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597

(출애굽기 37-3) 여종에 관한 계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4. 2. 6. 21:39 Writer : 김홍덕

앞서 설명한 남자 종이 사람이 가진 생각, 특히 무엇을 의로 여기는지에 관한 생각이라면, 여자 종은 사람이 생각하는 의로움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이 형식은 성별로 여자를 한정하는 게 아니라 자기 육신이다.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육신이 바로 하나님 앞에 여자다. 생각을 표현할 형식인 육신이 하나님의 생각을 표현하면 그게 여종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앞에 신부인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아래 여자 종과 같다.

 

여종에 관한 계명은 다분히 혼인을 전제로 한 말씀으로 보인다. '상관한다'라는 표현이 그렇다. 여종의 목적은 전적으로 후사를 잇는 데 있다. 그리고 여종은 남자 종과 달리 안식년에 속량되지 않는다. 이는 기준이 남자 종에게 있기 때문이다. 형식은 내용에서 비롯된다. 사람이 가진 삶과 행동 등 육신으로 표현하는 모든 형식은 그 사람이 생각하는 의로움의 표현이다.

 

여종이 상전이나 남자 종에 종속된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고 하신 하나님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성경은 남존여비처럼 보이겠지만, 보이는 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라 속에 있는 의가 표현된 것이고, 그 의가 본질임을 아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의와 내용이 남자를, 그리고 그 의와 생각을 표현하는 육신을 여자로 표현하는 것임을 안다. 남자와 여자에 관한 관점을 잘 살핀다면 의와 생각이 하나님의 의와 같으면 그 육신의 삶은 자연스레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안목을 알 수 있다.

 

여종이 상전에게 벗어나는 건 이혼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여자가 종이 되는 시작과 원인에 연결된 표현이다. 그리고 이렇게 여종이 해방될 수 있는 이유가 세 가지 있는데, 이는 모두 혼인의 의미가 상실되거나, 형식이 없는 내용으로서의 상전의 태도다. 특이한 점은 속량한다고 해도 다른 나라로 팔거나 넘길 수는 없다고 했다. 하나님의 계명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법이라는 걸 분명히 하신 말씀이다.

 

서로 기뻐하지 않는 내용과 형식의 결합은 속이는 것

 

상전이 여종을 상관히지 않거나 기뻐하지 않으면 속신케 하라고 하셨다. 이유는 여종을 상관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다는 건 속이는 것이라는 게 이유다. 내용이 형식을 기쁘게 여기지 않고 상관하지 않는다는 건 겉과 속이 다른 상태다. 상관한다는 건 혼인의 개념으로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관하지 않는다는 건 여종으로 대변되는 삶의 형식으로 자기 의를 표현하지 않겠다는 것이므로, 여자가 종이 되는 원인자가 소멸된 것이다. 당연히 여종이 속량되는 게 합당하다.

 

이는 사람이란 형식을 가진 존재는 자기를 기뻐하지 않는 상전과 함께 하지 않아도 됨을 뜻한다. 어떤 신앙이 나에게 열심히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해도, 그 안에 기쁨이 없다면, 신앙하는 대상이 나를 기뻐하지 않는다면 함께 할 이유가 없다. 그런 상태인데 계속 함께 하겠다고 자기 상전으로 섬기는 건 속이는 것이다.

 

기쁨이 없는 신앙을 이어가는 건 속이는 것

 

상전이 여종을 아들에게 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이므로 아들도 기본적으로 아버지와 의가 같다. 그 아들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은 결국 아버지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이다. 당연히 딸, 아버지의 의가 형식으로 표현된 딸과 같이 대함이 합당하다. 그런데 딸과 같이 대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종이 된 이유가 없어진 것이므로 속량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이를 거절하는 베드로에게 "내가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안에 있는 의가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 표현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면, 그 표현을 공유하는 관계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의와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여종, 곧 의가 표현된 아들의 의를 표현하는 여자를 딸과 같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상호 상관이 없다.

