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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예수님께서 신성과 인성을 가지셨다는 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반신반인의 개념과 다르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반신반인의 핵심적 정체성은 부모 중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능력이다. 반면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이자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졌다는 건 콜라가 콜라병에 담긴 것처럼, 전능자 하나님의 의이자 뜻인 말씀이 육신과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다. 같은 목적의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상태다.

 

이런 예수님의 정체성은 육신을 가진 우리에게 중요하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다는 하나님의 뜻인 내용과 같은 목적을 가진 형식이다. 예수님은 육신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성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걸 보여주시려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기에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진 분이다. 결국 우리는 그가 오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가 된 육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존재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고, 존재의 목적이다.

 

따라서 육신을 가진 우리로선 하나님의 본체인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게 너무너무 중요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와 육신을 가진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왜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하셨는지,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는지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에 거하시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뜻을 몸소 보이시려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졌다는 걸 이해하는 걸 넘어 예수님처럼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진 존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셔서 인생을 주신 뜻, 사람을 창조하신 뜻이 내 안에 없는데 구원이 있을 수는 없으므로 그것이 구원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의 본성이 되는 게 바로 구원이고, 그건 곧 내가 예수님처럼 신성과 인성이 하나 되는 것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자기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이다. 즉 구원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신성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말씀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신성화, 즉 사람에게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을 주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셨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를 지는 낮아지는 그리스도의 본능이다. 그 낮아지는 마음이 사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가 가지길 바라셔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다. 여기서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보다 그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게 더 큰 기적이고 능력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왜 십자가를 졌고, 왜 내려오지 못했나?

이제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었던 이유다. 이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와 같다. 한 예수님께서 하나의 사건으로 표현하신 뜻이기에 같은 것이다. 이걸 중요하게 여기는 건 이 이유를 오해하면 신앙이 어긋나게 되면서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은 이단인 신앙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성교회에 지친 사람들이 여기에 쉽게 빠질 가능성이 높다.

 

십자가는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모두를 보여주는 사건이자 우리 신앙의 핵심적인 사건이다. 기독교는 이 십자가를 두고 그냥 단순하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죄가 사해졌다>라고 뇌까리는 게 구원의 증거라고 생각하고, 가르치고, 믿고 있다. 이건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는데 모든 걸 해결한 듯한 표현이다. 더더욱 심각한 건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교회가 이걸 교리로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복음이 복잡하냐? 그건 아니다. 나와의 상관성을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죄가 내가 짓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다는 식의 기독교 교리에서 십자가는 나와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 된다. 친구가 대신 낸 차비는 더 이상 나와 상관성을 찾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와 내려오지 못한 이유가 내 안에, 내 본성이 되어야 그게 구원이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와 같은 육신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데만 주목한다. 그러고는 육신의 연약함이라고 변명하는 자기 죄는 육신 때문이며, 이를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육신을 가졌다는 공통점에 대입해서 자기 실수나 부족함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신앙인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대구에 있는 대구교회(, 이현래 목사 설립) 교인들이 그렇다.

 

물론 겉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은 육신을 가진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는 육신을 가진 채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육신이라는 게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가장 근원적 이유라면, 부활은 별개의 사건이 된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할 때는 오직 육신이라는 이유 때문이고, 부활할 때는 우리와 다른 육신이 되어야 한다. 그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이유를 육신이란 이유에 한정하는 건 반만 아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심부터 부활승천할 때까지 단 한 순간도 말씀이 육신이 된 정체성을 이탈한 적이 없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심도, 내려오지 못한 이유와 부활하시는 정체성까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라는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하나된 사람으로서의 모습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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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의 관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몇몇 부분은 상식과 과학적인 실증을 요구하는 사회적 습관에 완전히 반한다. 대표적으로 부활과 사람을 포함한 천지창조 등이 그렇다. 신앙인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의 이런 시각차는 신에 대한 믿음 유무다. ,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에 대한 실존 인정과 신앙이 기독교 신앙을 구분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부류가 있다. 신을 믿느냐 아니냐는 기독교를 하나의 나라에 비유할 때 국경을 넘는 이념과 같다. 오늘은 그 경계를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일단 그 경계를 넘어 정상적인 입국이 허용된 사람들, 즉 믿는다는 사람들의 신앙 세계 속에서 신성과 인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미 신을 인정했는데 그게 필요할까?' 생각할 수도 있을 테지만, 의외로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졌다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회색지대처럼 흐릿하다.

