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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맺는 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2. 31. 13:03 Writer : 김홍덕

사도행전은 제목 그대로 사도들의 행적을 다룬 성경이다. 하지만 이건 위인전이 아니다. 우선 사도의 정의부터 생각해야 한다. 사도들의 행적을 상고하면서 사도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건 허술한 접근이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냥 사도로 정의되지만, 왜 그런가에 대해서는 고찰하지 않는다. 제자이기 때문에 사도가 된다면 바울은 어떻게 될 것인가? 반대로 가룟 유다는?

 

물론 가룟 유다를 사도로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을 사도로 칭하는 건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냥 복음을 전한 공로가 심히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의 공로가 있어야 사도가 될 수 있느냐는 기준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더욱이 이건 공로로 믿음을 가늠하는 것이기에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의에도 합당하지 않다.

 

성경에 사도의 기준이 없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건 사도의 기준이 되는 법이 자기 안에 없기 때문이다. 이걸 신학이라는 학문으로 정의하려 드는 건 정말로 무식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도의 기준은 무엇인가? 제자들과 바울 그리고 그 이후에 여러 사도들을 사도로 정의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그건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느냐?’ 그리고 그걸 전하느냐?’가 사도의 기준이자 제자의 기준이다. 이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사도로 칭하는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의 뜻을 보면 된다.

 

사울이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행 9:22)

 

바울로 개명하기 전 사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에게 예수는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이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밖에 없었는데 그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전했다는 게 그의 사도로서의 직분을 증명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역시 다르지 않다. 그들이 사도이자 진정한 제자인 것은 예수님을 직접 따라 다녔기 때문이 아니다. 아주 많이 언급했듯이 제자들 역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걸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오순절 이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목숨을 다해 전했다.

 

사도의 자격은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전하는 것이다.

 

사도의 자격은 단지 바울과 베드로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모든 사람의 문제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나에게 사도들이 전한 것처럼 전할 같은 복음이 있느냐의 문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있느냐의 문제다.

 

이 문제에 있어 기독교인 대부분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게 단순하지 않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성공해서 높이 올라가기를 기도하는 것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는 건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한 화살과 같아서 절대 같은 믿음이 될 수 없다. 자신이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고 자기가 어떤 예수를 믿는지 솔직하게 시인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높이 오르려고 한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는다. 또 십자가는 차비를 대신 내는 것과 같은 희생이 아니다. 자기가 낮아지는 것이 본성이 되는 것이고, 낮고 겸손한 마음이 하나님께 있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자기와 같은 사람이 창조되었다는 걸 믿는 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되는 일이다. 제자들의 변화가 이를 잘 설명한다는 건 여러 차례 설명했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질 수 있는지를 믿지 못했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이 오시자 완전히 달라져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전했다. 우리는 그 과실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어야 그 과실을 누리는 것이지만.

 

결론적으로 사도의 자격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성령을 받는다는 건 방언을 말하고 병자를 고치는 능력을 얻게 되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부수적인 것들이다. 성령 강림과 충만의 본질은 높아지기를 앙망하는 사람이 스스로 믿고 고백할 수 없는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바로 읽고 묵상한다면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이 믿음은 곧 성령의 강림이며, 성령으로 거듭남이다. 거듭남은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것이고, 그 생명의 본성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다. 이것이 사도의 자격이자 제자의 자격이며, 무엇보다 이것이 삶의 근본 목적이고,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의미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본분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으로서 그 본성대로만 사는 삶을 살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전하시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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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못지않은 사도행전의 또 다른 주제는 바로 <교회>. 사도행전의 흐름으로 본다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워 앉은뱅이가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기뻐 뛰었던 일 후에 본격적으로 교회가 어떤 곳인지 말씀하신다.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대제사장의 송사를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갇혔을 때 성도들이 기도했고,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난 일 후에 서로 물건을 통용했다는 말씀으로 교회가 어떤 곳인지 말씀하신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지금으로선 꿈같은 생활을 했다.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모든 것을 나누어 사용하는 삶인데, 이 말씀은 공산주의 이론을 창시한 자들에게 공산 사회주의의 몽상을 가지게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공산주의자들이 역사적으로 이렇게 심각한 오류를 범한 결정적 원인은 성경의 행간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로 읽었고 사회에 대한 자기 불만을 해소하는 이론적 명분으로 성경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다른 거 볼 거 없이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만 병행해서 봐도 공산주의 같은 쓰레기 이론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어리석은 공산주의자들만 성경의 껍데기만 본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금의 순도를 표시할 때나 사용할 법한 수치의 확률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교회 역시 사도행전이 설명하는 교회와는 다른 교회다. 기독교인 대부분은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와 완전히 다르다는 말에 금방 동의하지 않겠지만,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와 지금의 교회는 형성의 방향성과 정체성이 완전히 반대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정체다.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는가가 핵심인데, 그 모인 사람의 정체에 따라 교회를 형성하는 과정과 법도 완전히 달라진다. 이 차이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어떤 것을 믿는 하나님께 간구하느냐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기 때문이다.

