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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많은 환난을 이겨내고 마케도냐와 아가야 지역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그런 삶은 복음이 말로만 이른 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거라고 보증하고 칭찬한다. 본이 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삶은 성령이 능력으로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보증이다.

 

칭찬받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삶은 말에 있지 않고 성령이 주신 거라는 보증으로, 생각해 보면 신앙인은 누구나 원하는 하나님께 칭찬받는 삶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이런 삶은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믿음의 확신이다. 이런 확신은 자신이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택하심의 증거 혹은 확신을 소망한다. 택하심의 증거란 다른 말로 구원의 확신이다. 결국 구원의 확신은 자기 삶에서 얻을 수 있다는 걸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칭찬한 바울 사도의 칭찬과 보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오늘날 신앙인들은 이 확신을 말로 확보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말로 되는 게 아니라 성령으로 되는 일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말로 신앙의 확신이나 택하심의 증거를 얻으려는 사람들은 참 간절하다. 우선 말로 택하심의 증거를 삼으려는 노력은 아주 반복적이다. 자기가 구원이 확신이 있다는 걸 계속 상기하고, 반복적으로 말한다. 예를 들면 SNS와 같은 곳에 그걸 강조한다. SNS는 삶은 탈색된 말의 놀이터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신이 부족할수록 더 반복적인 성향을 띤다.

 

구원의 확신은 의외로 자기 확신이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성령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말씀이 삶을 살아가는 육신이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사람이 듣고 순종하며 소망한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잉태시켜 육신이 되게 하시며, 그렇게 말씀이 육신이 된 생명이 그리스도며, 그 과정을 <거듭남>이라고 한다. 결국 성령께서 사람 안에서 행하신 일의 증거가 사람에게 택하심의 증거가 된다.

 

더욱이 이는 생명 세계의 일이다. 생명 세계의 일이라는 건, 생명의 법과 생명이라는 속성을 따른다는 뜻이다. 성령께서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되게 하신다는 건, 바꿀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존재로 새롭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즉 구원의 확신은 구원을 확신하기 위한 간절함의 산물이 아니라, 구원을 부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말로 확정하려 노력하는 게 아니라, 부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

 

이런 분명한 말씀에도 사람들은 구원받은 지 수십 년이 지나서도 구원의 확신을 재고하는 이유는 성령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택하심을 자연인 한 사람을 특정한 선택이라는 생각 역시 하나님의 의와 성령의 직임을 바로 알지 못해서 비롯된 굳어진 오류다. 실존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한 존재다. a Man이 아니라 the Man을 선택하고 예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택하심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갈 때 예정하신 택하심을 얻는 것

 

사람은 이 예정하신 택하심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신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택하신 자는 생명,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는 생명,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택하신 존재다. 창조주에게 있어 피조물의 생명 기준은 창조하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되느냐? 이건 앞서 설명한 일련의 과정을 인정하고, 그 일련의 과정에 자신을 대입해서 '과연 그런가?' 양심적으로 비교하고 그렇지 않을 때, '내가 구원을 부인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니구나!'라는 솔직한 고백이 나오면 된다. 이게 쉬울 거 같은 데 잘되지 않는다. 구원을 부인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게 경험하지 못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성경은 이걸 시인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라고 약속하시고 있다. 다만 사람은 이걸 말로만 하는 것으로 알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말로 되는 일은 아니다. 세례 문답에서, 성경 공부 시간에 답하는 걸로 되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서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 성경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게 아닌데 구원받은 척, 확신을 갈구하며 반복적으로 뇌까리면 양심에 화인 맞은 게 된다. 없는 걸 있다고 우기니 구원받을 기회를 얻을 수 없다.

