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일, 준비 찬양으로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435장)을 부르기 시작했다. 순간 ‘내게 정말로, 나는 정말로 이 신앙과 믿음이 생명보다 귀한가?’라는 생각이 들며 사고가 멈추었다. 나는 또 우리는 정말로 찬송가 가사, 성경 말씀대로 살기에 이 가사로 찬송하고, 성경을 읽고 믿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큰 도전이다. 수시로 듣는 찬송가 가사들은 예사롭지 않다. 언제나 가사는 나를 비춘다.
학창시절, 어쩌면 더이상 울지 않아도, 소리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주일, 수요일 거르지 않고 예배 후 그렇게 찬송 부르며 울고 소리치며 기도했었는데, 환갑의 나이인 지금도 찬송가나 성경 구절은 나를 멈칫멈칫하게 만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 이젠 울 나이가 아닐 텐데 눈물짓게 만든다. 나는, 우리는 왜 이렇게 예수로 인해 반성하고, 죽는 날까지 우는가?
어쩌면 오랜 종교적 습관 때문일지 모른다. 또 어쩌면 젊은 시절 감성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주는 참혹함과 그 참혹함이 나 때문이라는 죄책감과 감사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득 작년에 소천한 내 친구가 학창 시절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애절하게 부르며 울던 장면도 기억난다. 오랜 세월 시달린 인생에 대한 회한과 감상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때문일까? 그랬으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사람은 연습이나 노력에도 안 되는 게 있지만, 한편으로는 세월 속에서 침식당하듯 다시는 빠지지 않을 냄새처럼 삶에 베이는 많은 것들이 있는 거 같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이 믿음과 함께 힘든 인생의 기억 속에 스며든 감성일 게다. 그래서 우리는 태연한듯 살아가다가 불연 듯 감정이 긁히듯 들리는 찬송에 감동하는 게 아닐까?

어떤 날 생각하면 사람들이 육신의 복락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부르짖는다는 사실에 분통해 하다 가도, 또 생각해보면 ‘그래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저렇게 열심이다’ 싶어 긍휼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나를 위하는 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니, 하나님을 찬양하고, 많은 연습과 숙련된 기법으로 노래하고 연주하는 게 참 아름답다. 그 마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와 일치하면 더 좋겠지만 방향이 하나님을 바로 알기 원하는 방향이라면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세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것인 것을.
사실 ‘우리는 왜 예수로 인하여 우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왜 예수를 인하여 울지 않는가?’가 더 중요하다. 어느 순간 불연 듯 들리는 찬송가 가사에 내 삶이 녹아 있음을 느낀다면 감동하고 감사할 것이다. 그땐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찬송가 가사 앞에 ‘나는 그렇게 살고 있나?’라는 각성에 멈칫거리는 게 더 이상한 것일 게다.
'김집사의 뜰 > 복음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기도는 정말 효과가 있을까? (0) | 2026.02.25 |
|---|---|
|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는 두려움과 환난 (0) | 2026.02.17 |
|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0) | 2025.11.30 |
|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0) | 2025.11.26 |
| 하나님은 왜 죄를 허용하셨는가? (0) | 2025.11.1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