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54

(10:1-48)

고넬료라는 이방인 백부장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하며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임하셔서 베드로가 있는 곳을 알려주시며 청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는 꿈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을 알리셨다. 이는 꿈의 내용으로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꿈속에서 율법으로 먹지 못하는 것을 보이시고 '잡아 먹으라' 하셨는데 베드로가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니 하나님께서 "내가 깨끗하다고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깨니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와서 베드로를 인도했다. (10:9-16) 율법으로 먹지 못하는 음식이 바로 이방인인 고넬료였다.

 

이 고넬료의 일은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이방인을 넘어 온 세상으로 전해진다는 걸 보여준다. 하나님은 자신이 외모가 아니라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는 걸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에 순종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복음을 누림에 있어 외모로 인한 차별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적지 않게 복음을 전함에 있어 '저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라며 생각한다. 분명 생각하는 사람의 어떠함이 있을 것이다. 강직한 무신론자거나, 아주 흉악한 범죄자거나, 자기 생각만 고집하고 남의 형편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으므로 우리는 거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사람은 사람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다 알아서 하신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 4:2)

 

앞서 열거한 완곡한 사람들, 범죄자나 무신론자와 같은 사람들을 우리가 인식하는 기준은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외모다. 사람의 행동과 말 그리고 사고하는 방식이다. 그걸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면 복음을 전하는 대상은 제한적으로 된다. 이런 현상은 비단 복음만이 아니라 사람 관계의 법칙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그런 걸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으로 본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창조한 목적으로 가늠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핸드폰 공장에서 핸드폰을 만들 땐 자기 설계 목적으로 평가하는 게 당연하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의 목적이다. 그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다.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품대로 살아가는 게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이 기준으로 판단하는 존재다. 그러니까 그것 아닌 사람의 어떠함,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라고 주신 형식이자 도구인 사람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생각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을 보는 기준은 당연히 창조하신 목적

 

하나님께서는 <외모>라는 걸 중요하게 언급하시는 건 외모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의 어떠함, 신분이나 행동을 보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이 가진 그런 기준의 대상들을 <외모>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흔히 신분이나 명예나 돈 그리고 행동 양식 등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요소들,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외모다.

 

베드로는 율법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가 율법주의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아직 복음이 이방에게 전파되는 걸 보지 못하고 있었던 베드로에겐 복음은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을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걸 일반화된 용어로 표현하면 혈통이 된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혈통, 그것이 복음의 대상이 되는지를 가늠하는 기준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기에 베드로에게 그 생각을 알려 주셨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머무르면서 복음을 전했더니 결국 성령이 임하시는 걸 보게 된다. 하나님의 경륜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사실 이 외모는 복음 전반에 있어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외모를 보고 판단한다는 건 하나님과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외모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가치관이 대단히 생소한 것 같지만, 사실 기독교 안에는 만연한 가치관이다. 쉽게 설명하면, 사람의 형편이 나아지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고 그 사람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판단하고, 불행한 일을 겪거나 경제나 건강 상황이 악화라도 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거나 잘못을 깨닫게 하시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가치관은 신앙 전반에 아주 깊고 다양하게 침식되어 있다. 목사가 아니면 설교를 할 수 없다는 것도 목사 자격이라는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며, 행여 누가 40일 금식이라도 했다고 하거나 방언을 받은 사람을 신앙 좋은 사람처럼 대하는 것도 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그가 가진 가치관으로 분간하므로 복음을 전하는 대상 역시 외모로 판단하게 된다. 범죄자나 고집 센 사람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편향적인 생각이 그 세계의 생각이다.

 

고넬료의 일은 베드로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이 만민을 위한 것임을 알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유대인에게 한정했다면, 오늘 우리가 복음을 이렇게 나눈다는 건 아주 힘든 일이 되었을 건 자명하다. 나타난 일로만 봐도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더 나아가 단순하게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진 게 아니라 성령이 강림하셨다. 성령이 강림하셨다는 건 곧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곧 이방인의 육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일이 시작되었다. 성령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믿음이 그 사람의 육신 곧 삶이 되도록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다. 그 성령이 임하셨다는 건 그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뜻이다. 바야흐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한 목적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걸 알리는 사건이 바로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2024 주기도문) 예수님의 시험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8. 29. 17:46 Writer : 김홍덕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을 떡으로 만들라

 

40일 금식을 마친 예수님을 시험하러 온 마귀는 가장 먼저 예수님께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는 시험을 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유혹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금식으로 굶주린 예수님의 약점을 노린 것처럼 보인다. 많은 기독교인의 생각도 그렇다. 하지만, 앞서 <양식>에서 설명했듯이 우선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이 시험은 육신의 배고픔을 이용한 시험이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란 능력은 육신의 빵을 만드는 능력이 아니다.

