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자 다윗의 최고 책사였던 아히도벨과 누이의 아들이자 요압의 이복형제였던 아마사(압살롬의 군대 장관이 됨)는 압살롬의 편에 선다. 시므이라는 베냐민 지파, 곧 사울의 친족은 도망가는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조롱했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사환은 다윗에게 자기의 주인 므비보셋이 배신했다고 다윗을 속이는 거짓말을 하고 므비보셋의 재산을 얻기도 한다. 반면에 후새라는 다윗의 친구는 다윗의 요청에 따라 압살롬에게 위장 투항하여 배신다 아히도벨의 기습 작전을 전면으로 돌려 다윗에게 시간을 벌어 주고,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들은 언약궤와 함께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다윗의 첩자 역할을 했다.

 

하지만 므비보셋은 그의 사환 시바의 말과 달리 예루살렘에 남아 씻지도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체로 다윗의 고난을 슬퍼했다. 심지어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고 므비보셋의 재산을 모두 빼앗았던 사환 시바의 재산마저 되돌려 받지 않고(다윗이 시바를 벌하지 않고 재산을 반씩 나눈다), 그 아비 요다난처럼 다윗에게 충성했다. 그 외에도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들은 목숨을 걸고 다윗을 도왔고 이방인(블레셋 사람)임에도 다윗이 돌아가라는 권유조차 물리고 충성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정신 없는 상황은 누가 봐도 환난 그 자체다. 그리고 다윗이 우리의 영적 상황을 투사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 역시 환난으로 여길 일들을 만난다. 그리고 자기 생각에 환난이라 여기는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 이 환난을 이기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 누구나 환난은 속히 벗어나길 원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환난을 만나면 이전에 없던 더 큰 능력과 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윗은 아들, 특별히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의 반란과 그 속에서 난무하는 배신과 모욕당하는 환난을 갑자기 생기는 특별한 믿음으로 이겨낸 게 아니다. 하나님께 그걸 구하지 않았다. 다윗은 그가 항상 가지고 있던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순종, 무엇보다 그 믿음과 순종의 근원인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이겨낸다. 특별히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라는 사울 친족을 대하는 다윗의 태도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놀랍게도 다윗은 그 저주도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이라고 봤다. 사울을 죽일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았던 그때 그 본성이 그대로 있었다.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삼하 16:11)

 

전쟁 중에는 살인이 용납되듯이 사람들도 환난을 겪으면 이전에 없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도 이전에 하지 않던 더 경건한 행동을 자아내어 하나님을 감동시켜 환난을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집에서 새는 쪽박은 들에서도 새는 법이다. 환난은 이전에 없던 능력이나 믿음으로 벗어나는 게 아니라 평안할 때 가지고 있던 믿음으로 이기는 법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환난이 오나, 평안하나 한결 같은 삶과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환난에서 평안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은 평안한 일상을 유지하던 그 믿음과 능력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압살롬의 반란 그 이면에서 우리가 조명해야 할 첫 번째 교훈이다.

 

환난을 이기는 힘은 평안할 때 유지하던 믿음과 순종

 

다음으로 우리는 환난의 근원적 개념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어떤 어려움을 겪으면 하나님께 어려움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이건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사람의 이런 본능적 반응에는 우리가 돌아봐야 하는 아주 중요한 관점이 있다. 자기가 환난으로 느끼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도 이걸 환난으로 생각하시는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환난 모드로 전환해서 하나님께 이 환난을 이기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수없이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고 말씀하신다. 내 생각에는 그게 환난이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환난이 아니라 은혜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다윗이 아주 사랑한 아들 압살롬이 일으킨 반란은 분명히 다윗에게는 심각한 환난임에도 다윗은 아주 다른 관점으로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사태를 자기에게 임한 환난으로 정의하고 그 환난을 이기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을 보인 게 아니었다. 쉽게 예루살렘을 떠나는 모습에서 이 일은 환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이기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자기를 저주하는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이 저에게 행하라고 하신 일로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모든 걸 환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로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나와 다른 관점으로 사태를 보신다고 해도 사람에게는 일상적이지 않고 기대하지 않은 난관은 분명히 어려움이고 두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면 그렇게 수없이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하셨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돌아볼 수 있다.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환난을 간주하고 도움을 청하기 전에 내가 겪고 있는 일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환난인지 깨닫게 해 달라고 먼저 기도하는 게 맞는 일이다. 더 본질적으로 내가 마주한 일을 하나님과 같은 안목으로 볼 수 있기를 간구하는 게 가장 좋은 기도일 것이다. 그게 바로 하늘의 뜻이 땅이자 사람인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온전한 기도인 것이다.

 

환난을 만날 때 우리는 먼저 이 환난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게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삶을 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게 행한 다윗의 행동들을 살펴 교훈을 얻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건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뜻, 그리스도의 본성을 깨닫는 입구다. 본질은 다윗의 가치관과 믿음과 순종을 자아내는 본성이다. 다윗이 왜 그리스도의 혈통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혈통이라는 건 그리스도와 본성이 같은 생명이라는 뜻이다. 다윗이 환난을, 또 자기를 저주하는 사람이나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보는 관점이 어떤 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걸 잘 들여다보면 다윗의 본성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다윗은 늘 자기가 마주한 일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고 있다. 그걸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걸 볼 수 있다면 나도 삶에서 마주하는 일들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같은 안목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삶에서 마주하는 일 앞에서 하나님! 이 일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는 기도는 줄어들고, ‘하나님, 이 일을 하나님과 같은 안목으로 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믿음을 필요로 하는지도 자연히 알게 된다. 하나님과 같은 안목으로 인생의 조명하는 것,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어야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본성이 있어야 하나님의 안목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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