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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거룩한 이름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5. 13. 14:47 Writer : 김홍덕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 아버지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정체성을 밝히셨다. 하나님께서 직접 밝히신 하나님의 정체성을 사람들은 그저 산뜻한 표현 정도 생각하지만, 스스로 존재한다는 건 모든 신, 모든 존재와 구별되는 절대적 차이다. 그나마 세상의 존재 중 사람만이 유일하게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만, 사람도 자기 존재를 스스로 결정한 게 아니다. 오히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기가 왜 존재했는지, 이렇게 힘든 삶의 목적과 의미와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고 한다.

 

이는 사람이 의지하는 신도 마찬가지다. 어떤 신도 존재적 관점에서 정의되거나, 자기 정체성을 밝히고 이를 매개로 신이 된 사례는 없다. 세상에 존재하거나 사람이 상상하는 어떤 신()도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알려 주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믿고 의지하는 신은 사람의 존재 목적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은혜와 능력을 행하는 존재거나, 이미 존재하게 된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관해서만 언급한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하나님의 정체성은 세상 모든 것과 구분된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어떻게 행동해야) 복을 주는지를 모호하게 이야기하는 세상의 신과 달리 하나님은 사람을 왜 창조했는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이와 함께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하나님이 존재의 신임도 밝히셨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행위를 요구하시는 게 아니라 어떤 존재로서 관계를 형성할 것인지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아들이 되기를 원하시지, 종처럼 행위의 성과로 평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여기에 있다. 거룩은 구분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존재하지 않은 세상의 모든 존재와 구분되고, 사람의 존재 이전에 사람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을 정하고, 사람에게 그걸 알려 주는 하나님은 육신의 복락을 미끼로 신앙을 요구하는 다른 신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거룩한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처럼 존재의 신으로 알고 부를 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게 된다. 아니 이것 외에 하나님을 거룩히 부르는 법은 없다.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고 부르는 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려면 사람이 다른 신과 명확히 구분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가 존재하는 목적과 내 정체성을 아시는 분으로 믿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모든 존재, 모든 신과 구분하는 사람이다. 즉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믿는다는 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을 아는 사람, 하나님의 뜻이 자기 육신이 된 사람, 곧 그리스도고, 하나님 아들이다. 이건 곧 하나님이 아버지인 사람이다.

 

하나님 아들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거룩함을 안다.

 

이것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안다는 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완전히 달라진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인식은 곧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것인지와 무엇을 드릴 것인지를 정하는 기준이 된다. 하나님을 모든 신과 구분하여 존재의 신으로 믿는다는 건 하나님께 내 존재 정체성을 구하고, 나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형성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된 삶을 사는 아들이 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행위를 드리는 종이 될 것인지를 정하게 된다.

 

하나님을 거룩히 여긴다는 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지를 결정한다.

 

아버지라는 호칭이 그렇듯 호칭은 관계를 설명한다. 내가 상대를 어떤 존재로 여기는지를 의미하고, 어떤 존재로 여기는지에 따라 대하는 자세와 주고받는 게 달라진다.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구분하고 거룩하게 여긴다는 건 세상의 모든 존재, 모든 신과 여호와 하나님은 구별되는 거룩한 분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는 뜻이다. 이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부르는 게 참이 된다. 반대로 행여 하나님 앞에 그릇된 <행동>을 해서 육신의 복락을 얻고 유지하는데 해가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체로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부르는 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부른다는 건, 세상 모든 존재, 모든 신과 달리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는다는 뜻

 

따라서 스스로 가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며 나는 스스로 알 수 없는 내 삶의 목적과 이유를 가지신 분임을 믿고 하나님께 존재의 목적을 간구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부르며 간구하는 진실한 기도다.

