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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가 된 에스더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스더 Date : 2025. 1. 11. 22:03 Writer : 김홍덕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킨 아하수에로는 신하들의 말대로 새로운 왕후를 얻는다. 왕정 국가에서는 후사를 잇는 건 중요한 일이다. 에스더서는 이 당연한 일에 우리 구원의 법을 입혀 설명하고 있다. 절대자의 배필이 되는 에스더는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존재의 신부가 되는 우리의 길을 설명한다. 정확히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표현하는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라는 의의 형식이 되어야 하는 우리의 존재 목적에 관한 말씀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성경이 말하는 남자와 여자의 의미와 의도를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 성경은 육신의 성별을 기준으로 누가 더 의롭고 주관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책이 아니라는 걸 주목해야 한다. 언뜻 보면 성경은 아주 가부장적이고 남성 우월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단언컨대 성경이 그렇게 보인다면 당신은 눈에 보이는 걸 본질로 보는 사람이고, 성경의 행간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대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영이시다. 영이라는 건 마치 짝사랑하는 마음과 같아서 존재를 알 수 없다. 말이든 행동이든 표현해야 상대가 알 수 있다. 그와 같이 영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형상을 만들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맛보라고 우주와 만물을 만드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성품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겸손의 성품도 있다. 이걸 표현하기 위해서 만든 게 바로 사람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건, 하나님이 사람처럼 생겼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이자 담아내는 그릇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건 우리 육신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다. 육신의 남녀 또한 이런 법을 설명한다. 남자는 의와 능력에 치중하고, 여자는 외모와 형식을 중히 여기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영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표현할 형식으로 사람을 만드신 법으로 남자와 여자에게 역할을 주신 것이다. 이는 남녀의 관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이런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사람은 이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는 게 존재로서의 구원이다. 존재는 존재 목적에 부합하는 게 구원이다. 선수가 발로 차지 않는 축구공은 깨끗하긴 하지만 존재 목적으로 보면 멸망 당한 상태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할 때 구원받은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의와 뜻은 표현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재해야 하고, 그 말씀이 본성이 되어야 한다. 본성은 생명에만 있으므로 거듭난 생명이 되어야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도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 생명이 되었을 때를 말한다. 성경대로 살려고 부단히 애쓰는 건 본성으로 살아내는 게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남녀의 관계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장가드는 게 된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호 2:19.20)

 

절대자의 아내 곧 왕후가 되는 에스더는 이런 우리 모습을 보여준다. 에스더 시대에 아하수에로는 절대자다. 이방인의 왕에게 시집가는 걸 어떻게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걸로 비유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아하수에로라는 육신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절대자라는 그의 상태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우리에게 절대자는 바로 하나님이다. 아하수에로에게 왕후가 필요했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도록 만든 육신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은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때 구원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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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대하는 아름다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스더 Date : 2025. 1. 10. 10:20 Writer : 김홍덕

에스더는 다소 소설 같은 분위기지만 신학자들의 분류로 역사서다. 역사 사기 정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에스더 역시 우리 구원을 말씀하시는 성경이다. 아하수에로의 왕후 와스디의 모습은 첫 번째 아담과 같은 우리 옛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에스더는 구원받은 새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에 대한 말씀이다.

 

왕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싶었던 아하수에로 왕을 실망하게 한 와스디의 모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을 버린 사람의 모습 그대로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사람이 표현해 주기를 바라는 모습이 있다. 사람이 와스디처럼 이걸 거역한다면 벌 좀 받고 끝나지 않는다. 왕후가 폐위되듯이 사람이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이게 에스더서의 교훈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건 사람에겐 선택사항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바라시는 바를 이루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즉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와스디에세 바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건 사람의 존재 목적 그 자체다. 창조주가 정한 존재의 목적을 상실하는 건, 설계자의 의도를 벗어난 공산품과 같아서 그냥 폐기된다. 이건 가혹한 게 아니다. 섭리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건 사람에겐 존재의 목적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건 어떤 것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했다. 형상은 이미지다. 성경 원문에 실제 image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할 형식으로 육신을 가진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아들을 보면 그 아버지가 누군지를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의외로 낮아지는 마음, 겸손과 자비와 섬김이다. 사람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랑과 자비와 겸손하신 분임을 알게 하겠다는 것이다. 사람은, 특히 기독교인들은 그래 하나님은 그런 분이지!”라고 어렵지 않게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그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사람은 늘 위대하고 높아지는 걸 추구하고, 그런 것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신 것들을 순종하지 않고 있다. 순종하고 있었다면 당연하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 사람이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걸 성경은 대속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대속은 차비를 대신 내어 주듯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은 일이 아니다. 와스디가 거부했듯 우리가 외면한 우리 정체성이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낮고 겸손한 마음이다. 정말로 이걸 믿는다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성공을 구하는 패역한 기도는 이제 그만하는 게 좋을 듯하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자랑하고 싶어 하시는 건 낮은 마음이 본성인 사람의 삶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낮은 마음을 원한다. 다만 노력으로 이룬 낮은 마음을 원하시는 게 아니다. 천국에서 황금 면류관을 얻을 목적으로 낮아지는 것이나 세상에서 복을 받겠다는 목적으로 낮아지는 건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낮아지기를 노력하고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본성이 낮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 구원이 거듭남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성이 바뀌려면 생명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낮아지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되려고 마음을 다잡고 노력하는 게 일반이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노력은 한계가 있고, 모든 순간, 모든 상황에서 뜻한 대로 되는 게 아니다. 언제나, 쉬지 않고, 항상 낮은 마음으로 사는 유일한 방법은 마음이 낮은 생명으로 태어나는 방법뿐이다. 그래서 거듭나야 구원을 얻는다.

