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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0)

바울 사도를 죽이겠다는 유대인들의 각오는 대단했다. 심지어 40여 명의 사람은 바울을 죽이기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매복 살해 계획은 탄로되어 성공하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는 계획을 천부장에게 말했고, 천부장은 계획을 수정하여 밤에 군사들과 함께 로마로 보내게 된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바울 사도가 생각한 대로 로마로 가는 여정이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면 방법이 여러 가지였을 것이다. 굳이 바울이 죄인으로 압송되어 가는 방법을 택한 건 사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면이 있다. 자기의 신앙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그 성공을 간증하고, 그 성공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것이며, 좋은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신앙을 가졌다면 더더욱 죄인이 되어 로마로 가는 바울 사도의 여정이 이상해야 한다. 하지만 아마도 그런 양심을 가진 신앙인은 거의 없을 것이라 유추한다.

 

방금 설명한 바와 같이 세상의 일반적인 상식과 견해와 옳은 방법은 성공해서 로마로 입성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굳이 죄인이 되어 압송되어 로마로 가게 되었다. 더욱이 이게 하나님의 방법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게 놀랍다. 다시 한번 말하는 데 성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오늘날 신앙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분명히 놀라워야 한다. 그러나 반복된 지적질로 보이겠지만 오늘날 신앙인들은 그렇지 않다.

 

바울 사도의 여정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우선 성경을 겉핥기식으로 보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바울 사도의 여정과 고난과 순교는 오늘 내가 하나님께 육신의 성공을 의탁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지기까지 수고한 수고로만 보고 있을 뿐, 왜 하나님께서 죄인의 신분으로 바울 사도를 로마로 인도하셨는지 관심이 없다. 그건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뜻에 관심이 없다는 태도다.

 

그럼 이제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죄인의 신분으로 바울 사도를 로마로 인도하셨는지 그 의미를 이야기해 보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성결하게 여기며, 자기가 얻은 구원과 은혜를 매우 귀하게 여긴다. 이렇게 귀하게 여기다 보니 신앙의 요소들을 귀한 걸로 마련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교회의 오르간을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혹은 그 이상의 좋은 것으로 설치하려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존귀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귀한 걸로 해야 한다는 논리다.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하나님과 주신 구원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의 태도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생각은 지극히 당연할 뿐만 아니라 마땅한 도리라 생각한다.

 

이게 참 너무 그럴듯하고 말이 되는 것 같은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사람들의 생각과 같다면 예수님은 말구유가 아니라 황금마차에 올라 구름 타고 오셨을 것이다. 그게 맞지 않는가? 역설적으로 사람이 가진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생각은 예수님을 구주로 보내신 하나님을 모르는 생각이다. 이 논점으로 보면 사람의 이런 생각은 하나님과 다른 생각이니 이 생각을 하는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구원도 없다. 이건 매우 중요한 논점이다.

 

하나님이 존귀하니 세상이 존귀하게 여기는 걸로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믿음은 예수님을 구주로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다.

 

다시 오늘 바울 사도의 여정으로 돌아와서 보면 존귀한 하나님을 섬기니 수억 원짜리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해야 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바울 사도가 왜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되는지 궁금해야 한다. 이게 궁금하지 않다면 신앙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를 지셨는지 궁금해하지 않는 신앙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되는 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에 관심 없는 신앙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시는 건 위대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은 사람이 아닌 자연으로 충분히 표현했다. 아니 육체의 신비만 생각해도 하나님의 위대함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인지하는 하나님의 위대함은 하나님의 위대함 중 극히 일부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함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아는 건 충분하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정말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함을 표현하고자 하셨다면 최소한 슈퍼맨 정도로 사람을 만드셨을 것이다. 하나님께 그게 어려운 일일 거 같은가? 그렇지 않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육신과 인생의 연약함을 보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렇게 만드신 이유가 궁금하지 않다면 하나님에 대해 전혀 묵상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약하게 만드시고 사람이 어떻게 그걸 극복해서 강하게 되는지를 보고 싶어 하셨을 거 같은가? 하나님은 그런 고약한 분이 아니다.

 

바울 사도가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로 가게 된 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은 과정이다. 낮은 자리에서 사람을 섬기는 본성과 성품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이 낮아지는 단순한 겸손이나 봉사 혹은 희생정신이 아니다. 모양은 같거나 비슷할 수 있지만 노력이냐, 본성이냐는 완전히 다르다. 거듭남과 생명을 말씀하시는 성경의 낮아짐은 낮아지는 게 본성인 생명이 되어야만 비로소 표현할 수 있는 낮아짐이다.

 

낮아지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그리스도 거듭난 사람은 낮아지는 본성으로 산다.

 

이 낮아짐은 의에 관한 것이다. 더 놀라운 건 낮아지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더 의롭고 선함에도 낮아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표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그것이기에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으로 낮아지는 게 오히려 선하고 의로운 것이다. 이 선함과 의로움이 노력이 아니라 본성으로 나타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다. 거듭남이 이것이다.