 

어떤 하나님을 믿고, 어떤 것을 믿는 하나님께 간구하느냐가 교회의 온전함을 증명한다.

 

교회는 모두가 동의하듯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므로 핵심은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구약성경 속 이스라엘은 늘 여호와 하나님을 불렀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기만 하셨다. 어린아이가 길에서 아빠, 엄마라고 부른다고 상대가 엄마나 아빠가 되는 게 아니듯이 사람이 부른다고 하나님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에 맞게, 온전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불러야 하나님이 된다. 어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였는가가 교회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사도행전을 통해 설명하는 교회의 성도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다. 여기서 다시 성령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게 하는 성령을 받아 거듭난 사람들의 공동체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고, 그런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지금의 교회들이 동경하는 초대교회다. 여기서 핵심은 바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다. 이건 아주 중요한 핵심이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초대교회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라는 건 많은 걸 시사한다. 교회의 성도들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하나님께 간구하는지가 결정되고, 교회는 어떻게 형성되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지를 결정한다. 이런 결정 사항은 드러나기 때문에 의외로 구별하기 아주 쉽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교회를 보자. 교회에 모인 성도들은 낮고 천한 걸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낮고 천한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는다는 건 나도 그런 사람이 되는 게 구원이라고 믿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겠다는 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 혹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서 구원을 얻겠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시면서 심지어 우리에게도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낮고 천한 길로 갈 때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이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겠다는 건 예수님처럼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겠다는 뜻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이런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공동체인지를 살펴보면 교회의 정체성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너무나 솔직하고 당당하게 높고 위대한 걸 추구한다. 더욱이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높고 위대한 걸 간구한다. 한마디로 예수를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고 평안을 누리겠다는 소망을 이루려 한다. 이는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며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세상의 성공과 평안과 위대함을 소망하는 오늘날 교회는 초대교회와는 다른 교회다.

 

이런 성도들의 믿음과 정체성은 교회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교회의 정체성을 시작부터 초대교회와 완전히 다르다. 정체성이 다르니 아무리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며 신년 목표를 세워도 되지 않는다. 왜 초대교회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지 궁금해하고 아쉬워하지만, 높아지기를 소망하면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게 되는 기적이 일어날 리 만무하다.

 

많은 사람이 진정으로 바라는 참된 교회,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 같은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거듭난 사람 두세 사람이 만나 교제하면 그게 교회다. 여기에는 기적이 있다. 항상 높은 걸 추구하는 사람이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본성으로 거듭났으니 이게 기적이다. 이 놀라운 일을 위해 필요하면 초자연적 현상도 일어난다.

 

이 참된 교회는 굳이 목사라는 라이센스나 건물조차 필요하지 않다. 거듭난 사람이 카페에 만나 말씀을 나누면 그게 교회다. 우리 사회는 사람이 만나 교제할 수 있는 공간 인프라가 널리고 널렸다. 그렇게 만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을 나누고 위로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교회다.

 

이런 만남에서 사람이 동경하는 물건을 통용하고, 서로의 필요에 따라 소유를 팔아 나누었다는 교회가 시작된다. 교회의 필요, 성도의 필요는 높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낮고 천한 십자가로 가서 하나님 아들이 된다는 걸 믿는 기적을 위한 필요다. 이를 위해 필요하면 재화와 용역을 나누는 것이다. 재화와 용역을 나눈다고 교회가 초대교회 모습을 회복하는 게 아니다.

 

끝으로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베드로와 요한이 갇혔을 때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했다는 것에서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교회의 사도가 갇혔으니 당연히 그들의 석방을 간구했겠지만, 사도행전이 전하고자 한 교회의 모습은 그것보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이라는 것임을 강조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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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81 – 사도행전 정리 - 성령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2. 23. 09:11 Writer : 김홍덕

사도행전은 복음 전도의 역사이자 교회 시작의 역사며 성령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성경이다.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과 나라가 어떻게 복음을 누리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그 과정에서 사도들과 함께 하신 성령의 능력을 일깨우는 성경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역시 성령이다. 열거한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을 아는 건 단지 사도행전의 이해나 초대교회 역사를 이해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특히 하나님께서 어떤 신비한 능력을 행하시는지를 이해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사도행전과 성경에 기록된 신비한 기적들을 보며 '하나님께서 이런 기적도 행하시는구나!'라고 감탄한다면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능력을 사람에게 자랑하시지 않는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을 믿는다면 기적은 놀랄 일이 되지 않는다.