 

노력으로는 얼마간 낮은 자세를 보일 수 있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다.

 

비록 사람이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습대로 살지 않는다. 심지어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서라도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바란다. 와스디처럼 하나님께서 원하는 뜻을 버렸다. 절대적인 비중으로 낮은 자세로 살았다고 해도 한 순간 높아지려는 본심을 드러냈다면 아무 소용 없다. 이건 율법과 같은 법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존재지 낮아진 모습, 낮은 자세로 살아간 순간들의 모음이나 공로가 아니다. 존재가 바뀐 게 아니라면 하나님의 뜻을 버린 것이다. 여기에는 자비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낮은 마음이 본성인 사람이 되기를 스스로 버리고, 높아져서,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로 마음을 정한 증거는 세상에 넘친다. 교회는 화려해지고, 그 화려해진 교회에서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의 간증이 넘쳐나고, 설교는 그런 성공을 위해서 낮은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라고 외치고 있다. 모두 단결해서 와스디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와스디처럼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에스더서를 통해 엄히 말씀하신다. 바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버린다는 걸 사업이 망하고 건강을 잃어버리는 일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집에서 용도와 목적을 상실한 물건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쓸모없는 존재는 존재 가치를 상실한다. 그에 대한 처분은 폐기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버리신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능동적인 주체로써 사람에게 어떤 일을 행사하시는 것 같지만, 실상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버린다. 존재가 자기 존재 목적을 선택할 의지가 있는데 그 목적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건 스스로 자기를 망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스스로 굴러가지 않겠다고 정했다면 당연히 버림을 받는다.

 

이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에덴에서 추방된 일로도 설명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리력을 행사해서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한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에덴동산이라는 말은 만족의 동산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면 늘 자신을 정죄하므로 만족할 수 없게 된다. 이건 우리가 다 아는 본성(옛사람의 본성)이다. 우리가 스스로 정죄하고 있다는 건 구원받았다면서 회개하는 모습으로 증명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지금의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 높고 위대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어리석고 어두운 생각에서 돌아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와스디처럼 버려질 것이다. 에스더서의 시작은 이 법을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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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는 다니엘 성경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니엘이 예언한 대로 바벨론이 멸망하고 세워진 페르시아(메데-파사) 때의 일이다. 에스더에 나오는 아하수에로는 바벨론의 벨사살 왕을 멸망시킨 고레스의 아들이다. 그리고 에스더는 그의 아내 곧 왕후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문구는 에스더의 말이다.

 

에스더는 다음과 같은 6가지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1. 먼저는 아하수에로가 베푼 잔치에 왕후인 와스디가 왕의 청함을 거절함으로 폐위되는 일
  2. 다음으로 에스더가 왕후가 되는 과정
  3. 모르드개가 반역을 알아내어 미리 막는 사건
  4. 하만의 실권 장악과 그에 굴하지 않는 모르드개로 인한 갈등
  5. 모르드개를 비롯한 모든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하만의 계획과 이를 막아내는 모르드개와 에스더
  6. 무림절의 제정과 규례

 

그렇다면 이런 일련의 사건과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마음과 뜻은 무엇인가?

