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해와 달이 어두워진다는 것에 대한 말씀이 자주 나온다.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도 그랬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막 13:24)


그렇다면 성경, 그리고 이 요엘이 말씀하고 있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것’이 지구의 종말과 같은 세상의 종말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주 쉽고 반사적인 접근이지만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성경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 관한 말씀이냐는 것이다.


성경은 영적인 말씀이라고 쉽게 말하면서 그 속에 있는 말씀을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일로 보는 것, 성경의 구원을 세상의 일이나 육신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보는 것, 성경이 말하는 축복과 은혜를 세상에서 잘 살고 세상의 일이 잘 풀리는 것으로 보는 것이 과연 합당한 접근이냐는 것이다.


요엘서에 한해서만 봐도 메뚜기 재앙에서 시작해서 절망과 돌이킴 그리고 회복과 성령에 관한 전개로 이어지다 주의 영이 임하고 난 다음에 세상이 망한다는 전개가 합당한지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자녀들의 장래일은 무슨 소용이며, 늙은이의 꿈과 젊은이의 이상은 모두 멸망에 관한 것이 될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성령, 하나님의 신은 멸망의 화신이 될 수밖에 없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도 최소한의 언어 능력만 있어도 해와 달이 어두워지는 것으로 표현된 종말론적인 말씀의 의도가 눈에 보이는 세상의 멸망에 관한 것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신학을 전공하고 신앙을 사모한다는 사람일수록 이 말씀을 세상의 종말로 보는 경향이 짙다는 점이다. 그것은 요엘이 메뚜기 떼로 비유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또 예수님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여기는 신앙을 외식하는 신앙, 율법적인 신앙,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형식인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행간을 읽지 않고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여기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한다는 것이 하늘의 해와 달이 아니고, 이 종말이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의미일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난센스 같지만 지극히 상식적인 것을 상기해 보자. 지구의 멸망과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이 차이가 있는지를.


영화나 소설에서 지구 혹은 세상의 종말을 다루면서 어떻게든 그것을 막아보려는 영웅적인 이야기를 만들곤 하지만 사람이 죽지 않는 존재가 되지 않는 이상 세상이, 지구가 멸망할 때 함께 죽으나 생을 마감하는 것이나 개인에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한 개인의 세상, 그것의 마지막이야 말로 진정한 종말이란 의미다.


그리고 한 개인의 세상 역시 물리적인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간혹 남들과 다른 사고를 가진 사람을 일컬어 “자기 만의 세상을 산다”고 말하는 것에서 보듯 한 개인에게 세상은 자신의 가치관과 안목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기 만의 세상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신이 목숨을 걸 정도로 옳다고 여기는 것이 망가지거나 무너지거나 빼앗기는 경우 간혹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보면 사람에게 있어 세상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그 위에 구축된 육신의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질그릇’, 혹은 ‘그릇’이나 ‘성전’과 같이 안을 채우는 존재로 사람을 표현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그 안에 아무 것이나 채우거나 이것 저것 여러 개를 채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분명한 존재의 목적이 있다는 것에서 그 안에 채울 수 있는 것 역시 그 존재 목적에 맞는 단 하나만 채울 수 있다. 사람이 그 존재 목적에 맞는 것을 찾아서 자신에게 채우면 인생은 허무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 목적을 알지 못하면 인생이 허무하고 또 한편으로 그 맞는 것을 찾기 위해서 돈을 좇다 명예를 좇기도 하듯 이것 저것을 다 자신에게 채우려고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란 존재는 두 가지 의를 섬길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옳다는 것을 좇지만 여러가지 의를 좇을 수는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이와 같이 사람이 단 하나의 의로움만 좇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유일한 뜻을 사람에게 두셨다는 의미고, 바로 그 하나님의 법 때문에 사람 안에 다른 의가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이전의 의와 그 먼저 있던 의 위에 세워진 세상과 먼저 있던 의로 세상을 보던 안목과 가치가 종말을 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종말적 말씀은 자아,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의로움 위에 세워진 세상, 자신이 가진 의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세상을 보던 자기 세상의 종말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로움으로 세상을 보는 가치관과 안목이 있는데 하나님의 신이 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것은 이미 자기 의로움으로 세워진 세상,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자신의 의로움으로 보는 자아가 이미 멸망했다는 뜻이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했다는 것은 한 개인에게 자신의 외로움이 모두 무너진 사건이라는 의미며,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의 기준, 선과 악을 구분하고 판단하는 기준과 의가 다 어두워지고 망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빛은 곧 인식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빛이 없다는 것은 매우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빛이 없다면 인식과 의가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물리적인 빛, 광학적 빛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 곧 세상의 이야기이다. 컴맹, 문맹과 같이 특정 분야에 대한 어두움은 그 세계에 빛이 없다는 것이듯, 해와 달이 그 빛을 잃었다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신이 임할 수 있도록 자신이 판단하고 인식하던 모든 가치가 종말을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그때가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때이기 때문에 이 말씀에 이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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