 

이제 사도행전을 마치면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건 성령에 대한 이해다. 성령이 어떤 분인지,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는 사도행전 초반에 아주 명확하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다만 사람들은 이 성경의 흐름과 의도보다는 성령이 행하신 기적 자체에 집중해서 성령의 정체성을 놓치고 있다. 이건 매우 아쉬운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가장 본질적인 직임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믿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를 믿게 하는 게 성령의 일이라는 게 당연하지 뭐 특별날 게 있는가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성령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게 한다. 이는 제자들의 변화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성령의 직임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게 하는 것

 

변화산에 오르시기 전 "내가 십자가를 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후 가룟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성경을 제대로 봤다면 제자들의 걱정은 여러 차례 예수님과 갈등을 빚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예수님께서 왕이 되면 누가 좌우에 앉을 것인가를 논쟁한 일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왕이 되리라 기대했는데, 정작 왕이 되어야 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진다고 하시니 양극단의 생각이 갈등을 빚은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정말 십자가를 지셨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은 어디 두고 힘없이 끌려가 매맞고 십자가에 달리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배신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나는 저가 누군지 모르겠다"라는 베드로의 말이 이 상황을 잘 설명한다. 베드로는 배신이 아니라 메시아가 어떻게 사람에게 죄를 받아 매를 맞고 있는지를 모르겠다고 한 것이다.

 

제자들의 갈등과 의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엠마오로 도망가기까지 했다. 도마는 못 믿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제자들이 가룟 유다와 달리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건 믿었기에 사도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승천하시면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오순절 성령이 오시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도망가던 제자들이 완전히 달라졌다.

 

성령이 임하시자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어떻게 십자가를 지는지 알 수 없었던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담대히 전하게 되었다.

 

성령이 오시니 제자들은 이전과 전혀 다르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전하기 시작했고, 이 말을 들은 사람들 역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며 회개했다. 달라진 건 하나뿐이었다. 제자들이 모여서 신학이란 학문을 만들어 공부했거나, 산에 올라 나무를 뽑을 정도로 기도한 게 아니라 단 하나 성령이 오신 그 하나가 달랐다. 성령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완벽히 보여주는 변화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는다는 건 어떤 것인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는다는 말 속에는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가 핵심이다. 십자가를 누가 지는지, 그게 어떤 의미인지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런 존재를 사람이 하나님 아들이자 세상을 구할 메시아로 믿을 수 있느냐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죄인, 그것도 사형시켜야 하는 극악한 죄인은 세상에서 더 이상 낮은 신분이 없는 가장 천한 신분을 가진 존재다. 이런 신분의 예수를 세상을 구원할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이다.

 

이건 세상에 속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은 높고 강하고 영화롭고 깨끗한 걸 추구한다. 그 갈망의 정점에 어떤 존재가 있어 그가 세상을 구원한다고 믿는다. 사람은 누구나 낮고 약하고, 천하며 추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걸 구원이라 여기며, 자신에게 그런 구원을 베푸는 존재를 메시아 곧 구원자로 믿는다. 따라서 구원자 메시아는 너무나도 당연히 지금의 내 모습보다는 더 강하고 영화로운 존재여야 한다.

 

그런데 죽은 자를 살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수가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는 예수가 능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고 황금 면류관을 쓰는 왕이 되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그런 자신을 믿어야 세상에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한 삶을 간구하는 신앙인은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도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다. 그들의 믿음은 다 거짓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건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성령은 바로 이걸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않으니, 성령을 기적으로 행하시는 분으로만 본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니 세상에서 성공하는 걸 하나님의 영광으로 아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성령이 임하지 않은 사람이니 성령을 바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체험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성령을 기적을 행하는 영으로만 안다면 성령을 체험한 적이 없는 것이고, 성령을 체험하지 않았다면 성령으로 거듭나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성령은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세상 가치관으로는 믿을 수 없는 십자가를 진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하시는 영이다. 이 고백은 오직 생명이 바뀌어야만 가능하기에 성경은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성령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고백하게 하는 생명을 가진 존재로 거듭나게 하신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렇게 거듭난 존재를 성경을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기적을 행하는 능력으로만 알면 구원이 없다. 성령으로 거듭나는데 성령이 누구신지 오해하고, 체험한 적 없으니 알지 못하니 성령으로 받는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사도행전에서는 이런 우리를 위해 성령을 바로 알려 주시고 있다. 높은 곳만 추구하던 우리가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고, 그 그리스도가 우리가 얻어야 할 우리 정체성이라는 걸 믿는 게 구원이다. 성령은 바로 그 일을 하시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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