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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을 이기려면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처럼, 사탄을 이기려면 사탄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의도와 다르게 믿도록 하는 악령과 그 생각이며,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까지 사탄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은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어둡게 하는 존재다. 이걸 모르고 마냥 "사탄아, 물러가라!" 외치는 것으로는 사탄을 이길 수 없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탄의 또 다른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적그리스도가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적그리스도는 사탄의 사병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적그리스도 역시 하나님 아들을 부인하고 올바로 알지 못하게 하는 영을 따르는 존재기에 당연한 관계다. 그리고 성경은 적그리스도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면 그게 바로 적그리스도라고.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요2 1:7)

 

적그리스도를 포함한 사탄 일당이 추구하는 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그리스도는 존귀한 존재이므로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걸 부인하고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이 둘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부인한다는 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뜻을 부인하고 믿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곧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부인하고 믿지 않는 것이 사탄이다.

 

따라서 사람이 일반으로 생각하는 육신과 삶을 괴롭게 하고 망하게 하는 건 사탄이나 마귀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니까 사탄이나 마귀를 그런 존재로 안다면 이길 수 없다. 사탄을 이긴다는 건 결국 예수를 바로 알고 믿는 것이며,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존재, 곧 그런 생명으로 다시 나서 삶을 사는 것이다. 결국 온전한 구원을 얻으면 사탄의 방해 공작은 근원적으로 실패하게 된다. 사탄은 이렇게만 이길 수 있다. 목적 자체를 봉쇄하고 무력화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승리다.

 

온전한 구원이 사탄을 근원적으로 이기는 것

 

그렇다면 구원받은(받았다는) 사람이 사탄의 시험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건 자기만의 착각일 수 있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이 뜻하신 생명으로 사는 것이므로,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시험은 모두 이긴 것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구원을 얻었다면 더는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 사탄의 모든 공작은 끝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앙인들이 일상으로 사탄의 유혹을 말하는 건 근거가 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항상 강조하듯이 그리스도는 존귀한 모습이라고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자기도 귀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데, 이런 모습은 바로 사탄이 바라는 바이다.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나 실상은 사탄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기에 늘 사탄과 밀당하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사탄을 이길지를 궁리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모습도 이제는 교리가 된 지경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걸 믿는다는 건 육신을 가진 나도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자기는 아들이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자기는 예수님과 달라서 그리스도의 삶을 기록한 성경대로 살 수는 없고 노력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겸손을 가장한 불신이 바로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걸 부인하는 것으로 바로 적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사탄을 이기는 방법은 별것 없다. 그냥 온전한 구원을 얻으면 된다. 역설적으로 아직 사탄과 다투고,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기를 기도하고, 경계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고 다짐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는 사탄의 의도 속에 헤매는 것이다. 즉 구원도 없고 사탄도 이길 수 없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사탄을 이기는 간단한 방법은 하나님 뜻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다.

 

사탄을 이긴다는 건 곧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의 안에 거하는 것이며, 사도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항상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사탄의 유혹을 받는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사탄의 유혹을 받거나 이를 염려하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것이며, 그건 온전한 구원의 상태가 아님을 뜻한다.

 

결국 사탄을 이기는 아주 간단하고 유일한 방법은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 구원은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 밖에서 내 뜻대로 살던 삶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이 내 삶의 본성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거듭난 삶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보여 주신 대로 우리 육신이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삶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말씀대로 살 수 없을 수가 없다.

 

사탄과 마귀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것이다. 반대로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건 아주 간단명료한 하나님의 말씀과 법이다. 그렇다면 사탄을 이기는 것도 간단하고 명료하다. 바로 온전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아직도 사탄의 계략을 염려하고 넘어지지 않으려 하고 있다면 구원이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사탄은 한낱 장난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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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사탄과 마귀 (1) - 사탄이란?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5. 25. 23:07 Writer : 김홍덕

사탄이란?