 

재밌게도 에스더는 육신으로 남녀의 지위 차이, 그러니까 페미니즘이나 여성 해방 혹은 진보적 정치 성향의 사람들이 경기를 일으킬 내용으로 시작한다. 왕인 남편이 부르는 자리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비를 폐위하는 일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폐위의 명분이다. 왕의 명을 거역했다는 게 핵심적 이유가 아니라, 남편이 부르는 데 오지 않은 왕후를 벌하지 않는다면 모든 가정에서 남편이 무시당할 것이라는 게 쟁점적 이유다.

 

왕후 와스디의 폐위는 가부장적 세계관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잠시 오늘날 시대적 상황을 보면 젠더 갈등이라는 부인하기 조금 어려운 시대적 갈등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 갈등의 한 축인 페미니즘이나 여성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아하수에로의 아내이자 왕후인 와스디가 단지 왕이 부르는데 오지 않았다는 일이 나라의 모든 가정에서 남편의 권위가 추락하는 명분을 주므로 폐위시킨다는 게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남녀 이야기는 육신으로 남자,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성경 속 남녀 이야기를 육신의 성별에 따른 이야기로 보는 건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 신앙이고, 외모로 사람을 판다는 것이며, 글의 행간을 읽지 못하는 어리석은 관점이다. 이 어리석은 관점이 하나의 교단이 되어 있기도 하다.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개념 때문에 주목받는 그들의 교리는 안타깝지만, 성경의 행간을 읽지 못하는 건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놀랍게도 에스더서 1장에서 이방인의 왕인 아하수에로는 하나님의 역을 맡은 배우고, 왕후인 와스디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사람의 모습 그 자체다. 게다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여성성을 가진다. 이 사건의 구조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게 창조한 사람에게 그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했으나, 자기 의를 좇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주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잠깐 성경 속 남녀의 의미를 살펴보자.

 

성경에서 남성은 의를 가진 존재를, 여성은 형식을 가진 존재를 뜻한다. 따라서 여자가 더 온전한 복음을 가지고 남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육신은 여자지만 성경이 말하는 남성이 되고, 말씀을 듣는 남자는 육신은 남자지만 성경이 말하는 여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의 본체이기에 아버지 하나님이 되고, 신랑 예수가 되는 것이지 육신으로 남자의 우월성을 성경이 보장하고자 함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고 성경을 봐야 한다.

 

이 관점을 이해했다면 에스더를 시작하는 시점에 기록된 원래 아하수에로의 아내이자 왕후였던 와스디의 폐위 이유를 알 수 있다. 더 분명하게는 성경이 이 일을 기록한 이유, 이 일로 우리에게 주시려는 교훈을 알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설명한다. 다시 한번 이건 남자의 말을 순종하지 않은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한다.

 

따라서 왕후 와스디는 개인적 일탈이나 모는 성격은 화를 부른다는 걸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 일로 왕후를 본 나라의 모든 아내가 남편을 거역할 것이라는 주장으로 폐위하는 남성 우월주의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이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무엇보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 곧 뜻에 대한 사람의 순종에 관한 말씀이다.

 

아하수에로는 와스디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가 베푼 연회에서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의 이 마음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기대하고 보시기에 좋았던 사람의 모습을 사람에게 기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런데 사람은 와스디처럼 그 마음을 배신했다. 그 결과는 와스디가 폐위되듯 만족의 동산, 곧 만족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사건이고, 어떤 성경인지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시기에 좋은 모습을 기대하신다. 그러나 사람은 와스디처럼 이를 거부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그게 어떤 모습인지 우선은 궁금할 텐데 결론적으로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보고 내가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보듯이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모습을 기대하신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모습이 아하수에로가 자랑하고 싶은 듯 아내 와스디의 모습처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대하는 모습이다.

 

사람은 와스디처럼 그 모습을 상실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기로 순종할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 자기 의지로 순종한 게 아니라 아바타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않는다. 게임할 때 치트키를 쓰면서 하면 의미 있는 재미가 없는 것과 같다. 그렇게 주신 의지로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걸 선택했다. 문제는 그 선택으로 이른 사람의 정체성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다.

 

이렇게 와스디처럼 첫 번째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났다. 에덴이 만족이라는 의미므로 만족을 상실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자기 삶에 만족 없는 사람의 모습, 그게 바로 에덴에서 쫓겨난 모습이다. 역설적으로 사람이 만족 없이 산다는 건 모든 사람이 죄인인 증거다. 그래서 다음으로 두 번째 아담이 왔다.

 

어쨌든 하나님은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보시기에 심히 좋은 모습을 기대하신다. 에스더가 두 번째 왕후로 위를 받는다는 건 결국 하나님 앞에 여자인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에스더서는 바로 이런 성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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