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해 온 일곱 가지 복은 가난이나 애통처럼 스스로의 고백과 시인에서 얻는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복은 조금 다릅니다. 남이 나를 대하는 상황, 그것도 칭찬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곱 가지 복이 나에게 임했다면 이제 평안을 누리고 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기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받은 복이 진짜인지 검증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에 대한 핍박은 사실상이질감에 대한 공격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원어는디오코(διώκω)’인데, 사냥감을 추격하듯 끈질기게 뒤쫓고 공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 사울이었을 때, 믿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핍박했던 모습에서 그 의미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복을 받는다는 것은 이처럼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끝까지 배척해야 할 정도로 이질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가치는 언제나 위를 향합니다. 크고 위대한 것을 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금식 후 마귀에게 받으신 시험을 보면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기적, 다시 말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능력,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상하지 않는 초월적인 능력, 그리고 세상의 모든 권세를 얻는 것은 모두 위대함과 높아짐을 추구하는 가치의 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 육신을 내어주며 섬기는 겸손과 낮아짐의 본성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가치와 완전히 반대되는 가치입니다. 동물의 세계든 인간 사회든 집단이 형성되면 그 공동체가 추구하는 이익과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 부류는 언제나 배척당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이 세상에서 핍박받는 이유입니다. 비싼 자재로 화려한 교회를 건축하고 최고급 오르간을 설치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기는 가치관에 반하여, 진리는 오히려 낮아지는 데 있다고 말할 때 배척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핍박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핍박을 오해합니다. 예를 들어 회사가 바빠 주일 근무를 하기로 했는데, 교회에 가야 한다는 이유로 빠지겠다고 하여 직장 동료들에게 눈치를 받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핍박이 아닙니다. 특히 교회에 가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아 재산이나 건강에 손해가 생길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에 다니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를 통해 세상적인 성공을 얻으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쉬는 날 일하여 임금을 조금 더 받으려는 사람보다 오히려 더 간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핍박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 외에도 반복해서 핍박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였으므로 제자들도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고, 제자들을 공회에 세우고 끌고 갈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핍박은 그 정의 그대로 집요하게 따라옵니다. 많은 경우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사회 평균 이상의 도덕성을 갖게 됩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여전히 신앙인을 배척합니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오늘날 사회는 과거처럼 신앙 자체를 핍박하지는 않습니다. 칭송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용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신앙이 주는 이질감이 희석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핍박을 받아야 좋은 신앙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진실한 신앙은 분명 세상의 가치에 역행하며, 그로 인해 선명한 이질감을 드러내게 되고 결국 핍박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핍박이 이질감이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핍박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핍박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신앙의 증거로 삼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의 순도가 높아질수록 더욱 깊이 체감하게 됩니다. 성경을 더 밝히 알게 될수록, 이러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을 동반하는지도 깨닫게 됩니다. 교회도 세상도 모두 크고 위대하며 편안해지는 것을 가치로 여기고 추구하는 시대에, 낮고 또 낮은 십자가의 도를 말한다는 것은 핍박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핍박받는 사람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되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팔복의 시작에서도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같은 약속을 반복하여 확증하시는 듯합니다. 이는 핍박이야말로 우리가 어떤 나라의 백성인지를 드러내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천국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뜻이며,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욕하고 핍박하며 거짓말로 괴롭힐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빌라도의 뜰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당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선지자들도 같은 핍박을 받았음을 상기시키시며, 이러한 일을 당할 때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펴 본 팔복은 위로나 배부름 같은 복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사람에게 전하신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된 사람은 이런 상태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원래 그걸 목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모든 것인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라는 복을 받은 사람의 상태 혹은 정체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팔복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번 이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라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을 상기하면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 온 복들이 어떤 의미인지, 그 복은 어떤 사람이 받는 것인지 명확해 집니다.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셔서 인생을 주신 목적이 내 인생의 목적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서 유일한 복이라는 것을 알고, 그 창조 목적이 내 육신, 곧 내 삶이 되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산상수훈 역시 이 복된 사람, 제자이자 하나님 아들의 삶입니다. 그 말씀들 역시 ‘~하라는 말씀을 볼 게 아니라는 걸 팔복을 통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라는 곧 그렇게 행하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생명은 그런 것입니다. 자기 만의 독특한 본성에서 비롯한 행동과 표현이 있는 게 생명입니다. 이게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이 관점으로 산상수훈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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