사탄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신앙적으로 시험에 빠지게 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하며, 삶을 힘들게 하고 저주스러운 일을 겪게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는 신앙 세계에 한정된 관점만도 아니다. 대표적으로 영화 속 사탄은 사탄에 관한 사람의 생각을 그대로 보여 준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 쉽진 않겠지만 그냥 육신의 삶을 괴롭히고 망하게 하는 존재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사탄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우리는 몇몇 성경 구절을 통해서 사탄은 타락한 천사라는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런 성경 구절도 명확하게 사탄의 정체성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탄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분은 예수님이다. 특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우리가 되어야 할 표상이면 우리의 본이시므로 그분이 사탄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가지고 사탄에 관해 생각해 보자.

 

예수님께서 사탄을 처음 언급하신 건 40일간의 금식을 마치신 다음이다. 금식을 마치신 예수님을 시험하러 온 건 마귀라고 되어 있지만, 마지막 시험에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신다. (개역한글 기준) 이때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를 주겠다는 시험(유혹)"사탄아, 물러가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라고 말씀하신다.

 

또 하나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바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책망하신 일이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시기 전 제자들에게 '내가 십자가를 질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이를 만류하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도 바로 직전에 베드로를 그렇게 칭찬하셨던 예수님께서 돌변하다시피 바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셨다.

 

이 두 사건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존재 혹은 사람을 사탄이라고 하시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여기에 사람을 포함하는 건 사람이 예수님께서 사탄이라고 정의한 모습을 언제나 또 충분히 보여 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하는 건 처음에 언급했던 사탄에 관한 사람의 인식과 예수님의 정의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이게 아주 중요하다.

 

사탄에 대한 사람과 예수님의 정의는 다르다.

 

왜 이것이 다른가는 생각하면, 만약 사람의 생각처럼 육신의 삶을 괴롭히는 게 사탄이라면 예수님과 순교한 사도들은 모두 사탄의 계략에 당한 꼴이 된다. 부활하셨으니 이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하고 역전하는 것과 처음부터 사탄이 예수님과 사도들을 괴롭히지도 못할 존재로 인식하는 건 완전히 다를 뿐만 아니라, 십자가와 순교는 사탄의 계략에 당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화로운 일이므로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각처럼 사탄은 사람을 괴롭히는 게 목적인 존재로 한정할 수 없다. 물론 사탄이 나선다면 사람은 괴로움을 겪게 되겠지만, 그건 현상이지 본질이 아니다. 사탄은 사람을 괴롭히는 게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존재다. 그렇게 본다면 가장 본질적인 사탄은 아마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신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말하는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하신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를 통해 사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라는 사람을 사탄이라고 하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인지도 중요한 요소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하신 건 베드로라는 사람이 사탄이라는 건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건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걸 베드로가 부인하고 만류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세상의 심판을 받아 죄인이 되는 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주장한다면 그게 바로 사탄이라는 게 예수님 말씀의 본질이다.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바로 사탄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탄이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생각은 어떤 것인가? 이는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 곧 메시아가 목수의 아들 같은 모습일 리 없다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제사장들과 같은 맥락의 생각으로, 존귀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더욱이 그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세상의 존귀한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다. 이는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세 번째 시험과 결이 같다.

 

문제는 오늘날 신앙인의 모습인데, 이게 놀랍게도 다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한 사탄의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당연하게 여기기까지 한다. 이게 비판적인 의견으로만 들릴 수도 있는데, 가장 보편적이고 여기서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것으로 세상에서 성공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일반적인 신앙 가치관으로, 그리스도는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베드로의 생각도 이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너무나 보편적인 신앙 가치관이 바로 사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 안에 있는 낮은 마음으로 섬기고 겸손하며 사랑하는 성품을 표현하고자 하시는데, 사람은 하나님이 존귀하시니 그저 세상이 높고 귀하게 여기시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만 생각한다.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새로운 하나님을 조각하여 섬기는 신앙이니 당연히 사탄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역시 사탄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게 바로 사탄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을 괴롭히는 게 사탄이란 생각은 온전한 생각이 아니다. 사탄의 본질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계획하신 뜻에 반하여 하나님 아들은 세상에서 높고 귀한 모습이어야 한다고 믿고, 자기도 그렇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생각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게 바로 사탄이다. 이런 사탄의 본질을 모르고서 사탄을 이길 수는 없다.

