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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모두 말씀하실 때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가 나고, 산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 현상을 본 백성들은 매우 두려워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강림은 사람을 시험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안심시킨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출 20:20)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강림은 사람에게 두려운 일이다. 자신의 죄가 드러날까 염려한다는 말이다. 이런 두려움의 시초는 아담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 자기가 벗었다는 게 부끄러웠다는 이유다. 즉 자신이 드러나는 게 두려웠다는 의미다. 그리고 아담은 '붉다'라는 의미의 단어로, 흙으로 만든 사람 모두를 뜻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오직 자기 죄가 드러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건 자기 죄가 드러날까 하는 두려움 때문

 

사람들은 이렇듯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이 자기 죄를 드러나게 하고, 그로 인해 심판받을까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의 기저에는 아담처럼 자기가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게 목적이 아님을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은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죄를 범하지 않는 성결에 있다. 더 본질적으로 보면 죄를 범하지 않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사람은 왜 두려워하는가의 문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지킬 수 없음을 알고 있고, 또 계명을 많이 어겨왔을 뿐 아니라, 자기가 기억하지 못했거나 죄로 인지하지 못한 범죄마저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행동과 생각이 성경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이게 양심이다.

 

사람은 이 두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노력'이라는 타협점을 발굴했다. 특히 신학(神學)이라는 영역에서 성경을 모두 지켜낼 수 없어 근심하는 사람에게 궁여지책으로 노력을 제시했다. 사람은 예수님과 다르므로 예수님처럼 성경을 지킬 수 없으니 최대한 노력해야 하면 하나님께서 그 노력을 인정하실 것이라는 타협안을 신앙인들에게 제시했고, 사람들은 여기서 위안을 찾고 있다.

 

사람의 두려움에 대한 신학의 해결책은 모순적인 '노력하라'

 

하지만 노력이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신앙에는 많은 모순이 있다. 사람이 예수님과 같을 수 없다는 문제의 대안으로 노력을 제시하면서 신분은 예수님과 같다고 믿는다고 한다. 자신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아들이 되었고, 모든 죄는 사함을 받았다고 한다. 예수님과 다른데, 신분은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들이 되고, 성경을 다 지키지 않았는데 죄는 사함을 받았다는 모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모순을 방치한 체 그냥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 다 되겠지', '교회가 시키는 것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에 자기 영혼을 맡기는 도박으로 신앙을 일관하고 있다.

 

여기에 교회는 한 발 더 나가서 예수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아들이 된다고 가르치는 동시에, 기도할 때는 회개부터 하라고 가르친다. 이런 교회의 모순에 상식과 이성을 가진 교인들은 모순 속에 갈등하면서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더 나은 말씀이 없나 찾기도 한다. 이때 교회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벌 받는다."라고. 이건 분명 가스라이팅이다.

 

사람의 두려움을 악용하는 교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주기 위해서나, 심판 자체를 목적으로 계명과 성경을 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신다는 건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시면서 죄를 범하는 순간 각성하고, 유혹을 이기고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런 환경을 인위적으로 저성한 후에 사람이 어떻게 하나 시험하신다고까지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험은 그런 유혹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고 선택하는지를 기다리시는 기다림이 하나님의 시험이다. 사람에게 창조하신 목적을 분명히 알려주시고, 사람이 그 목적을 자기 삶으로 순종하는지 기다리시는 기다림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이다.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사람이 순종하는 건 사람으로선 충분히 가능한 일일 뿐 아니라, 오히려 당연하기에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하신다고도 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신다는 건 사람의 행동이 죄가 되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럴 값이라면 하나님께서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걸 인정하셔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의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이 어떤 존재냐는 것에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어떤 존재가 되면 그의 행위가 죄가 되지 않는다는 법 안에 있다. 아들로 나면 아들의 행위로 인해서 아버지와 아들이란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건, 죄를 범하지 않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시겠다는 뜻

 

따라서 사람이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 자체가 죄와 무관한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존재가 죄와 무관한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의미다. 이를 거듭남이라고 한다. 죄를 범하지 않는 다른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이유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사람이 창조 목적에 합당한, 그 목적이 육신이 된 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다. 행위를 바르게 하라고 주신 게 아니다. 행위는 생명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독립된 게 아니다. 이 법 아래에서 십계명을 주셨고, 성경 말씀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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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은 행간에 숨긴 뜻이 더 중요하긴 하지만 표현된 문자 자체도 당연히 중요하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가진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삶은 생명 본성의 표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먼저다. '거듭남'이란 말을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거듭나면 생명이 바뀌고, 바뀐 생명의 본성에서 비롯된 삶을 살게 된다. 그 삶의 형태가 바로 성경이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말씀은 액면 그대로 남의 물건에 욕심을 내지 말라는 말씀이다. 생각해 볼 건 '소유'. 사람의 모든 건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사람은 거저 '맡은 자' 일뿐 자기가 소유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하셨다. 탐내지 말라고 한 이웃의 소유는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소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신과 삶과 삶에 필요한 재화와 공급을 예비하시고 마치 사람의 소유처럼 주신 것은 사람에게 기대하시는바, 계획하시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웃의 소유는 하나님이 이웃에게 기대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맡기신 것이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게 있는데,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맡겨진 게 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 육신의 삶이 핵심이다.

