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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

스데반의 순교는 복음 전파의 전환을 가져온다. 유대 공동체 안에 머물던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지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우선은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많은 성도가 흩어지면서 복음이 오히려 사방에 전파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빌립 집사 또 고넬료를 찾아간 베드로와 같이 집사와 사도들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 바울이 나타난다.

 

이런 변화는 우리 각 사람의 개인적인 신앙 여정의 변화로도 이해할 수 있다. 유대 공동체라는 하나의 개체 안에 머물던 복음이 유대 밖 이방인에게 전해지는 모양새는 한 개인 안에 머물던 복음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과 같다. 한 사람 안에서 갈등하며 성장한 복음이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삶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는 마음이 생기게 만든다. 이게 바로 씨를 뿌리는 것이고, 진정한 의미의 전도다.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에게는 더 없는 천민이자 혈통이었다. 수가성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했을 때 그 여인이 사마리아인인 자기에게 어째서 말을 붙이느냐고 생각할 정도로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던 사람들이었다. 이는 예전 앗수르에 의해 시행된 혼혈 정책 때문인데, 북이스라엘을 점령했던 앗수르가 혼혈 정책을 펼쳤고,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이 사마리아인들이었다.

 

그런데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다. 복음이란 게 원래 낮고 천한 곳에 먼저 전해진다. 복음의 법은 사람이 낮아지는 것인데, 이미 낮아진 사람은 그 측면에서 유리한 셈이다. 때로 우리는 인생이 난관을 겪으면서 진정한 복음을 만나기도 한다. 복음은 자기 힘이 넘치는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은혜가 아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믿는 건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복음은 이런 단순한 정황 논리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마리아 성의 백성들은 먼저 빌립 집사의 말을 들었다. 오늘 우리에게 빌립 집사는 대단한 사람이지만, 당시에는 유명인이 아니다. 집사라는 것도 교회의 직분일 뿐 당시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분명한 직분도 아니었다. 그런 빌립의 말을 들었다는 게 구원받는 관문이었다. 오늘날도 그렇다. 목사 전도사가 아닌 사람의 말을 듣고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가 누군 줄 알고?

 

그런데 사마리아 백성들은 빌립 집사의 말을 들었다. 그랬더니 표적을 보았다. 무엇보다 빌립 집사의 말하는 것을 귀담아들었다. 좇았다는 건 자기 삶이 되기를 바라며 들었다는 의미다. 그랬더니 더러운 귀신이 크게 소리 지르며 떠나갔고, 중풍 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았다. 당연하게도 사마리아 성은 이 일로 기쁨이 있었다.

 

늘 설명하는 것인데 다시 설명한다면, 귀신 들렸다는 건 자기 머리를 빼앗겼다는 것으로, 삶을 주관해야 하는 의식 아닌 게 삶을 지배하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믿음의 본질 없이 행동으로 믿는 믿음이다.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고, 귀신처럼 정체가 불분명한 것을 믿는 신앙이다. 중풍 병자는 반대로 생각은 바른데 몸이 생각을 따라오지 않는 상태다. 앉은뱅이와 함께 행함이 없는 믿음을 의미한다. 귀신 들린 자, 중풍 병자, 앉은뱅이는 모두 온전치 못한 신앙을 의미하고, 이것이 나았다는 건 온전한 신앙으로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신앙의 회복은 말씀을 듣는 것에서, 듣고 자신도 그렇게 되려는 소망에서 비롯된다. 빌립이란 사람이 보기에 하찮게 보였을지라도 그가 전하는 말씀이 온전하므로 들었더니 자신들의 영혼도 온전하게 되고 기쁨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게 복음이다. 온전한 말씀을 듣고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면 자신의 신앙이 온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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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7:69)

스데반은 교회가 공정한 구제를 위해 선출한 일곱 집사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유명세는 행정을 잘 펼쳐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기 때문이다. 집사의 직분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전하는 데 있음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스데반의 순교를 이야기해 보자. 스데반의 순교 이유는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스데반은 정말로 하나님을 모독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행 6:11)

 

은혜와 권능이 충만해진 스데반은 기사와 표적을 사람들에게 행하였다. 또 공회에서 온 자들과 변론하게 되었는데, 아무도 스데반을 당하지 못함을 인해 거짓 증인을 세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공회에서 온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 스데반은 요즘 말로 '듣보잡'이었을 것인데, 모세와 하나님에 관한 변론에서 스데반을 당하지 못했다는데 적잖이 자존심도 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당할 방법은 없다. 이 시대 상황으로 바꾸면 목사가 평교인과 성경을 주제로 토론했다가 묵사발이 난 셈이다.

 

그런데 공회에 온 자들은 스데반의 말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들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다. 돌은 율법이므로 결국 그들의 법으로 스데반을 심판했다는 것인데, 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명분이기도 하다. 결국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 사도들을 사람의 법으로 심판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율법적인 신앙에 매몰된 사람들이 복음을 대하는 일관된 태도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스데반과 변론한 사람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다. 단 하나의 차이는 이스라엘 역사 속 인물들과 자신의 역할 차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법을 따른다고 믿고 있었지만, 스데반은 자기와 사도를 죽이려는 자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핍박한 사람이라고 설교한 차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렸다고 했다. 결국 스데반의 설교가 옳은 말이란 뜻이다. 스데반은 하나님을 모독한 게 아니라, 은혜와 권능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결론은 스데반의 순교로 마무리되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 심판받아 마음에 찔린 사람의 손에 죽은 것이다. 이건 아주 불합리해 보이지만, 놀랍게도 이것이 복음이다. 물론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 모두 육신의 목숨을 잃는 게 복음인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법이다. 더 의로운 사람이 죄인이 되는 법이 복음의 실체다.

