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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1)

성경의 흐름으로 사무엘 상 10장에서 사무엘이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다. 그런데 11장에 보면 암몬이 쳐들어왔을 때 왕인 사울은 밭에서 소를 몰고 있었다. 기름 부음을 받긴 했지만 아직은 백성들이 사울이 왕이라는 데 크게 동의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10장 마지막에 보면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 이방 민족인 암몬사람 나하스가 쳐들어온다. 나하스는 이름의 뜻이 '' 또는 '독사'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데,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복하겠다고 했을 때, "너희들 오른 눈을 다 뽑으면 항복을 받아 주겠다고"라고 할 정도로 악하고 독한 사람이었다.

 

이 소식은 사울에게 전해졌다. 사울을 왕으로 인정하고 백성이나 관료가 가서 보고한 게 아니라, 나하스의 협박과 모욕에 우는 백성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백성들은 "누가 우리를 구원할까?"라며 울었다. 자기들이 왕을 원해서 하나님께서 왕을 세웠는데, 왕에게 가서 자기 안녕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이 원하는 왕이 아니라 열방의 왕을 구했다는 걸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생각에 사울은 나하스를 세상 가치나 기준으로 이길 수 있는 왕이 아니었다.

 

백성의 울음을 들은 사울은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한 겨리의 소, 그러니까 소 두 마리를 잡아 각을 떠서 이스라엘 각 지경에 보내면서,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않으면 이 꼴로 만들겠다"라고 했고, 이에 백성들은 두려워 유다 족속이 삼만,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사울에게로 모였다. 그리고 전쟁은 사울과 함께한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난다. 성경은 암몬 사람이 두 명이 함께 도망가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의 군사력으로 사울이 암몬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들이 원해서 세운 왕에게 전쟁을 의지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언약궤를 빼앗길 때 자기들끼리 전쟁에 임했다 크게 패했었는데,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결국 전쟁은 사울이 나서서 크게 이기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크게 임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자기들이 원했던 왕도 의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임하시고 함께 하시니 전쟁은 아주 쉬운 일이 되었고,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모든 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지, 아닌지로 결정된다는 걸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암몬 자손의 조상을 소환해 봄 직하다. 암몬은 소돔이 멸망할 때 피한 롯의 두 딸이 이제 자기들에게 아들을 낳게 해 줄 남자가 아버지밖에 없다며 아버지를 술 취하게 한 후 얻은 아들 중 둘째 딸의 아들 벤함미의 후손이다. 암몬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주관하려는 마음이다. 암몬이 쳐들어왔다는 건 우리 마음에 하나님보다 앞서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고 주관하겠다는 생각이 생겼다는 뜻이다.

 

암몬의 침략은 하나님의 일을 내가 책임지고 하겠다는 우리 안에 생기는 교만한 마음을 대변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간혹 자기가 하나님보다 앞서서 하나님께 열정을 다하면 아주 독하고 무서워진다. 대표적인 게 전 재산을 헌금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이런 건 극단적인 모양이긴 한데, 사람이 하나님 섬기는 일에 자기가 앞장서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게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일반적이지 않은 일을 행하게 된다. 예를 들면 하나님 일을 해야 한다면 공부를 등한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마음은 정말 단호하다. 오른눈을 다 뽑아야 화평하겠다는 나하스의 마음이 투사된 듯한 모습을 일상에서 보인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이 보실 땐 이방인의 마음이지만 신앙인들이 이걸 이기지 못한다. 또한 이스라엘이 암몬과 화친을 시도한 모습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보다 앞서 행하는 일에 스스로 명분을 주고, 괜찮다고 타협하는 모습이다.

 