 

부인할 수 없는 확신이 없음에도 괜찮은 척하는 건 양심에 화인 맞은 것

 

구원과 복음은 말에 있지 않다. 말이라는 범위와 경계가 모호할 수는 있으나 적어도 말에 있지 않은 복음의 상태는 분명하다. 바로 삶인데, 이 삶은 살아가는 본인에게 확신을 주는 삶이다. 어차피 세상이 알기 어려운 삶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어야 보이는 삶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삶도 세상은 환난을 주었지만, 사도인 바울에게는 칭찬이 되었다. 이처럼 자기 스스로 부인할 수 없는 삶과 그 삶을 이끄는 내재한 본성이 구원과 택하심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이런 상태로의 전환을 이끄시는 분이 성령이다. 성령으로만 되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을 믿는다면 누구나 소망하는 택하심과 구원의 확신을 확인하고 싶다면, 나의 삶이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어떻게 봐도 내 삶이 성령이 이끄는 삶임을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면, 미안하지만, 당신은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여러 가지 말로 그것을 보장받으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다만 이걸 인정한다면 길이 보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덧없는 세월일 수밖에 없다. 구원은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온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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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회개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4. 19. 04:57 Writer : 김홍덕

구원은 하나님 은혜의 섭리다. 회개는 그 구원으로 가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자의적이고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유의지라는 것도 이런 이유로 사람에게 주어졌다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 맘대로 해도 되는 건 아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과 법과 계획 안에 있는 회개여야 한다. ,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는 상태에 자기가 있었다는 고백이 있어야 하고, 돌이켜서 가는 방향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해야 한다.

 

회개는 구원을 얻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능동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회개를 과거 관점에서 이해한다. 지난 잘못을 돌이키는 게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회개는 그 의미 자체가 가던 길을 돌아간다는 의미다. 잘못을 인정하는 건 출발이고, 본론은 이전과 다른 삶과 상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회개가 있었다면,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이 되었을 것이므로 이전과 같은 회개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마다 어제와 같은 죄를 회개하는 사람은 온전히 회개한 사람이 아니다.

 

이를 정리하면 하나님이 죄로 여기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의로 사는 생명이 되었다면 다시 회개할 일이 없는 게 합당하다. 이건 성경에만 있는 예외 조항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 견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약속하셨고, 생명이 바뀌면 이전 생명 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봐도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사람들은 날마다 회개한다. 이게 맞는 일인가?

 

십자가로 모든 죄를 사했다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면, 매일 회개하는 일이 있을 수 있나?

 

이런 모순에 매몰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고 오랫동안 예수 믿고 심지어 목사인데 그럴 수 있겠나 싶겠지만, 그게 아니면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십자가로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아직도 회개하고 있다면 하나님과 다른 세계에 있는 것 외에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죄로 여기는 걸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기에 아직도, 날마다 회개하는 것이다.

 

우린 지금 그 괴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다. 이 흐릿하고 불분명한 신앙 세계, 그렇게 흐릿하고 분명하지 않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안일함 그리고 다들 그렇게 하니 이렇게 온전하지 않은 믿음으로도 된다는 큰 낭패가 예정된 그릇된 확신을 바로 잡고자 외 회색 성경이라 명명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하는 건 앞서 언급한 그릇된 확신은 구원이 아니라 심판이라는 것이다.

 

다시 회개라는 주제에 집중해서, 회개해야 하는 죄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와 목적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목적으로 창조된 사람이 자기가 옳다는 걸 주장하고 성취하려는 삶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더 정확히는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거듭난 생명으로 나서 사는 게 회개의 본질이다. 자기가 아무리 교회에 다닌다고 해도 아직 회개하고 있다면 그건 최소한 본성이 바뀐 건 아니다. 본성이 바뀌지 않았다면 생명이 바뀐 게 아니므로 결국 회개한 게 아닌 셈이다.

 

이런 문제는 죄의 인식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은 행위를 기준으로 죄를 가늠하고 심판한다. 하지만 성경은 피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말씀으로 '하나님은 행위와 같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는다',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말씀은 행위를 바로 잡는 데 느끼는 한계를 면소하거나 완화하는 명분을 제공하는 말씀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원천적으로 행위로 죄를 판단하지 않는 말씀이다.

 

이렇게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행위로 모든 걸 판단한다. 하나님께서는 존재의 회개를 바라시는데 행위를 회개한다. 존재는 바뀌면 항상성이 있지만 행위는 그렇지 않다. 늑대가 양으로 거듭난다면 고기 먹는 게 뭔지도 모르는 존재가 되지만, 늑대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채식을 시도해 봤자 어느 순간 고기를 먹는 자기 모습에 다시 회개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물론 고기를 다시 먹는 순간 이전의 양이 되려고 채식한 노력은 다 허사가 된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행위를 바로 잡으려 해도, 본성이 바뀌는 희생을 치르신 하나님 앞에는 소용이 없다. 그래서 날마다 행위를 회개한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자기 행위를 교정하려고 해도 끊임없는 회개의 굴레에 머무는 이유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 자기 행위를 바꾸어 달라고 부르짖지만, 아들을 십자가에 보내시면서 생명이 바뀌는 근원적인 법을 보여 주신 하나님이 보실 때 어이없는, 오히려 조롱하는 기도일 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는 하나님이 원하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뉘우침 그 하나다.