 

하나님은 모든 성경을 통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 성과를 평가하여 의롭다 칭하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했다. 아울러 육신의 문제, 먹고, 마시고, 입고, 성공하는 일들은 알아서 하시는 영역이지 사람이 호소한다고 해결하시는 분이 아님도 분명히 하셨다. 그러니까 이런 걸 하나님께 구하는 걸 기도라고 하는 건 기도를 잘못 아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간절하게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과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에 기대어 육신과 세상일을 기도하라고 한다. 그러나 알 것이 있다. 하나님의 정체성과 다른 목적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다. 물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란 기대로 부르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이 아니기에 육신을 위해 부르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

 

사람들은 많은 문제를 겪으며 살지만, 가장 기저에 깔린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는 <왜 사느냐?>,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인생은 무엇인가?>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의지할 문제는 바로 <나는 누구인가?>이다. 이는 사람이 하늘을 생각하는 기본 개념과도 닿아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의 신 여호와를 의지하는 이유다. 우리가 부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곧 내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알고 정하신 하나님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로 구해야 하는 건 하나님만 알고 있는 <>라는 존재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이유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내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고,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 역시 내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이 받기를 기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려면 누군가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기도하는 당사자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바로 기도하는 자신이다. 하나님은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구하는 사람에 의해 거룩해진다는 뜻이다.

 

거룩하다는 건 신성시 한다는 의미보다 어원으로 볼 때 <구분>이란 뜻이다. 거룩은 히브리어에서 '잘라내다', ’분리하다’, ‘구분하다라는 의미의 '코데쉬’(kodesh)'란 단어가 그 어원이다. 이는 단순하게 더러운 것과 구분한다는 의미로 봐도 무방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무엇이 더러운 것이고, 무엇이 깨끗한 것이냐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꿈속에서 부정하다고 여겨 '먹어라'는 말씀에도 거절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깨끗하다고 한 것'이라고 하신 말씀만 봐도 그렇다. 무엇이 깨끗한 것이고, 무엇이 부정하고 더러운 것인가가 거룩함의 핵심이다.

 

이는 하나님의 정체성과 다시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는 건 당연히 깨끗한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옳다고 여기시지 않는 건 당연히 부정하다. 그리고 이 기준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그에 합당하면 깨끗하고, 그렇지 않으면 부정하다.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으면 깨끗하고, 돈이나 밥을 주는 신으로 믿고 늘 그런 기도만 하고 있다면 부정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구한다는 건,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과 달리 내 존재 정체성에 관한 주권을 가진 분으로 믿는다는 뜻이다. 이름은 그 존재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렇게 믿을 때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분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건 결국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바로 아는 사람이 되기를 구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기를 구한다는 건,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게 되기를 구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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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47)

베드로의 설교에 양심이 찔린 사람들은 어찌할지를 물었고,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3,00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초대교회가 사람 사회 속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썼다. 교회가 어떤 곳인지, 어떻게 시작하는지를 설명한다.

 

3,000명의 회개, 그리고 교회의 시작

 

우리가 알고 있고 길에서 볼 수 있는 교회는 일반적으로 먼저 목사 라이선스를 가진 사람이 건물을 임대하고 사람을 모으는 걸로 시작한다. 이런 시작은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실 사도행전 교회의 시작과는 명백히 다르다. 시작이 다르다는 건 미세한 차이가 아니다. 천로역정에서 담 넘어 순례를 시작한 사람을 생각하면 된다. 결국 그는 순례를 다 마치지 못했다.

 

잠깐 부연하자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내재한 생명의 본성이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도하고, 봉사하고, 착한 말씨로 살아가면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생각한다. 행동이 자기 정체성을 하나님 아들로 바꾼다고 믿고 있다. 명백히 방향이 반대다.

 

교회의 시작도 마찬가지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내재한 그리스도의 본성이 삶으로 나타나는 게 하나님 말씀의 방향성인 만큼 교회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모이는 게 먼저다. 그리고 건물이 필요해지면 그때 그 용도만을 위해 마련하면 족하다. 이런 교회가 이 시대 기독교의 로망인 초대교회의 본질이다. 건물이 있어야 교회가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돌아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만남 자체가 곧 교회다.