 

이 본성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로서 낮아지는 본성에 이끌려 십자가를 지신 것 같이 죄인이 되어 로마로 끌려가는 것이다. 이건 하나님의 각색이나 조작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 때문이다. 할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은 건 하나님이 냉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게 하나님이 보이시고자 한 본성이고 의로움이고, 예수님은 그 의로움이 육신이 된 본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 역시 그렇다.

 

바울 사도가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진 것은 잘 짜인 각본이나 효과 극대화를 위한 시나리오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본성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그리스도로 거듭나 바울 사도의 육신은 회귀하는 연어처럼 이 그리스도의 본성, 이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법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바울 사도가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에 압송된 건 그가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떨까? 예수님과 바울 사도의 공로에 빌붙어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될까? 차비를 대신 내듯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그 혜택을 누리라고 사도들의 목숨으로 오늘에 전했을까? 그게 아니다.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런 존재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래야만 구원받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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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67 –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1. 23. 10:02 Writer : 김홍덕

(22:30-23:11)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라는 바울 사도의 유명한 말은 에베소에서의 고별 설교에 나오는 말이다.(19:21) 그리고 이제 바울 사도는 정말로 로마로 가게 된다.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우선 압송되는 형태니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죽이겠다는 결사대가 조직되기도 했는데, 이런 전개는 다음에 이야기해 보도록 하고 이번에는 바울 사도의 로마행에 대한 의미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바울 사도의 로마행을 보면 '자발적으로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황제 앞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시기 위한 계획'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생각들의 여지는 충분하고 틀린 생각이라 일갈할 수도 없지만 본질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세상 기준으로 심판받아 십자가를 지신 분 아닌가?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건 이런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려 로마로 가는 사도 바울

 

로마도 보아야 할 것이라는 바울의 고별 설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과 완전히 똑같다. 사도 바울이 로마도 보아야 할 것이라며 자기 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과 십자가를 지시러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신 예수님의 모습 역시 똑같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우리는 어떨까? 우리 역시 그렇다. 역설적으로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게 아니라고 확증할 수 있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 내가 십자가를 질 것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가 이끌어가는 성경이다. 성령의 정체성과 직임과 능력을 아는 게 핵심이다. 사도행전 중반부까지 많이 설명했듯이 성령을 기적의 아이콘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성령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조건은 단 하나, 성령의 직임에 필요하실 때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본성이 된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일을 위해 필요할 때만 능력이 나타난다.

 

성령의 직임은 어떻게 보면 단 하나다.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게 심령에 있을 때 그 말씀이 생명이 되도록 잉태케 하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도록 하시는 분이다. 그 능력으로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핵심이다. 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제자들조차 쉽지 않은 문제였다. 하나님 아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귀한 존재가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천한 십자가를 지느냐는 세상 가장 상식적인 의문이 문제의 본질이다.

 

이 해답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자 하심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표현하고자 하신 성품의 본질을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는 본성,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성품, 이 본성을 가진 생명이 그리스도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존재가 바로 거듭난 사람, 곧 그리스도다.

 

바울 사도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즉 그리스도의 본성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삶을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그 본성이 로마로 이끌었다. 그리고 로마에서 전한 복음을 인해 오늘 우리가 이 복음을 접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 하나님 아들의 정체가 드러난 것처럼.

 

여기서 우리는 바울 사도가 로마로 간 이유와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걸 찾고 알고 순종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이 사도행전을 깨달은 사람이고, 구원받은 사람이며,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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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66 – 각각 다른 하나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1. 22. 00:02 Writer : 김홍덕

(22:2-29)

바울 사도로 인한 소동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천부장까지 나서서 바울 사도를 격리하므로 사태를 일단 진정시켜야 했다. 그 후에 사도 바울은 천부장에게 기회를 얻어 자기의 회심 과정에 대해 유대인들에게 간증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유대인들은 끝까지 듣지도 않으려 했고 오히려 더 바울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걸 밝힘으로써 상황은 다소 반전되었지만 그렇다고 석방이 되지는 않았다.

 

바울 사도는 변론을 통해 자기의 모든 건 하나님의 뜻이라는 걸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바울 사도의 변심은 하나님을 배신한 것이라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통할 리 없었다.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율법을 행위로 지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고, 그 행위에 따른 반대급부로 상 혹은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유대인들은 오직 행동과 말로 바울 사도를 판단할 뿐이었다.

 

사도 바울의 하나님과 유대인의 하나님은 달라

 

사람들은 단어가 같으면 뜻도 같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보면 기도, 전도, 봉사, 율법과 같은 단어들은 유대인이나 지금 기독교인들이나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만 하면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대인과 사도 바울의 괴리에서 보듯이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 모두 여호와 하나님인 건 아니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하나님 혹은 여호와로 부르지 않아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 다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건 아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불러 복음을 전한다고 간증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배신한 배신자에 불과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을 불렀다고 간증했지만,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이방인을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이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교회와 성당 등이 있고, 그곳에서는 모두 하나님을 부르나 그들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부르는 거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평안하기를 구하는 게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게 아니다. 아쉽게도 대부분은 그렇다.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보면 아는데 부르기는 하나님이라 불러도 그들이 믿는 신은 바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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