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4:12-22)
엘리 일가의 악행은 하나님을 알기 전 우리 모습이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자기 것으로 훔치고,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보다 내가 우선인 삶을 살고,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짝인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이 아닌 세상 가치와 상관하는 음란한 삶을 사는 우리 모습이다.
그런 삶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다. 언약궤를 빼앗긴 사건은 이를 말씀한다. 있다면 그건 심판에 관한 경고뿐이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 없이 임한 전쟁에서는 하나님 뜻의 상징인 언약궤도 소용이 없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없다면 성경을 지키는 행위도, 교회에 빠지지 않는 열심도, 전 재산이라도 드릴 것 같은 헌신도 다 소용없다. 핵심은 사무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 한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3)
하나님의 심판은 말씀대로 이뤄졌고, 그 결과 악행을 일삼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었고, 아들의 악행을 방관한 엘리도 죽었다. 그런 엘리의 일가에 새 생명이 태어났지만, 엄마인 비느하스의 아내는 자기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영광이 없다'라고 지었다. 성경에서 아들은 엄마를 영화롭게 하는 존재인데, 하나님의 언약궤가 없으니, 이제는 영광이 없다고 고백한 것이다. 어쩌면 이 엘리의 며느리가 집안에서 가장 믿음이 좋았던 거 같다.
사건 자체로 보면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런 일이 없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내가 인생의 주인으로 살던 시절이 이렇게 완전하게 멸망하지 않는다면 나는 주님을 만날 수 없다. 사무엘 시대가 열리려면 패역한 엘리 일가의 멸망은 필수적이다. 이게 보기에 두려운 일이어서 그렇지, 알고 보면 우리에겐 축복이다. 내가 주인된 삶이 죽고 시작된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새 생명의 삶은 축복이다.
이런 전개는 이 사건에만 특화된 게 아니다. 우리 신앙, 우리 삶은 반드시 이런 전개를 거쳐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종말도 같은 맥락이다. 엘리 집안의 멸망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은 우리의 회개다. 회개는 하나님의 의와 법을 떠나 살던 삶의 멸망이다.
이 삶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을 수 없다. 언약의 축복이 적용되지 않는다. 법괴라고 하는 언약궤가 블레셋과의 전쟁에 아무런 효력이 없었던 이유다.
하나님 없는 세상의 갈등은 이방인들의 다툼일 뿐
하나님 없는 상태는 이방 민족인 블레셋과 다를 게 없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도 인생을 자기 것으로 알고, 육신의 복락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임하는 블레셋과의 전쟁 같은 삶의 갈등은 세상을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싸움이 아니라 그냥 이방인들끼리 다툼에 불과하다. 그런 전쟁에 하나님의 언약은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 누구든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언약이 실현된다.
엘리와 두 아들의 멸망은 우리의 회개
엘리 일가는 비록 불행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행악과 태만은 회개해야 할 우리의 모습이다. 다시 한번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나의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육신의 복락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과 은혜와 말씀을 이용하며,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목적이 아닌 세상 가치를 배필로 삼아 살던 세월을 돌이켜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는 걸 상기해야 한다. 그래야 본젹적인 사무엘의 시대가 열린다.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삶이 시작된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 > 사무엘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무엘 상) 07. 블레셋에게 대패한 이스라엘 (2) | 2025.07.31 |
---|---|
(사무엘 상) 06. 사무엘에게 하신 첫 말씀 (1) | 2025.07.30 |
(사무엘 상) 05.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사무엘 (1) | 2025.07.29 |
(사무엘 상) 04. 엘리의 불량한 아들들 vs. 사무엘 (0) | 2025.07.27 |
(사무엘 상) 03. 아들을 얻은 한나의 기도 (0) | 2025.07.27 |