 

(Next) 사탄을 이기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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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전서는 보기 드물게 책망보다 오히려 바울 사도가 위로를 받은 내용이 많다. 많은 환난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고, 바울 사도에 대한 신뢰가 컸으며, 지역 성도들의 본이 되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다시 데살로니가를 방문하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아들처럼 여기는 디모데를 대신 보냈다. 디모데를 통해서 행여 환난으로 인한 낙심이라고 있을까 확인했는데 오히려 굳건한 믿음에 위로를 받았다고 화답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바울 사도의 관계는 사도와 성도들은 이상적인 관계다. 귀한 복음을 섬기는 마음으로 전했고, 성도들은 그 복음을 진심으로 믿었다. 서로가 서로의 보증과 위로가 되는 진정한 관계가 형성됐다. 이는 바울 사도는 복음의 본질을 바로 전했고, 성도들은 그걸 온전히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살전 3:8)

 

복음은 놀라운 면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은 당연히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인데 막상 그 내용을 보면 낮아지고 섬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세상이 가진 개념과 상반된다. 세상은 귀하게 여긴다면 귀하고 높이 대하는데 복음은 그렇지 않다. 존귀한 하나님의 말씀이라 세상에서 가장 귀한 마음으로 열어보니 낮아지고 섬기는 것임에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바울 사도는 존귀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였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존귀함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일면 자기가 성도들의 대접을 받을 충분한 명분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는 그런 자격을 행사하지 않았다. 복음의 귀함은 바로 낮아지고 섬기는 것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낮아지고 섬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이고, 우리 인생의 목적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살전 2:7)

 

복음은 정말로 존귀하다. 진정으로 거듭난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의를 하나씩 알아갈 때는 마치 머리에 누군가 사이다를 쏟아부은 것처럼 생각과 삶에 큰 청량감과 감동과 만족과 감사와 기쁨을 느낀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라운 계획을 사람을 위해 행사하신다는 놀라움에 놀라고, 존귀한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그 감동을 진정한 존귀함으로 여긴다.

 

그래서 대부분은 복음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이를 모르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고 대비하여 자기를 존귀한, 최소한 존귀함을 간직하고 선택받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런 자부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자 하는 동력으로 가치는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고 죽는 순간까지 잊으면 안 되는 게 있는데, 그 귀한 하나님 복음의 본질은 낮아지고 섬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복음의 가장 근원적 본질은 낮아지고 섬기고 겸손하며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는 것!

 

앞서 언급한 대로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바울 사도의 관계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그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온전한 관계다. 복음 본질을 바로 알고 전하고, 그 복음이 온전하다는 걸 알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관계다. 이 관계는 상호 의존적이며, 서로 보증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그 복음을 받아 거듭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관계는 일반적인 관계처럼 보인다. 전하는 사람이 거저 주는 것으로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복음을 들은 사람이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복음을 전한 사람의 위로와 보람과 의미와 양식이 된다. 복음을 전한 사람을 살리고,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삶의 동력이 된다.

 

복음은 온전한 만큼 제대로 전해졌다면 사도와 성도 관계는 온전할 것

 

이런 온전한 관계가 되려면 앞서 언급한 대로 복음의 본질이 온전해야 한다. 즉 귀한 복음의 실체가 낮아지고 섬기고 겸손하며 사랑하는 것이라는 게 잊혀선 안 된다. 온전한 복음이 전해지고 그걸 듣고 살아가는 관계가 온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요즘 시대로 표현해서 목사와 성도들 간의 관계가 늘 개선점이 있고, 더 나아지기를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는 상태라면, 그건 복음이 온전하지 않아서거나 드물게 마음 밭이 온전하지 않아서 그렇다. 온전한 복음이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사람에게 전해지면 온전한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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