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많은 환난을 이겨내고 마케도냐와 아가야 지역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그런 삶은 복음이 말로만 이른 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거라고 보증하고 칭찬한다. 본이 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삶은 성령이 능력으로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보증이다.
칭찬받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삶은 말에 있지 않고 성령이 주신 거라는 보증으로, 생각해 보면 신앙인은 누구나 원하는 하나님께 칭찬받는 삶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이런 삶은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믿음의 확신이다. 이런 확신은 자신이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택하심의 증거 혹은 확신을 소망한다. 택하심의 증거란 다른 말로 구원의 확신이다. 결국 구원의 확신은 자기 삶에서 얻을 수 있다는 걸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칭찬한 바울 사도의 칭찬과 보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오늘날 신앙인들은 이 확신을 말로 확보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말로 되는 게 아니라 성령으로 되는 일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말로 신앙의 확신이나 택하심의 증거를 얻으려는 사람들은 참 간절하다. 우선 말로 택하심의 증거를 삼으려는 노력은 아주 반복적이다. 자기가 구원이 확신이 있다는 걸 계속 상기하고, 반복적으로 말한다. 예를 들면 SNS와 같은 곳에 그걸 강조한다. SNS는 삶은 탈색된 말의 놀이터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신이 부족할수록 더 반복적인 성향을 띤다.
구원의 확신은 의외로 자기 확신이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성령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말씀이 삶을 살아가는 육신이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사람이 듣고 순종하며 소망한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잉태시켜 육신이 되게 하시며, 그렇게 말씀이 육신이 된 생명이 그리스도며, 그 과정을 <거듭남>이라고 한다. 결국 성령께서 사람 안에서 행하신 일의 증거가 사람에게 택하심의 증거가 된다.
더욱이 이는 생명 세계의 일이다. 생명 세계의 일이라는 건, 생명의 법과 생명이라는 속성을 따른다는 뜻이다. 성령께서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되게 하신다는 건, 바꿀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존재로 새롭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즉 구원의 확신은 구원을 확신하기 위한 간절함의 산물이 아니라, 구원을 부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말로 확정하려 노력하는 게 아니라, 부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
이런 분명한 말씀에도 사람들은 구원받은 지 수십 년이 지나서도 구원의 확신을 재고하는 이유는 성령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택하심을 자연인 한 사람을 특정한 선택이라는 생각 역시 하나님의 의와 성령의 직임을 바로 알지 못해서 비롯된 굳어진 오류다. 실존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한 존재다. a Man이 아니라 the Man을 선택하고 예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택하심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갈 때 예정하신 택하심을 얻는 것
사람은 이 예정하신 택하심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신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택하신 자는 생명,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는 생명,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택하신 존재다. 창조주에게 있어 피조물의 생명 기준은 창조하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되느냐? 이건 앞서 설명한 일련의 과정을 인정하고, 그 일련의 과정에 자신을 대입해서 '과연 그런가?' 양심적으로 비교하고 그렇지 않을 때, '내가 구원을 부인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니구나!'라는 솔직한 고백이 나오면 된다. 이게 쉬울 거 같은 데 잘되지 않는다. 구원을 부인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게 경험하지 못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성경은 이걸 시인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라고 약속하시고 있다. 다만 사람은 이걸 말로만 하는 것으로 알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말로 되는 일은 아니다. 세례 문답에서, 성경 공부 시간에 답하는 걸로 되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서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 성경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게 아닌데 구원받은 척, 확신을 갈구하며 반복적으로 뇌까리면 양심에 화인 맞은 게 된다. 없는 걸 있다고 우기니 구원받을 기회를 얻을 수 없다.
부인할 수 없는 확신이 없음에도 괜찮은 척하는 건 양심에 화인 맞은 것
구원과 복음은 말에 있지 않다. 말이라는 범위와 경계가 모호할 수는 있으나 적어도 말에 있지 않은 복음의 상태는 분명하다. 바로 삶인데, 이 삶은 살아가는 본인에게 확신을 주는 삶이다. 어차피 세상이 알기 어려운 삶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어야 보이는 삶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삶도 세상은 환난을 주었지만, 사도인 바울에게는 칭찬이 되었다. 이처럼 자기 스스로 부인할 수 없는 삶과 그 삶을 이끄는 내재한 본성이 구원과 택하심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이런 상태로의 전환을 이끄시는 분이 성령이다. 성령으로만 되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을 믿는다면 누구나 소망하는 택하심과 구원의 확신을 확인하고 싶다면, 나의 삶이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어떻게 봐도 내 삶이 성령이 이끄는 삶임을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면, 미안하지만, 당신은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여러 가지 말로 그것을 보장받으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다만 이걸 인정한다면 길이 보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덧없는 세월일 수밖에 없다. 구원은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온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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