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로 거듭나기를 바라시는 말씀이고, 그 구원을 전하는 말씀이기에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부활함을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시는 부활은 계대 결혼 같은 육신의 일로 깨달을 수 있는 은혜가 아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육신의 관점에서 부활을 논하므로 예수님께서 오해하고 있다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부활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돌아보자. 부활을 비롯하여 성경의 모든 말씀을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육신을 본질로 보고, 육신의 형편이 그리스도의 자격이나 하나님 은혜의 기준이라 여기며,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내려 노력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부활도 사두개인과 같은 관점일 수밖에 없다. 아마도 많은 기독교인이 부활 후를 상상할 때 육신의 삶에 비견해 보고 있을 것이다. 죽어서 천국 가면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받는다고 말하는 게 그 증거다.

 

그러나 이런 관점, 육신을 본질로 보는 관점으로 성경과 부활을 보는 건 하나님 말씀을 오해한 것이다. 한 마디로 그냥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모른다는 건 구원도 부활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예수님처럼 사람의 기준으로 죽임을 당하거나 죽은 것처럼 취급당하고 멸시받는다고 해도 그리스도는 산 자의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는 생명이므로 날마다 죽어도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이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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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1-25) 방언과 예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3. 3. 26. 07:00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사랑장에 이어 다시 성령의 은사 중에서 방언과 예언을 이야기한다. 더 큰 것을 보이겠다고 한 사랑 다음에 설명한다고 세상 지혜의 관점으로 방언과 예언이 더 중요하단 의미로 하신 말씀은 아니다. 모든 성령의 은사가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을 위한 것이란 말씀의 더 세부적인 설명이다. 은사의 주체이 성령은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바울 사도는 둘 다 말하는 것에 관한 은사인 방언과 예언을 마주보고 있듯 설명하고 있다. 방언은 자기에게 유익하고 예언은 남을 위한 것이란 표현이 그렇다. 그렇다고 방언은 이기적이고 예언은 이타적이라는 갈라치기는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결국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남을 위한다. 그러니까 방언이 유익하게 하는 자아의 성장도 결국은 남을 위한 일임에는 다툼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성령의 은사가 주는 은혜를 입을 상대는 아직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은 영이거나 어린 영혼일 가능성이 절대적이므로 예언이 유익하다.

 

방언은 국어적으로는 사투리다. 같은 것의 다른 표현 혹은 같은 표현의 다른 이해다. 기도라고 하면 건강을 빌고, 성경대로 살기 위한 노력이 열매 맺기를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늘의 뜻 곧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과 의미를 알려 달라고 구하는 순종이다. 방언과 방언 통역이 중요한 이유다. 방언을 한다는 건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육신의 일을 구하는 걸 기도라고 할 때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뜻이 내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도록 나를 드리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통역은 그 의미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하고, 그래서 성령의 은사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기도를 그렇게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남을 유익하게 하는 예언은 색이 다르다. 예언은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산 사람으로써 일러주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살아보니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삶을 어떻게 이끌었는지를 간증하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앞으로 자기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일러주는 게 예언이다. 베드로에게 사람들이 너를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가 성령이 임하셔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심령 안에서 이루어지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음을 먼저 가신 이로써 알려 주신 것이 예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울 사도의 모든 말씀은 이처럼 성령의 기본 성품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직임이 근간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일을 위하여 창조된 사람에게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 이상의 유익이나 의미가 없다. 이를 위한 헌신 이상의 사랑도 없다. 따라서 예언은 이런 성령의 직임을 따르는 은사 중 최전선에 있다.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할 사람이나 아직 어린 생명과 성령의 은사가 만나는 접점에 있는 게 예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거듭나는 게 아닌 육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논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그건 방언이 없는 것이다. 예언을 예언으로 바로 알지 못하면서 말하니 방언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행여 방언을 한다고 해도 이를 가지고 당장 어린 사람,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공동체인 교회에서 우선되는 은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방언을 한다는 이유로 더 좋은 신앙이라 일반화하는 건 더 곤란하다. 심지어 방언을 구원의 증거로 삼는 이들도 있는데 그 어리석음은 논할 가치조차 없다.