 

온전한 회개는 내가 하나님이 원하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내가 하나님이 정한 목적 안에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그 하나를 돌이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육신이 된, 삶의 목적과 의미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그 하나를 뉘우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 아들로 거듭나는 이 하나가 바로 회개다. 그렇게 하나님 아들로 거듭난 사람들에게 행위의 잘못은 단지 하나님 아들답지 못한 행동에 대한 반성이지, 아들이 아니었다는 회개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하나님 아들이 아니었다는 회개 그 한번을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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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성령 충만한 삶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4. 8. 11:33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탁상공론이 아니다. 삶과 생활로 나타날 때 의미가 있다. 이건 물리적 형상이 없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성품과 실존을 표현하시려고 육신을 가진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기본 섭리다. 결국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에 수렴한다. 생명은 활동하고, 움직이고, 자신을 표현하는데, 이런 게 없다면 살아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삶의 경건을 늘 소망하고, 경건하게 살기를 바란다. 다만 그 소망은 생명의 본능으로 성취되는 게 생명의 법인데, 노력하여 이루려고 하는 건 큰 문제다. 하지만 오늘은 성령, 성령께서 잉태시킨 생명은 그 생명의 본성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이야기할 것이다. 그 삶이 바로 성령께서 이끄는 삶이다. '성령이 이끄는 삶', '성령 충만한 삶'이라는 말로 이를 많이 표현한다.

 

우리의 삶이 성령 충만한 삶이 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먼저 성령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성령이 임하셔야 하고, 임하신 성령이 충만해져야 한다. 끝으로 그 성령이 내 삶을 주관하여 인도하고 이끄셔야 한다. 이 모든 시작인 성령이 어떤 분인지에 관해서는 앞서 간략히 이야기했다. (블로그의 다른 글에 성령에 대한 설명이 많이 있다.)

 

성령 충만한 삶은 성령의 임재에서부터

 

우선 성령은 기적의 아이콘이 아니다. 성령은 들어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게 사실상 가장 크고 근본적인 기적이다. 성령이 이런 분이란 걸 알면 성경대로 산다는 게 노력이 아니라 거듭난 생명의 본성에 이끌려 사는 것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신앙인들은 성령을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시는 신비한 영으로만 생각한다. 이런 그릇된 생각으로 인해 성령 충만은 곧 기적을 행하게 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능력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겐 성령 충만과 기적을 행사하는 게 인생의 과업이 된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능력 행하는 데 자신이 없는 사람은 성령에 관해 무관심해지거나 그냥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라는 말씀을 뇌까리기만 한다.

 

성령은 또한 길 가다가 줍듯이 얻거나 받는 게 아니다. 성령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므로 그 생명의 본성에 맞는 자리에 임하신다. 우리가 집이나 사무실에 사용하는 물건도 대부분이 놓은 자리, 있을 자리로 공감하는 위치가 있다. 그런데 하물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정체성과 맞지 않는 사람의 심령에 거하실 리는 없다. 그런즉 성령이 임하시고, 충만해지려면 성령에게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에게만 임재하신다.

 

성령의 임재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거듭남이고 구원이다. 그리고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만나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어 만나야 한다. 즉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임하시지는 않는다. 성령이 임하시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인기척이 있는 하나님을 느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스스로 존재한 게 아니면서도 존재라는 걸 인식하는 사람에게 있어 스스로는 알 수 없는 게 있는데 바로 자기 존재의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창조주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도 여기 있다.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이 바로 우리를 창조한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만난다는 건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과 살아가는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조성한 목적과 의미를 깨닫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렇다면 '나를 찾고 찾으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네 인생의 목적을 찾으라는 의미도 된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고자 한다. 인생의 목적, 삶의 의미를 알려는 마음이 있다는 건 사람에겐 누구나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까 사람은 일부러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찾지 않아도 정말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고자 한다면 그게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렘 29:13)

