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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예정론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3. 20. 20:24 Writer : 김홍덕

죄 사함의 집합에는 예정론이 있다.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특정돼 있다는 식의 생각인데, 예정론이 이런 법이라면 죄 사함은 특별한 의미가 없다.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굳이 어렵게 예수를 믿을 이유가 없는 셈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정은 개인을 특정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란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a man에 대한 예정이 아니라 the Man에 관한 예정이다. 하나님이 만든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아래에 있다.

 

하나님의 예정은 사람의 특정이 아니라 사람의 창조 목적에 관한 예정

 

예정론의 근거가 되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로는 로마서 829, 30절에 나오는 '미리 아신 자', 에베소서 14, 5절에 '창세 전에 택하사', 요한복음 644절의 '하나님이 정하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께 올 수 없다', 사도행전 1348'영생을 주기로 한 자는 다 믿더라'라는 말씀들이 있다. 행간을 읽지 않고 이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다 정해졌다는 느낌이 들기 십상이다.

 

예정론은 단지 사람에게만 정해진 것도 아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라는 개념도 나온다.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베드로와 요한이 핍박받을 때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기 위해 성(예루살렘)에 모였다고 했다.(4:28) 교회를 향한 뜻도 예정되어 있다.

 

하나님은 분명 사람을 향한 뜻을 분명히 예정하셨다. 하지만 그 예정은 개인을 특정한 예정이 아니다. 사람이란 존재에 관한 예정이다. 그리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다. 그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기를 바라시는 뜻, 그 하나다. 이 뜻이 바로 하나님의 예정이다.

 

앞서 언급한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면, 먼저 로마서 829, 30절에 나오는 '미리 정하신 자'는 특정한 개인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미리 정하신 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순종한 사람이다. 사람이 되어야 하는 표상을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정한 건 사람의 창조 목적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사람의 모습과 정체성에 부합한 사람이 바로 미리 정하신 자다.

 

하나님이 예정한 건 사람의 정체성

 

그리고 어쩌면 예정론을 오해하게 한 에베소서 14, 5절의 창세 전에 정한 사람은 건축에 있어 어떤 집을 짓겠다는 주인의 마음 같은 것으로, 사람이 되어야 하는 모습이자 정체성을 말한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건 온전한 사람의 모습, 성품, 정체성이지 특정 개인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자기 존재의 목적인지 순종하면 바로 예정된 존재가 되는 법이다.

 

이어 요한복음 644절의 하나님이 정하시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께로 올 수 없다는 말씀과 사도행전 1348절의 '영생을 주기로 한 자' 역시 같은 맥락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을 정의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구원받을 방법이 없다. 무엇이, 어떤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인지 미정인 상태에선 구원이 없는데, 그 기준이자 표상으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의 영생을 주기로 한 자 역시 특정한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로 했다는 게 아니라, 누가 영생을 얻는지를 생각하면 된다. 성경에는 어떤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지 너무 많은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에 순종한 사람이 바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영생을 주기로 한 자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으니, 영생을 주기로 한 자는 바로 하나님과 예수를 아는 사람이 바로 예정하신 사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하나님의 예정이 사람의 정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예정이라면 그 예정은 곧 우리 구원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갖고 창조한 존재며, 그 목적은 곧 예정이기에 우리가 그 목적에 합당한 존재가 되는 것이 구원이고, 그 자리를 벗어난 상태는 죄다. 따라서 자리의 회복, 예정하신 존재로의 회복이 바로 죄 사함이다.

 

성경은 이 회복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얻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그러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무의식적 믿음처럼 노력이나 신념으로 되는 게 아니라 생명이 바뀌는 거듭남으로만 된다. 그렇게 바뀌는, 거듭나야 하는 생명,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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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죄 사함 -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3. 19. 14:00 Writer : 김홍덕