 

아무리 간절하게 하나님을 믿노라 해도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지 못하는 육신의 삶은 하나님과 무관한 삶

 

여종이 속량되는 마지막 조건은 상전이 다른 여자에게 장가가더라도 여종의 의복과 음식을 제공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속량된다. 여기서 우리는 여자가 종이 되는 목적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전은 다른 여자에게 장가간다는 건, 상전의 의를 다른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걸 기어이 일부다처제로 본다면 그건 성경의 행간을 보지 않으려고 작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대상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신부가 된다는 걸 생각하면 된다. 하나님의 의는 너무나 많은 형식으로 표현된다. 하나님 성품의 무궁한 다양성이다.

 

여기서 음식과 의복을 끊지 말라는 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를 표현할 형식으로 창조한 사람이 육신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걸 아신다고 하셨다. 목적이 정해지면 형식의 필요는 주인이 다 공급한다. 이동을 위해 자동차를 사면 기름은 주인이 넣는다. 상전이 여종에게 음식과 의복을 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하나님은 이 계명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의 필요를 늘 공급하신다. 이는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하고 모든 게 일치하는 진정한 내용이자 상전이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삶을 주신 목적이 너무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사람을 향한 목적이 분명하시므로, 그 목적을 이루는 의지가 확고한 하나님이시다. 당연히 그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육신의 모든 필요는 항상 부족함 없이 공급하신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출애굽기 37-2) 남종에 관한 계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4. 2. 1. 06:40 Writer : 김홍덕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남종과 여종을 구분하여 말씀하신다. 이는 늘 설명하는 바와 같이 남자와 여자에 관한 성경의 기본적인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종이라면, 사람이 가진 의와 육신을 비롯한 육신이 가진 것 모두 이에 종속된다. 여기서 사람 안에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의는 남자를, 육신이란 형상이자 형식은 여자를 의미하는 성경의 관점이 적용된 것이다.

 

따라서 남자 종이란 사람이 가진 가치관, '무엇이 의로움인가'를 생각하는 철학적이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 모든 생각과 가치관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람이 가진 형이상학적 부분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이 부분도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걸 말씀하시는 것이다. 행동을 이끄는 사람의 모든 생각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런 생각과 의로움은 무형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생각은 결국 육신으로 표현된다. 남자 종이 여자와 혼인한다는 게 바로 생각이 행동과 삶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서 계명은 남자 종의 아내를 상전이 맺어 주었는지, 남자 종이 스스로 얻은 아내인지에 따라 나눠진다. 자기 스스로 얻은 아내라면 데리고 나갈 수 있지만, 상전이 맺어 준 아내는 안식년을 맞아 자유롭게 되어도 데리고 나가지 못한다.

 

남자 종은 무엇을 의로 여기는지에 관한 생각, 여자 종은 그 생각이 표현된 형식과 성과

 

스스로 얻은 아내는 자기 노력으로 일군 삶의 형식과 성과다. 자기 생각을 자기 힘으로 이루어 낸 자기 성과라는 의미다. 반면에 안식년이 되어도 데리고 갈 수 없는 아내와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란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을 보는 관점을 잘 생각해야 한다.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말을 예로 설명해 본다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불공평과 불공정의 문제와 가난과 질병과 갈등의 문제가 해결되도록 바꾸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관점으로 보는 게 아니다. 내가 바뀌면, 생명이 거듭나서 다른 본성과 안목과 관점이 되면 여전한 세상 모든 걸 다르게 인지하고 순종하는 변화를 하나님이 세상을 바꾸신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이 바뀐다는 건 보는 사람이 다른 생명으로 거듭나서 본다는 것,

 

종에 관한 말씀 역시 그렇다. 자기 삶에 주어진 것들을 자기 기준으로 재단하면 자기가 성취했다고 생각하면 자기 걸로 생각한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면 하나님의 것이 된다. 그래서 종이 상전과 처자를 진정으로 사랑하므로 상전을 떠나지 않겠다고 한다면 상전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고, 존재의 의미도 모르는 자신에게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심에 감사하고, 이를 위해 주신 삶을 사랑한다면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종으로,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으로 자기 삶을 헌신하고 순종하게 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표현된 삶을 거듭난 안목으로 보면 다 하나님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거듭난 사람은 영원히 주인과 함께 거한다.

