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란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란 제하의 글을 올렸다. 하나의 주제에 대하여 한 방향을 설명한 것이다. 성경에는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말씀을 수없이 많이 하고 계시기 때문에 다른 측면이 존재한다. 문제는 어쩌면 상충되는 이 둘의 관점이 공존할 수 있는지 여부다. 핵심은 무엇으로부터 지키는지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시 121:5)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실 것이란 사람의 생각 속 위험은 육신의 일이다. 운전 중 위험, 시험에 임할 때 실수와 같은 것들이다. 이런 위험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상쇄될 것이라고 믿는 건 어리석은 것임을 먼저 말했었다. 그러나 실제 기독교인들의 기대가 그렇고 믿음이 그렇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이런 기독교인들의 기대사항은 모두 육신에 관한 일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사도들은 물론 예수님도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 믿는 위험이나 환난을 피하지 못했다. 모두 고통스런 순교를 당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을 본 받고 따른다고 하면서 그들이 당한 위험에선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과연 온전한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상식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기독교인들이 지켜 주시기 원하는 위험을 모두 당했다
그럼 예수님과 사도들조차 피하지 못했는데 우리를 지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런 하나님께 지켜 주시기를 바라는 건 이성적이고 온전한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이런 고찰이나 묵상도 없이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위험 속에서 안위를 부탁한다는 건 뭔가 많이 부족한 설정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시작할 때 이미 제시해 두었다. 하나님은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지가 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사람의 부분은 육신이라기 보다 육신 안에 거하는 심령이다. 육신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형식이자 소비재다. 즉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본질은 육신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이다. 심령 안에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것이 있는지다. 그 생명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은 이 아들을 지키신다.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본질은 육신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
신앙의 가장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구원도 이와 비슷한 모델이다.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나 ‘무엇으로부터, 어디서 구원을 받았는가?’ 물으면 거의 대답하지 못한다. 물론 답하는 경우가 제법 있지만 그건 대부분 공식이다. ‘죄와 사망?’ 그러면 또 죄는 무엇이고 숨 쉬고 살아 있는데 사망은 무엇인가 물으면 끝이다.
이는 도움을 받아야 할 환난과 위험과 결을 같이 한다.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위험이나 구원해야 할 위험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어디서 구원받았는지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것 역시 육신의 문제를 구원받아야 할 자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천국에 가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금면류관이라는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서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지 못했던 이 땅의 삶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약속은 절대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 아래에서 났으므로 이를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구원이란 이 목적을 벗어난 자리에서의 회복이며, 지키심도 이 목적을 벗어나지 않도록 지키신다.
결론은 신앙의 본질이 육신의 일인지 아니면 사람으로서 자기 정체성, 존재로서 존재 목적인지다. 육신과 그 삶에 부속된 일을 본질로 보면 하나님이 지키시는 위험은 육신과 삶의 위험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란 위험이 이것이다. 그리고 구원도 육신의 일에 귀속된다. 그래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기대하는 게 증거다.
우리를 지키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아래 사람이 회복되고, 그 목적이 자기 삶의 의미가 되며, 그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고 육신이 되어 그 생명으로 사는 삶을 지키신다는 것이다. 이 삶을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것이고, 이 삶을 살게 되는 게 구원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지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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