죄 사함은 인생의 목적 회복

사람들에게 죄 사함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의 회복이라는 게 생소할 것인데 이유는 크게 둘이다. 하나는 죄를 존재가 아닌 행위적 측면으로 확신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인생의 목적을 자기가 정하기 때문인데, 그마저도 종국에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고백한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고백한다는 건 그나마 솔직한 인생일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이 자기 존재와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어두움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어두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인생의 목적을 보여 주셨다. 그게 보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십자가로 인해 사해졌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십자가는 그리스도 구원의 핵심이라는 걸 안다. 십자가로 인해 모든 인생이 구원을 얻었다. 이건 명백하다. 그렇다면 죄 사함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십자가의 의미도 달라진다. 잘못되고 범법한 행동이 죄라고 믿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단지 형벌이다. 죄는 내가 범하고 벌은 예수님이 받은 게 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건 기독교의 정설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고착된 사람의 생각이다. 일반화된 이 교리는 늘 '수천 년이 지난 오늘 내가 범하는 죄를 미리 아시고 미리 사하셨단 말인가?'라는 도전을 피할 수 없고, 그 도전은 자연스레 '그렇게 미리 속죄할 게 아니라 죄를 예방하면 되지?', '하나님이 그만한 능력도 없는가?'라는 외통수에 걸린다. 그러니까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법은 이렇게 허술하지 않다. 온전하신 하나님 아닌가?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이 되는 건 우리 대신 받는 형벌이라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 모습을 이끄는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존재 목적이 그 모습이라는 걸 깨닫는 게 회개고 구원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도 모세가 광야에서 든 놋뱀처럼 자신이 높이 들려야 한다고 하셨다. 모세 시대에 놋은 거울이었다. 그러니까 놋으로 만든 뱀을 볼 때 구원을 얻는다는 건 자기 모습이 뱀과 같이 하나님이 되려는 존재라는 걸 발견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4)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의 표상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과 달린 모습 그리고 부활과 승천까지 일련의 과정은 모두 회복해야 할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의 모습이자, 하나님의 목적이 본성이 된 사람의 삶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건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의 사람이란 뜻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회복할 정체성이며, 예수님이 보여 주신 대로 나의 정체성과 인생의 목적이 회복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떠난 죄가 사해진 것이다. 이건 다시 회개할 필요 없는 온전한 관계 회복이다.

 

죄 사함을 이렇게 온전히 아는 것은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 성경의 말씀대로 우리의 회개는 단번에 드린 제사가 되고, 하나님께서 다시 죄를 생각하지 않는 흠 없고 순결한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이탈한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즉 더 이상의 회개가 없는 온전한 사람이 된다. 만약 이게 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구원받았다면서 날마다 회개해야 하는 죄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 죄가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가고,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정체성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이렇게 죄 사함이 정체성의 회복이라는 걸 알면 발을 씻는 것과 몸을 씻는 것의 차이도 분명하다. 이건 아주 중요한데, 우리가 다시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법을 설명하고, 또 어떤 회개를 할 것인지도 아울러 설명한다. 정체성의 회복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사람이 정체성을 회복한다는 건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이 두렵거나 부끄럽지 않은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더 이상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지 않아도 되는 떳떳한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그의 삶의 본질이 되면 하나님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 , 창조 목적이 육신이 된 하나님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염려할 필요는 없다. 아들이 아무리 잘못을 해도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가 끊어질까 염려하진 않는다. 유전적으로 그럴 수 없다. 이런 완전한 회복이 바로 하나님 앞에 얻는 죄 사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떠난 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여 돌이켜 자기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게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단번에 드리는 제사요, 모든 죄를 도말하신다는 말씀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떠나 자기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인생을 자기 것으로 알아 살아가는 죄라고 하심을 알고, 그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회개로 안다면 우리는 다시 회개할 일은 없다. 우리가 원하는 죄 사함은 바로 이것이며, 우리가 원하는 구원이 바로 이것이다.

 

다시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사함이고, 구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행위를 보기 때문이다. 자기 행동이 늘 법을 어기고 불순종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행위를 의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걸 상기시킨다. 행위로 인한 죄책감은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의 기준이지 하나님의 기준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과연 더 이상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가?',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지 않는가?'라고 염려한다. 심지어 '이건 구원파의 논리인가?'라고 걱정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염려를 미리 아셨다. 베드로가 발 씻기기를 거절할 때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목욕했다는 건 성경적으로 정결케 했다는 것이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정결은 존재의 회복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란 죄 사함은 더 이상의 회개가 없다.

 

발을 씻는다는 건 행동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다. 이걸 비유하자면 아버지와 아들의 불변적인 유전적 관계는 목욕한 정결이고, 아들이 이런저런 행위로 아버지께 불순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들이 행위로 지은 불순종으로 아버지와의 불변적 관계를 헤칠 수는 없다. 그런 법은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아들로 거듭나는 게 이만큼 중요하다.