 

최근에 주목할 만한 일이 있는데, 바로 새한글 성경이라는 성경의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된 일이다. 39명의 학자가 12년 동안 연구한 결과라는데, 아직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유튜브에 문제점을 지적한 영상을 보면서 느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탈색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게 산상수훈으로 새한글 성경에서 예수님은 더 이상 복을 베푸시는 주권자가 아니라, 어떤 이치를 따르면 복을 받을 거라고 조언하는 사람에 불과하게 묘사되었다. (새한글 성경에 관해서는 다음에 따로 다룰 예정이다)

 

어쨌든 기독교는 자기 존립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진 분이어야 하는데도 성경을 그따위로 번역할 정도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개념조차 없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든다. 더 나아가 이런 무개념 속에 빠져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새한글 성경이 이를 아주 선명하게 해 주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논란의 핵심은 <십자가>.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로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으로 보면 분명 신이지만, 그런 능력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끌려가서 못 박히고 또 스스로 내려오지 못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는 십자가 밑을 지나던 유대인들의 조롱,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거기서 내려 와 보라"라는 말 속에 잘 녹아 있다.

 

사람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은 신의 영역이라 생각한다. 예수님의 신성을 버릴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신성은 어디 가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못 박으니 그냥 죽어 버릴 뿐 아니라, 무엇보다 왜 그렇게 힘없이 끌려가고, 유대인의 조롱처럼 왜 내려오지 못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다 보니 신성과 인성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예수님과 형제가 되어야 구원을 얻는 우리는 신이자 사람인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신인지 아니면 그냥 사람인지 등의 파생적 논쟁을 낳았다. 만약 이 논쟁이 나와 무관하다면 생각할 가치도 없겠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기에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본, 우리는 그와 같이 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게 문제다. 본질적으로 우리 역시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지녀야 구원을 얻는다.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닌 이유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아져야 한다고? 이건 기존 기독교인들에게 큰 저항을 일으킬 말이라는 걸 모르고 있지 않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은 영어로 a Christ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the Christ. 즉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우리가 거듭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받은 모습이고 정체성이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므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건 내가 예수님과 같은 개체가 된다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거듭난 많은 사람 중 한 그리스도, a Christ가 되는 것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존재라고 선을 긋는다. 사실 이건 아주 편리한 접근이긴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형제가 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형제란 한 아버지의 의를 가진, 그래서 정체성이 같은 사람이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진 분인데,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러 예수님과 형제가 되는 구원을 얻었다면서 예수님과 나는 다른 존재라고 선을 긋는 건 모순의 극치다.

 

예수님의 신성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식은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다>라는 것과 <우리도 예수님과 같다>라는 것이다.

 

이런 분명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님과 다른 존재라는 믿음은 놀랍게도 기독교 대부분의 입장이다. 대표적으로 죄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다시 회개하는 게 그렇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모순에 대한 답은 "예수님과 나는 다르기 때문"에 죄가 없지만 나는 살면서 죄를 범하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과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확신한다. 그러면서 예수님과 형제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건 모순임을 상기시키고 싶다.

 

또 다른 접근은 예수님과 우리가 같은 존재라는 시도다. 이는 사실 성경적으로 틀리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다는 건 성경에서 밝히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3)

 

문제는 성경이 의도와 달리 간헐적으로 기적을 행한 과거를 빌미로 자신도 신성을 가졌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문제에 도전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런 접근의 대부분은 이단적 결론에 도달한다. 그 이단적 결론은 크게 자기도 신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이 도전이 엄두가 나지 않는 이들은 예수님의 인성에만 집중한다. 이 둘은 모두 성경의 의도를 벗어난 것들이다.

 

먼저 자기도 예수님처럼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접근을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 이건 뭐 너무 많은 사례가 있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건 소위 정통이라는 교단의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신이 될 수 없다는 기반에서 대응하면서도, 부흥회나 알 수 없는 기도원에서 기도하면 신적인 능력이 일어나서 암이 치유되거나 성령에 감동하면 그런 능력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상충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더 나아가 독려하고 있다.

 

이런 모순에서 허덕이는 이유는 신이란 존재의 정체성을 초인적인 능력을 행하는 존재라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분명 신의 영역이다. 우리가 믿는 신은 하나님이 유일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신의 능력으로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나 업적을 기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기적을 접점으로 사람과 하나가 되시려 하지 않는다. 다른 것 볼 거 없이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사람은 바위를 쪼개는 바람 같은 하나님과 접점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위대하고 강하신 하나님이라는 신과 만나는 지점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의 신성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방법과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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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을 향한 진정한 핍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스더 Date : 2025. 1. 31. 22:29 Writer : 김홍덕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행동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하만은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빌미로 모든 유대인을 죽이려고 했다. 연좌제도 이런 연좌제가 없다. 그래서 이건 그저 옛날에는 있을 법한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 왕의 권세를 훔친 하만의 모습은 곧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사람의 모습으로 하만의 핍박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향한 인생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태도이자 핍박이다.