 

이에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찾고 찾으면 만나시겠다고 많이 말씀하셨다. 인생의 목적을 찾는 것이기도 한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은 결국 존재의 하나님, 존재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사람들은 주로 인생의 문제, 가난과 질병에서의 해방이나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존재의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니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간혹 그런 것들을 찾다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이 있고, 버젓이 교회 강단에 서서 간증도 하는데, 단언컨대 그들이 만났다고 하는 하나님은 풍요의 신 바알과 아세라지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찾고 만나야 하는 하나님은 존재의 신, 여호와 하나님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신학적으로는 모음을 기록하지 않는 히브리어 특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정확한 이름, 즉 발음을 잊어버렸다고도 하는데, 그건 사실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 이름의 뜻은 모세에게 잘 말씀해 두셨다.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더라도 그 부르는 존재의 정체성을 '스스로 있는 자'로 인식하고 있다면 존재의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게 왜 중요한지를 알아야 한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건 존재하는 목적과 가치와 시간과 의미와 실존을 모두 주관한다는 의미다. 다른 거 볼 거 없이 우리 사람을 보면 이게 얼마나 큰 차인지 알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건 인지하지만, 존재의 목적도, 깃들어 사는 육신의 탄생과 성장의 원천을 모른다. 무엇보다 그런 것 중 어느 하나도 자기가 결정할 수 없다. 즉 그것들에 관해 주권이 없다.

 

스스로 있다는 건, 존재의 목적과 의미와 주권이 있다는 의미

 

하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다는 말로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선언하신다. 바로 이 하나님을 찾고 찾을 때 성경 속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그의 말씀을 듣고 심령에 되새김질하면서 심령에 둘 때 성령이 오신다. 즉 자기 존재의 목적을 존재의 신 여호와에게서 찾으려는 사람에게만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오신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삶을 원한다면 하나님께 자기 존재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없던 사업자금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생기는 기적을 일으키는 성령을 만나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셔서 인생을 주신 목적을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오신다. 이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우리 생명이 되도록 거듭나게 하신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이렇게 거듭난 사람은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곧 그리스도의 본성이 생명인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인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께서 생명으로 잉태시키시니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고, 그 생명의 본질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본성이 또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인 사람이다. 그의 모든 삶은 항상, 쉬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대로다. 그리고 그 행함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나타내시려고 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정체성과 마음과 뜻이다. 한 마디로 성경대로 사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삶의 모든 순간은 성경대로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은 그 삶 자체가 성경대로 사는 삶이다. 이 블로그의 주제인 Bible become My Story도 이런 의미다. 이런 삶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고, 이 삶이 장성하여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며, 그 장성함이 곧 성령의 충만이다. 즉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삶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이다.

 

아마도 대부분은 '그냥 살 뿐인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게 된다고?'라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답한다면 그런 삶이 아니라면 거듭난 삶이 아니다. 거듭난다는 건 생명에 관한 이야기고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의 삶 모든 순간은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게 당연하나 것이다. 개가 어느 순간만 고양이일 수 없다는 걸 동의한다면, 거듭난 사람은 항상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개가 잠깐씩 고양이일 수 없듯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라면 한순간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여야 한다.

 

다만 자기가 그런 삶인지는 다른 이야기인데, 그것이 아니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만 양심이 화인 맞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하는 게 곧 자기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 인정이 구원을 이룬다. 당연히,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나님이 정한 목적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자리를 떠난 것이고, 그것이 죄다. 그걸 시인해야 구원이 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삶은 구원받은 삶의 업그레이드된 버전이 아니라 구원 자체다.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자기 안에 없다면 그건 구원받지 못한 삶이다. 사람으로 난 사람은 숨 쉬는 동안 항상 사람이듯이, 구원이 거듭남이라고 믿는다면 한순간의 예외도 없이 항상 성령이 함께하는 삶,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삶이어야 한다. 이 생명이 없으면 행함 없는 믿음, 곧 죽은 믿음이다. 이건 신앙이 아니라 상식이다. 즉 항상, 어느 순간도 예외 없이 성경대로 살고 있어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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