 

결국 말에 관한 대표적인 은사인 방언과 예언, 또 굳이 이 둘이 아니어도 복음에 관한 모든 말은 듣는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인생으로서 누릴 가장 큰 유익을 위해서 해야 한다는 게 바울 사도의 권면이다. 얼마의 은사나 세상 지혜에 의탁한 복음을 가지고 분당한 고린도 교회를 향한 강력한 권면인 동시에 성령의 은사를 근거로 더 나은 신앙이 아닌가 생각하게 하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성령의 모든 은사와 능력과 역사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일이라는 것을 알고 이를 바탕으로 보고 논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그리스도의 안목이 있어야 하니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한다.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 이게 어쩌면 성령의 은사에 대한 말씀 저변에 깔린 복음의 본질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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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의 정당성을 시비 걸다가 제대로 되치기당한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나라의 세금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한다. 세금은 어디에 내느냐로 내는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결정한다. 가이사에게 낸다면 로마의 사람이고, 하나님께 낸다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하지만 육신의 세금이 하나님 나라에 속했다는 걸 증명할 방법은 사실 묘연하다.

 

바리새인들의 시비는 이런 점을 악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세금이 하나님 나라에 드리는 게 되도록 나라를 독립시킬 존재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란 말씀으로 답하셨다. 솔로몬의 판결 같은 명쾌한 답변인데, 내면에는 '나는 나라를 독립시키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선언도 포함되어 있다. 향유 옥합 사건 현장에서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우선 세금이 가진 성격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육신은 세상의 어떤 나라에 속해 있다. 그래서 싫든 좋든 세금을 낸다. 그리고 이렇게 내는 세금은 어떻게 봐도 하나님 나라에 내는 세금으로 보긴 힘들다. 그냥 육신이 속한 세상 나라에 내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교회라는 대체 기관을 이용한다. 여기에 내는 건 하나님께 내는 것이라고 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세상에 속했다면 제아무리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며 신권으로 바꾸어 교회에 드린다고 해도 세상에 내는 것이다. 자신은 교회에 내는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 같아도, 그 헌금으로 누리는 혜택이 세상에 있다면 그건 세상에 내는 세금일 뿐이다.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 믿는 세상의 성공과 복락, 세상에서 자녀의 풍요는 세상의 혜택이니 그는 세상에 세금을 내는 것일 뿐이다.

 

반대로 그리스로 거듭난 사람은 굳이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세금을 충실히 내는 세금도 하나님께 내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난 사람은 세상이 옳다는 주장 앞에 자기 육신을 내어주는 존재기 때문이다. 세상이 세금을 내는 게 옳다고 주장하니 자기 육신의 수고가 집약된 돈을 세금으로 내는 건 그리스도라는 본성에 이끌리는 삶이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이 대답은 '나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선언이다. 이런 예수님의 입장은 일관된 것이다. 세상 임금이 되면 높은 자리를 얻으려는 제자들에게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나, 영생을 얻으려면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말씀이나, 무엇보다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란 말씀처럼 한결같은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세상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또 보여주신 그리스도는 당연히 하나님의 그리스도다. 그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졌다. 세상 권세를 가진 자들이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정죄했고, 세상 사람들은 자기 몸도 구하지 못하는 예수님을 향해 '그리스도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며 조롱했다. 예수님은 세상 가치관 앞에 자기 육신을 내어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세상을 구하겠다는 신념 때문이 아니다. 억지로 참고 노력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세상 주장 앞에 자신을 내주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그리스도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리스도다. 그러니까 육신의 나라가 독립하는 것이나 가난 해결을 위한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가치나 옳다는 주장 그리고 제도 앞에 자기 육신과 그 수고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존재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주장에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 그 증거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존재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로 난 사람은 모든 게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영광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는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고,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먹든지 마시든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런 그리스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세금을 어디 내든 하나님께 드리는 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삶은 육신의 평안, 자녀의 복락 같은 걸 기대하고 그리스로 살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본성대로 살 뿐이다. 세상이 옳다는 주장 앞에 자신을 내어주는 본성대로 살 뿐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물론이고 예수님처럼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어디에 세금을 내든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나라에 세금을 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삶이 세상의 주장 앞에 자기 육신을 내어주는 존재기 때문이다. 돈은 육신의 수고, 그것의 결정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난 사람에게 세상의 일은 모두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보여주고 그려내는 운동장이자 도화지다. 그런 그리스도로 난 사람에겐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으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도 하나님께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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