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54

(8:26-40)

사도행전 8장에는 당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장과 빌립 집사의 만남에 관해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꼽으라면 당연히 내시장의 말,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이 말은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접할 수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는지를 설명하는 말이다.

 

이방인 에디오피아의 국가 재산을 관리하는 내시장이 어떤 이유로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를 드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다는 건 분명하다. 성경은 이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간절함과는 달리 성경을 바로 알지는 못한 상태였다. 앞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세례는 받았으나 성령을 받지 못한 것과 같은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만나려면 사람을 만나야 한다. 이건 아주 중요한 법칙이다. 우선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알도록 하시기 위해 아들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보내셨다. 그렇게 오신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었다. 여기서 바로 알았다는 건 바로 십자가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성품이다. 낮아지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때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만날 수 있다는 법칙도 녹아 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만나는 법은 지금도 똑같이 낮아지는 본성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는 사람을 통해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진다.

 

낮아진다는 건 사장 밑에 사원이 있는 구조와는 다르다. 의에 관해 더 옳은 의를 가졌지만 옳지 않은 의를 가진 이의 주장에 이끌려 자기 수고를 내어 주는 낮아짐이다. 수학에 대해서 이미 깨우친 선생이 학생의 어리석은 질문에 수고스럽게 답을 하는 것과 같다.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죄인이 되신 것이 하나님께서 표현하고자 하신 낮아짐이다. 이런 낮아진 사람과의 만남이 복음을 깨닫게 한다.

 

앞서 수학이 그랬듯이 복음도 마찬가지다. 먼저 깨달은 사람은 끊임없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복음을 알 수 없다. 누가 보자고 하면 가서 만나는 수고를 해야 하고,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사람이 복음을 알기 원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책을 쓰는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바울 사도의 많은 편지가 오늘 우리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것도 같은 수고의 산물이다.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런 블로그나 글도 그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특별한 이득도 없는데, 알 수 없는 책임감에 이끌려 글을 쓰고, 때로 연락이 오면 만나러 먼 길을 가기도 하는 이런 수고로 인해 복음이 전해진다.

 

어쨌든 복음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람이 수고한 사람을 위한 산물과 사람이 만나는 만남에서 전해진다. 보리수 나무 아래서 스스로 깨달아지는 진리가 아니다. 그럴 값이라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필요 없이 하늘에서 사람을 변화시키면 그만인 일이다.

 

그런데도 친히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몸으로 생활하는 불편을 입고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신 건, 복음은 그렇게만 전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육신의 목적을 깨닫는 게 복음인데, 육신의 초월한 기적으로 복음 깨닫는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육신의 만남, 육신의 수고가 수반되지 않은 체 전해지는 복음은 온전하지 않다. 에디오피아 내시장은 그걸 보여준다.

 

사람이 자기 육신의 삶의 목적을 알게 되는 게 복음인데, 육신을 거치지 않고, 육신의 수고 없이 전해지는 건 온전하지 않다.

 

다시 한번 복음은 사람을 통해 전해진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 둔다. 이건 성경 전반에 걸쳐 아주 중요한 정의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만나는데 있어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게 육신의 삶을 바라보는 안목이다. 육신을 하나님과 같은 안목으로 보느냐 아니냐가 모든 것의 시작이고 끝일 수 있다. 하나님과 같은 안목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어야 하는 건 당연지사다. 거듭남이 이것이다.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에디오피아 내시장은 스스로 알 수 없다는 걸 고백하고 빌립 집사를 자기 마차에 타게 했다. 자기 세계로 영접한 것이다.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이사야서가 아니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책이라는 걸 들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들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를 믿고 영접했다. 가는 길에 물이 보이자,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세례를 청하였다. 지금까지 자기의 믿음, 사람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든 성경을 지키고 이해하려 했던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고백을 한 것이다. 성경의 말씀대로 자기 죄를 시인한 것이다. 세례는 말씀을 지켜내고 이해하려는 노력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 스스로 고백하는 예식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란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기보다 기적을 만나기를 원하고, 기적적인 일을 간증하면서 그게 하나님의 능력이고 구원이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복음은 사람과의 만남 없이 전해지지 않는다. 누군가 당신을 위해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한다면 에디오피아 내시장이 자기 마차에 빌립 집사를 청한 것과 같이 자기 안으로 청하여, 어떻게 십자가에 달린 죄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들어야 한다. 그런 들음이 없이 믿음은 생기지 않는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함부로 교회에 돌을 던지는 사람들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4. 7. 22. 20:01 Writer : 김홍덕

