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점도 흠도 없는’, 혹은 ‘온전한’이나 ‘장성한’ 신앙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은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단순하게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생각되지만, ‘그럼 어느 정도가 되어야 그 수준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것과, ‘그렇게 되면 끝나는 것인가?’하는 문제가 있다. 어느 정도가 되어야 성경이 말하는 수준이 되는가의 문제도 문제지만 정작 더 궁금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되고 나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에 대하여 노력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을 때,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 문제도 문제지만 달성하고 나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과 같이 노력한 신앙의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점도 없고 흠도 없어지면 신앙에서 은퇴하는 것이냐는 것이다. 물론 근원적인 문제는 도대체 그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근원적으로 신앙이라는 것을 노력하는 것으로 보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자나? 그러니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거지?’라는 그 일상적이다 못해 경건하기까지 한 그 생각과 말이 어느 정도 노력해야 인생으로서 할 만큼 한 것이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사람이기에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을 하려면 적어도 어느 수준까지는 해야 한다는 가이드도 같이 제시해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교회 안에서 그런 답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없다.


행여 그런 것을 언급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문제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조차 이르지 못할 지경이나 수준을 제시한다. 그러니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굴레에 다시 갇히게 되고, 그렇게 사람들은 교회에서 인생을 착취당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라도 가르치고 요구할 때는 목표가 있어야 하고, 그 목표는 달성 가능한 것이어야 하는데 교회만큼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신학이라는 성경에서 그 족보를 찾을 수 없는 수학(修學) 증명인 목사라는 라이센스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신앙은 이런 것’이라고 설교하지만 아직까지 그들이 말하는 단계에 이른 사람이 없음에도 다들 육신이 바라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려고 하는 옛 신앙에 매몰되어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예수를 믿으려면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것인지는 알고 믿어야 할 것 아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그럼 그 장성한 분량은 도무지 어디며, 또 바울 사도가 말씀한 푯대는 어디인가?


그렇게 보면 우리가 어디까지 이를 것인가의 문제는 육신의 정욕을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성취하려는 간사함에서 시작되고, 지혜로울 것 같은 간사함은 정작 자신이 무엇을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어두움 속을 헤매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교회와 자아 속의 요구를 만들어 낸다.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이 문제를 간단하게 정의하면 <구원이 신앙의 목적인가? 아니면 시작인가?>로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예수 믿고 천국가고, 하는 일이 형통하게 되는 구원을 말한다. 그 하는 일 속에는 선교활동과 같이 세상의 경제적인 부를 추구하는 것과는 분리된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인생을 주신 목적이 아닌 것인데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형통하게 되는 것을 교묘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것도 간과하면 안 된다. 물론 우리가 예수를 믿어 천국을 가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목적이 이루어진 결과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문제의 근원은 신앙이라는 것은 구원이 목적이나 지향점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 인식이나 구분 없이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대하면 여지없이 노력하는 신앙으로 다시 빠지게 된다. 이는 어떻게 보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인데, 구원을 목적으로 보고서 그 목적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는 옛 신앙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권면하는 대상인 베드로후서의 수신자들은 기본적으로 베드로 사도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벧후 1:1)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으니 베드로 사도와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착각하고 있는 오늘날의 신앙인들도 그냥 힘을 써 보기는 하지만 언제 이루어질지, 어떻게 되어야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잠깐 멈추고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스스로 묻든지 아니면 더 근원적으로 자신이 베드로 사도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는 한지를 반문해 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목적은 죽어서 천국을 가기 위함도 아니고 이 땅에서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을 추구하고 이루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창조하신 이가 있음을 믿는다. 창조하신 이를 믿는다는 것은 창조하신 이가 창조하신 목적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 안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 시작이고, 그 시작이 완성이다. 그렇게 되고나면 그 시작이고 완성이라는 것이 생명의 세계인 것을 알게 된다. 생명은 나는 것이 다가 아니라 나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만 안다면 우리의 신앙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생명은 나서 그 생명의 본성을 발휘하면서 산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더 그 생명이 생명답게 표현할지를 고민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한다. 그게 생명이다. 여자로 나면 평생을 여성스럽고 아름답고자 노력한다. 남자가 볼 때 가히 놀라울 정도로 그것에 집착한다. 그것은 여자가 사치스럽거나 꾸미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남자가 평생 있어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도 그렇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난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지를 늘 고민한다. 그야말로 쉬지 않고 기도한다. 살아가면서 집중해야 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되면 바로 그 생각에 빠져든다. 그것은 물속에 있는 물체에 빈틈이 생기면 물이 스며들 듯, 육신으로 살아가는 본성을 인하여 육신이 집중해야 하는 일이 있는 중에 잠깐 여유, 생각의 여유, 시간의 여유,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묵상하며, 그것을 어떻게 전할까 힘쓴다. 여자로 나서 틈만 나면 꾸미듯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념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힘쓰라고 했으니 노력해보자고 마음먹고 시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끝도 없이 살아 있는 동안 하는 것이기에 미완인 것 같지만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그럴 수 있는 생명으로 온전하고 완전하게 났기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온전한 생명으로 났기에 그 생명다움으로 살아가려 혼신의 힘을 다하는 그것이 바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주님 앞에 서려고 달려가는 삶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잡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온전한 것이고 점도 흠도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괜히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 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이 나면 그 생명의 유전자로서 온전하고, 또 그 생명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듯,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온전한 것이고, 점도 흠도 없는 것이로되, 반대로 잡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비밀이기에 그 비밀에 합당한 열쇠를 자기 안에 유전자와 같이, 생명의 본성이 되어 있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냥 교회에 다닌다고, 아니면 신학을 했다고, 아니면 방언한다고, 아니면 기도 중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간혹 육신의 장래에 대하여 미리 안다고, 성경을 100번 읽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이름 외에 구원 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이름은 생명의 정체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제 베드로후서도 마지막을 향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베드로후서는 단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수신자가 아니다. 교회에 가서 밥 달라, 돈 달라, 직장 달라, 배우자 달라, 자식 잘 되게 해 달라 기도하는 사람들을 향한 말씀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자들은 다 옛 신앙에 속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것을 논할 수도 없다. 잉태되고 나지 않았는데 생명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생명이 아니기에 온전하면서 또 힘쓰는 세계를 알 수도 없는 것이다. 단지 온전해지려 힘쓰기는 할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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