 

의롭고 온전한 이가 죄인이 되는 게 복음의 실체

 

이제 우리는 유대인들의 하나님과 사도들의 하나님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공회에서 온 자들이 모욕당했다고 주장한 하나님은 모세와 다윗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건 자기들의 하나님이다. 그렇지 않다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찔릴 이유가 없다. 스데반의 설교 속 모세의 하나님은 자기들의 하나님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에 양심에 찔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21, 20, 12)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제사장과 바리새인들만이 화를 낸 적이 있는데, 그와 같은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스데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스데반이 모독한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하나님이다. 천한 나사렛에서 온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믿는 이들의 하나님, 가난과 독립을 해결하는 그리스도를 보내는 하나님, 신학을 전공해야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이들이 믿는 하나님,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는 이들의 하나님을 스데반이 모독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스데반과 사도들을 죽였다. 그리고 오늘날은 진정한 하나님 아들을 믿겠다는 이들을 유혹하고 흐리고 있다.

 

순교는,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준다"라는 협박 앞에 신앙을 고백하고 택한 죽음이 전부가 아니다. 핵심은 어떤 예수를 부인하고, 어떤 예수를 믿는지다. 낮고 천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 믿음을 인하여 높아지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사람들 앞에서 고난받고, 그게 무슨 신앙이냐며 조롱당하는 게 순교다. 그리고 그 세계의 정점에 육신의 목숨도 그 믿음을 인하여 잃는 게 순교다. 스데반의 순교가 바로 이것이다.

 

순교의 핵심은 <어떤 신앙을 고백하고, 어떤 믿음으로 사느냐>다.

 

그렇다면 아마도 적지 않은 곳에서 오늘도 많은 순교가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사회 속에서 "네가 옳다"며 자신의 수고를 내어 주는 순교는 늘 있다. 목숨을 던지며 신앙을 고백하는 순교에 숭고함이 미치지 못할 수는 있지만, 삶의 순간 순간을 그렇게 예수로 인하여 낮아지는 순교는 항상 있다. 이게 없다면 세상은 쓸모를 다한 것이다. 그땐 정말 지구가 종말을 맞을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게 하나도 나지 않는 지구는 하나님께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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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죄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설명했듯 주기도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자 사람을 통해 이루길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 본성이 되기를 구하는 기도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나 그 나라가 내게 임하는 것이 모두 그 하나를 구하는 것이고, 그렇게 된 사람에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다. 결론은 그리스도로 거듭나기를, 즉 구원을 간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구원 이전의 어떤 삶, 죄와 사람이라고 성경이 말하는 삶에서 새롭게 거듭나는 것이다. 하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진다는 건 곧 죄가 사해지고 어둠이 사라지는 빛이 있는 삶이다.

 

'''하말티아'라고 발음하는 헬라어가 어원이다. 이 말은 '과녁을 벗어나다'는 뜻인데 자기 자리를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자리는 위치가 아니라 정체성이다. 사람이란 존재에게 정해진 자기 정체성이 있는데 이 정체성을 벗어난 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다. 아담이 범죄하고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말씀 속 <어디>도 사람의 자리, 사람의 정체성이다. "아담아 네가 지금 내가 사람을 창조한 목적 안에 있느냐?"라는 말씀이다.

 

죄는 자기 존재 정체성의 자리를 떠난 것

 

간첩이란 존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간첩은 존재 자체가 죄다. 그가 선하게 행동하고,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에 늘 앞장설 뿐 아니라 기부하고 가난한 사람을 돌본다고 해도 죄인이다. 오히려 그가 간첩이란 사실이 드러나면 그의 선행에 혜택을 입은 모든 사람도 죄와 연루된 것으로 간주해 사법기관의 조사를 받게 된다. 이처럼 정체성이 죄를 정의하는 핵심적 요소다. 형법에 정의되는 죄도 결이 같다. 모든 형법의 기저에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가 깔려 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정한 정체성을 벗어난 행동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행동은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정체성이 지향하는 목표가 행동의 동기다.

 

사람의 정체성은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이 정하는 것

 

사람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정했다. 하나님이 자기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뜻에 따라 사람을 창조했다. 따라서 피조물인 사람의 정체성(이 정체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셨다.)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할 때 온전하고 선하며 의롭다. 반대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아닌 것을 표현하고 지향하면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죄를 선악과가 대변한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건 단순하게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불순종이 아니라 사람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기 기준을 가졌다는 뜻이다. 이는 다음에 나오는 <선악과>에서 더 자세히 알아본다.

 

정리해 보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이 있어 창조된 존재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고, 사람은 그 뜻대로 사는 게 자기 자리이자 정체성이다. 그런데 이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의 의가 아닌 걸 의로움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표방(아담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야 할 빚이 있는데 이를 이행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죄다. 예수님께서 죄를 빚(debt)이라고 하신 이유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행해야 할 빚진 존재

 

이는 비단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사용하는 물건도 다 그렇다. 자동차는 나를 이동할 수 있도록 기능을 발휘해야 할 빚이 있고, 전구는 밝음을 제공해야 할 빚이 있다. 이런 빚을 갚지 않는 건 죄다. 그리고 빚을 갚을 수 없는 죄의 상태는 고장 났다고 하고 아프고 죽었다고 한다. 또한 모든 존재의 수명 역시 이 목적을 이행할 때까지다. 사람도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육신이 더 이상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데려가신다.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이 자신을 존재케 한 목적에 관해, 자기 정체성에 관해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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