이렇게 우리 안에 있는 이방인의 마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마음을 이기려면 사울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임하시고, 하나님의 뜻과 시간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하고 살아가는 법을 깨달아야 한다. 사울이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암몬을 이겼다는 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앞서 행하실 때 이기게 된다는 교훈을 준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남다른 능력이나, 남에게 미치지 못하는 연약함과 무관하게 나를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암몬을 물리친 사울은 비로소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인정받게 된다. 의미가 있는 건 하나님의 영이 함께했을 때,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승리를 이루어냈을 때, 백성들이 사울을 왕으로 인정한 모습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행하시도록 순종할 때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다는 걸 말씀하심이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위하는 간절하고 투철한 마음으로 하나님보다 더 열심을 내어 섬기는 건, 일면 충성스럽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누구보다 하나님이 잘 아시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가장 잘하신다. 우리에게 남다른 능력이 있다면, 그건 하나님이 일하실 때를 대비한 것이다. 그건 하나님이 일하실 때 사용되어야 하는 거지 나의 열정으로 앞서 행할 일은 아니다. 그건 암몬으로 투사된 우리 마음의 교만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출 14:13)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해결하겠다는 암몬 같은 마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이 아니다. 이건 물리쳐야 하고, 우리가 이겨내야 하는 마음이다.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힘든 일은 <가만히 서서 주의 행하심을 보는 것>일 수도 있다. 결국은 하나님이 하셔야 일이 제대로 된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자기 뜻을 위하여 창조하시고,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곳이다. 결국 하나님의 일이든 나의 일이든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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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는 않았으나 백성들의 요구를 듣고 왕을 세우셨는데, 우리가 잘 아는 사울이다. '사울'(히브리어: שָׁאוּל)이라는 이름의 뜻도 '구하다', '간구하여 얻은 자'. 말 그대로 백성들이 구해서 얻은 왕이 바로 사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울은 선한 왕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 반면교사의 교훈을 많이 남긴 왕이다.

 

그는 우선 화려하게 왕으로 세워지고, 예언도 하고 암몬, 블레셋 등의 이방 민족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로 사무엘이 도착하기 전에 성급하게 제사를 드리고, 모두 죽이라고 한 양과 소를 취하여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큰 질책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울을 세울 때 하나님은 하나부터 열까지 관여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셨다. 자기 손으로 세운 왕을 버리신 것이다.

 

사울 왕은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주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왜 이 사람이 그런 교훈을 주는지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분명한 교훈을 주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기름 부은 사람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사무엘 상 9장부터 나오는 사울이 왕이 되는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정말 세밀한 부분까지 관여하셨는데, 그런 사울의 타락에 대해 경고나 용서나 미리 알려 주시는 일 같은 건 없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다윗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신 일과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통할하리라 하시니라 (삼상 9:17)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인물과 많은 사건은 분명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선한 교훈을 주는 일과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 조화롭게 섞여 있다. 우리가 사울이나 솔로몬 같은 인물에게 의구심을 가지는 건 그 사람 전체의 인생에 나 혹은 어떤 사람의 인생을 대입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사울이나 솔로몬을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선택받고서 타락하는 일을 투사하는 것으로만 보기 때문이란 뜻이다.

 

그러나 아담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모든 인물과 사건은 오늘 우리 한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기까지 겪게 되는 자기 내면과 영혼의 조각들이다. 각 사람의 인생 전체에 속한 일이다. 그러니까 사울의 일생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기까지 여정 속 내 안에 있는 한 모습이고, 반면교사로 삼을 하나의 일이며,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기 위해서 비워내어야 할 우리 자아 중 하나의 모습인 셈이다.

 

성경의 인물과 사건은 내 인생과 자아 속이 있는 작은 부분 부분들이다.

 

사울이 왕이 되었다는 건 성경의 기본적인 기조와 온도가 다른데, 이건 우리 안에 사울의 월등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낮은 자를 부르고 선택하여 높이시는 분인데, 이미 남들보다 어깨가 하나 더 있을 정도로 남다른 조건을 갖춘 사울을 부르심은 우리 안에 남보다 잘한다 싶은 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에 관한 교훈이다. 물론 사울이 주는 교훈이 이뿐만은 아니겠지만, 왕으로서 사울의 모습은 자기 세계의 왕으로 살아가는 우리 안에 그런 마음, 일면 교만이라 할 수 있는 마음을 다스리는 교훈이고 거울이다.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과정을 이야기할 때 더 자세히 나누겠지만, 사울은 하나님보다 앞서 하나님을 섬기려 했다. 말년에 악령에 시달릴 때 무당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을 불러 달라고 하기는 하지만 타락한 왕들처럼 하나님 아닌 이방신을 섬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좋게 해석하면 사울은 하나님보다 더 하나님을 위했다고 미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은 은근히 우리 신앙인들 안에도 있다. 살아가면서 알게 된 남들보다 잘하는 일에 의를 가지게 된다. 찬양을 잘하는 사람들은 찬양이 하나님 섬기는 일에 최고봉인 양 행동한다. 물론 말은 그와 다르게 하지만, 태도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금방 알 수 있게 행동한다. 물론 찬양하는 사람만 그런 건 아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교사대로, 주차나 주방 봉사하는 사람은 또 그 일로. 다른 것 볼 거 없이 교회 예산 배정할 때 보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사울 왕은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하나님을 위할 것 같은 나의 경쟁력에 대한 거울이다.