 

이러한 종의 마음은 재판장에게 공증받고 상전 집의 문설주에 자기 귀를 대고 구멍을 뚫는 것으로 확정한다. 자기 상전의 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말씀만 듣고 순종하겠다는 헌신이다. 이는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의 완성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성경을 노력으로 지켜내려는 사람이나, 눈에 보이는 육신과 세상과 삶을 본질로 보는 이들에게 종에 관한 말씀은 단지 신분이 종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의 말씀으로만 보일 것이다. 조금 더 나간다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불모지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말씀이다. 성경이 말하는 종은 신분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그리고 잠깐 지면을 빌려 말하자면, 어디 험지에 선교하러 가겠다고 하나님께 닦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완수하는 게 먼저다. 하나님의 종에 대한 개념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출애굽기와 여러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종은 우리 모든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주실 때 뜻하신 우리 존재 목적을 이루어 내야 할 빚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므로 우리는 빚진 자다. 하나님의 목적에 빚졌고, 각자의 삶이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도록 하는 빚을 졌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모든 건 이를 위해 주셨음을 깨달아야 한다. 종이 얻은 아내가 어디서 왔든, 내 삶에서 이룬 그 무엇이든 모두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고 내 인생에 기대하시는 바를 이루어 내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히 받고 하나님을 영원히 섬기는 종으로 사는 게 우리의 존재 의미다. 그게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심부름

Category : 김집사의 뜰/십자가의 삶 Date : 2024. 1. 30. 06:30 Writer : 김홍덕

십자가를 지는 삶은 어떤 것일까? 앞서 십자가를 지는 삶은 우리 삶의 사소한 부분, 흔히들 말하는 디테일 속에 있음을 언급했다. 오늘은 그 처음 시간으로 공기처럼 우리 일상에 스며 있는 삶의 한 요소가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걸 이야기하려 한다. 바로 <심부름>이다.

 

심부름은 육신의 수고를 대신 시키는 것이다. 그 육신의 수고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사사로운 일에서부터 생존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모든 수고의 공통점은 육신을 내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부름은 육신을 가진 존재들의 세계와 사회에만 있다. 말로 다 되는 호그와트 마법학교 같은 곳에서는 굳이 심부름이 필요 없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기적과 능력을 숭배한다.

 

심부름은 육신을 내어 주는 것

 

심부름은 누가 육신의 수고를 감당할 것이냐의 문제다. 심부름을 시킨다는 건 내가 감당할 육신의 수고를 남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반면에 내가 심부름하거나, 혹은 내가 직접 한다면 내 육신을 내어 주는 것이다. 이게 아주 작아 보이지만 육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다. 다만 심부름과 같은 작은 하나의 행동도 자기 본성이 이끄느냐? 아니면 보답으로 또 보상을 목적으로 행동하느냐는 다르다. 겉으로 보기엔 같지만, 속 사람의 생명은 전혀 다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도 결국 육신을 내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으니,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게 해야지'라는 맥락의 생각으로 노력하고, 신념으로 자기 육신의 행동을 끌어내는 게 아니다. 그건 성경을 행위로 지키려는 사람이다. 충분히 심부름시킬 만한 작은 일에도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는 게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려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집에서 물 한 잔도 '심부름시키지 말고 내가 가서 먹자'라는 생각 없이 그냥 가서 먹는 게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삶이다.

 

물 한 잔 먹는 일도 육신의 수고를 스스로 감당하고, 남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사람들 사회에서는 육신을 사용하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낮은 존재다. 예로부터 빚을 지면 육신으로 속량했다. 그게 종이란 신분의 근원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섬기러 오셨다고 하신 건, 육신을 세상에 내주므로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물 한 잔도 끼니때가 되면 밥 먹는 게 당연하듯, 자기가 하는 게 당연한, 완전한 본성으로 자기 육신으로 수고를 감당하는 삶을 사는 것, 이게 그리스도로 거듭난 본성으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이게 작아 보여도 이 하나가 없다면 거듭난 게 아니라 말할 수 있다. 본성은 습관보다 무섭다.

 

'김집사의 뜰 > 십자가의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식 vs. 십자가  (1) 2024.04.02
십자가와 죄 사함  (0) 2024.03.01
십자가를 지는 삶을 이끄는 거듭남  (1) 2024.01.26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