 

우선 삶을 자기 것으로 여긴 사람은 세상의 가치를 따른다. 세상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노력하고, 이를 위해서 신을 찾는다. 심지어 사회적 약속인 규범과 법을 어기면서 그 자리에 오르려 한다. 자기를 부유하고 평안하게 그리고 살찌우려는 의도의 저변은 인생은 자기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 인생이 자기 소유가 아니라 청지기처럼 맡은 것일 뿐이라는 걸 안다면 그렇게 자기를 위한 삶을 살지 않는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늘 세상의 핍박을 받는다는 말씀이 아주 많다. 많은 기독교인은 이걸 오해한다. 예를 들어 회사에 바쁜 일이 있어 다른 직원들은 일요일에 출근해서 일하는데 주일 예배 드려야 한다며 동참하지 않는 상황에서 받는 직원들의 눈치 같은 걸 성경이 말하는 믿는 사람에 대한 세상의 핍박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완전히 괄호 밖 이야기는 아니지만 성경의 의도는 이와 다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유대인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향한 세상의 조롱과 손가락질 그리고 핍박은 가치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상은 모두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는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낮고 천한 십자가로 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상을 살면 패배자가 될 것"이라는 걱정과 조롱과 우려 모두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세상의 핍박이다.

 

진정한 핍박과 조롱은 가치를 뺏고 조롱하는 것

 

하만은 유대인들을 죽이려 했다. 지금은 일부 극단적인 이슬람 국가를 제외하면 그때처럼 목숨을 빼앗는 경우는 드물다. 사람에게 육신의 목숨이 중요하긴 하지만 삶의 가치를 육신의 목숨에 한정하지 않는 게 사람이다. 부모에게는 자식이 자기 목숨보다 귀하다. 결국 핍박의 극한은 가치를 빼앗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인 사람에게 십자가를 모욕하는 게 핍박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세상은 십자가가 귀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 않는다. 앞서 예로 든 일요일 특근의 경우 주일을 지키겠다는 교인을 비난하는 건 주일 성수를 하겠다는 사람은 세상의 경쟁을 편하게 하려는 얌체처럼 보이기 때문이지, 다들 특근하는데 교회 가는 사람이 낮아지는 삶이라서 비난하는 게 아니다. 그걸 핍박으로 생각하는 건 기독교인들의 정신 승리일 뿐이다.

 

오히려 십일조 드리지 않으면 세상에서 실패할 것이란 설교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핍박이다. 여기서 실패는 세상이 모두 추구하는 성공과 부유함을 얻지 못할 거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낮아짐을 실패로 보고 있다. 하나님은 낮고 천한 십자가를 영광으로 여기는데 세상과 세상 가치를 영광으로 여기는 기독교인들은 높아짐을 영광으로 믿고 낮아짐을 경계하고 터부시하니 그것이 핍박이다.

 

하만이 핍박한 유대인은 그리스도인으로 충분히 치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절하지 않는다. 세상이 영광스럽게 여기는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라는 생명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을 말한다. 노력으로 성경을 지키려는 사람은 여기 해당하지 않는다. 본성과 노력은 근원이 다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8-19)

 

일제 강점기나 현재의 아랍권에서나 있을 법한 신앙에 대한 핍박은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큰 위험이다. 그러나 그것 혹은 그런 강도의 핍박이 핍박의 전부는 아니다. 서서히 끓는 물 속의 개구리처럼 일상에 있는데 핍박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핍박과 유혹은 일종의 배신과 같아서 아주 치명적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평안하게 살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여겨 본받을 거라는 그럴듯한 말은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인생에게 진정한 시험이고 핍박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절에 가서 불상에 절하지 않고, 초상집에 가서 영정에 절하지 않는 것을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모르드개와 같은 신앙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라도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신앙,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신앙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고,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것이다.

 

세상의 성공과 귀한 게 하나님께도 귀하다고 생각하면서 비싼 악기와 재료로 예배드리고 교회를 건축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는 우상이나 세상에 절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건 명백한 착각이다. 더욱이 그런 착각은 자신만 망하게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고, 예수를 핍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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