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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말씀을 하나님을 욕하거나, 나쁜 하나님이라 하거나, 나쁜 의미로 하나님을 인용하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의 영어적 표현은 '오용'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정체성과 다르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뜻이다. 이름은 곧 정체성이다.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건 하나님의 정체성을 오용하여 부르지 말라는 뜻

 

어쩌면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과 사람의 갈등은 모두 이 계명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대하므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이것도 하나님을 믿고자 할 때 생기는 문제긴 한데, 결론적으로 존재의 하나님을 행위와 그 공로에 보은하는 하나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과 갈등을 일으키는 게 사람이다.

 

'너와 나'라는 관계에서 '' 혹은 ''를 정체성과 다르게 인식한 상태에서 대하면 모든 것 어긋난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인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면 모든 게 어긋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늘 '너는 누구냐?'를 보시는데,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께 무엇을 할까 전전긍긍하며 궁리하는 게 어긋난 관계의 표본이다. 이런 어긋남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하나님께서는 이를 <>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면 죄가 없다고 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정체성을 오용하는 건 곧 ''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오용한다는 게 단순한 인식의 오류 같아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오용한다는 건 사람의 정체성, 곧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이유를 벗어났다는 증거다. 그래서 ''라는 단어는 '자리를 벗어나다'는 의미의 '하말티어'라는 말이 어원이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걸 죄라고 정의하는 이유를 여기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건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벗어난 '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알고 불러야 한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지 못하고 부르는 건 Mr. Miss를 바꿔 부르는 이상의 모욕이다. 사람을 개로 부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유일한 존재의 신이고, 창조주인데, 사람의 욕망이 형상화된 온갖 잡신, 행위로 의로워지고, 그 행위에 보은하는 잡신으로 여기면서 스스로 경건하다 믿는 건 구제 불능의 상태에 가깝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으려면 하나님이 정체성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건 곧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에 대한 바른 인식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존재를 바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만 ''라고 하신다. 그렇게 보면 십계명을 지키라고 한 ''는 이 계명을 어길 수 없는 존재일 수 있다. 하나님과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되었다면 이미 십계명을 지킬 수밖에 없는 사람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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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출 20:4)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 사람에게 신은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의 능력 이상을 가진 존재다. 그리고 우상은 그 바람의 형상이다. 결국 신과 우상은 사람이 가진 자기 욕망이란 내용과 그 내용의 형상이다. 이는 사람이 육신의 삶이 겪는 문제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상은 사람이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 만든 신이란 내용의 형상

 

이에 반해 하나님은 그 방향이 다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사람을 통해 구현하시는 존재다. 사람은 그런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인데, 그 방향을 거슬러 사람이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한 신을 두지 말라고 하셨고, 그 신을 만드는 마음을 표현하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게 십계명의 첫 번째, 두 번째 계명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두 번째 계명을 말씀하실 때 <너를 위하여>라는 부연을 다신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곧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든다는 건, 사람이 정한 기준에서 벗어난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서 만든 신이란 내용을 형식 가진 존재로 만든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 형상은 비단 물리적 형상에 한정하지 않는다. 특히 사람이 만든 가치관, 돈이나 명예가 문제를 해결한다는 가치관이므로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나 학문, 철학도 사람이 만든 우상이다.

 

결국 십계명의 근간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설정이다. 물론 그건 성경의 기본 뼈대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건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걸 사람이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수동적이고, 순종이 근간이다.

 

결국 이런 문제, 십계명으로 계몽되어야 하는 문제는 사람이 가진 생각이다. 십계명을 주실 때 '너는'이라고 하셨는데, ''는 바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사람이고, 너라는 존재를 성립하게 하는 ''는 애굽의 가치관에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따라서 사람이 애굽의 기준으로 삶을 재단하고, 그 기준으로 볼 때 미흡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순간,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 생기게 되고, 그 신에 대한 믿음을 보증하려고 형상화할면 그게 우상이다.

 

우리가 잘 아는 금송아지 사건이 전형적이다.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존재가 되려고 애굽을 떠나와서는 광야에서 죽을지 모른다는 문제 해결을 시도한 결과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다. 송아지가 문제가 아니라 육신이 광야에서 죽으면 안 된다는 가치관이 금으로 형상을 만들 정도로 중요한 문제로 정의한 까닭이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방향이 아니라 사람이 정한 사람의 문제를 신이 해결하는 방향이다. 이른 잘못된 방향이 여호와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사람이 만들고, 이를 증명하려 형상으로 만들어 우상이 된다.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신이란 생각을 가졌다면 이미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다.