기독교와 그 주변에는 교회를 기존 교회라고 칭하면서 교회를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큰 범주에서 보면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일 수 있다. 그렇다 보니 간간이 교회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 비판에 동참한다는 사실 만으로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기독교가 비판받을 만한 상태가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문제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너무 광범위하게 횡행 되다 보니 마구잡이식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라는 기복주의적 기독교가 추구하는 신앙을 쫓다가 실패한 목사들의 비판은 비판인지 질투인지 구분하기 어렵고, 어설프게 기독교를 학습한 상태에서 상식마저 통하지 않을 논리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까지 경계선 없이 비판이 넘쳐나고 있다. 이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상황을 마주하다 보니 유년 주일 학교와 율법적인 신앙이지만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오히려 중요하게 여겨진다. 평생을 그런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지만, 그런 신앙의 여정 없이 그저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그런 자신의 모습이 정의롭다고 참칭해서도 안 된다.

 

이런 현상은 왜 하나님께서 구원의 여정을 설명하는 출애굽 여정에서 40여 년간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연단하셨는지 이유를 알 수 있게 만든다. 율법적인 신앙생활, 그러니까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는 노력으로 관철된 삶의 과정은 진정한 복음을 깨닫는데 필수 불가결하다는 걸 날이 갈수록 깨닫게 된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는 과정으로 비유해 본다면, 병아리가 안에서 부화해서 스스로 껍질을 깰때까지는 껍질이 온전해야 한다. 율법을 행위로 지키는 걸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는 율법적인 신앙생활이 달걀의 껍질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껍질을 깨야 병아리가 나온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밖에서 껍질을 깬다면 병아리가 되기 전에 죽고 말기 때문이다.

 

자기 최선을 다해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서 스스로 "이래서는 구원이 없겠구나!" 깨달아야지, 율법적인 신앙에는 구원이 없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가 체휼한 것도 없이 그저 율법적 신앙이라는 껍질을 깨버린다면 이도 저도 아닌 신앙이 될 게 분명하다. 그저 기독교를 비판하면 자신도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내가 만난 막무가내로 껍질을 깨려는 대표적인 이론 중에는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성결한 건 아니었다는 이론이 있다. 그래서 "그럼 언제부터 성결해졌는가?"라고 반문했더니 이해할 만한 답을 얻지 못했다. 또 어떤 이들은 "아담의 육신은 원래부터 영원히 죽지 않게 창조되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럴 값이면 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나? 아담과 하와만 있으면 되지?"라고 반문했더니 그 또한 이해할 만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 외에도 성경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일반 상식으로 봐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예수님의 육신을 바라보는 모든 잘못된 생각은 영지주의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을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든다. 그러면서 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예수님과 자신이 다르다면서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는 양자라 다르다고?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라는 근원적 개념도 모르는 소리다.

 

아담의 육신에 관한 오해 역시 육신에 관한 그릇된 견해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정녕 죽으리라"하신 말씀에 기인한 해석인데, 성경을 제대로 봤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바로 죽임을 당한 게 아니다. 선악과를 먹은 일로 육신의 정체성이 변경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나신 예수님을 보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라고 했다. 아담을 불사의 몸이라고 보는 것이나 예수님이 처음부터 성결한 건 아니라고 주장하는 건 동전의 앞뒷면처럼 표현이 다를 뿐 다 같은 영지주의다.