 

이 시험의 핵심은 돌이나 떡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말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조롱 역시 같았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거기서 내려 와 보라고.

 

지나가든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마27:39-40)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모두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시험과 유혹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십자가를 지셨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우리의 시험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시험을 지금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하나님 아들에 대한 기준이 있고, 그 기준으로 자신을 볼 때 하나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고 스스로 심판한다. 하나님 아들이라면 화를 내지도 않고, 항상 좋은 말만 하고, 욕심이나 음란한 생각도 없어야 한다는 게 사람이 가진 하나님 아들의 기준이다. 사람은 그 기준으로 통과할 수 없다.

 

돌로 떡을 만들라는 마귀의 시험은 하나님 아들에 대한 사람의 기준과 연결되어 있다. 돌은 율법이고, 먹는다는 건 사람이 소화한다는 의미인데, 결국 율법을 다 지켜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는 게 마귀의 계략이다. 결국 사람은 자기가 가진 기준 때문에 마귀의 시험에 늘 패배한다.

 

사람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더 많은 돈이 있었으면 바라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이런 부끄러움은 아담에게서 비롯됐다. 놀랍게도 아담이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 건 선악과, 곧 선과 악에 대한 기준으로 스스로 가지면서부터였다. 사람이 가진 기준으로 자신을 보니 부끄러웠고, 율법의 나무인 무화과 잎으로 자기 부끄러움을 가리려 했다. 즉 돌로 떡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성경을, 율법을 행위로 지켜서 선한 존재인 하나님 아들이 되려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마귀는 이 마음을 공략하고, 사람은 늘 패한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시험을 물리쳤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가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요한 사도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하였다"라고 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의 육신이 된, 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뜻이다. 이건 창조 목적이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이 육신, 곧 삶이 되었다는 뜻인데, 예수님은 사람은 이렇게 사는 존재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이 살았다고 하려면 이런 존재여야 한다. 성경이 세상 사람을 가리켜 살아 있음에도 어두움과 사망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심이 여기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게 아니면 산 게 아니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으로 여길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에 주의할 게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의로워지려는 노력과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은 전혀 다르다. 겉으로 표현되는 행동은 비슷할 수 있지만, 존재가 다르기에 모든 게 다르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도 모두 기도했지만 전혀 다른 것처럼.

 

이 차이, 이 간격에 마귀의 시험이 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즉 율법을 지켜내야 하지 않느냐?"며 사람을 시험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뜻과 목적이 자기 본성이 된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을 기록한 게 성경인데,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지 않느냐며 시험한다. 그리고 마귀의 이 시험은 오히려 "예수님과 우리는 다르니 성경을 지키려고 항상 노력해야 한다"라는 기독교인들의 겸손한 신앙이 되어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단 하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그 안에서 왜 시험에 들지 말기를 기도하라고 하셨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건 사람은 누구나 시험에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험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받으신 시험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하나님께 그 시험을 이기게 도와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예수님처럼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받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나므로 이 시험을 완전히 이길 수 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의 능력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마귀에게 시험받고 스스로가 심판받는 쟁점이 바로 우리 육신을 인함이란 걸 알 수 있다. 이 육신 그대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없으니, 성경을 육신의 행위로 지켜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유혹과 사람의 생각이 돌로 떡을 만들어야 하나님 아들이라 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마귀의 시험이다. 육신을 어떻게 볼 것이냐가 핵심 쟁점인 셈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이 육신을 보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라고 하셨다. 이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너무 좋다는 게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 육신 그대로는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없으므로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내야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게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의 말씀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9:36-43)