 

우상은 흔히들 생각하는 불상이나 조각상 같은 게 본질이 아니다. 결국 본질은 우상이 필요한 이유, 우상을 만들려는 사람의 마음이다. 행동이야 일시적으로 참을 수 있지만, 우상을 만들려는 마음, 곧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신의 역할이라 믿는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시간과 상황의 문제일 뿐 언제나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다. 음욕을 품은 자는 간음한 자라는 말씀의 논리를 적용하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모두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다.

 

따라서 설사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가 믿는 하나님의 정체성이 뭔가, 하나님의 어떤 걸 믿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을 육신을 문제를 해결하는 신의 범주에서 믿는다면 제아무리 하나님이라 부르고, 신학이 설정한 방식에 따른 경건의 형식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건 단지 우상일 뿐이다. 이게 사실은 모든 우상보다 더 심각한 우상이다. 실체는 우상인데, 자신은 하나님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상은 무엇을 본질로, 또 문제로 보느냐의 문제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둔다는 건 결국 무엇을 본질로 또 문제로 보느냐의 문제다. 육신의 삶을 본질로 보기에 그 본질에 발생한 차질을 문제로 보고 이것을 해결하는 게 신이라는 방향성과 믿음을 가지고 믿고 의지하는 모든 대상은 다른 신이고, 그 신을 형상화하면 모든 게 우상이다. 자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로 믿는다면 강대상 벽면에 걸려 있어도, 목에 걸고 있어도 모두 우상이다. 이게 인정되지 않는 사람이 믿는 하나님도 결국 우상이다.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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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너(출 20:3)

 

하나님은 가장 먼저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너에게 두지 말라'라는 계명을 주셨다. 여기서 ''는 하나님께서 종살이하는 삶을 안식으로 여기는 삶에서 건져낸 사람이다. 명백히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앞서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사람에겐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하나님이 ''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신은 여호와 하나님뿐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사람은 자기 나름의 신을 믿는다. 신이란 내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의 능력 이상을 가진 존재다. 다시 말해 나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다. 이런 정체성 때문에 오히려 신은 사람에 의해 정의된다. 사람이 무엇을 자기 삶의 문제로 보느냐는 관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이 정해진다. 육신의 겪는 난관이나, 육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기에 버거운 문제 해결을 바라는 사람에겐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신이다. 그래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어려움이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의 해결을 바라는 사람 중에는 돈이나 권력이 신이라고 말한다.

 

신을 믿는 사람의 문제에 의해 신이 만들어진다.

 

결국 육신의 삶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신이 정해진다. 가난을 해결해 주기 바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란 말씀에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하소서!"라며 찬양하고 기대했던 마음을 버리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았다. 육신의 질병과 가난이 인생의 문제, 구원의 필요성이라고 믿는 이들의 신은 당연히 가난을 해결하는 다산의 신이다. 설사 그들이 믿는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그 신의 실체는 '바알''아세라'.

 

육신의 문제를 신께 의탁한다면, 그 신을 하나님을 불러도 실체는 바알과 아세라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신 배경에는 하나님의 정체성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먹을 것, 입을 것을 해결하는 신이 아니라, 먹을 것, 입을 것 얻는 것에 종이 된 삶을 안식의 상징인 집으로 여기는 삶에서 구원하시는 신이다. 결국 십계명 첫 번째 계명의 본질은 "너는 무엇을 구원으로 여기느냐?"에서 출발한다. 먹고 입는 것이 삶의 문제라고 여기는 이들에겐 여호와 하나님이 신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신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무엇을 구원으로 여기느냐가 곧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지키는 기준이 된다.

 

하나님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 같아 보일 순 있지만, 실상은 다른 신을 믿는 것

 

사람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지 않으려 경계한다. 경계한다는 건 자신이 이 계명을 어길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첫 번째 계명을 어길까 감찰도 한다. 계명을 어겼을 때 지불해야 하는 대가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계명을 지킬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없다. 즉 하나님과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첫 번째 계명은 전혀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 아니다. 하나님과 자신이 '너와 나'의 관계라면 계명이라 하기보다 관계를 설명하는 말씀이다. 하나님과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된 사람에게 계명은 지켜야만 하는 법이 아니라, 자기 삶의 모양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본성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에겐 비단 첫 번째 계명뿐 아니라 십계명이나 모든 계명이 그렇다. 그저 살기만 하면 지켜지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 삶이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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