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19)

압살롬의 반란 중에 다윗을 도운 바르실래라는 사람이 있다. 성경을 많이, 꼼꼼히 읽는 사람이라도 기억하기 힘든 이름이다. 교회에 다니면서 설교에서 이 사람의 이름을 듣기는 참 어려운 유명하진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다윗의 환난 중에 여러모로 다윗을 도왔다. 그는 아들 압살롬을 피해 예루살렘을 버리고 요단강을 건너 마하나임에 도착했을 때 굶주린 다윗의 군사들을 먹이고 필요한 모든 물자를 제공한 사람이다. (삼하 17:27-29) 그리고 반란이 끝났을 때 예루살렘으로 함께 가자는 다윗의 요청에 자기의 나이 80인데 왕께 누를 끼칠 수 없다며 사양하면서 대신에 아들이 다윗을 섬길 수 있도록 청한 사람이다.

 

그는 정말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압살롬의 반란 때 이미 80인 노인이었다. 그런 그가 환난을 겪고 있는 다윗을 물심 양면으로 도왔다. 그렇다면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바르실래라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자기 신앙을 삶으로 드렸고, 그 신앙은 다윗을 돕는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리스도의 혈통이자 조상인 다윗을 도운 것이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고, 바르실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자녀’, ‘주 안에서 우리는 하나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본성이 된 사람들,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거듭난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같은 영적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영역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또 반대로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기도 한다. 한 사람의 헌신과 봉사가 환난을 겪는 다른 형제에겐 하나님의 도우심이 된다. 이런 상호관계가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관계다. 다윗을 돕는 바르실래의 모습은 우리에게 이 관계를 설명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짧게, 전후 설명 없이 그냥 기록된 것을 마냥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니까 기적처럼 그때 사람이 그렇게 행동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말씀하시니 제자들이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갔다는 장면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순간적으로 압도당해서 그물을 던져두고 따라간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일이 있기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소문을 들었고 자기 안에서 갈등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잔을 넘치게 하는 한 방울의 물이 된 것이다.

 

바르실래라는 사람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방탕한 삶을 살다가 어느 날 도망치는 다윗을 도운 게 아닐 것이다. 겨우 두 번 정도 성경에 기록된 그의 행적만으로도 그는 신실한 삶을 산 노인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나름의 신앙 여정을 겪었을 것이고, 언제나 신실한 삶을 추구했기에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도운 것이다. 한 사람의 신실함이 다른 한 사람에겐 하나님의 도우심이 되는 구조다. 이 구조가 바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모습이다.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께 받는 도움은 이렇듯 각자의 삶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삶에서 온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비를 내리시듯 사람으로선 할 수 없는 기적과 같은 일로 우리를 도우시기도 하나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영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므로 하나님의 역사는 대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니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섭리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으로 살고, 육신으로 말하고 보이시고, 육신의 병을 고치시고, 육신을 십자가에 드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도움을 이루셨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하나님의 복음은 사람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 원칙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려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이루셨듯이,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 순전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육신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한다. 이런 육신의 수고가 바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전도라는 것도 이것이다. 서울역 광장에서 시끄럽게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건 전도가 아니라 자기 의를 이루고자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행위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육신으로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삶이 때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하고 은혜를 끼친다. 이런 육신의 수고, 종이 하는 육신의 수고가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또한 한편으로 주의 도움 역시 사람을 통해서 오고, 사람의 일로 확증된다. 믿는 사람의 수로 복음의 능력을 가늠해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늘어나는 건 분명 수가 늘어나는 일로 나타난다. 세상의 복락이 복음의 증거는 아니지만, 복음의 능력은 예수님이 파도를 잠잠케 하셨듯 막막한 삶을 평안하게 만든다. 복음은 언제나 사람과 사람의 일로 나타나고 증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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