도르가라 하는 여제자 다비다는 구제와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인데, 그런 그가 병들어 죽자, 사람들이 그를 씻겨 다락에 누이고 베드로가 가까이 있다는 말에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불렀고 도착한 베드로가 기도하니 살아났다. 이런 정황으로 볼 다비다는 신실한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지역의 모든 과부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베드로가 왔을 때 그가 만들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이며 그를 기념할 정도로 선행과 구제가 일상인 사람이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그는 성경을 삶으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병들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기도하니 살아났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건 어쩌면 사람이 체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이 단지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 일어나진 않는다. 하나님께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믿는 건 신앙의 기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굳이 자랑할 필요는 없다. 주목해야 하는 건 죽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오늘 나와 상관이 없으면 하나님께 어떤 능력이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든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성경이 어떤 책이냐는 것이다. 성경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가 중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성경이나 북한의 법령집(그런 게 있다면)이나 나와 상관없다는 건 같다. 그런 측면에서 성경이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그 뜻의 기본 주제를 알 필요가 있다. 나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사람에게 전하는 주제는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살리겠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구원을 얻는다면 그게 바로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이다. 죄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말씀이 곧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도르가와 야이로의 딸 그리고 나사로는 모두 성경의 이 주제를 설명하는 사건이다. 성경의 이 기적들을 그렇게 믿지 않으면, "이 시대는 왜 시도행전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며 질문하고 학문적인 연구를 하는 꼴값을 떨게 된다. 그런 의문과 학습은 자기에게 구원이 없다는 걸 떠벌리는 것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나의 구원이 다비다나 나사로와 같은 경험이란 걸 생각하지 못한다면 구원이 없는 것

 

성경 속에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몇몇 일들은 형식적으로 보면 부활이지만 본질은 거듭남과 구원을 설명한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모두 다시 죽었고 지금은 우리 곁에 없다. 영원한 예수님의 부활과 다르다. 그래서 그들의 다시 살아남은 부활을 설명한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의 다시 살아남은 우리 모든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일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오늘 자신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믿는다면 자신 역시 도르가와 같이 죽었다고 살아난 사람이라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은 왜 초대교회 같은 기적이 없느냐는 소리를 하고 있다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도르가라 하는 여제자 다비다는 구제와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인데, 그런 그가 병들어 죽자, 사람들이 그를 씻겨 다락에 누이고 베드로가 가까이 있다는 말에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불렀고 도착한 베드로가 기도하니 살아났다. 이런 정황으로 볼 다비다는 신실한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지역의 모든 과부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베드로가 왔을 때 그가 만들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이며 그를 기념할 정도로 선행과 구제가 일상인 사람이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그는 성경을 삶으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병들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기도하니 살아났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건 어쩌면 사람이 체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이 단지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 일어나진 않는다. 하나님께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믿는 건 신앙의 기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굳이 자랑할 필요는 없다. 주목해야 하는 건 죽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오늘 나와 상관이 없으면 하나님께 어떤 능력이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든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성경이 어떤 책이냐는 것이다. 성경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가 중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성경이나 북한의 법령집(그런 게 있다면)이나 나와 상관없다는 건 같다. 그런 측면에서 성경이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그 뜻의 기본 주제를 알 필요가 있다. 나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사람에게 전하는 주제는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살리겠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구원을 얻는다면 그게 바로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이다. 죄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말씀이 곧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도르가와 야이로의 딸 그리고 나사로는 모두 성경의 이 주제를 설명하는 사건이다. 성경의 이 기적들을 그렇게 믿지 않으면, "이 시대는 왜 시도행전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며 질문하고 학문적인 연구를 하는 꼴값을 떨게 된다. 그런 의문과 학습은 자기에게 구원이 없다는 걸 떠벌리는 것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나의 구원이 다비다나 나사로와 같은 경험이란 걸 생각하지 못한다면 구원이 없는 것

 

성경 속에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몇몇 일들은 형식적으로 보면 부활이지만 본질은 거듭남과 구원을 설명한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모두 다시 죽었고 지금은 우리 곁에 없다. 영원한 예수님의 부활과 다르다. 그래서 그들의 다시 살아남은 부활을 설명한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의 다시 살아남은 우리 모든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일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오늘 자신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믿는다면 자신 역시 도르가와 같이 죽었다고 살아난 사람이라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은 왜 초대교회 같은 기적이 없느냐는 소리를 하고 있다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