 

또 하나 우리를 주목하게 하는 초대교회에 관한 말씀이 있다. 바로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소유와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라는 말씀이다. 어쩌면 낭설처럼 이 말씀이 공산주의의 씨앗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말씀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교회가 어떤 사람이 어떻게 모인 곳인지를 먼저 생각하고서 이 말씀을 봐야 한다. 그저 교회는, 또는 하나님을 믿으려면 자기 물건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방향도 그게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니 그렇다는 것이지, 이렇게 살아야 교회다워지는 게 아니다.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면 마치 공산주의 사회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정체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건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 곧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표현하시겠다는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즉 자기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이 된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자기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이 된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삶이 된 사람은 모든 게 하나님의 말씀에 수렴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항상', '범사'와 같은 빈도 부사를 충족시키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이같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렇게 사는 생명체가 되는 것뿐이다. 현재 기독교인들이 하듯이 노력으로는 어렵다.

 

모든 걸 통용한다는 건 모인 사람 모두가 자기 인생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

 

모든 물건을 통용한다는 건 내 것, 네 것 없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그저 사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교회에 모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데 자기의 모든 걸 사용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누구나 가릴 것 없이 자기가 가진 물건을 모두 하나의 목적에 사용하는 것, 이것이 모든 걸 통용하는 것이다. 마치 자동차 공장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모두가 가진 걸 가지고 자동차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것과 같다. 자기 삶의 모든 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데 쓰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들의 삶을 통틀어 모두가 모든 걸 주를 위해 통용하는 것이다.

 

소유와 재산을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눈다는 말씀 역시 같은 맥락이다. 부자가 가진 재산으로 가난한 자의 필요를 돕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필요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의 필요다. 누군가 그런 삶으로 거듭나는 데 필요한 필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의 어려움을 돕는 필요다. 무작정 재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역을 위해서, 또 그런 사람의 형편을 돕기 위한 필요다. 노숙자에게 밥 나누어주는 것과 같은 것을 한정하는 게 아니다.

 

재산을 팔아 나누어 주는 필요는 사람이 거듭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을 돕는 데 필요한 필요를 말한다.

 

그렇다면 떡을 떼고 교제에 힘쓴다는 말씀도 여기에 귀속된다. 떡은 거듭난 영혼의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의 믿음을 보증하고 위로하는 말씀과 간증이고, 교제는 그것을 나누는 것이다. 그것을 나눔으로 서로가 자기 삶이 하나님께 영광됨을 보증받고, 위로받으며, 그 삶에 더욱 힘쓰게 되는 것이다. 이건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만족스럽지 못한 교회 생활에 '좋은 말씀과 교회가 없을까?' 방황하는 사람이 쉽게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모든 건 결국 교회가 무엇으로 시작하고, 무엇을 함께하는 공동체인가에서 결정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육신의 삶의 축복을 공유하고자 하는 교회라면 먼저 건물을 구하고 사람을 모아 노숙자에게 밥 지어주는 걸 재산을 나누어 주는 걸로 알고 그렇게 교회를 운영할 것이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의 만남이 교회의 시작이란 걸 알면 그리스도의 생명 본성으로 사는 삶의 모습이 모든 걸 통용하고, 주를 위한 필요를 위해 자기 가진 걸 내어놓고, 거듭난 삶의 열매를 나누고 교제하는 교회인 걸 알 것이다. 이 차이가 교회에 대한 만족을 나누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차이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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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우리 아버지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5. 9. 19:3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성경이 말하는 아버지와 아들은 육신의 관계를 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와 생각이 형상 곧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다. 육신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한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따라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건 기도하는 사람이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겠다는 고백이다. 이걸 요한 사도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표현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표상이므로 그와 같은 육신을 가진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이 삶으로 나타나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걸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신 의도는 우리가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 사람을 통해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육신, 곧 삶인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 그런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려면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으로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호칭이다. 이건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란 관계는 생명 관계로 노력으로 되지 않듯,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의 삶 자체가 되는 것 역시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즉 성경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니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말하는 건 모든 게 엉망인 상태지 겸손이나 신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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