 

우리는 그렇게 자기가 잘하는 일로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보다 더 열심일 때가 많다. 이런 마음이 우리 안에 있다는 걸 사울 왕의 일생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 안엔 이런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이런 마음을 비워내야 한다. 우리 인생의 한 마디에 사울이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걸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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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왕을 원하는 이스라엘은 당시 왕과 같은 지위에 있던 사무엘을 무시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생각해 보면 굳이 왕이라 부르지 않아도 사무엘이나 모세나 삼손 같은 사람들은 사실상 왕보다 더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사사시대에 사사가 전쟁을 위해 모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모여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보다 더한 충성은 없다.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라는 부름에 응한다는 건 부르는 자가 왕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은 ''이라는 지위에 연연하지도 않고 거부감도 딱히 없다. 열방의 왕이라는 게 문제다. 어떤 가치의 정점에 있는 왕이냐가 문제다. 게다가 사람은 자기가 왕을 선택할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사람이 자연발생적 존재라면 자기가 섬길 왕을 정한다는 게 말이 될 뿐 아니라 어떤 왕을 섬기든 다른 존재가 상관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어 창조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존재도 사람에게 왕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니라 열방과 같은 왕을 원하고 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가 왕이 될 수 없어…

 

열방 곧 이방의 왕은 세상 가치의 정점에 있다. 세상이 추구하는 모든 귀한 것이 모인 지위이고,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존재다. 그런 존재에 충성한다는 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걸 진정한 가치로 삼아야 하는 사람이란 피조물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겠다는 건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이걸 성경은 ""라고 한다. 그리고 죄라는 말의 어원은 '자리를 벗어났다'라는 의미의 '하말티어'.

 

, 열방의 왕은 우리에게 모든 걸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너희 아들들은 전쟁에 끌려가게 될 것이며, 너희 딸들은 왕을 위해 노동하게 될 것이며, 너희 소산 중 귀한 것들은 왕이 가져갈 것"이라 경고하셨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괜찮다고 했다. 그걸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귀한 걸 얻을 수만 있다면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고, 세상 귀한 걸 위해선 자기를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도, 또 세상 귀한 걸 위해 희생하겠다는 자아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욥 1:21)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경고하신 대로 살고 있다. 세상의 가치, 세상이 귀하다고 생각하는 걸 위해서 자기 인생을 희생하는 걸 당연하게 여길 뿐 아니라 오히려 그걸 고귀하게 생각한다. 정말로 사람들은 세상의 귀한 걸 얻을 수 있다면 자기 모든 걸 버리고 투자한다. 열방의 왕께 진심으로 충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고귀한 일이라면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후일에 상을 주시겠지만, 성경은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

 

우리에겐 왕이 있다. 그보다 더한 창조주 하나님이다. 그는 우리를 다스리신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소산을 가져가는 분이 아니다. 그리고 압제하는 통치를 하시지도 않는다. 전지전능한 하나님 앞에 사람이 자기 자리를 떠나고, 죄를 범할 수 있는 자유도가 있다는 것에서 이미 하나님의 통치 이념을 알 수 있다. 이건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 어떤 상황도 조치 가능한 능력자기 때문이다. 완전히 통제하고 주관하는 영역을 압제하는 주관자는 없다. 이미 어떤 세계를 주관할 정도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소비적이고 멍청한 짓을 하지 않는다.

 

온전히 주관하고 통치할 수 있는 왕은 절대로 압제하지 않아…

 

이런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와 권한을 자기 걸로 안다. 그래서 심지어 이 절대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죄를 범하기도 한다. 그렇다는 건 사람은 하기에 따라서는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할 수도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 온전히, 전적으로 순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 그런 사람에겐 하나님은 온전한 왕이요, 사랑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이걸 버린다.

 

우리의 왕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 창조하셨으니까. 더욱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온전히 하나님이 삶을 주관할 수 있도록 창조되어 있다. 단 하나 사람이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을 뿐이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순종하고, 그 계획과 의도와 목적인 말씀이 육신이 되면, 그렇게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의 본성이 되게 거듭나면 그냥 그 본성대로 사는 것이다.

 

이것보다 온전한 통치와 육신이 된 말씀보다 강한 왕은 없다.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모습을 보여주셨다.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 사는 삶을 보이셨다. 그게 십자가다. 절대자의 뜻을 버리고 자기 맘대로 살 수 있는 자유와 권한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하면, 존재에게 가장 귀한 것, 존재하는 목적대로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내가 알아서 법대로 사는 통치 안에 살게 하신다. 이게 우리 하나님, 우리 여호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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