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지옥가야지 뭐…

Category : 김집사의 뜰/덕이의 신앙 이야기 Date : 2017. 6. 4. 12:51 Writer : 김홍덕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 신앙을 가진 이런 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따지고 들면 단 하나 죽어서 천국 가겠다는 목적이 핵심이다. 아니다고 우기겠지만, “너 그래 봐야 죽어서 지옥 갈 거야!”라고 증명한다면 아무도 교회에 다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다들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려고 열심이다. 성경에 ‘분 내지 말라’하니 화 내지 않고 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너나 나나 다 알다시피 우리가 화를 참는다고 참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적어도 인두껍을 쓰고 있으면 다 아는 사실이다. 단지 남 앞에서 얼마나 그 마음에 있는 것을 들키지 않는지에 대하 능력과 기술이 그 사람의 고상하게 만들거나 별종으로 만든다.


하지만 내면은 어차피 같다. 껍데기가 다르다고, 그것도 정확히는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척 하는 그것으로 좀 달라지긴 하지만 모두 화를 참는 것이 힘들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평온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기 원한다. 행여 화를 내다 죽음을 맞이하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할까 해서 말이다. 사람들의 그런 생각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행위로 지은 죄가 남아 있다면 천국 가는데 지장이 있을 것이라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신학이란 괴변으로 그것을 어떻게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 사람들이 그 신학에 의존해서 죽음 직전에 어떤 불의한 행위로 인하여 천국 가는데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근심을 지워버리지는 않는다. 그냥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정도지 그 신학의 이론에 자기 운명을 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걸 뭘로 증명할 거냐?’는 것이다.


어쨌든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자기 사후의 어떤 신에게든 심판의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을 믿는 것은 틀림없다. 그건 아마 모든 종교와 신앙의 공통된 관점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천주교의 고해성사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의 회개기도도 그렇다. 일단 기도한다 치면 회개부터 해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행위에는 늘 자신이 없다. 다만 남에게 얼마나 들키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믿는 것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신앙의 매커니즘이 다른 신앙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위와 그것에 대한 회개, 즉 죄의 관점이 행위에 있다는 것과 그 회개의 루틴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방법과 색깔이 다르긴 하지만 골격이 같다. 이것은 정말로 의심해야 할 부분이다. 정말로 성경을 학문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것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이쯤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한 번 이야기 해 봐야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그렇게 우리가 행동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제시한 회개의 행위를 하므로 용서를 받는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가야 하니까?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서 제시된 것은 다른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신은 다른데 요구하는 패턴은 비슷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하나님이 가장 뛰어 나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비슷한 패턴으로 행위를 인간 죄의 본질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세상의 학문이 하나님의 말씀과 결합된 탓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았다는 노아 홍수 원인에 대한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성경 속의 하나님은 행위를 본질로 보시는 문이 아니다. 행위는 어디까지나 그 존재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존재론적 신앙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스스로 있다’는 여호와라고 하신 의미인 것이다.


존재론적 신앙이라는 것은 행위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행위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질은 어디까지나 존재라는 것이다. 내가 누구냐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늘 물으신다. ‘네가 어디(정체성의 자리)에 있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정체성과 그에 따른 관계가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위를 본질로, 또 심판의 기준으로 보는 이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행위를 본질로 보고, 행위가 심판의 기준이 된다고 여기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훔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이면 그 신앙의 결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열심히 평생을 수고해도 천국에 갈 수 없다. 천국은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다. 하나님과 관점이 같아야 한다. 하나님은 정체성과 존재를 기준으로 보시는데 행위를 본질로 보는 이가 그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행위가 온전치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떼를 쓰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설사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치자.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희 말을 듣지 않으면 나와서 신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네 갈 길을 가라.’고 그런데 행위의 신앙에 매몰된 사람들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의 집에 불을 지르려 한다. 


남의 삶과 의견에 침입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려고 한다. 침략하는 자들이다. 자신들의 주장이 있다면 그것을 자기의 장을 만들어 설명하면 된다. 그것에 대한 평가는 듣는 이의 몫이다. 그럴 자신이나 용기가 없으면 닥치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십자가를 안다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순종의 십자가를 믿으면서 능동적인 도전을 한다? 그게 바로 천국에 가지 못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행위와 형식을 본질로 보는 이들 중에는 그런 몰지각함을 무릎 쓰고서 존재의 신앙을 심판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신앙은 잘 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행위는 맘대로 하면 되느냐고 묻는다. 자기 안에서 본성이 나와서 행동을 지배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당연한 마련함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투덜댄다. 지옥에 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 할 수 없다. 존재의 신앙을 가진 나로선 그렇게 주장한다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난 행위로는 아무리 해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죄를 자백까지 했으니 여지가 없다. 난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화를 낸다. 변명이 있다면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훼손당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 그래서 이 글도 쓰고 있다. 성경을 보니 다윗도 그랬었다. 예수님? 말할 것도 없다.


또 나는 돈에 대하여 그렇게 청렴할 수 없다. 십일조도 정확하게 계산하기 어렵고, 돈 없을 때는 사람 만나서 밥값을 내는 것에 눈치도 본다. 이런 비겁함은 어쩔 수 없다. 없는데 어쩌라고? 그래서 지옥 가야한다면 어쩔 수 없다. 내가 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가야지. 달리 방법이 없다.


그래도 난 이 존재의 신앙에 목 맬 것이다. 내 안에 있는 화내는 본성은 하나님이 주셨다.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고, 적어도 난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다고 믿는다. 그러니 내가 화 내는 본성을 가진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다만 나는 내 의를 주장하기 위하여 화를 내는 것을 자제한다. 때론 실패하기도 하나 내 삶의 골격은 그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훼손당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몸의 피가 끊어 오른다. 때론 생명을 얻기 위해 참기도 하나,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당하는 것을 보고 분개한 소년 다윗의 마음 정도는 나도 있다.


그래서, 그렇게 화를 내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본능으로 인하여 지옥에 가야한다면 가야지. 잘 차려 입고 갈란다. 난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시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30년간 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예수 믿었다. 그런데 해도 해도 안 되더라. 그래서 그게 아니라고 결정했고, 그 결정으로 인해서 지옥 간다면 갈 각오로 나섰다. 존재의 하나님을 좇아서. 


그런데 이 길을 가면 갈수록 이것이 참 지리임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멈출 수 없다. 이 모양으로 사는 것은 행위를 심판의 기준으로 보는 이들에겐 가관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예수님을 보는 바리새인도 그랬다. 그래서 그런지 나 역시 너무 많은 바리새인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난 지옥 갈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야한다면 가야겠지. 그런데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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