 

오랜 시간 성경을 묵상하고, 또 성경에 대해 나름 자기 생각을 가진 사람과 또 알기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게 있다. '사람들이 이 육신을 보는 관점을 넘어서기 힘들구나!'라는 것이다. 이 육신을 보는 바른 관점이 생기려면 육신으로 의로워지려고 최대한 노력해 봐야 한다.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보라는 게 아니다. 자기로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한다. 그러면 껍질 안에서 밖으로 껍질을 깰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함부로 기독교에 돌을 던지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선무당이란 걸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가장 넘기 힘든 신앙의 장벽은 육신을 보는 관점인 듯 하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8:14-25)

예루살렘에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사마리아인에게 안수하니 성령을 받았다고 했다. 이런 전개는 우리에게 세례와 성령강림이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당연히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게 한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이건 구원의 문제이므로 생각 이상으로 신앙의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다.

 

핵심은 '성령'이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까지 갈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과정에서 보듯이 성령강림은 너무너무 중요하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예수님)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까지 말한 베드로가 성령이 오시니 오히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담대히 전하는 변화를 보면 성령강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도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고 성령이 오시는 게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걸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면 신학이라는 학문의 존재 정당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성령을 받았다면 성경은 공부하지 않아도 자기의 삶, 자기의 이야기가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원론적으로 성경은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하니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그들의 이야기가 바로 성경이다.

 

세례는 성령강림의 전단계이자 필수적인 단계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물에 들어가거나 안수를 받는 행위 자체를 한정하는 게 아니다. 세례가 가진 본질, "나는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라는 고백이다. 이 고백을 진심으로 한다면 그는 굳이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진정한 세례를 받은 것이다.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세례는 물(율법과 말씀) 속에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의 퍼포먼스지 본질은 아니다. 이걸 부인하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이다. 세례라는 행위가 있어야 온전한 구원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자기 신앙을 증명한다.

 

세례는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고백

 

그러므로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고백인 세례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절대적 조건이다. 성령으로 잉태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는 사람이다. 행위를 실천하기 위해 의지나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본성이 되어 그 본성대로 사는, 아니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자기 의지가 있다면 굳이 성령이 필요 없고, 질그릇과 같은 우리 한 개체 안에 삶을 이끄는 복수의 가치관이 있을 수 없다. 행위로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게 성령은 임하시지 않는다. 설사 그가 기도하여 암을 치유한다고 해도 그건 그를 위한 성령의 강림은 아니다. 이건 분명하다.

 

우리의 신앙은 세례로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고 세례와 성령강림이 멀리 있느냐? 그것도 아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고백한 사람은 쉽게 성령을 받는다.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의로워질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 생각은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이 된다. 사마리아인들도 마술사 시몬이 부러워할 정도로 빌립 집사의 말씀을 사모했다고 했다.

 

우리는 성경 많은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으면 만나겠다고 하신 약속을 볼 수 있다.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고백한 사람, 행동으로는 성경을 모두 지켜낼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한 사람, 그래서 성경을 행동으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말씀을 다 알게 된다고 하셨는데 자신은 모르기에 아직 성령이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으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이 만남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어떤 기적도 일으키실 것이라 확신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건 이런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강림이 필요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강림은 필수적이다. 자신이 성령을 받았는지는 앞서 자주 언급했듯이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는지, 자신이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닌지 돌아보면 된다. 이걸 솔직하게 인정하는 게 양심이다. 양심에 화인 맞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건, 이런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로는 구원을, 성령을 받을 수 없기에 하신 말씀이다. 나에게 성령이 필요한지 정말로 깊이 생각해 볼 때다.

 

성령이 강림한다는 것, 성령을 받는다는 건 곧 그리스로라는 생명이 잉태되고 거듭나는 것이다. 그건 곧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고, 말씀이 육신이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존재가 그리스도고,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삶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아들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렇게 꿰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는 진정한 이유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