 

더 나아가서 그럼 아들이기만 하면 서슴지 않고 악행을 범해도 되느냐의 문제가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일상으로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도둑질이나 악행을 저지르는 걸 일상으로 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낮아지는 본성인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악행은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생명은 낮아지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다. 자기가 진정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거듭난 사람은 악행을 자행할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거듭나기만 하면 악행을 저질러도 되느냐?"며 질문하고, 염려한다. 이건 아주 확실한 증거다. 진정 자기가 거듭난 사람인지 가늠하는 증거다.

 

발만 씻으면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거듭난 삶을 살면 무슨 뜻인지 자연스레 알게 되는데, 불순종에 대해 회개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성품을 표현하는데 부족했던 것, 미흡했고,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을 돌아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존재에 관한 회개가 아니라 좀 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이건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를 벗어난 죄의 회개와 전혀 다르다. 거듭난 삶을 살아보면 아주 분명하게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죄를 범했는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게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어떤 회개를 해야 하는지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리가 회복되어야 할 온전한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모습이라는 걸 알고, 그 모습이 나의 인생이 되기를 고백해야 한다. 그게 죄 사함이고 온전한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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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죄 사함 -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3. 18. 16:56 Writer : 김홍덕

어떤 죄의 사함을 받는 것인가?

죄 사함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근본적인 이유다. 오늘날 신앙인들에겐 그것보다 삶의 복을 얻는 게 더 중요하게 보이긴 하지만 사람이 신앙을 어떻게 생각하든 신앙의 본질은 죄 사함이다. 죄 사함에 있어 죄를 불순종과 같은 행동으로 보는 사람에게 실감이 나진 않겠지만 죄가 사해진다는 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생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걸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바의 회복인 만큼 우리에게도 중요하고 하나님께도 중요한 문제다.

 

죄 사함에서 생각해 볼 것은, 먼저 어떤 죄를 누구에게 사함을 받느냐는 것과 또 꼭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먼저 누구에게 어떤 죄 사함을 받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죄 사함은 우선 사함을 받을 죄가 명확해야 한다. 살인죄를 범한 사람에게 절도죄를 사하는 게 의미가 없듯,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하나님께 사함을 받는 죄는 사람이 하나님께 범한 죄이어야 하고 또 그게 하나님이 보실 때 분명히 죄라야 한다. 사람이 아무리 죄라고 우기고 믿어도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지 않을 수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현실은 그게 혼합된 상태다.

 

사람들은 행위를 기준으로 죄를 판단한다. 하지 말라고 한 걸 하는 것, 하라고 하는 것을 하지 않은 걸 죄로 생각한다. 행위로 죄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데, 그건 행위가 선악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는 뜻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의 쟁점은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죄에 대한 기준이 명확히 다르다. 하나님은 존재를, 사람은 행위를 본다. 하나님이 보시는 죄에 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다. 죄는 자리를 떠난 것, 존재의 정체성을 벗어난 상태의 정의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야 할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선악을 판단하여 삶을 결정하고 살아가는 상태를 말한다. 그 상태에선 남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어도 소용이 없다. 이건 아주 선명한 하나님의 뜻이고 또 말씀이다.

 

죄는 존재 목적을 벗어난 상태

 

행위를 죄로 판단하는 건 사함에도 한계가 있다. 행위로 인한 죄를 사하는 방법은 형벌의 면제뿐, 이미 행한 행위는 되돌릴 수 없다. 회개란 가던 길을 돌아서는 것이지만 행위로 죄를 판단하면 그럴 수 없기에 완전한 회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기억은 죄 사함을 받았다면서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하여간 행위 기준으로 죄를 판단하는 건 분명 하나님의 기준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전 장에서 이야기했듯이 하나님 앞에 사람의 죄, 근원적으로 선악과를 먹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진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 사함이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걸 회개해야 제대로 사함을 얻는다.

 

그리고 이 죄 사함에는 온전한 회복이 있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에서 떠났다가 돌아오면, 돌아온 탕자처럼 언제나 그랬던 것 같이 아들로 회복된다. 온전한 회복이 있는 회개가 있는 세계다. 아울러 새롭게 되었다는 말씀에도 부합된다.

 

사람의 창조와 존재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죄 사함

 

다만 이 새로움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격이 있는 누군가가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사람에게 보여 주고, 전해 주어야 사람이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일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존재 목적을 회복한 사람의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죄 사함의 핵심이고, 열쇠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의 모습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은 걸로 생각한다. 행위를 죄를 판단하는 대상과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바와 같이 행위로 범한 죄에 대한 사함은 완전한 회복이 아니라 형벌의 면제 정도일 뿐이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죄 사함은 형벌의 면제나 대속함이 아니라 우리 존재 정체성의 회복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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