 

우리가 가진 가장 중요한 소유는 우리의 삶

 

이런 개념으로 볼 때 많이 알고 있는 달란트와 충성, 청지기 같은 말씀들이 여기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 위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웃에게 또 나에게 주신 소유에 대한 바른 생각이 필요하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가 이것일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낙심하여 물고기 잡는 본업으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가서 153마리의 고기를 잡도록 그물 던지는 방향을 말해주신 일이 있었다. 그리고 유명한 베드로와의 대화가 있는데, "내 양의 먹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지막에 베드로가 누구나 요한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을 두고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한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이 사람을 머물게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모두에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있다는 분명한 선언이다.

 

사람은 모두 셀 수 없이 다양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다.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성품과 환경과 철학과 삶을 가진 이유다. 우리가 가진 남다른 것이나 공통적인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 안에 있다. 탐나는 이웃의 맡은 바가 있다면, 나에게도 맡기신 게 있고, 개인의 삶을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이웃의 소유보다 나에게 맡기신 것이 더 중요하다. 이웃의 소유를 탐할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달란트와 소유를 먼저, 귀중하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이 당연함에 관한 말씀이다.

 

이웃의 소유보다 나에게 맡기신 달란트가 중요

 

사람은 마땅히 이웃의 물건을 탐내는 게 옳지 않다. 욕심은 결국 죄와 사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웃이 가진 모든 소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와 뜻, 목적을 위해 주신 것이다. 물질이나 환경 모두가 그 목적 아래 있다. 그러니 이웃과 남의 소유를 모두가 그렇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안다면 이웃의 모든 소유는 나에게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삶을 위해 주신 것이므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소유를 맡기셨다. 이웃에게 무언가를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뜻에 집중해야 한다. 남의 소유를 보면 '나도 저런게 있다면 주를 위해 더 잘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나에게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여기고 인생을 주신 뜻대로 사는 게 중요하다. 그것이 모든 계명을 지키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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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계명은 이웃에게 반대하는 증언하지 말라는 뜻의 '네 이웃에게 거짓으로 증언(증거)하지 말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이웃은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고, 또 다른 이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해 창조되었기에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좇아 사는 기회를 훼방하는 거짓을 전하지 말라는 게 이 계명의 의도다.

 

우리는 여섯 번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서 살인하면 안 되는 이유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기회를 박탈하면 안 되기 때문이라는 걸 이야기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그림자도 없는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형상이 필요해서다. 그 형상, 그 육신이 바로 사람이고, 성경은 이 사람에게 그 뜻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오직 사람이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바라시는 변함은 없는 뜻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십계명과 성경은 모두 이 하나님의 뜻 위에서 듣고, 이해하고, 전해야 한다. 이 뜻과 다르게 성경과 말씀을 듣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건 불순종과 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이와 다른 뜻으로 전하는 건 거짓 증언이고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다. 따라서 십계명 역시 이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의 목적이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깨닫는 걸 훼방하는 거짓을 전하지 말라는 데 있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 아홉 번째 계명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 어린 소자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과 연결된다. 거짓 선지자, 거짓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예수님께서 항상 있을 것이라 하신 가난의 문제처럼 세상에서 겪는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구하면 들어 주실 것이라고 전하고 외치는 게 바로 이웃에게 하는 거짓 증거고, 성령 훼방이며, 어린 소자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정체성과 다르게 하나님을 전하는 게 이웃을 향한 거짓 증거

 

하나님은 존재의 신, 우리에게 너와 관계를 원하신다. 애굽의 종살이가 집과 같았던(안식이었던) 삶에서 구원받았다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와 정체성을 생각하는 사람이니 이웃에게 나에게 임했던 구원,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종살이하던 삶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대로 사는 삶을 살게 된 이야기를 전하는 게 바른 증거고, 참인 증거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선한 마음으로 전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어도 거짓 증거다. 자기들도 온전하지 않지만, 정통 교단이라는 사람들이 이단들의 선함을 비난하는 걸 상기하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전하려면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전해야 한다. 그래야 아홉 번째 계명을 지킬 수 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최우선 의와 뜻을 기억해야 한다. 그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할 존재며, 이 육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할 도구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이 육신의 필요와 소망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 일갈하신 것이다. 도구를 위해 사는 사람이 없듯 하나님도 그렇다. 육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형식이자 도구다. 목적이 중요하지 육신이 겪는 문제가 본질인 게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으로, 마치 알라딘의 램프 속 요정인 지니처럼 생각하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거짓 증거다. 그런 거짓은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만나는 기회를 어둡게 한다. 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살인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뛰어 드는 게 나을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종살이에 안주하는 삶에서 건지셨다는 걸 믿는다면 자기를 구원한 하나님을 바로 전해야 한다. 하나님을 세상에서 나를 종으로 삼았던 세상 가치를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 믿거나 전하면 안 된다. 그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하나님이 보실 때 <>도 아니다. 그냥 죄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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